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0. 20. 16:13

거짓선지자들의 약점 , 예레미야 23장 23-27절

본문 : 예레미야 23장23-27절
제목 : 거짓선지자들의 약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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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강-렘23장23-27거짓선지자들의약점-jer101020

거짓 선지자의 약점

2010년 10월 20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3:23-27

(렘 23:23,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데 하나님이요 먼데 하나님은 아니냐』
(렘 23:24,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렘 23:25, 개역)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몽사를 얻었다 함을 내가 들었노라』
(렘 23:26, 개역)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
(렘 23:27, 개역) 『그들이 서로 몽사를 말하니 그 생각인즉 그들의 열조가 바알로 인하여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 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


‘몽사’라는 것은 꿈을 말합니다. 선지자직을 전문 직종이라고 여겼던 사람들은 오늘날 목사들이 정기적으로 설교하는 것과는 달리 그들은 늘 하나님의 계시를 달고 살아야 했습니다. 마치 부채도사나 점치는 점장이와 같은 위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늘 하늘의 계시를 조작해야 했습니다.

받은 적도 없고, 가진 적도 없는 하나님의 계시를 백성들에게 알려주려고 하니 자연적으로 백성들이 원하는 바를 끊임없이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자극적이고 환상적이고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기발한 내용으로 계시를 조작해서 배포해야만 했습니다. 구약 때, 선지자들의 이런 딜레마와 계시 부담을 생각한다면 오늘날 목사들은 한결 수월한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없는 데서 만들어 내야 될 필요가 있었던 구약 선지자들에게 비해서 오늘날 목사들은 있는대로 대충 조립해내면 그만인 것처럼 간주되기 싶습니다. 하지만 목사는 오늘날 선지자들이 아닙니다. 따라서 구약 선지자들이 받고 누려야 할 영적 권위를 한 몸에 받을 하등의 이유도 없고 권한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계시를 받아야지만 외칠 수 있는 구약의 참 선지자와 맥락을 같이 하는 자들이 오늘날 신약 시대에는 누구란 말입니까? 그들은 바로 ‘성도’들입니다. 베드로전서 2:9에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는 계시를 하늘에서 받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계시 안에서 살면서 날마다 계시의 저촉을 받고 삽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안에 있는 성도에게 십자가의 정신으로 늘 추궁도 하고 늘 용서도 해주십니다. 말씀이 작용하게 되면 성도에게서 죄가 피어납니다. 이 죄는 본인의 양심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죄가 아닙니다.

말씀 작용으로 인해 새삼 알게 된 죄입니다. 이 죄를 들추어내면서 늘 교정시켜 나가십니다. 그러다가 몇 년 지나면 지난 날에 했던 죄가 또 다시 나오게 됩니다. 이로서 성도는 단 한시도 십자가의 혜택을 벗어나서 살 수가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자신에게서 조작해서 나온 계시를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와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이 세트가 되어서 오직 예수님의 공로만 증거되는 겁니다.

여기에 비해 거짓 선지자들은 자기 몸에서 만들어진 계시를 전하다보니 도로 자기 자신의 가치를 챙기는 식으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즉 자기 몸에서 출발한 계시이기에 도로 자신의 몸을 보전하는데 유리하는 식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몸이 만든 ‘몽사’입니다.

시편 73:20-23에 보면,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의 몸과 그 몸으로 평생 설친 것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한낱 꿈꾼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꿈을 꾼 후에는 모두 무시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인간의 몸으로 만들어내었다는 모든 것은 꿈처럼 취급해 버립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에 평생 살면서, 고생하면서 겪은 모든 것을 유일한 현실이라고 우기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된 하나님의 약속과 접해보지 못하고 기껏 같은 인간들이 설쳐대는 것을 목격하면서 평생을 살아오기 때문입니다. 즉 꿈이 꿈을 만나니 그것이 꿈인지 꿈이 아닌지를 가려낼 기준이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기준을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 앞에 서니 인간은 곧 짐승이었습니다. 꿈이나 꾸면서 평생을 보내는 짐승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서게 된 그 짐승은 비로소 압니다. 이 짐승같은 ‘나’이지만 하나님의 오른손의 능력으로 구원이 된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오른 손에 누가 계십니까? 시편 89:19-20에 보면, “주께서 이상 중에 주의 성도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돕는 힘을 능력 있는 자에게 더하며 백성 중에서 택한 자를 높였으되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 나의 거룩한 기름으로 부었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기름부어서 장차 오실 메시아 역할을 미리 하게 하십니다. 그 역할에서 평생 꿈 속에서만 사는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나옵니다. 이것만이 진정 꿈이 아닌 참된 계시입니다. 이 계시를 직접 대면한 사람이 요한복음 3장에 나옵니다. 니고데모라는 자는 이스라엘의 선생입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12-15에 보면,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땅의 일’이란 곧 예수님께서 홀로 이 땅에서 하실 일을 말합니다. 즉 인간들이 조작해내는 그런 엉터리 계시가 아니라 땅에서 접할 수 있는 참된 계시는 오직 예수님만이 행하시는 일 뿐입니다. 니고데모는 평소에 자기 몸 중심으로 계시를 생각하다보니 전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하지를 못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의 일의 결말을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들려야 할 것이다”고 하십니다. 지상으로 내려오셨기에 다시 본래의 위치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말은 땅의 일이 완성된 채 하늘로 가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땅의 일의 완성이 무얼까요? 요한복음 12:32에 보면,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의 목적인 인간 몸을 구원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주되심에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이란 자기 몸에 관한 겁니다. 즉 자기 몸이 구원받는데 치중합니다. 이러다보니 그 어떤 인간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이란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몸과 연결됩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들로부터 핍박을 받듯이 오늘날 성도들도 예수님의 의와 복음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습니다. 하지만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이로서 선지자와 우리가 같은 맥으로 연결되됨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꾼 꿈에 기대를 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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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강-렘 23장23-27(거짓선지자들의약점)-jer101020-(이근호목사)

2010-10-23 13:22:11 녹취 : 오용익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3장 23절에서 2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88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23:23-2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데 하나님이요 먼데 하나님은 아니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몽사를 얻었다 몽사를 얻었다 함을 내가 들었노라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 그들이 서로 몽사를 말하니 그 생각인즉 그들의 열조가 바알로 인하여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 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


몽사라는 말이 나오지요. 꿈속에서 계시 받은 것을 이야기합니다. 선지자들이 늘 예배는 드려야 되겠고, 설교도 해야 되겠고, 백성들을 가르치려고 하는데 밑천이 떨어져버린 거예요. 밑천이 떨어지니까 뭔가 기발한 것, 자극적인 것, 뿅 가는 것, 그런 것을 백성들이 원하고 있습니다. ‘도사님, 도사님, 무슨 하나님의 계시가 또 떨어졌습니까?’ 하면 ‘가만있어 보세요. 제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서 전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계속해서 백성들을 속여 온 겁니다.

꼭 부채도사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점쟁이 같은 느낌도 들고요. 그런데 여기서 선지자들과 오늘날 목사들과의 차이점을 생각해 보면, 이렇게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계시가 그리워서 애 닳아했고 안타까워했다는 그 자체가 상당히 우리한테는 신기합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실 때만 자기의 할 일이 발생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지자가 직업이 되면 곤란하다 그 말입니다. 어린 사무엘이 성전에서 엘리제사장과 같이 잠을 자고 있는데 ‘사무엘아’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자 어린 사무엘이 일어나서 엘리제사장한테 가서 ‘제사장님, 저를 불렀지요.’ 했을 때 ‘아니, 내가 안 불렀는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선지자가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를 아주 깔끔하게 보여주지요. 하나님께서 ‘사무엘아’ 하고 불러주지도 않았는데 괜히 사무엘이 ‘내가 계시 받은 척을 좀 해볼까.’ 해서 자다가 일어나서 ‘절 불렀지요.’ 이럴 수는 없다는 말이지요. 아주 순진하게 그야말로 어떤 속임수도 쓰지 않고 ‘저, 엘리제사장님! 저를 부르신 것이 맞지요?’ 제사장이 ‘아니, 내가 너를 부르지 않았다.’

세 번씩이나 하나님께서 어린 사무엘을 부릅니다. 네 번째에 가서 ‘아하, 이것은 계시구나. 계시가 얘한테 떨어졌구나.’ 그 때부터 사무엘이 선지자 노릇을 하게 됩니다. 그걸 봐서 진짜 선지자라 하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만 선지자의 기능을 해야 되는 겁니다. 만약에 그것이 직업화 되어버리면 아무런 계시도 없는데 직업이라는 이유로 계시를 스스로 조작해야 될 필요가 있는 거예요.

나올 것도 없는데 조작하는 거예요. 소설가도 여러 번 쓰면 나올 것이 없어요. 밑천 바닥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목사라는 전문직업과 옛날 선지자와 차이가 이만큼 나는 거예요. 그렇다면 옛날 그 선지자와 같은 맥락을 갖고 있는 오늘날 사람들은 누구란 말입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성도입니다. 성도가 그 일을 하게 돼요. 그러면 성도가 맨 날 계시를 받는가? 성도는 계시를 받는 정도가 아닙니다. 아예 계시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늘 계시 안에서 살아가는 거지요. 그래서 성도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뭐냐, ‘난 뭘 해도 항상 죄 뿐이며……’ 이것이 빈말이 아닙니다. ‘나는 죄인이다, 죄인이다.’ 하면 구원시켜 줍니까, 라고 하는 것은 가짜지요.

내가 생각하는 죄라고 하는 것은 계시에 입각한 것이 아니고 양심에 입각해서 죄라고 하는 그것은 죄 근처도 안 간 겁니다. 그것은 가짜 성도지요. 진짜 성도는 죄를 진짜 깨달아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대신 희생하심으로서 구원받는구나, 라는 것을 날마다 깨닫지요.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그 짧은 시간가운데서 위에서 나를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에게 죄란 무엇인가하면, 대전에서 그런 강의를 했는데, 습성이죠. 이 세상을 좋아하는 습성을 내가, 성도 본인이 고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주님 쪽에서 알아서 고치는 거예요. 주님께서 고치는데 고쳐 놓으면 다른 속성이 또 튀어나오고 그러면 또 고칩니다. 고친다는 말은 ‘그것이 죄인 줄 알게 한다.’는 말이지요.

고쳐 놓으면 또 다른 속성 나오지요. 그래서 한 몇 년 지나면 5년 전의 그 속성 또 튀어나옵니다. 그래서 인간은 늘 죄가 나오면서 하나의 세트로서 죄는 늘 나오고 늘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만남을 통해서 외부사람들에게 십자가 복음을 증거 하는 성령의 사람이 오늘날 성도 곧 선지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너희들이 바로 이 시대의 선지자다. 왕 같은 제사장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는 바로 너희가 선지자’라고 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그것을 누가 주도적으로 하시는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성령 안에서, 계시 안에서 그것을 이루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보는 이 본문은 신약이 아니고 구약인데 구약에서의 거짓선지자들은 몽사, 꿈 가지고 계시를 조작해 내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내 몸에서 계시를 조작해 내는 겁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는 참 선지자기 때문에 자기 몸에서 계시를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고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계시가 예레미야에게 도착한 거예요. 앞당겨 도착한 거예요. 그래서 거짓선지자는 자기이야기 하는 반면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장차 오실 주님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는 주님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의하면 27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서로 몽사를 말하니……” 몽사는 무엇과 대립이 되느냐 하면, “……그 생각인즉 그들의 열조가 바알로 인하여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 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 여기서 ‘내 이름을 잊어버린다.’ ‘내 이름’이 나와요.

여기 나온 ‘내 이름’은 예레미야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몸을 사용해서 장차 나타나실 어떤 몸, 이름의 구체화, 장차 신약시대에 나타날 분의 이름, 지금 예레미야에게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몸을 만나서 그 이름 됨의 기능을 다 발휘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 몸이 있어야 십자가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그런 과정이 다 필요하니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지 않습니까?

장차 오실 그 분의 몸에서 나오는 그 기능이 미리 앞당겨서 지금 예레미야를 통해서 발휘되고 있는 겁니다. 조금씩 장차오실 예수님께서 이런 식으로 구원하고 죄를 용서한다는 것을 예레미야를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예레미야는 계시를 자기가 조작하고 만들어 내지를 못해요.

구약의 선지자들이 만약에 5개월 동안 계시가 없다, 그러면 안하면 되는 거예요. 아모스의 경우에 그냥 뽕나무에서 과수농사 하면 되는 겁니다. 그냥 밭작물 농사 하다가 계시 받으면 외치고 계시 없으면 또 밭작물 하고 돼지 키우다가 계시 받으면 돼지 키우는 것 잠시 멈추고 계시 전하고, 그러면 되는 거예요.

오늘날 목회는 참 쉽습니다. 전문적으로 목사를 안 하면, 목사를 포기하면 참 쉬워요. 이게 참 너무 쉬운데 어떻게 말로 할 수도 없고, 정말 쉬운데! 이것은 전하고 싶으면 전하면 되고 받은 계시가 없으면 안전하면 되는데 문제는 이것이 직업화 되다 보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에게 계시를 줄 리도 없고 안주니까 만들어내야 되는 겁니다.

캘빈 주석보고 루터 주석보고 신학 책들 참고해서 얼기설기 만든 것을 가지고 시간 때우는 거예요. 설교 들어보면 다 압니다. 다 보입니다. 교인들도 이해해요. ‘빨리 끝내고 축복이나 해라. 얼른 해라. 월급 줄 테니까 더듬거리지 말고 대충 해치우고 말아라. 네가 백날 해도 베낀 것 다 아니까 주석에서 옮겨놓은 원고 어서 읽고 그만 치워라.’

설교를 베껴서 하는 경우에 목사가 어떤 딜레마에 빠지느냐 하면, 베껴서 하게 되면 그것을 뒤엎는 이론이 나왔을 때 앞에 한 것이 거짓말을 한 것으로 드러나는데 그것이 굉장히 난처한 거예요. 목사 안 되고 성도만 되어도 천국 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 했지요.

어느 지점에, 천국에 갈 때에 티코 타고 가나 고급차 타고 가나 아무 지장이 없듯이, 천국 가는데 호화스럽게 ‘목사입네.’ 하고 갈 필요가 없어요. 천국 가는데 성도만 되면 됩니다. 성도만 되면 되는데 목사에게 계시가 안 오면 성도에게 그 계시가 주어질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 그 목사가 성도라면 일찌감치 목사라는 그 전문직은 아예 마음에 두지를 않습니다.

목사가 성도가 아니기 때문에 자꾸 목사가 이 전문 직업을 쥐려고 하고 이것을 안 놓치려고 하는 거예요. 아등바등 쥐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속아 넘어가는데 누가 안 속느냐, 우리 주님은 속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그 당시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이고 성경을 안다는 니고데모라는 사람과 예수님과 직접 맞닥뜨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3장 12절에서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라고 이야기하지요. 니고데모가 요새말로 하면 말씀도사인데 예수님 하시는 말씀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뭔가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니고데모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을 피해가는 것 같아요.

그들이 아는 것을 다 피해가니까 니고데모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발언들에 대해서 ‘당신은 계룡산에서 하산한듯한 느낌이 든다.’ 하는 식으로 도대체, 자기가 알고 있는 노림수로 해석을 하려고 하는데 해석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그 때 예수님이 ‘내가 땅의 일을 말해도 이해가 안 되는데 어떻게 하늘의 일을 이해하겠느냐.’ 여기서 땅의 일이란 그 뒤에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입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해석은 뭐가 누락이 되고 빠지느냐 하면, ‘죽는 하나님’이 누락됩니다. 하나님이 죽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날 구원하는 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보는 거예요. 이것도 참 어려운 이야기입니다만 계속 해 봅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날 구원하는 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해서 자꾸 구원받고자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구원에 관심이 없고 죽은 아들 어떻게 되살리는가, 거기에 하나님의 일의 핵심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을 죽여 놓고 살려야 비로소 예수님이 주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주가 된다는 것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주제입니다.

‘예수님은 주(主)십니다.’ 그런 관점에서 구약성경을 다시 한 번 보자는 말입니다. 그러면 구약성경에 그것이 없었는가? 있었어요. 있었지만 사람들이 해석을 못하니까 구약성경을 그냥 건성으로 넘어간 겁니다. 시편 73편 20절에 보면 꿈에 대해서 나옵니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끔을 무시함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애쓰는 것을 뭐로 보느냐하면, 지난밤의 꿈으로 치부해버립니다. ‘너, 몇 살 살았어?’ ‘80년 살았습니다.’ ‘80년 동안 꿈 꿨구먼.’ 꿈을 꾼 거예요. 그러면 실제는? 실제는 주님 앞에 나설 때 그것이 실제지요. 꿈이라는 것은 늘 내가 주인공이 됩니다. 우리는 꿈을 꾸면 거울 앞에서 나를 보는 것 같으니까 늘 보는 것이 나와 내가 아는 사람들, 인간들뿐이니까 그 속에서 자꾸 꿈만 생산되는 거예요.

꿈 외의 것은 생산되지 않아요. 그래서 이것이 꿈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기준이 없는 겁니다. 중국의 장자라는 철학자가 그 이야기를 했거든요. 자기가 나비 꿈(胡蝶夢)을 꿔놓고 ‘내가 나비 꿈을(내가 나비가 됨) 꾼 것인가, 아니면 그 꿈속의 나비가 바로 나인가.’ 본인이 헷갈리는 겁니다. 이것은 동양뿐이 아니고 서양도 마찬가지입니다.

데카르트가 30년 전쟁에서 부상당해서 난롯가에 몸을 녹이는 가운데 몸이 곤한데 꿈을 구면서 “내가 지금 벽난로 가에 있는데 이것은 내 속의 악마가 나를 속여서 내 앞에 벽난로가 있지도 않는데도 ‘넌 현재 벽난로 가에 있어.’라고 속삭일 때에 그것이 악마인지 아니면 천사인지 무엇으로 기준삼아서 판단할 수 있겠는가?”라는 고민에 빠진 겁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라는 철학자가 결론 내린 것은 악마가 내 현실을 조작해 낸 것인지, 아니면 내 현실이 진짜 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뭐냐, 그것이 바로 나를 상대로 한다는, ‘내가 여기 있다, 는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이렇게 본 겁니다. 그 때부터 ‘인간의 주체만큼은 확실하다.’는 주체철학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시편 73편 22절에 보면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라고 합니다. 22절 23절을 보면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이것이 십자가 안에 있는 성도가 유일하게 해야 될 고백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비로소, 나는 맨 날 꿈만 꾸는, 장자처럼 데카르트처럼 환상을 현실로 보면서 꿈만 꾸는 인간인데,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나타날 때 ‘내가 바로 인간도 아니고 짐승입니다.’라는 고백을 죽을 때 까지 계속해야 됩니다. ‘나는 짐승 맞습니다. 그런데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점은, 신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주의 오른손으로 붙들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이 짐승 같은 인간도 대속의 피로 말미암아 인간되어서 천국 갑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거예요.

시편 73편 20절, 23절의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그 오른편에 뭐가 있느냐 하는 것이 시편 89편에 나옵니다. 20절, 21절에 보면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 나의 거룩한 기름으로 부었도다 내 손이 저와 함께 하여 견고히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 오른쪽의 다윗을 기름 부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몽사나 꿈이 아닙니다.

이게 실제에요. 그런데 이미 모든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치매현상에 걸려서 이것이 실제인지 실제가 아닌지, 이 일이 하나님이 인정할지 안할지 헷갈리면서 이것을 판정할 수 있는 판정기준을 하나님의 진짜 약속이 아니면 알 수가 없어요.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는 겁니다. 저한테 가끔 들어오는 질문이 그런 거예요.

‘목사님, 제가 꿈을 꾸었는데 이 꿈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또 얼마 전에 어떤 분은 이런 분이 있었어요. 전화로 ‘목사님, 한번 만납시다.’ 해서 ‘왜 그러십니까?’ 했더니 꿈에 이 근호 목사를 봤답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본 거예요. 짐승입니다. 왜 그것이 몽사, T꿈에 불과하냐하면 꿈은 나에게로 출발해서 나에게 되돌아와요.

나에게 출발해서 나에게로 되돌아옵니다. 그 과정을 누가 침투해서 수박 으깨듯이, 오이 뚝 자르듯이 엿가락을 자르듯이, 과자를 부스러뜨리듯이 딱 부러지게 만들어야 돼요. 딱 부러지면 그것이 바로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땅에서 이룬 땅의 일에 해당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땅에서 이룬 땅의 일입니다.

땅의 일이지만 그것이 어디로 연결되었는가, 유일하게 예수님이 하신 땅의 일만 몽사가 아니고 꿈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의 완성이며 그것만이 하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보고 예수님 하신 말씀이 ‘네가 땅의 일도 모르면서 어떻게 하늘의 일을 알겠느냐. 인자는 들려야 하리라. 모세가 지팡이를 든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

이 ‘들려야 한다.’는 이 말이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그냥 들리는 것이 아니고 ‘내가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들릴 때에 내가 택한 백성을 이끌겠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1,32)

그냥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숲속에서 거미줄을 걷는다고 잡아 당겨보면 그 옆에 연결되어 있는 거미줄도 와락 다 딸려 나오지요. 그것처럼 인자가 들릴 때 그냥 홀로 들리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택한 백성을 함께 영생을 공유해서 천국으로 이끄시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실 때는 홀로 왔지만 가실 때는 자기백성 데리고 가시는 거예요.

데리고 가실 때 요한계시록에서 증표가 뭐냐 하면 종려나무라는 것을 줍니다.(계 7:9) 종려나무는 순교자라는 뜻입니다. 순교자에게만 주는 겁니다. 쉽게 하면 이런 거예요. 성도는 자기 목숨하고 천국에서 내미는 종려나무하고 맞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종려나무 하나 얻고 우리는 이 땅에서 순교하는 겁니다. 그것이 14만4천명입니다.(계 7:4)

이 종려나무를 흔드는 모습,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할 때 민중들이 나귀타고 오신 분이 왕이라고 흔드는 그들의 그 모습이 바로 예수님 십자가이후에 일어날 일을 미리 보여주는 엑스트라들입니다. 막상 본인들이 엑스트라를 해놓고는 그 역할이 무슨 역할인줄 모르지요. 예레미야가 주님의 이름으로 일할 때는 남들은 뭘 보느냐 하면 예레미야라는 몸하고 자기 몸하고만 자꾸 비교해요.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제시한 성도의 모델은 뭐냐, 한국교회에서 교회 세워놓고 목회한답시고 ‘적어도 이 정도수준은 돼야 진짜 성도입니다.’라고 제시하는 그 모델이 뭐냐, 스데반 집사는 아니다 그 말이죠. 이것은 교회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 모델이 스데반집사가 아닙니다. 한국교회가 제시하는 모델은 뭐냐, 예수 믿고 부자 되어서 교회 십일조, 헌금 많이 하는 사람, 그게 모델이 되고 말았어요.

그러나 그 모델은 성경에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열두 제자가 전부 다 순교자들이니까요. 성경에 나오지도 않는 모델을 인간의 야망과 탐욕에 의한 모델을 한국교회는 대표적인 참된 성령 받은 성도라고 제시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다 따르라고 요구하고 있어요. 그러나 성경에서 성령 받은 사람은 그런 길로 안 갔습니다.

한국교회는 교회라고 볼 수 없어요. 성당도 마찬가지고.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이름을 이야기할 때, 결국 예레미야가 주의 이름으로 핍박을 받아요. 그러면 자기는 주의 이름으로 이야기를 안했으면 핍박을 안 받을 것인데 주의 이름으로 핍박을 받으니까 그 핍박받는 몸뚱이가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주의 이름으로 이야기할 때 당하는 핍박과 같은 맥락으로 가는 겁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복이 나오는데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핍박을 하는 주인공이 누구냐, 27절에 보면 “그들이 서로 몽사를 말하니 그 생각인즉 그들의 열조가 바알로 인하여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

다시 말해서 예레미야를 핍박하는 그 주체가 누구냐, 주의 이름을 모르는 그것이 그냥 모르는 것이 아니고 ‘예레미야는 이단! 예레미야는 이단!’이라는 핍박을 하는 거예요. 그 배후에 누가 있느냐, 거짓 선지자들이 주동이 되어서 자기사람들을 선동해서 진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전하는 사람을 이단으로 몰아세워서 핍박을 하는 겁니다.

이것이 목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아는 모든 성도에게 다 같이 해당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이미 우리를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23절, 24절에 나옵니다. 이것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데 하나님이요 먼데 하나님은 아니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다 안다는 겁니다.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안다는 겁니다. 아담이 무화과나무 뒤에 숨어봐야 주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에게 우리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을 위해서 사는 것인지, 아니면 짐승 같은, 만 날 꿈만 꾸는 우리를 대신해서 누가 피 흘렸는지 그 피를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인지. 여러분은 그 피를 바라보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시대가 참 기막힌 시대입니다. 교회마저 마귀가 점령을 하고 말았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큰 교회가 가립니다. 우리도 덩달아서 예수님 바라보기 보다는 인기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관심 받고 싶어 하는 식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 한 번 말씀 속에 들어가서 예레미야가 갔던 그 좁은 길만이 영생의 길인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