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6. 10:14

고소당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15장 1- 4절)

고소당하신 예수님

2009년 9월 6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15:1-4

(막 15:1, 개정)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
(막 15:2, 개정)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막 15:3, 개정)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지라』
(막 15:4, 개정) 『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


본디오 빌라도 예수님에 대해 고발 사건을 접수하고 난 뒤에 정말 궁금한 것은 과연 ‘예수’라는 이 작자가 누구냐하는 겁니다. 같은 시대를 사는 제사장들이 민중들은 생리는 빌라도 총독이 너무나도 잘 압니다. 하지만 예수라는 분은 자신의 판단 범주 안에 들어오지를 않은 겁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알기 위해 그 당시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죄수 하나를 예수님 옆에다 세워놓고 대중들의 판단을 기다립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감정과 더불어 예수님의 반응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동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도리어 우리가 예수님을 고소하는 한 통속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갖는가를 보세요. 고소자들과 그 고소를 받아들이는 자가 나옵니다. 여기 예수님을 고소하는 자들은 그냥 평범한 자들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명을 지닌 자들입니다. 소위 말하는 성직자들입니다. 말씀을 탐구하고 연구해서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인도해야 하는 책무를 지녔다고 여기는 자들입니다. 백성들은 그들 앞에 이런 말씀 전문가, 신앙 전문가들이 존재한다는 그 사실을 하나님께서 현재 자신들을 사랑으로 통치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쉽게 말해서 구원받고 싶거든 교회에 나가보라”는 식입니다. 교회 안 나가는 자는 천국에 못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을 세상 권력에 고소했습니다. 소위 말해서 자기네들 하는 종교업무,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그 업무방해죄에 예수라는 자가 방해하고 있다고 고소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존재가 여러분이 하고자 하는 사업과 여러분의 인생 행복에 방해물이 되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는 있는데 하등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남겨셨는지,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예고하셨는지, 예수님께서 무엇을 심판과 축복의 기준이라고 제시했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누구로부터 고소당해도 여러분의 일상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찬동할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므로서 인간들의 삶 전체에 걸림돌을 설치하시려는 겁니다. 모든 분야, 모든 영역에 있어 인생들이 추구하는 소박한 행복과 거대한 비전 전체에 하나님은 초를 치시려고 하려는 겁니다. 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가짜 하나님을 신봉하므로서 예수님이 제시하는 진짜 하나님 아버지상을 백성들에게 도달되지 않도록 주의를 주어왔습니다.

그게 안되니 아예 이참에 예수님을 고소해서 예수님의 모든 흔적을 삭제하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전략은 이것입니다. 이 세상 속에 예수님을 보내셔서 세상을 저주받을 지옥으로 만드시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을 ‘죄인 중의 한 분’으로 만들려고 하시려는 겁니다. 죄없으신 분을 죄인으로 인간들 손에 의해서 확정지어지게 하므로서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옳은 판단인 것으로 드러내려 하십니다.

이 과정에 동원된 자가 있었으니 바로 바라바라는 죄수입니다. 바라바는 누가 봐도 죄수입니다. 빌라도가 보아도 죄수요 일반들이 봐서도 죄수요 제사장이 봐서도 죄 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모든 이들로부터 죄인취급 받도록 하셨습니다. 누가봐도 예수님의 죄는 크다는 식으로 평가받도록 이 땅에 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모든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하고자 하는 것이 죄악된 것이며 부질없는 것이며 하나님에게 욕을 하고 낙서를 하게 만드는 짓거리임을 알려주는 식으로 일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런 취지를 모르고 좋게좋게 이해해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호의와 동정은 진정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데서 비롯된 것임을 예수님의 최후의 행적을 가지고 증명하려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가 봐도 흉악범이고 동정의 여지가 없는 죄수 바라바를 예수님과 나란히 비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묻습니다.

“바라바와 예수 중에서 누가 여러분의 속마음을 힘들게 하더냐?”고 말입니다. 이 하나님의 질문은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부터 모든 인간들에게 공히 떨어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약하디 약한 여인네를 수 십명 죽인 유형철과 예수님을 나란히 놓고서 “이 둘 중에 누가 당신에게 심적 부담을 안겨줍니까?” 물으면 백이면 백, 예수님을 손가락으로 겨냥하게 됩니다.

이런 대우를 받는 예수님을 우리가 사랑한다고요? 이런 예수님을 우리 자신보다 더 좋아한다고요? 미친 것 아닙니까? 왜 우리는 바라바는 예수님보다는 더 좋아합니까? 그 예를 들겠습니다. 조용기라는 사람이 조용히 살지 아니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한국 민중들의 심성에서 그려내는 하나님은 상은, 1. 죽어도 좋은 데 가고 2. 살아서 부자되고 3. 인생 끝날까지 온 가족이 건강하게 지내는 해주는 그런 하나님상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해당되는 성경 구절을 찾아냅니다. 그것이 요한3서 1:2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즉 방언하게 되면 성령받은 자가 되어서 죽어도 좋은 나라가게 되고, 이렇게 영혼이 잘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부자되게 하시고, 또한 건강함도 아울러 주신다는 이 사랑의 하나님이야말로 ‘복음 중에 복음인 순복음’이라는 겁니다.

장로교인들이 예정론이나 하나님의 주권이니 하지만 그런 것들을 배우는 것도 실은 이 세가지 축복을 얻어내기 위해서 신에게 아부하는 짓거리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차라리 노골적으로 정체를 밝혀라는 겁니다. 나 천당가고 나 부자되고 나 건강하고, 도대체 인간으로서 이것 말고 또 다른 축복이 어디있으며 인간이 납득하고 이해하는 신의 사랑이 이런 내용말도 또 무슨 내용이 더 필요하단 말입니까!

인간의 이러한 점을 간파한 쪽은 둘입니다. 하나는 악마 쪽입니다. 악마는, 인간이 죽기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미끼로 하여 ‘좋으신 하나님상’을 참된 하나님 상으로 제시했습니다. 또 다른 쪽은 하나님쪽입니다. 인간들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알아야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이 세상 그 어떤 흉악범보다도 더 싫어한바 되는 인물로 의도적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려도 인간들이 핑계치 못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구원의 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구원의 길은 좁은 길이요 구원의 길은 자기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들이 들어설 수 있는 길입니다.

요한복음 12:25에 보면,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라는 이 말씀을 왜 예수님께서 구태여 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참된 구원자는 인간들의 지니고 있는 본성과는 정 반대는 성향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이사야 53:1-6에 보면,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가짜, 모두가 다 가짜입니다. 우리 자신을 도무지 인간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선악과는 하나님만이 아셔야 할 내용이고 인간의 몸은 그 지식을 감당하지 못할 몸으로 미리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 간격이 주는 유혹내지 못하고 악마에 의해서 감당 못할 것을 담고 말았습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 되었습니다. 이 괴물에서 만들어낸 예수나 삼위일체나 천국이라는 것도 모두 다 거짓들입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주유소로 보지는 저는 참된 교회란 폐차장 가능을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구원됩니까? 동맥경화증이란 액체만 흐르게 된 혈관에 고체가 생겨서 막히는 되는 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갈기갈기 찢어버립니다. 낱낱이 찢고 녹여서 그래서 멀건 액체로 만들어버립니다. 오로지 말씀의 뭉치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피흘리시는 예수님과 시선이 마주치면 우리는 비로소 구원은 예수님의 피의 능력으로 베푸신 당첨임을 압니다.

자꾸만 가짜만 양산되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구원되는 것은 우리를 덮고 있는 맨홀 뚜껑을 여시고 꺼내주시려 오신 예수님의 재림을 초대 교회들은 손꼽아 고대한 것입니다. 마치 군인들이 제대날을 고대하듯이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의 찔림이 우리의 허물로 인함인줄 예수님과 시선을 마주침을 통해서 알게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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