2010. 10. 6. 08:02

위태로운 인생 (누가복음 8장 22-25절)

본문 : 누가복음 8장22-25절
제목 : 위태로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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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강-눅8장22-25위태로운인생-luk101003

위태로운 인생

2010년 10월 3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8:22-25

(눅 8:22, 개역)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눅 8:23, 개역)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눅 8:24, 개역)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눅 8:25, 개역)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


제자들이 다급합니다. ‘주’를 두 번씩 부릅니다. 하지만 본문에 끝에 가면 바로 잠자는 예수님을 깨운 그 행위가 곧 ‘믿음 없음’으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믿음 없음’은 곧장 ‘천국 못 가’로 이어집니다. 눈 앞에 보이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면서 일방적으로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고 우긴 겁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과 동행하시되 위험한 호수로 동행하시고, 거기에다가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주무셨다는 것은 그러한 기획을 통해서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불신앙’ 뿐임을 일깨워주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인생에 위기와 위험을 주지 아니하시면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이 전혀 하늘 나라의 하나님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 거짓된 믿음이라는 것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우리 인간을 흔들어대며, 우리의 기본 층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생존 차원’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며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동행하시게 되면 예수님께서 이 땅의 생애를 보내시면서 목표 지점으로 삼으셨던 그 취지가 그늘처럼 제자들에게 같이 덮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 목표점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거기에 도달해서 비로소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전에는 아닙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을 죽기 위해 사셨고, 그 죽음은 아버지로부터 주어지는 저주의 힘으로 실행되는 겁니다. 그 효능의 그들이 벌써 호수 위에서 제자들에게 함께 덮히는 겁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사정을 모릅니다. 안 죽으려고 합니다. 저주 안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곧 ‘불신앙’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주무시고 바다에 풍랑이 일 때, 제자들은 집단으로 죽었으면 아무 문제 없었습니다. 죽지 싶지 않아 잠자던 예수님을 깨운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본색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생존차원에서 다루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 있음의 차원’으로 다루십니다. 그 죄란 곧 악마에 의한 인간 지배와 관련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을 하시면서 먼저 사람하고 만난 것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악마와 먼저 만나도록 성령께서 주선해 주셨습니다. 악마 만나고 난 뒤 인간 만나는 것이 순서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인간을 둘러싼 세력에 의해 성경을 이 인간 세계가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나옵니다. 사람에게 있어 ‘산다’는 곧 떡으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만이 삶임을 예수님께서 악마에게 이야기하니 악마는 말씀의 진실성을 목격하겠다고 나섭니다. 거기에 등장한 성경 말씀이 곧 시편 91:12의 말씀입니다.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악마는 시편에 나오는 ‘그’가 곧 예수 그리스도임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안목으로 성경을 본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그 성경 전체에 대한 해석이 인간의 이해도와 마주치면서 일관성 있는 증거물을 쥘 수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납득이 되는 증거물을 확보해서 그것으로 신과 접촉을 시도하게 됩니다. 이러한 버릇은 악마가 예수님에게 시도하는 그 행세를 통해서 악마로부터 유입된 속성임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발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신체 중에 달려있는 발을 뜻하고 돌이라는 것은 금속과 더불어 뭉쳐진 딱딱한 흙덩이를 뜻합니다. 그것 외에 다른 것은 틀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해도를 가지고 악마는 예수님에게 접근했습니다. 예수님을 높은 성전 꼭대기에 올라 세워놓고서는 거기서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무엇을 실험하고 무엇을 측정하기 위함입니까? 예수님께서 중력의 법칙이 지배를 받는지 아니면 그 중력의 법칙을 벗어나는지를 알아 보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짓된 성경해석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육의 소산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나타난 아버지의 뜻입니다.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해서 베드로의 몸이 사라지지 않는한 악마의 해석이 곧이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잡혀 고난 받고 죽는다고 하니 베드로가 나서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자신이 조치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태도는 단호하십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려는구나.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잠자고 계셨습니다. 시편 121:3-4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는 표현은 곧 인간은 졸기도 하고 잠자야하는 것으로 신보다 못한 존재이며 이 조는 시간, 잠자는 시간에 일어나는 일은 속수무책이라는 그것으로 인하여 인간은 당하면 당할 수밖에 없는 허약한 처지에 놓여 있음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메시야가 오시면 그분은 여느 인간과는 확연하게 월등해서 모든 인간이 잠자고 조는 허약성 때문에 실패한 하나님의 일을 그분만큼은 성경 말씀대로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는 법도 없어서 늘 제자들을 지켜주는 그런 존재로 각인됩니다. 이점은 매우 중요한 내용을 품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러한 발상이 악마가 심어준 발상이라는 겁니다. 이처럼 인간들이 평소에 자신도 미처 모르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들을 쏟아내는 계기가 됩니다. 인간이 자신이 어떤 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며 살아오고 있는지 그 내막이 들통나야 합니다. 인간은, 생각하기를 자신은 마땅히 신으로부터 혜택받아야 당연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지켜주는 보디가드처럼 여기는 것을 마치 참 좋은 믿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에 참여해서 같이 죽고 같이 사는 신세가 된 것이 곧 믿음이요 축복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존 차원에서 예수님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여드리기 위한 사명 때문에 우리가 아직 죽지 않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사라져도 사명은 하늘나라에서도 영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꼭 살 이유가 없음을 아는 기간으로 우리 인생을 보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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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강-눅8장22-25(위태로운 인생)-luk101004-(이 근호목사)

2010-10-05 23:57:35 조회 : 8          이름 : 오용익
 
 
045강-눅8장22-25(위태로운 인생)-luk101004-(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8장 19절에서 21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04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8:22-25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 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시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 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


예수님과 제자들이 호수, 큰 바다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본문 24절에 보면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제자들이 상당히 급했습니다. ‘주여’를 한 번만 불러도 되는데 ‘주여, 주여’라고 두 번씩 부르면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하니까 그때서야 예수님께서 잠에서 깨어나서 조치를 취했지요. 바다를 꾸짖으니까 물결이 잔잔해 졌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25절에서 제자들을 나무라지요.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믿음이 없는 자들아.’라고 나무란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나를 왜 깨웠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주님을 깨운 그 짓이 믿음이 없는 짓이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는 우리가 다급할 때 예수님을 깨워서 예수님의 도움을 받는 것을 보통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것이 잘못이라는 겁니다. 예수님한테 도움받기 위해서 믿는 것은 바로 믿음이 없는 짓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못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깨워서 예수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도 아닌 것을 가지고 계속 예수님을 흔들어대면 결국은 믿음 없는 사람이 되고 믿음이 없게 되면 이 세상에서서 어떻게 사느냐 하는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죽어서 영생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자기 딴에는 ‘주님을 믿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어려울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분은 우리 주님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것을 인정합니다.’라고 주님을 흔들어 깨우면서 ‘이때다, 이때가 주님이 필요한 때다. 깨워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다.’라고 흔들어 깨웠는데 그 짓이 우리로 하여금 구원받지 못할 짓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 믿음은 믿음 축에도 안 들어가고 그런 믿음은 믿음이라고 인정해주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믿음 가지고는 구원받을 생각하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왜 깨웠느냐, 하는 겁니다. 여기서 주님의 책망이 처음부터 ‘너희들 오늘 두고 봐라. 내가 책망한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아니고 나중에 바람이 불어서 배가 뒤집어질 지경이 되었고 물이 마구 배에 차고 제자들은 다급해서 어쩔 줄을 몰랐고, 이런 일련의 일들이 다 지나가고 그 마지막에 주님께서 ‘믿음이 없다. 엉터리 믿음이다.’ 했으니까 그 믿음 없음을 드러내는 데는 위기 속에서의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련의 조치들이 계속 일어나야 되는 거예요.

일어나려면 항상 위태로운 사태가 벌어져야 되는 겁니다. 위태로운 사태가 벌어져야 우리에게 믿음이 생긴다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사태가 벌어져봐야 ‘아, 우리가 전혀 믿음이 없는 자구나.’를 안다는 겁니다. 위태로운 사태가 안 일어나면 자기는 지금 예수를 잘 믿고 있다고 오해를 할 수 밖에 없지요.

그래서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로 하여금 위태로운 사태에 직면하도록 방치하시느냐 하는 겁니다. ‘예수 믿는다는 교인들은 생각할 거예요.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어려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교회 다닌다. 하나님을 믿기로 했다. 지금부터 내 인생에는 위기상황은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단정을 하는 경향들이 있어요. ‘절에 다닐 때 어려움이 있었는데 교회 다니고부터는 모든 것이 만사가 형통해졌습니다.’ 그런 것을 은근히 기대한다 그 말이지요.

목사님이 어떤 가정을 방문해서 ‘우리 같이 말씀 봅시다. 이제 예수 잘 믿었으니까 올해부터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 아마 우환이 끊일 날이 없고 계속해서 위기와 어려움이 들이닥칠 겁니다. 축하합니다. 악수합시다.’ 이런 대 심방은 없습니다. 제 말을 끝까지 잘 들으셔야 합니다.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대 심방은 없고 대 심방 하게 되면 ‘이제는 어려움이 끝났습니다. 행복시작입니다.’ 이러고 싶지만 우리 주님이 대 심방을 할 때는 그런 일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어려움이 들이닥칠 것입니다. 그래야 당신이 믿는다고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거짓이며 위선이며 가짜인 것을 이제 밝혀낼 것입니다.’라는 식으로 예수님께서는 여러분 가정에 대 심방을 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 심방 올까 싶어서 겁나서 도망가잖아요. 본문에서 두 가지 점이 우리 입장에서는 굉장히 수상합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물고기가 아닌 이상 물위에서 사는 것이 익숙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물보다 땅이 안전해요. 그런데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자기 제자들과 함께 땅이 아니고 물 위를 가셨습니다. 유리알같이 잔잔하면 또 별일이 없겠습니다만 풍랑이 일었습니다. 그처럼 의도적으로 아주 위험한 물위를 가게 했다는 거예요.

제자들은 대표 급 수영선수들이 아니에요. 박 태환이 같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마 대표 급 수영선수들이 탔다면 풍랑은 그보다 더 심하게 일었을 거예요. 뭍에서 살아야 비로소 안심하고 산다는 것이 보장되는 그런 사람들로 하여금 바다 위를 통과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항상 아슬아슬한, 평소에 내가 생존을 위해서 했던 것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는 거예요.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주무신다는 겁니다. 어려운 길을 갈 때 제자들이 위태로운 길을 갈 때는 더 바짝 정신 차려서 ‘얘들아, 너희들은 다 자라. 나 혼자 깨어 있을게. 내가 다 지켜줄 테니 너희는 안심 놓고 자.’라고 했다면 처음부터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티격태격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풍랑은 아예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고 풍랑이 일어나더라도 제자들은 주무시고 예수님이 깨어계셨으면 애초부터 문제될 것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일부러 문제를 지금 만들어내는 겁니다. 사람들은 문제가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 하고 있고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문제를 유발시키고 있고, 그 의도가 뭐냐 하는 겁니다.

그 의도는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이 평소에 주님과 동행하면서 믿는다고 하는데 그 믿음은 이미 들통 났어요. 그 믿음은 엉터리 믿음이라고. 엉터리 믿음이라고 한다고 해서 바른 믿음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엉터리 믿음이 왜 엉터리 믿음인가, 그 내막을 우리가 추궁해 들어가야 돼요.

왜 이것이 엉터리 믿음인가? 이것이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잖아요.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제자들은 우리를 대표해서 이런 경우가 믿음 없는 경우에 해당된다고 대변해서 먼저 앞장서서 보여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믿음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면 우리한테도 동일한 평가가 주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파악해야 돼요. 어째서 우리가 위태할 때 주님을 깨우는 그것이 왜 믿음이 없는 것이냐, 하는 겁니다. ‘믿음 없는 자들아. 왜 깨웠느냐.’ 하거든요. 이러면 돼요. 풍랑이 일어날 때 ‘야, 죽는 기회가 자주 오지 않는데 이것이 바로 죽는 기회구나.’ 하고 죽으면 되는 거예요. 이게 믿음이 있는 겁니다.

잠잠……, 우리교인들도 잠잠……, 인터넷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도 잠잠…….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지금 호수를 지나서 제자들과 함께 가고자 하는 그 방향을 제자들이 몰랐습니다. 그 방향은 십자가라고 우리는 들은풍월로 알고 있었어요. ‘예수님이 태어날 때부터 분명한 목적이 있었는데 그 목적은 바로 십자가였다.’

부동산 괜찮은 것 장만해서 머물러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그것이 우리와 마지막 헤어지는 장면이었어요. 그 마지막지점이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에서 그냥 헤어지지 않고 ‘다 이루었다.’ 하시고 헤어졌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한다면 끝까지 가야지요. 어디까지? ‘다 이루었다.’ 하는 지점까지 가야지요.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이것에 이의를 달수가 없어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순간순간 풍랑 같은 위기 속에서 예수님이 도움을 받았다는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에요. 중간과정을 지나서 오병이어 지나서 더 지나고 또 지나서, 병이 나았다, 고기 아가리를 벌리니 동전이 나와서 성전 세를 냈다, 더 지나서, 예루살렘 성전을 부정했다, 더 지나서, 나귀를 탔다, 더 지나서 어디냐는 말이지요.

그것은 십자가였잖아요. 그 십자가에 딱 도달하니까 거기에서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사실이 하나 등장합니다. 그 사실은 바로 하나님의 저주예요.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이 세상을 저주해왔노라, 하는 그 사실이 예수님이 기어이 가고자 했던 그 십자가자리에서 모든 것이 폭로가 되고 다 드러났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가고자 한 자리는 저주의 자리지요. 그 저주의 자리에 십자가가 서 있다면 석양의 노을에 의해서 그 십자가의 긴 그림자가 생긴다면 그 긴 그림자가 예수님의 출생부터 덮여지는 겁니다. 예수님의 출생부터 산상설교 지나서 열두제자 뽑고 호수 건너오고 베드로 장모 병 낫고 오병이어로 먹이고 삭개오를 만나시고 여러 설교 하고 귀신들리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이 모든 과정에서 ‘나는 저주의 자리로 간다. 너희도 나에게 합세하라.’라는 취지가 없어진 적이 없었어요.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할 때 그 때 베드로는 이랬지요.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할 때 주님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합니다.

어렵게 해서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지금 예수님께서 가시고자 하는 그 십자가의 그늘 속에 베드로가 놓여 있게 되면 베드로는 본인의 혈육, 본인의 아버지나 어머니나 본인의 능력에 의해서 ‘예수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없고, 그런 복을 받을 수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 그 영향력이 미리 앞당겨서 주어지니까 베드로에게 복이 주어졌는데 그 복, 예수님은 메시아임을, 그리스도임을 아는 복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효과에 대해서 이야기 했어요. 그 효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난 뒤에 계속해서 이야기했어요. ‘내가 고난 받고 죽을 것이다.’ 하니까 베드로가 ‘주여, 그리하시면 안 됩니다.’하고 나왔다는 말이지요.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신앙을 고백할 때 이것은 우리 혈육에서 우리 능력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능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에요. 죽을 때까지 그 능력은 계속 가는 거예요. 우리의 더러운 능력이 계속 가서 주님이 주신 능력인 십자가의 효력과 죽을 때까지 남아 있는 우리의 육적인 것이 대비가 되면 우리가 무슨 짓을 하느냐 하면, 우리는 마귀 짓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 받는다고 하니까 ‘주여,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하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보고 하는 말이 ‘사탄아! 마귀야! 이 악마야! 내 앞에서 꺼져라.’ 베드로가 그때 갔습니까? 아니지요. 베드로 속에 있는 악마를 보고 ‘악마야, 가거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구나. 나를 십자가 고난을 받지 못하게 하는 자구나.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그렇다면 베드로의 육은 무엇을 대변해주느냐 하면, ‘사람의 일(다른 말로 하면 악마의 일)은 이런 목적으로 움직입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변인으로서 베드로가 서 있고 그런 악마의 힘에서 벗어날 수 없는 베드로에게 십자가의 효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그런 베드로의 입에서도 ‘예수님은 진정 그리스도입니다.’라는 말이 튀어나오게 만드는 거예요. 그게 복입니다.

복이라는 것은 저주를 이겨야 복입니다. 진짜 복을 알려면 내가 지금 어떤 저주를 품고 있는지를 알고 있어야 그래야 그것이 복과 대비가 되면서 ‘아, 복이라 하는 것은 내가 저주받아야 마땅한 것을 아는 상태에서 비로소 복은 복답게 우리에게 인식이 되는구나.’라는 것을 여러분은 아실 거예요.

내가 악마에게 속해있고 악마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평소에 살아가고 있고 성경해석도 그 따위 식으로 한다, 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진정한 복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과 동행하는데 예수님은 주무시거든요. 주무실 때 그 주무시는 의도와 위태로운 호수가 물위를 가시는 그 이유를 제자들은 나중에라도 알아야 됩니다.

그 때 당시는 모르지요. 시편 121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4절, 5절에 보면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라고 되어 있어요. 3절에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편 121편을 보게 되면 여호와는 우리 성도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항상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다는 거예요. 이 말은 사람은 평소에 몸의 한계를 갖고 있기에 잠 오면 자고 안자면 까불고 그렇거든요. 그러니까 잠잘 때 마귀가 덮쳐버리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마귀한테 당할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우리의 몸은 피곤에 쪄들었는데 오는 잠을 어쩌겠습니까? 잠 오면 잠 잘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잠 잘 수밖에 없을 그 때에도 고맙게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 몸과 다른 몸을 가지고 계셔서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존다는 것은 꾸벅꾸벅 하는 것이고 주무신다는 것은 대놓고 자는 거잖아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해서 우리가 긴장이 해이해질 때 우리를 지켜줌으로써 우리는 실족하지 않게 된다. 아 고마워라.’라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이해고 믿음인데 그것이 가짜라는 겁니다. 그게 가짜에요. 제가 한 말을 달리 이야기하면 어떤 인간이 성경 보면서 가짜 믿음에서 벗어나서 진짜 믿음을 알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천 독을 해도 거기에서는 가짜 믿음만 솔솔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그게 왜 그런가? 여러분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은 마귀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 해석이 왜 잘못되었는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귀와 만나는 장면이 나와요.

예수님께서 사람구원하려면 사람부터 만나는 것이 정상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구원하라고 예수님 보내줬더니만 하나님의 영이 예수님보고 먼저 사람을 만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만나게 하느냐하면 마귀부터 일차적으로 먼저 만나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사람 만나서 ‘날 따르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마귀 만날 때 열두 제자중 하나도 뽑지를 않았습니다. 아직까지 인간을 상대할 순서가 안 되었습니다. 우선 인간 배후를 장악하고 있는 마귀부터 먼저 만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인간을 만나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 때 예수님과 마귀의 만남에서 말씀 해석싸움이 벌어졌어요.

마귀가 하는 말이 ‘사람이 뭘 먹어야 일을 할 것이 아니냐.’ 하니까 예수님 말씀이 ‘사람은 먹는 것으로 생존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 생명은 말씀에 있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하는 말이 ‘그러면 말씀대로 해보자.’라고 하면서 두 번째 시험을 하는데 그 두 번째 시험은 시편 91편의 말씀을 가지고 했어요.

시편 91편 11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마귀의 성경해석이 얼마나 뛰어난지 시편에 나와 있는 ‘그’라는 인물이 예수를 지칭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오늘날 신학자들은 이것을 몰라도 마귀는 이미 알고 있었어요. 시편에 나와 있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예요. 구약의 학자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구약학자들은 시편의 나와 있는 ‘그’라는 것이 다윗이라고 보는 거예요. 마귀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시편에 나오는 ‘그’라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도들도 성령 받고 난 뒤에 비로소 시편의 ‘그’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지요. 악마가 그렇게 해석했는데 악마의 해석으로 듣지 말고 보통 목사들의 해석으로 들어보세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당신이 메시아인지 아닌지는 예수 당신 말대로 성경 말씀대로 곧이곧대로 일점일획이라도 남김없이 다 이루면 메시아 된다는 것을 나 마귀가 인정해줄게. 그렇다면 한 번 따져보자. 메시아인지 아닌지를 확정하는 것은 말씀대로 되면 메시아라고 인정해주겠고 말씀대로 안 되면 메시아로 인정 못해주겠다.’는 거예요.

그 말씀중의 하나가 이겁니다. ‘메시아라고 우기는 그 인간이 높은데서 뛰어 내리면 천사들이 어디서 왔는지 날아와서 그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한’다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 중에 제일 밑 부분에 있는 것이 발이고, 돌은 흙과 금속이 뭉쳐져서 단단해진 그것을 돌입니다. 그러니까 성경대로 하자는 겁니다.

꼭 고신 측 같아요. 성경대로 그대로 해석해서 믿자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중력의 법칙에 의하면 발이 돌에, 그냥 돌도 아니고 뾰족한 돌, 부딪히면 작살이 나는 그런 돌에 부딪혀서 깨지게 되어 있는데 깨지기 직전에 나풀나풀 어디서 왔는지 천사들이 짜잔, 하고 나타나서 발을 받쳐서 깨지지 않게 해 줄 때, ‘메시아 맞습니다. 이젠 믿습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악마의 성경해석이라는 겁니다.

유치원 애들한테 물어보세요. 그 해석 말고 다른 해석이 나오는지. 유치원 애들한테서도 그런 해석이 나온다는 것은 인간은 날 때부터 그 해석 외에는 다른 해석을 할 줄 모르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안다고요? 그것은 육으로서는 안돼요. 하나님의 깊은 내막은 오직 성령이 임해야 믿는 겁니다.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많은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봤어요. 요즘 같으면 캠코더로 동영상 찍고 사진 찍고 그랬을 거예요. 소용없습니다. 악마의 해석을 가지고 십자가를 해석하니까 그 십자가를 보면서 ‘나는 인생 더 살아봐야 소용없다.’고 느낀 사람은 오직 강도 외에는 없었어요. 어느 편 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강도만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나는 인생 더 살아도 소용없어. 십자가에서 내려가서 개과천선해봐야 다 소용없어. 난 그만 살아야 돼.’라고 느낀 것은 그 강도밖에 없고 그 외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그것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 더 있네요. 백부장이었던 그 사람. 어떤 사람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해서 믿었다는데 그게 아니에요. 부활 이전에 십자가를 보고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했어요. 뭘 보고 알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를 보면서 알았습니다.

감히 어느 인간도 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솔직한 대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버리기로 작정했음을 최초로 솔직하게 그것을 내 뱉은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 전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봐주소.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시편에 나오잖아요. 우리를 불쌍히,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자기 살 궁리 하는 반면에 예수님은 ‘주여, 저 인간입니다. 저주하소서. 당연한 조치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인간이라는 이유 때문에 당연히 저주받고 지옥가야 됩니다. 맞습니다. 그것이 주님 뜻에 합당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이 다 이루어져야 합니다.’ 죄, 죄의 문제지요. 인간은 존재로서 세상을 판단합니다. 어려운 이야기를 하나 할까요? 철학사, 혹은 고대사상사, 인간이 어떻게 생각해 왔는가를 연구해보면 동양과 서양이 약간의 차이가 나요.

예수님 오시기 전의 서양 고대철학은 ‘세상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세상은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세상은 물과 불과 흙과 공기로 되어 있다.’라는 4원소 설을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사람이 예수님 오시기 사백여년 전에 했어요. 세상은 무엇인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를 분석하고 세상은 어떤 것이며 자연은 무엇이며 비는 왜 오는가, 이런 것을 연구했습니다.

그 반면에 동양에서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자연에 합하여 사는가?’를 본 겁니다. 그것을 ‘禮’(예) 와 ‘仁’(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禮의 중심은 조상숭배입니다. 타인에 대해서 어떻게 예를 갖추고 사느냐, 그것은 각자가 조상숭배를 통해서, 각자 조상님의 은덕을 기리는 가운데서 서로 서로 대화가 될 때 이 사회는 예의바른 사회가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동양이고 서양이고 관계없이 모든 토속종교가 다 그래요. 왜냐하면 조상은 자기가 눈으로 봤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계시다가 돌아가신 거예요. 이미 본 사람이 돌아갔으니까 그게 눈에 딱 들어오게 됩니다. 신? 눈에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눈으로 봤는데 돌아가신 것이고 이미 눈으로 봤는데 지금 없으니까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나도 그 절차를 밟으니까, 있는데서 없는 것까지 포함을 시키니까 죽은 조상들이 신을 구성하는 거예요.

지금도 천주교에서 그렇게 해요. 죽은 조상 성도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仁은 정치입니다. ‘하늘의 뜻을 받은 김정은 지도자께서 어떻게 인간을 다스리느냐.’ 그래서 북한은 동양적종교단체가 되는 거예요. 북한이라는 것은 통일교와 순 복음과 똑같은 거예요. 하나의 무당이 지도자가 되어서 그 인물을 중심으로 일체가 되는 겁니다. 유훈정치라고 해서 죽은 김일성의 배지를 달고 전 세계를 돌아다닙니다. 유엔에서 연설할 때도 그렇게 합니다.

이것이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은 죽은 김일성이 통치한다면 남한은 가짜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통치하는 것이 맨 마찬가지에요. 이게 내 존재 어떻게든 살려달라는 겁니다. 생존차원이에요. 내 존재를 계속 살게 해달라는 겁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세상을 어떻게 알아서 그 다음에는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산다는 겁니다. 나의 생존차원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볼 때 내가 더 오래 살 수 있는 힘을 뽑아낼 수 있는 구절만 뽑아내고 그것만 기억하는 거예요. 성경을 생존차원에서 뽑는 겁니다. 본문의 설교 그냥 쉽게 하면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 주님과 함께 있을 때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려울 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는 전지전능 하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주님을 믿고 기도하게 되면 복 받게 되어 있습니다. 겁나는 인생의 위험도 풍랑도 잔잔해 질 것입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믿음이 없기에 기도를 안 해서 그렇습니다.’

방금 전부터 설교를 들은 사람은 오해하실 겁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여러분들이 어린애 같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기도를 안 하는 겁니다. 기도를 안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새벽기도회, 금요철야기도회, 주일예배를 빼먹고 안 나오기 때문에 사업을 망치고 애 성적이 떨어지고 불량학생이 되고 집안에 우환이 끓고 시부모와 싸우게 되는 겁니다. 기도하면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면 안 믿는 일가친척 다 믿게 하십니다.’라고 한다 그 말이죠. 그게 누구 좋으라고 그렇게 설교하는 겁니까?

저는 그 반대로 설교하고 싶습니다. ‘왜 풍랑 일 때 안 죽었는가, 이 바보들아.’ 하나님께서 죽으라고 한 그 절호의 찬스에 왜 안 죽었습니까? 결국은 이 저주받은 더러운 세상에서 예수 덕분에 오래 살아보려고 한 자기 본색을 드러낸 겁니다. 천국으로 보낼 절호의 찬스를 줬는데 그 인간들이 그 때를 놓쳐버렸어요.

예수님을 왜 깨웁니까? ‘하나님께서 주무시지도 않고 졸지도 않는다.’ 그 말에서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기에 우리의 생존차원에서 유리하다는 해석은 악마적인 해석입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으면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주님이 가시고자 하는 저주의 길은 눈에 띄지도 않고 하나님 이용하고 예수 이용해서 살 궁리만 찾는 악마에 속했다는 것을 주께서는 주무시면서 주무시지 않는 그 해석을 완성시켜 버리는 겁니다.

어렵지요?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그동안 성경을 반대로 보신 겁니다. ‘주여, 나는 진즉 죽어야 했고 지금 죽어도 상관없는 헛되고 헛된 인생입니까?’라는 식으로 성경을 보는 것은 성령이 와야 그런 식으로 보지 성령이 안온 육의 상태에서 그냥 성경 보면 ‘주여, 이렇게 힘든데 주께서 뭘 도와주십니까?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하는 이야기하고 똑같지요. 베드로가 신앙 좋다고 주님에게 칭찬받더니 자기 능력으로 신앙고백 한 줄로 알았는데 그래서 나온 유명한 말이 ‘나대지 말라.’는 말이잖아요. 베드로가 나대면서 ‘주여, 그러시면 안 됩니다. 우리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이 마귀가 이제 나오네요. 바로 그때.

주님께서는 마음껏 우리의 육적인 성질 그대로 노출시켜서 펄펄펄펄, 우리에게 잠재된 마귀가 막 튀어나오게 만듭니다. 원망 불평 있는 대로 주 앞에 다 쏟아내게 만들고, 좀 밥술이나 먹고 배부르다 싶으면 교회 안 나오고, 좀 없고 힘들다 싶으면 교회 나가서 원망 쏟아내고.

사람들이 교회 안 나오는 이유가요, 내가 이대로는 꼴깍 죽기는 싫다는 겁니다. 전도서 2장 14절, 지난주 이 본문으로 중고등부 설교하면서 제가 은혜 받았어요. “지혜 자는 눈이 밝고 우매 자는 어두움에 다니거니와 이들의 당하는 일이 일반인 줄을 내가 깨닫고.” 이 세상의 지혜로운 것과 어리석은 것 둘이 분명히 갈라지는 것이 맞는데 양쪽이 당하는 사태는 똑같이 당한다는 겁니다.

똑똑하다고, 공부 많이 했다고, 착하다고, 믿음이 좋다고, 훌륭하다고 어려움이 아니 닥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똑같다는 거예요.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인생 똑같다는 겁니다. 그 똑같다는 것을 수용해 줘야 내가 이렇게 믿음이 좋다고 하면서 살아도 믿음이 좋다는 것이 내 생존에 전혀 보탬이 안 된다는 사실을 본인이 진정으로 알고 있어야 됩니다.

내가 믿음이 좋다고 해서 그 다음부터 위기상황이 안 오고 내 삶이 좀 더 편해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광야에서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행할 때 동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는데 마다 양식이 없었고 가는데 마다 양식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동행한 것이 물이 없는 곳에서 물이 있는 곳으로 그렇게 동행한 것이 아니에요.

주님께서는 ‘네가 어떻게 나오는가.’ 한 번 보자 이 말이지요. 그게 동행입니다. 그래서 천국에는 생존차원에서 천국을 논하는 자는 천국에 못 간다는 겁니다. 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면 주님이 묻습니다. ‘너, 날 왜 믿으려고 하는데?’ ‘믿습니다.’ ‘왜 믿으려고 하는데? 왜? 왜 믿는데?’ ‘더 살고 싶어서요.’ ‘그러니까 네가 믿음이 없다.’ 그 말이죠.

본문에서 궁금한 게 있어요. ‘대체 바람과 바다는 왜 주님 앞에 순종하는고?’ 왜 순종하겠어요? 주님이 가시고자 하는 그 십자가는 말씀이 완성되는 시점입니다. 말씀이 완성된다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지는 그 와중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협하기 위해서 풍랑이 일어나더라도 주님은 그것조차도 말씀 체계 안에 반드시 일어나야 될 하나의 절차로서 간주가 되는 겁니다.

더 아주 우습게 더 쉽게 이야기하면 주님께서 주무시면서 몸이 근질근질 한 거예요. ‘풍랑이 일어날 때가 되었는데…….’ 그런 식이라는 말이지요. ‘풍랑이 일어나야 내가 일어나서 꾸짖을 것인데, 지금 때가 된 것 같은데, 아직 5분쯤 남았네.’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생존차원이 아니고 예수님은 처음이고 나중이라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계셔요.

모든 것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줘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서 철딱서니 없는 자기제자들을 구원할 수 있는 근거가 호수에서부터 부각되는 겁니다. ‘그때에 믿음 없어서 날 깨웠던 너희들을 오직 피로만 구원한다.’ 이런 내용이 이미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말씀 안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초등학교 중학교 졸업한 뒤에 교무실에 가면 생활기록부가 있잖아요. 어떤 사람이 어떤 중학교를 졸업한 적이 없는데 졸업했다고 하면 ‘실례지만 생활기록부 좀 확인합시다.’ 하지요. 생활기록부를 왜 보여 달라고 합니까? 그걸 보면 그 학교에서 생활한 흔적이 있는데 그게 없다면 그 학교 학생이 아니거든요.

십자가가 있고 우리가 그 십자가의 그늘이 있다면 주님께서는 그 전의 생활기록부를 다 갖고 있어요. 나귀가 어느 시점에 매여 있어야 되고 어느 물고기의 아가리에 동전이 들어 있는지, 그리고 참새가 어느 시장에서 몇 푼에 팔리는지, 비가 언제쯤 내려야 되고 비가 언제쯤 안내려야 되고, 3년 6개월 동안은 비가 내려야 되고 언제 적은 비가 안와야 되고, 그런 세상만사 모든 것, 이 자연세계가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에만 합당하게 움직임을 보이는 겁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움직임을 보이는 거예요. 어떤 때는 파도가 육지를 넘치지 못하게 하고 어떤 때는 파도가 육지를 넘어야 되고, 그런 것이 그냥 무대포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전부 다 구원의 비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의 효능과 관련되어서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의 효능과 관련되려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기로 작정되어 있느냐 하면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기로 작정되어 있어요.

죄인의 모습 중에 하나가 우리는 예수님과 동행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우리는 믿음이 없었습니다.’를 드러내는 쪽으로 자기의 역할을 해주셔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 죄, 그 믿음 없음이 그냥 빈칸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은 나름대로 교회 와서 예수를 믿고자 하는 거예요.

동양철학이나 서양철학 모든 신화들을 공부해보면 사람들은 기본이 자기 죄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차원부터 이야기하는데 생존의 차원에서 인간에게는 삶의 고통, 고충이 있어요. 그러면 삶의 고통에서 신을 믿는다, 메시아를 믿는다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삶의 고통에서 내 대신 해결해줄 영웅을 찾는 거예요. 그것이 로마 그리스 신화라는 거예요. 고대 4대문명의 신화들도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자세한 것은 울산에서 강의를 했었어요.

우리가 교회 올 때 하나님께 도움 받을 요청부터 해요. 자기는 일단 감추죠. 목욕탕에 때 벗기러 들어갈 때는 홀랑 벗고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수건 하나 걸치고 나오듯이 일단 자기는 감추고 나와서는 그 다음부터 뭔가 도움을 받으려고 합니다. ‘오늘 내가 바쁜 시간 내서 왔는데 이런 고충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 힘으론 안 됩니다. 이것들 다 주께서 일으켰지요. 예? 주께서 일으켰지요? 맞지요? 이 힘든 일들을 다 주께서 일으킨 것 맞잖아. 나는 이렇게 교회 잘 다니는데. 그만 해결해 주소.’

이런 식으로 약간 삐져서 온다 그 말이죠. 그것은 바로 어떤 영웅, 보디가드, 나를 지켜주는 영웅인 겁니다. 여자가 남자와 결혼할 때 남자를 보디가드로 여기잖아요. 뭔가 나를 지켜주는 보디가드노릇을 남편이 못해주니까 예수를 믿어서 그 자리를 벌충하려 들지요. 뭔가 나를 지키려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그만 죽어버려라.’고 하는 거예요.

죽어버리면 마귀도 떠나고 근심걱정도 떠나고 다 떠나는 거예요. 성경 볼 때 ‘저는 언제 죽어야 됩니까?’라고 보면 그 다음부터는 생존차원이 아니고 역할차원, 사명차원으로 보게 되는 겁니다. ‘너는 진작 죽어야 되는 것을 아직도 끈질기게 살게 하는 것은 이런 일을 하라고 살게 하는 것이다. 너는 죽으려고 해도 네 맘대로 못 죽어. 심지어 자살도 내가 알아서 할 거야. 한강물 쳐다보다 삐져서 뛰어들려고 할 텐데 한강물 파도와 수심까지도 알아서 내가 다 조치해 놨어.’

그래서 모든 세상만사가 하나의 역할과 사명인 겁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어떻게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는 이제 우리는 떠나 버려야 돼요. 고대문학들을 보면 춘향전이든 심청전이든 아무리 고상하게 나와도 다 그겁니다. 불로장생하는 것, 그것을 구하는 사람들의 몸부림이에요.

서기 약 300년경에 갈홍이라는 중국인이 지은 ‘포박자’(抱朴子)라는 책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만년 된 두꺼비와 천년된 박쥐를 잡아 그늘에서 말려서 가루 내어 마시면 4만년을 살수 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문제는 만년 된 두꺼비를 구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늘에서 말려서 가루 내는 것은 할 수 있는데 천년 된 박쥐를 못 구해서 결국 4만년을 못사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는 나도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건을 사는데 ‘얼마요?’ 하니까 ‘7천원’ 하는 거예요. 사려는 사람이 버릇대로 ‘좀 깎아주세요.’ 하니까 장사하는 사람이 ‘만원내소. 내가 삼천 원 깎아줌세.’ 하는 거예요. 하나마나한 이야기에요. 마귀는 인간이 악마한테 바치는 것을 생색을 내요. 기도하면 삼분의 일은 들어주고 삼분의 이는 안 들어주고.

하여튼 인간은 교회 와서 마귀와 거래해요. 왜? 마귀는 생존차원에서만 논하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여러 번 죽을 수 있는 기회를 줬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고 싶어서 자꾸 비켜갔어요. 기회 늘 오는 것 아닙니다. 사명 없거든 아하, 죽을 때 되었다, 생각하시고 사명 있거든 사명 때문에 죽고 안 죽고의 조절은 주께서 알아서 해 주신다고 생각하시고 ‘이제는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주여, 뭘 하면서 살까요?’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풍랑일 때 그 의미를 몰랐습니다. 풍랑일 때 왜 주님께서 주무시는지 그 뜻도 몰랐습니다. 본색이 드러났습니다. 주와 동행해도 그저 내 사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주님 이용하겠다는 심보가 우선이었습니다. 이제는 이 저주받을 세상에 아직도 살아 있는 이유를 깨닫게 해주시고 그것이 주님의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내가 용서되었다는 이 복음을, 십자가 피가 이 죄를 용서했다는 이 사실을 전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