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9. 29. 17:03

예수님의 가족 (누가복음 8장 19-21절)

본문 : 누가복음 8장19-21절
제목 : 예수님의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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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강-눅8장19-21예수님의가족-luk100926

예수님의 가족

2010년 9월 29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8:19-21

(눅 8:19, 개역) 『예수의 모친과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를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눅 8:20, 개역) 『혹이 고하되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섰나이다』
(눅 8:21,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에서 질문자는 인간입니다. 그리고 답변자는 예수님이십니다. 곧 사람이 하나님에게 이야기하는 것이고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다운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족이 있다는 그 가족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질 만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이 본성상 가족 속에서 태어나고 가족을 만들고 가족들이 지켜보는 것 가운데 운명하고 나의 시신은 역시 가족들에 의해서 이 세상에서 마지막 처리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족이 없다는 것은 사실 이 땅에서는 성립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7:1-3에 보면, 제대로 구원되는 자가 등장합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것은 곧 아비도 있고 어미도 있는 자는 그 자리에서 결코 구원이 될 수 있는 힘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첫째, 그 어떤 인간도 혈육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둘째, 그것으로 인해 그 어떤 인간도 그 혈육에서 벗어나서 구원될 수 있는 인간은 없다’입니다.

혈육적인 바탕이란 현재 인간의 행함보다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업을 하든지 도박을 하든지 자기 손으로 벌어놓은 것을 일거에 허물수도 없고 망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자신이라는 것이 자기 노동으로 일구어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힘으로 도저히 허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혈육적인 관계입니다. 마치 끈적끈적한 엿 같습니다. 아무리 떼어내고 싶어도 떼어지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가 있기 전에 먼저 형성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명절날 일가 친척 만나서 겉으로나 속으로나 부지런히 욕하고 씹어대어도 하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그들이 결코 남이 될 수 없는 자들이라는 점입니다.

어쨌든 신경 쓰이고 챙겨주어야 하고, 관심 쏟아야 하고, 그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 거절할 수 없는 자들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아무리 경건하고 고상해보여도 혈육에 속해 있다는 이유 때문에 궁극적으로 이기주의자로 전락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구원이란 물 건너간 겁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 인간과 타협하거나 협상의 의사가 없으십니다. 이런 지경에서 사람이 구원된다는 어느 정도의 기적이 필요한가하면, 예를 들면, 이미 죽어서 자신이 지옥가는 사람들과 함께 있음을 안 시체가 자신이 묻혀 있는 동네 뒷산에 공동묘지에서 스스로 관뚜껑을 열어제치고, 어디서 삽을 구해다가는 천국 가는 사람의 무덤을 파서는 그 안에 누어 관뚜껑을 닫아버리는 정도입니다.

결국 구원이란 가족 있는 자가 예수님처럼 가족이 없는 자로 새로 지음받아야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란 누구를 만나게 되면 미처 몰랐던 사정들을 듣고서는 수심과 근심과 염려와 걱정을 한 짐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다면 몰랐던 사항들이 일단 만남이 있고부터는 인생의 짐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라” 즉 아버지의 죽음마저 혈육적 관계성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에 대해서 너무 섭섭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말씀 이외에 어떤 것도 따로 남겨둔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는 그 때부터 예수님을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더나아가면 아예 예수님 자체를 잊게 됩니다. 이것이 혈육이 지닌 본성입니다. 이 본성에서 누가 벗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말씀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말씀 안에서 혈육에 속한 인간으로 도저히 상상 못할 말씀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출애굽기 4장에 보면, 모세 가정이 나옵니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는 자신들의 가정이 여느 가정과 다름없이 단란하고 하자없는 가정이라고 여겼습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관여하니 이 행복의 보금자리에 더욱 확고해지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의 개입’의 결과에 대해서 무척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자 그 여인은 자신의 소중한 ‘행복된 가정’이라는 성립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은 자신의 남편이 아니라 ‘피의 남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남편 모세를 친히 죽이시는 것으로 개입하신 것입니다. 기존의 혈육적 가정을 하나님께서 ‘언약의 피’를 통해서 깨시려는 겁니다. 교체하시려는 겁니다. 

인간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림을 통해서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길 때에, 예수님을 미워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이 실제로 예수님께서 자기 인생의 주도자로 개입하는 순간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도저히 구원될 수 없는 혈육에 속한 자들이 이제 구원될 자로 바뀌는 순간이 바로 죽음조차 이기는 낯선 힘입니다.

이것은 예전에 미처 예상 못할 일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4:28-29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육체로 난 자들의 노선과 성령으로 난 자들의 노선을 따로 마련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육체로 태어나지 않는 새로운 자들이 있는데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죽음보다 더 센 힘으로 작용하는 말씀에 의해서 따라 살게 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의 중앙에 계시기에 죽었다가 사흘만이 다시 살아난 그 생명의 힘이 말씀으로 성도에게 들이닥쳐서 성도로 하여금 죽음보다 더 센 힘으로 교체되어 살게 하십니다.

이로서 성도는 자기 혈육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자가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를 예수님의 가족이 되게 하시기 위해 흘리신 피의 효능 속에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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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강-눅8장19-21(예수님의 가족)-luk100926-(이 근호목사)

2010-09-29 10:42:21 조회 : 22      이름 : 오용익
 

044강-눅8장19-21(예수님의 가족)-luk100926-(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8장 19절에서 21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04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8:19-21

“예수의 모친과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를 인하여 가까이하지 못하니 혹이 고하되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섰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사람이 묻고 하나님이 답합니다. 사람이 질문하는 것은 ‘하나님이여, 제발 우리 사정을 좀 이해해주세요.’라는 것이거든요. 인간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뭐냐 하면, ‘제가 신앙생활 하는 것이 이렇게 힘듭니다. 그러니 하나님이라고 너무 턱 버티지 마시고 신앙생활 하는데 좀 편하게, 인간적으로 나와 하나님이 마주앉아 술 한 잔 나누듯이 서로의 의견을 나누면서 우리 선에서 일이 되도록 한번 사귀어 봅시다.’ 하는 쪽으로 인간은 질문을 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사정 알아 드릴 테니 하나님도 우리 사정 좀 알아주세요.’라고 하는 것이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답변은 퉁명스럽습니다. ‘나는 너하고 같이 할 맘이 없거든.’ 개그콘서트에 보면 그런 대사가 있어요. ‘난 너하고 같이 할 맘이 없거든!’ 네가 생각하는 그 세계에 나는 합세할 맘이 없다, 그 말이지요.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이 질문하면서 운을 떼는 그 취지가 뭐냐? ‘지금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일가친척이 있고 가족이 있습니다.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에게도 우리처럼 이렇게 애 닳아 하는 가족이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 가족들이 밖에 예수님 만나려고, 형님 만나려고 오셨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서 만나지 못 하고 있으니까 우리가 특별히 가족을 만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드리겠습니다.’라는 쪼로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 이야기의 운을 떼는 그 의도가 뭐겠어요. ‘예수님이나 우리나 우리가 애지중지 하는 그 가족만큼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을 거야.’라는 의도가 깔려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아까 제가 이야기했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퉁명스럽다고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 퉁명스러운 답변은 예수님 답변이지 하나님 답변은 아닐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어요.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다 일임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피해서 달리 남겨진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한 윤범 목사님이 우리교회에서 설교할 때 첫마디로 운을 뗀 것이 그거예요. ‘예수님을 빼놓고 어디에서 또 하나님의 남겨진 뜻이 있느냐, 하고 찾느냐.’ 하는 겁니다.

기웃거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버리고 ‘예수님은 잠깐 나와 보세요.’ 해놓고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야. 아버지의 뜻이 있을 거야.’ 하는 식으로 기웃거리지 말라 그 말이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의 모든 뜻을 예수님께 다 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고스란히 다 담고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십자가에서 남겼습니다.

지상과 하늘에 구멍이 뚫린 거지요. 쉽게 말해서 구원받을 길이 최초로 열린 겁니다. 여러분들 명절 지나면서 얼마나 가족과 모이면서 티격태격 힘들었습니까? 누구든지 만나면 고민이 발생돼요. 누구든지 대하면 수심과 근심걱정이 밀려와요. 누구든지 만나면 그래요. 3년 만에 만났든, 5년 만에 만났든, 사돈의 팔촌을 만나도 없던 근심이 또 생겨요.

‘인간이 저렇게 살아야 되겠는가, 제대로 못 먹고 산다는데 가만히 있어서 되겠는가, 조카 네가 저렇게 어렵게 살아가는데 내가 한번쯤 공납금은 내줘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나도 돈이 쪼들리는데 어떻게 하지, 어머니가 저렇게 편찮다고 하는데 이 불효막심한 내가 그동안 몇 번이나 돌아봤는지…….’ 이런 되도 않는 근심걱정이 막 옵니다.

오게 되면 ‘하나님 믿는 성도가, 하나님 믿는 사람이 아무것도 안하고 어렵다는 사람에게 무관심하게 방치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아닌가.’하는 걱정근심, 명절 만나면 이런 근심거리만 가득해서 집에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길에 쓸데없이 차 안에서 또 싸움이 벌어지지요. ‘당신은 평소에 어머니 좀 돌아보지.’ ‘나도 한다고 한 게 그거다.’ ‘한 게 그 모양인가.’ ‘내가 뭘 어쨌는데? 나보고 닦달내지 마라. 당신 엄마다.’

처갓집에 가면 또 그쪽에서 싸워요. ‘당신은 내가 시가에 하는 것 10분의 1만 우리 집에 해봐라. 당신 앞에 엎어지지.’ 이러면서 또 싸운다고요. 그럴 때 우리가 주일에 은혜 받은 것 다 쏟아버리고 수십 년 예수 믿은 것 말짱 다 도루묵처럼 소용도 없고, 불신자처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있는 대로 다 끌어 모으고 있는데 그럴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성경을 보게 되면, 그렇게 내 자력으로 구원될 수 없는, 누구만 만났다 하면 아예 근심걱정을 범벅되도록 뒤집어쓰는 가운데서도 시원하게 구원의 구멍이 분명하게 뚫렸다는 겁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구원이 있다는 거예요. 구원이 없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안 되는 것은 분명히 맞는데 하여튼지 내 힘으로 구원 안 되는 것은 분명하고 날 구원시켜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것은 맞는데 어쨌든지 하나님은 구원의 구멍을 뚫어놓았습니다. 이게 희망이고 이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우리가 명절을 지나면서 무엇을 깜빡 잊었느냐 하면 ‘이러나저러나 구원은 된다.’는 그 사실을, 그 기쁨을 우리가 놓친 거예요. 고민 많은 사람들, 구원과 관련 없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대하다 보니까. 교회 와서 성도만 만나다가 명절 되면 고민이 늘어져요. ‘성도 아닌 사람하고 무슨 대화를 할까?’ 제가 여행하면서 걱정되는 것이 그거였습니다.

맨 날 교인들, 성도들만 대하다가 성도 없는 그 지방에 가서 내가 할 것이 뭐가 있고 그런 데를 내가 왜 가는지……? 그런데 다녀와서 알았어요. 인간은 세계 어디에 가도 갇혀 있다는 거예요. 아무리 멀리 가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 그 돌아오는 자리란 내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은 영원히 갇혀진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여행을 해도 또 다시 돌아오고 어디를 가도 다시 돌아오게 되는데 그 자리가 바로 예수님이 뚫어놓은 구멍이 아니면 하늘로 로켓처럼 직행할 수 없는 그 구원의 자리, 구원이 보이는 자리, 주께서 마련하신 그 자리로 다시 돌아오게 하신다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냥 지평만 바라봐요. 세상 사람들은 그냥 평지만 바라보는데 성도한테는 웬 은혜인지 다 같이 근심 걱정을 뒤집어쓰면서도 어느 날 어느 순간은 뚫린 구멍을 바라본다는 거예요.

하늘이 열리고 거기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기뻐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 그 뚫린 구멍에서만 나올 수 있는,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고 성령께서 뚫어준 그 구멍에서만 나오는 ‘내가 바로 너의 구원자가 되었다.’ 하는 그 사실에 다시 한 번 얼굴을 쳐들어서 보게 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그런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알기 전에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구원될 수 없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사람이 남들 보기에 좀 경건하게 사는 것 같고 고상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추궁합니다. ‘네가 가족이 있는 한 너는 이기주의다. 네가 혈육이 있는 한 이기주의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가지를 알 수 있어요. 첫째, 인간은 혈육 없이는 태어날 수 없다는 거예요. 어떤 인간도 천주교의 수녀마저도 엄마 아빠 없이는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다는 그 사실입니다. 혈육이 문제가 되어버리는데 혈육은 찐득찐득한 엿 같아요. 찐득찐득하다는 말을 빼버리면 뭐가 성립됩니까? 엿 같아요. 혈육은 엿 같아요.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더 꼬여요. 더덕더덕 붙어 있어요. 불신 가족에 대해서 그렇게 미워해도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가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남보다 더 애타 하면서 미워해야 된다는 이 운명, 이 팔자! 차라리 남이라면 지옥가든 천당 가든 무관심하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저것은 인간도 아니야. 삼촌도 아니야. 저것은 지옥가도 마땅해.’라고 욕설을 심하게 하면서도 그렇게 해대는 대상이 끊어지지 않는 관계에 있다는 거예요.

그런 관계에 있다는 그것이 무슨 팔자입니까? 부모들이 애먹이는 자식보고 그러잖아요. ‘아이고, 이놈의 자식이 어디서 태어났는지…….’ 아무리 곧 죽이고 싶을지언정 끝내 미워할 수는 없는 것, 그래서 교회 가서 경건하게 살고 바르게 살아도 그 찐득찐득한 그 엿가락 같은 것이 얽매인 이상. 어떤 인간도 그 혈육을 떨쳐버리고 이기주의 아닌 사람이 되어서 구원받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가능치 않습니다. 완벽하게 불가능합니다.

주님께서 한 답변은 이거예요. 첫째는 어떤 인간도 혈육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혈육에서 못 벗어난다는 그 이유 때문에 어떤 인간도 구원은 물 건너갔다는 겁니다. 구원은 물 건너 간 거예요. 혈육에서 떨어질 수 없으니까. 성경에서는 그만한 이유를 대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7장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1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여러 임금을 쳐서 이기고 돌아오는 길에 복을 빈자를 만났’다고 합니다. 2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 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절에 보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는 분이 멜기세덱이라는 겁니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 사람 구원받지만 아비 있고 어미 있어서 태어난 사람은 구원은 물 건너 간 거예요.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혈육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것은 이미 그 혈육에서 나왔던 그 생래적인, 타고난 그 성품이 하늘의 아들로 태어난 방금 말한 멜기세덱과는 같이 동참할 수가 없습니다. 그 세계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을 설교 시간에 꾸벅꾸벅 졸면서 들었거나 혹은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하는 소리를 그냥 들은 풍월 식으로 들었다 할지라도 그 예수님께서 구원을 저지하고 있고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 못한다는 것을 이야기한 분인 줄을 우리는 애초에 상상조차 못하지요.

세상사의 여러 가지 지식가운데서 예수님이 구원자다, 하는 그 지식 하나 더 건지면 된다고 그렇게 쉽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생각은 이거예요. ‘그동안 네가 인생을 잘못 살아왔다.’는 겁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네가 모르는 너의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 하는 겁니다. 그 소중한 것이 뭐냐 하면, ‘혈육’이예요.

내가 번 것은 내가 도박하다가 날리면 그만이에요. 내가 벌어서 날린 것이고 또 따면 그만입니다. 3억 날리면 여자 친구가 돈 빌려줘서 또 도박하고 번 돈 다 날리면 또 MC해서 벌면 되고, 그럴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나’라는 것이 내 노동으로 얻은 그것만이 ‘나’가 아니라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계셨던 그것에 내가 편입되어 있는 거예요.

이것은 내 힘으로 떨어질 수가 없는 겁니다. 나는 스스로 나를 포기해도 이 포기할 수 있다고 여기는 나만큼은 포기 안 되는 그 바탕이 나보다 먼저 이 세상에 선점해서 깔려 있는 겁니다. 그것을 어떻게 부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부인합니까? 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쉽게 하면 예를 들어 이렇습니다.

어느 정도가 돼야 되느냐 하면, 어떤 사람이 죽고 난 뒤에 무덤에 누워보니까 지옥이거든요. 죽을 때 지옥인줄 알아서 정신이 번쩍 들어서 깨어나서 힘을 줘서 관을 열고 흙무더기를 파헤쳐서 나와 보니 동네 뒷산 공동묘지라, 가만 보니 주변에 천국 간 사람들이 있으니까 삽 하나 구해서 천국 간 사람들 무덤 파서 스스로 합장해서 자기 관을 파묻는 것, 이것이 가능합니까?

죽은 사람에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없지요. 이게 있을 수가 없다면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자기토대를 부정합니까? 아까 이야기했지만 자기가 애써서 돈 번 것 도박하다가 날리는 것은 자기가 번 돈이니까 자기가 날릴 수가 있어요.

그런데 내 힘으로는 취소시킬 수가 없는, 내 힘으로 취소가 안 되는 그 존재의 바탕이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데 어떻게 스스로 자기 존재를 부정한다는 말입니까? 있을 수 없지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에게 먼저 운을 뗀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 가족들이 왔습니다. 만나고 싶어 합니다. 바쁘신 줄 알지만 한 번 만나주세요.’라고 하니까 21절에서 하신 말씀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이 말은 ‘날 만나기 위해서 온 저 사람들이 당신들 보기에 내 동생으로 보이는 모양인데 내 동생 없다, 내 동생 아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왜 자꾸 너희들의 바탕, 너희들의 혈육적인 바탕에 근거해서 나를 해석하고 나를 이해하려 드느냐, 그렇게 해서 구원될 것 같으면 소나 개나 다 구원되게?’ 구원 안돼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러한 차원을 우리는 성경을 보고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죽은 자는 죽은 자로 하여금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마 8:22)고 했습니다.

세상에, 자기의 죽은 아버지를 두고 ‘죽은 자는 죽은 자니까 죽은 자들한테 장사하라고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한 이 이야기가 얼마나 겁나고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이것을 무서운 이야기로 들으시면 안 됩니다. 무서운 이야기가 아니고 불가능한 이야기로 들으셔야 돼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네가 설친다고 될 문제가 아니니까 나대지 말거라. 제발 설치지 말라.’는 말이지요.

오기로 믿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제가 로마의 갔을 때 20만이 지하 동굴에서 살다가 죽었다는 그 현장인 카타콤에 갔을 때 제가 느낀 것은 그거였어요. ‘의도성이 너무 강하다.’ 자기 최후를 표현할 때, 살아 있는 동안 ‘이렇게 죽어야만 하나님 보시기에 장렬한 죽음이겠지.’라는 그 의도성, 이벤트성이 너무 강렬해요.

그냥 살다가 혹여 잡혀서 죽든지 말든지, 그냥 살다가 죽으면 되는데 이게 합동으로 그냥 단체로 뭔가 집결해서 들어갔다는 것은 인간의 살아 있을 때의 자기 의도가 너무 반영이 많이 되었어요. 너무 인위적이에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제가 뭐라고 했느냐하면, ‘죽는 방법이 서툴다.’고 했어요. ‘성도로서 죽는 방법이 너무 서툴러서 의도적인 것이 너무 강렬하다.’

그렇게 장렬하게 죽게 되면 어떤 오류를 범하게 되느냐 하면, 그렇게 장렬하게 죽지 않고 창기생활 하다가 죽은 성도는 지옥 간 줄로 오해하게 되는 겁니다. 평범하게 설거지하다가 죽은 사람은 지옥 간 줄로 오해하게 돼요. 인간이 살아 있으면서 끄집어 낼 수 있는 아이디어들, ‘순교란 이런 것일 거야, 믿음이란 이런 것일 거야.’라고 끄집어내는 모든 것은 전혀 자기구원에 도움이 안 됩니다.

그래서 이런 글을 썼어요. ‘인간의 소망은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의 소망이 구원이라고.’ 인간의 소망이 구원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자기소망을 예수님의 자기능력으로 이룰 때 그 소망에 이끌림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카타콤베라는 그 지하세계로 들어간 사람들은 자기가 기획할 수 있고 자기가 이벤트를 할 수 있는 그 생각을 포기를 해야지요.

그럴싸해 보이는, 장렬해 보이는, 멋있어 보이는 최후, 그런 것을 자진해서 철회해야 됩니다. 멋있어 보인다는 이것 굉장히 위험한 거예요. 지금 네 번째 이야기합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뭔가 고상해보이고 뭔가 경건해 보여도 가족이 있는 이상은 이기주의다.’ 나대지 말라는 이 말이 아주 유명한 말인데 저한테는 아주 복음으로 들립니다.

그러면 이제 구원은 뭐냐? 구원은 간단한 거예요. 너의 의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자기 아버지와 맺은 파생되어 나오는 그 능력이 있을 것인데 그 능력에 의해서 자력으로 구원될 수 없는 자들이 혜택을 입는 방식으로 구원에 참여되는 겁니다. 그런 것이 어떤 식으로 성경에 나와 있는가?

성경 보기 전에 제가 이것을 먼저 당부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인간이 여기 있다면 인간들은 그냥 하나님을 쳐다보면서 신앙생활 하려고 할 겁니다. 하지만 그 중간에다가 네모난 유리판대기를 하나 딱 설치해 놓으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빛이 유리판대기를 통해서 인간에게 전달되고 그 유리판을 통해서 인간에서 하나님께 간다면 그 유리판이 뭐냐? 성경속의 세계입니다.

이 땅에서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어떻게 확인되는가? 그것을 저에게 수백차례 질문 했어요. ‘목사님, 제가 믿고 싶은데 구원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당최 확인이 안 됩니다. 어떻게 그게 확인됩니까?’라고 할 때, 성경속의 세계에 관심이 있으면 구원받은 사람이고 성경속의 세계에 관심이 없으면 구원 안 받은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성경을 통해서 주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성경을 보게 되면 정말 낯설기 짝이 없는, 정말 이것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새로운 가족이 거기에 등장해요. 대표적인 것이 출애굽기 4장에 ‘피 남편’ 가정, 모세의 가정이 나옵니다.

멀쩡한 가정입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룰루랄라, 하고 갑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가정에 대해서 어떻게 손을 댈 이유가 없는 건전하고 경건하기 짝이 없는 좋은 가정이고 믿음의 가정이에요. 그야말로 어릴 적부터 유아세례 다 받게 하고 아무 하자 없는 가정인데 이 모세의 가정에 죽음이라는 것을 삽입시켜버리지요.

누가 죽는가? 가장이 죽어요. 아버지가 죽습니다. 아버지라는 자리는 자기 부인의 입장에서는 가장 소중한 거예요. 여러분들이 구원받았습니까? 그러면 어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습니까? 사람이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때 최초로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요.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그 때는 예수님에 대해서 미워하든지 아니면 그 현실이 주님 주신 현실이라고 받아들이든지 양단간에 결정이 납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때, ‘이것만큼은, 이것만큼은 아니 되옵니다.’ 하는 그것마저 빼앗아 가버릴 때 그 때 예수님을 미워하든지, 아니면 예수님이 나보다 더 세다는 것을 인정하시든지 양단간에 결판이 나는 겁니다. 사람이 근원적인 자기 죄를 모르면 구원된 자라고 할 수 없어요.

모세 부인 이름이 십보라인데 그 십보라 입장, 결혼한 여자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편입니다. 남편이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책임진다고 했고 그 확답을 듣고 도장 찍고 그래서 결혼한 거예요. 아플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힘들 때에도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작정하고 결혼을 한 겁니다. 그래서 처녀 때는 자기가 소중했는데 결혼하고 난 뒤에는 자기보다 남편이 더 소중한 거예요.

물론 자식 낳으면 마음이 또 바뀝니다. 지난 금요일 광주강의에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자들은 참 좋겠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여자들은 자식만 낳으면 그 다음부터는 자기의 소중한 것들을 자식에게 다 이전합니다. 다 옮겨놓고 이제는 그 자식만 있으면 누가 나를 아줌마라고 욕해도 괜찮고 살쪄도 괜찮고 뱃살이 나와도 괜찮고 똥배 나와도 괜찮고 나의 자존심과 명예 같은 것이 다 깨져도 괜챃아요.

망가진 아줌마가 되어도 괜찮아요. 왜, 모든 것을 다 자식에게 이전을 해놓았기 때문에 자식만 잘된다면 나는 망가져도 괜찮다는 이점이 여자로서는 상당히 유리한 점이거든요. 그런데 아버지는 자기 것을 옮길 무엇이 없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여행을 갑니다. 왜 그 좁은 비행기 이코노미석에서 12시간씩 좁은 공간을 견디면서 여행을 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이 여행의 즐거움이거든요. 여행의 즐거움이 유적 관람하는 겁니까? 그것은 아니고 여행의 즐거움은 밤에 있습니다. 밤이 되면 여행지에 나이트클럽이 있고 이방여인이 기다리고 있어요. 여행은 혼자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가족과 같이 산다고 치었던 것이 있습니다. 그 힘든 여행을 다 감내하면서도 기다리는 것이 있어요.

‘나는 혼자다! 자유다!’ 그겁니다. 그런데 가족과 함께 여행을 해요? 가족과 함께 간다는 말입니까? 가면서도 잔소리를 듣고 오면서도 잔소리를 듣는데. 남자들의 여행은 홀로 떠나는 여행이에요. 미지의 세계에서 미지의 여자를 만나는 겁니다. 요새는 여자들도 혼자 여행하면서 낯선 남자를 만나지요. 이태리 남자들이 미남이라고 해서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특히 교사들이 계모임 만들어서 간답니다. 아마 맞는 이야기일 거예요.

여성에게는 혈육 있음이, 자식 있음이 그렇게 고맙고 좋은 겁니다. 그런데 그 십보라에게 남편이 죽어버렸어요. 이것은 예상치도 못한 가정입니다. 십보라가 뭔가, 뭔가, 뭔가 놓친 것이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동안 내가 결혼해서 만든 나의 가정이 내 행복을 위한 가정이라고, 내 행복의 보금자리라고 여겼던, 혈육으로 시작해서 혈육의 행복으로만 유지될 수 있는 그 가정이라고 여겼던 선입감이,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올 때 모세한테만 찾아온 것이 아니고 그 여파가 자기한테까지 미친 겁니다.

나의 이 혈육적인 가정의 행복을 몽땅 들어서 하나님 자신의 새로운 가족을 꾸미기 위한 조치로서 들어 쓰시려고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피가 개입됩니다. 아들의 할례를 행해서 그 피가 묻힌 아들의 포피를 모세의 생식기 앞에 던지니까 모세가 살아났습니다. ‘이 가정은 혈육적인 죄가 흐르는 그 피 말고 죄 없는 피가 흘러야 산다. 너의 가정 같은 가정이 네가 만들어야 될 하나님의 이스라엘이고 그 이스라엘, 하나님의 새 가족을 만들기 위해서 간다.’는 그 사명의 취지를 하나님께서 새롭게 한 겁니다.

그 피가 침입하는 계기, 그 사건이 십보라라는 그 여인으로 하여금 가족이라는 개념에 새로운 인식을 불어넣은 거예요. ‘아,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것은 기존의 내 것을 움키고 쥐는 것이 아니구나. 소중하고 소중한 가정, 하나님 없고 예수 없어도 나는 이 가정만 있으면 행복하리라.’라고 여기던 그 소중한 것이 자기 의사와는 관계없이 강제로 그 가정이 주님에게 빼앗기면서 천국의 가정으로 교체되는 겁니다.

그 교체됨을 여러분이 너무 섭섭해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이 여러분의 가정이 들어오는 것을 너무 섭섭하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가정이라고 해서 제사도 안 드리고, 무슨 이런 호로 자식이 있나?’라고 사람들은 그렇게 주장하지만 그 이기주의자들! 사람이 착하다, 착하다 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거짓말인지요.

사람이 살면서 기껏 익히고 배워봐야 그 한계라는 것이 자기가 아는 것이 얼마 안돼요. 그 선, 그 동그라미 안에서 ‘나는 경건하다. 나는 바르다.’ 하지만 남들 보기에는 남들에게 집단적인 폭력을 가하는 구조적인 죄를 행사하고 있는 겁니다. 여행하면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좁은 범위 내에서 거기서 선과 악, 의와 정의, 도덕과 윤리, 천국과 지옥을 한정해서 왜곡하면서 오해하면서 살아왔는지를 발견한 거예요.

남들이 생각하는 천국과 지옥이 따로 있는데. 그러니까 이 세상은 믿을 것이 못돼요. 여행을 여기 저기 할 것이 아니고 여행을 해도 성경 안에서 여행해야 돼요. 성경은 피를 통해서 낯설게 들어가는 겁니다. 여러분이 근심 걱정하는 것이 뭔가 있다는 것은 아직도 소중한 것이 뭔가 남아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복음을 딱 듣는 순간, 성경 속에 들어가서 십자가를 대하는 순간 멍, 해져버려요. 멍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것은 예상 못한 낯선 환경이거든요. 비행기 타고 수천 미터 올라간 것 하고 똑같아요. 멍해져버려요. 사람들이 나이 들면서 등산을 좋아하는 이유가 등산을 해서 높은 산에 올라가면 전에 마누라 하고 싸우고 자식들과 싸웠던 그 골치 아픈 세계가 손톱만큼 만하게 밖에 안보여요.

‘아, 헛되고 헛되다.’ 쓸데없는 것을 가지고 거기에 스물 네 시간을 마음고생하면서 상처 입었다는 것을 산에 올라가는 순간 압니다. 산에 올라가서 노래 부르고 뒹굴다가 산 밑의 동네에서 종소리를 댕, 하고 울리면 다시 일상의 생활로 돌아가잖아요. 산 위에 있으면 일종의 환각작용이 일어나요. 마치 신선이 된 듯하고 도인이 된 듯한.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다시 산 밑으로 내려와야 됩니다. 왜냐하면 산 밑에 와야 저녁을 먹을 수 있거든요. 산 위에서는 라면 하나 못 끓여먹어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산 아래로 다시 내려오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멍~한 세계, 뭐야 이 세계는 대체 뭐야, 할 정도로 멍한 세계,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제공해 주신 세계,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 만들기에 우리가 내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부름을 받은 거예요.

갈라디아서 4장 28절에 나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니라.”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의 인간노선이 있다는 겁니다. 한쪽은 혈육 따라 인간된 것과 다른 한쪽은 혈육 없이, 어미도 없고 아비도 없이 사람이 된 사람이 등장한다는 거예요.

그게 성령을 따라, 예수님을 따라서, 예수님과 같이, 주님과 더불어서, 예수님의 피가 우리 육신의 피를 교체시키면서 만든 인간, 달리 말해서 죽어도 사는 인간, 죽음이 더 이상 권세를 부릴 수 없는, 죽음이 더 이상 우리에게 에헴, 할 수가 없는, 죽음이 자기 세력을 행사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우리는 하나의 유령이 되어버린 존재, 그런 존재를 만들어 낸다는 겁니다.

죽음이 표적인줄로 알고 화살을 날렸는데 맞지를 않아요.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불속에, 불이라는 죽음 속에 집어넣었는데 춤을 추고 있어요. 예수님과 더불어서 강강술래를 하고 있어요. 바로 이것이 성경속의 세계입니다. 멍한 세계, 높은 산에 올라가서 기압이 떨어진 것 같아요. 그냥 멍해요.

밑에서 친구들이 말합니다. ‘어이, 친구야! 거기서 너는 뭘 보고 있느냐.’ ‘말 안 해줘. 너는 말해줘도 못 알아들어.’ 그 삼층 천에 올라간 사람들, 명절 지나면서 온갖 근심 걱정 수심 장례문제, 그 동안 관심 없던 가족들의 가지가지 애환, 아까운 친구와 친척들의 슬픔과 아픔, 내가 그중의 얼마는 감당해야 된다고 여기는 부담금, 부담감, 이런 것을 짊어지고 이제 주일을 맞이해서 말씀을 다시 한 번 봤는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간편합니다.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음의 길로 가도록 놔두고 너는 그 길로 가서는 안 되는 나의 사람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네가 혈육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내가 준 은혜와 사랑에 신경 써야 된다.’ 가는 길이 달라요. 저쪽이 동쪽이라는 너는 서쪽이고 저쪽이 북쪽이면 우리는 남쪽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해주신 십자가와 어린양이 더 크게 보이고 저쪽에서는 십자가가 점점 더 작아 보이고 갈수록 작아 보이지요. ‘나도 한때는 교회 다녔다.’ 이러면서 점점 더 멀어지는 거예요. ‘나는 가족은 안 믿지만 내 책임감은 다 한다.’ ‘그래. 다 해라. 다 해라. 실컷 해라.’ 그것이 바로 나도 주님께서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내 혈육에 대한, 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예수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고 결국은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는 그런 팔자였고 우리가 다 같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왜? 혈육에 속한 사람은 그 노선이 혈육에 속했기에 자력으로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혈육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죽음이에요. 죽음 뒤에 뭐가 있다는 것은 생각 안합니다. 죽으면 뭐든지 그것은 실패로 간주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에 속한 사람은 ‘죽어버려라, 속 시원하게 죽어버려라, 육체에 속한 사람이 너를 핍박할 것이다. 죽으라고. 육체에 속한 사람들이 너를 죽으라고 핍박할 때 비로소 네가 성령에 속한 자임을 알리라.’

우리가 성경을 너무나 얕잡아 봐요. 성경을 그냥 답답한 책으로만 봅니다. 펼치면 피융, 하고 빛이 나오고 성령의 글자들이 마구 춤을 추면서 마구 파도가 일어나고 있어요. ‘내가 너에게 이렇게 했느니라. 내가. 예수님인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느니라.’하는 소리가 막 움직입니다. 마치 바다의 물소리 같고 그 발은 빛난 주석같이 그 입에서는 빛이 나오는(계 1:12-17), 성경 자체가 예수님의 몸체 같아요.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마 12:48) 이 말씀에 의해서 말씀에 관심을 가져서 사람은 떠나고 말씀이 자기 주위를 휘감아서 말씀이 들썩거리고 그 말씀에 합세할 때, 말씀의 그 거품과 말씀의 파도에 휩쓸려 있을 때,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그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내 가족입니다.

말씀 자체가 죽음과 같은 세력이기 때문에 우리가 죽지 않아도 죽음의 세력이 우리 몸에 넘치는 것처럼, 말씀은 죽은 가운데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생명이기에 ‘말씀이 죽음을 이런 식으로 이긴다. 말씀이 네 죽음보다 더 세다. 확실히 세다.’ 하는 식으로 그 말씀이 들어차니까 그 말씀을 행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어요. 말씀이 더 센데요.

우리는 그냥 허수아비에요. 이쪽에서 당기면 딸려가고 저쪽에서 당기면 그냥 딸려가는 껍데기 같은 몸입니다. 복음이 와서 끌고 가니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거예요. 이제는 생명이 와서 말씀이 우리 속에 가득 차니까 말씀이 우리를 잡아당기니까 이제는 말씀에 관심이 있네요. 말씀 속에 들어가게 되지요.

그럴 때 우리는 멍~하지요. 이 말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멍~하면서 말씀 밖의 사람들의 처지가 이해가 되는 겁니다. ‘나도 저랬었다. 나도 저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이었다.’ 시편 64편 10절에 보니까 “의인은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 것으로 즐거워하지요. 죽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잊어버리려고 하고 다만 혈육적인 것으로. 일본하고 한국하고 결승전 해서 여자축구대표팀이 U대회 우승했잖아요. 역전 우승 했을 때 기쁘지요. 만약에 준우승 했으면 섭섭했을 거예요. 소중한 것을 날려버렸으니까. 우리는 17세 이하의 여자축구라는 것이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을 거예요.

제가 아까 이야기한대로 어떤 만남을 통해서 없던 근심과 포부와 희망이 누구를 만나든 만나는 가운데서 새롭게 발견이 되는 거예요. 주어진 것에 대해서 ‘하나님, 꼭 이렇게 되었으면, 저렇게 되었으면.’ 하고 감추어져 있던 이기적이고 육적인 소망이 막 터져 나오지요. 그런데 말씀 속에 들어가면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로 장사하게 하라.’

멍~! 하지요. 세상 사람들은 헐, 이럴 것이고 우리는 멍~ 하지요. 그게 이기나 지나 무슨 상관 입니까?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가 맨 날 하는 소리가 있었어요. 제 젊은 삼촌들이 축구를 좋아하니까 할아버지가 하는 소리가, ‘그 축구를 왜 그렇게 좋아하느냐. 바보 등신같이!’ 그게 무슨 뜻인지 나중에 커서 알았어요. 축구라는 말이 한자어인데 그게 ‘바보’라는 뜻이에요.

‘바보’라는 뜻이 한자말로 ‘축구’(畜狗)라고 해요(공차는 축구는 蹴球). ‘바보가 바보를 좋아하니 바보지.’ 그런 뜻이에요. 바보입니다. 우리는 바보였었어요. 맞습니다. 우리는 축구 좋아하고 자식 잘되면 자기 잘되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자식이 해달라는 것은 뭐든지 엎어지고 자빠지고 뭐든지 다 해주고, 부모는 죽어서라도 자식만 잘되면 그것이 전부고. 혈육에서 우리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성화되었다고요? 아!!! 모든 가족이 다 수녀 되었다고요? 아이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고요? 혈육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우리를 선점한 우리의 존재를 먼저 가졌던 그 혈육입니다. 못 벗어납니다. 주께서 찾아와서 그 소중한, 혈육에 속한 그 소중한 것보다 더 소중한 예수님의 말씀의 세계가 그 죽음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혈육에 속한 우리를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한 것처럼 사흘 만에 그것을 덮어버리고 주께서 생명으로 빚어내듯이,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죽고 주께서 부활할 때 같이 부활시켜서 우리를 뽑아낸 겁니다.

뽑아내 놓고 혈육의 엿가락에 질질 끌리는 우리를 뽑아내는 거예요. 아직 안 죽었으니까 덜 끊어진 거예요. 아직 남아 있어요. 계속 뽑아낼 거예요. 다 뽑아내면, 죽고 나면 우리가 영원히 주님과 함께 낙원에 거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예수님을 뭔가 오해한 적이 없었습니까? 주님과 좋은 관계 맺으려고 한 그 시도자체가 주님한테는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죄악 된 망발 일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우리 쪽에서 주님한테 다가가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소식을 가져다주었는지 우리에다가 무엇을 심었는지, 생명을 심고 예수의 피를 심어놓은 그 생명의 피가 우리 안에 돌면서 흐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