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7. 22. 13:40

생일 저주 (예레미야 20장 14-18절)

본문 : 예레미야 20장14-18절
제목 : 생일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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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강-렘20장14-18(생일저주)-jer100721

생일 저주

2010년 7월 2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0:14-18

(렘 20:14, 개역)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렘 20:15, 개역) 『나의 아비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네가 생남하였다 하여 아비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렘 20:16, 개역)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훼파하시고 후회치 아니하신 성읍 같이 되었더면, 그로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
(렘 20:17, 개역)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미로 내 무덤이 되게 하지 아니하셨으며 그 배로 항상 부르게 하지 아니하신 연고로다』
(렘 20:18, 개역)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수욕으로 보내는고』


위의 말씀에 감히 “아멘”이라고 동의하기가 난처하지요. 왜냐하면 자칫하면 신앙 전반에 걸쳐 의심이나 반발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고백이 예레미야에게만 해당되는 특수한 것이라고 간주할 수도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말 걸고 있습니다. 기껏 세상 사람들 앞에서 자신 신세 타령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지하게 하나님께 묻고 있는 겁니다.

자신의 인생을 이토록 힘들게 하신 분이 결코 세상이나 가족이 아니라 하나님시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문제는 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자신을 힘들게 하는지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차라리 진작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엄마 뱃속이 곧 나의 무덤이었으면 지금보다 더 행복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이와같은 고백에 우리가 동참하지 못하는 자가 되면 곤란합니다. 결국 성도가 가야하는 길에는 이런 과정이 필히 거쳐야 하는 겁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세월을 보내면서 겹겹이 자신을 가리는 것들이 쌓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의 오심은 바로 그런 위장층들을 걷어내시는 분으로 오십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 차라리 저를 태어나지 않도록 조치했으면 좋았겠습니다”라고 할 지경에 이르게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노출은 원래 하나님께서 시도하려는 구원 계획입니다. 평소에 우리가 이런 예레미야의 고백을 하지 못하는 것은 맨날 아침에 거울을 마주보면서 자신을 꾸미는데 진력을 다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는 너무 오랜 세월동안 꾸미다보니 진짜 자신의 근원은 잊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게 되면 그 겹겹이 쌓인 껍질을 홀라당 벗겨지고 부끄럽고 더러운 자아상이 노출됩니다. 너무나 그 아픔이 크기에 자칫 하나님께서 나 자신이 합당치 않은 조치를 내리고 있지는 않은지 오해하게 됩니다.

창세기 3장에서의 아담부부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바로 인간의 근원에 시선을 두고 찾아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인간들이 꾸며놓은 껍데기에 주눅드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인간은 자신을 속일 수 있지만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마저 속일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왜 이런 탄식을 하나님 앞에서 하게 됩니까?

그것은 인간들은 평생토록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살면서 왜 꼭 이 일을 해야하는지, 왜 자신은 이 세상에 태어나야 하는지 그 이유도 의미도 모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즉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소에 하는 일이란 사실 본인의 육신이 나타내는 성향대로 움직이다보니 그 쪽에 매진하게 되는 직업들입니다.

인간이란 일종의 크레용입니다. 자기만의 크레용을 들고 열심히 시공간으로 색깔을 칠해갑니다. 문제는 왜 나는 이런 색깔을 좋아하고 다른 색깔에는 영 흥미가 없는지, 왜 나는 이 색깔에 매료되어 평생을 이 일에 매진하는지를 모릅니다. 그저 자신이 그려나가는 데까지, 힘이 닿는데까지 그려나갈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세상 전체를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레미야의 고백은 이미 욥이 먼저 토해놓은 적이 있습니다. 욥기 3장에 보면, 욥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합니다. 하지만 욥기 40:1-5에 보면,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변박하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욥은 투정이나 부를 수 있는 대상으로 하나님이 성립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실수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상대로 투정부를 수 있는 입장이나 처지가 못됩니다. 기껏 자기 입이나 막을 존재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신체적으로 고통받고 시달려도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항의한다는 것은 잘못된 하나님을 고른 셈이 됩니다. 진짜 하나님은 그런 고통 여부의 의미를 따지기 위해서 인생들과 토론에 나서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예레미야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생일을 저주하고 싶어합니까? 그것은 바로 그런 모습이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예레미야는 세상을 넓게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가랴 6:1-5에 보면, “내가 또 눈을 들어본즉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왔는데 그 산은 놋 산이더라

첫째 병거는 홍마들이, 둘째 병거는 흑마들이, 셋째 벙거는 백마들이, 넷째 병거는 어룽지고 건장한 말들이 메었는지라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 보면 천사가 나옵니다. 이 4 천사는 세상 구석구석까지 날아가서 자신의 일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의 눈도 이 세상 구석구석까지 실시되고 있는 하나님의 일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즉 자기 자신의 일에 머물러 있어서는 아니된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 뿐만 아니라 요나나 엘리야도 자살을 시도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시대의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과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애통과 아픔이란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겪어야 될 아픔을 미리 참여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란 실은 그 시대에 오직 선지자들을 통해서만 발현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엉뚱한 하나님, 상상한 하나님만 섬기고 있는 와중에서 참된 하나님은 자신의 메시아의 속성을 가지고서는 선지자를 통해서 그 시대에 드러내신 것입니다. 넓은 세상 구석구석 이런 하나님의 모습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부여하시면서 이런 모습의 하나님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목에 걸린 닭 뼈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문제에만 몰두해서 그것 가지고 상상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 자신이 자기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모르고 난관에 부딪칠 때, 바로 그런 난관에 부딪힌 모습을 통해서 참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에게 사명을 주셔서 세상을 넓게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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