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7. 07:56

술 취한 백성 (예레미야 13장 12-14절)

술 취한 백성

2010년 1월 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3:12-14

(렘 13:12, 개역) 『그러므로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차리라 하셨다 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찰 줄을 우리가 어찌 알지 못하리요 하리니』
(렘 13:13, 개역) 『너는 다시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땅의 모든 거민과 다윗의 위에 앉은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예루살렘 모든 거민으로 잔뜩 취하게 하고』
(렘 13:14, 개역) 『또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간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관용치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유다 나라는 온통 술 취해 비틀거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에 푹 빠져 있습니다. 이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알려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도리어 이러한 지적이 의외라는 겁니다. 포도주 병 구멍에서 포도주가 넘쳐 난다면 자신들이 모를 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들은 그들이 신봉하는 ‘다윗의 위’가 곧 하나님의 저주로 차 올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다윗의 자리’가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자부심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해하기를 거기에서 ‘축복’이 차고 넘치도록 흘러나오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축복만 나오는 곳이 아닙니다. 저주도 넘쳐나는 곳이 바로 언약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고 자꾸만 괜찮은 수준의 의인요 착한 사람들이라고 간주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할 때는 무심코 ‘축복의 자리’로만 여깁니다.

그리고 그 축복이라는 것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선한 일에 매진하면 제공되는 것인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큰 오류입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는 인간의 착함과 안 착함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힘을 원하느냐’ 아니면 ‘봉사하고 섬기기를 원하느냐’고 판가름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0:28에서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교회에서 아무리 성실히 충성하고 반듯하게 살고, 바르고, 착하고, 말씀대로 살고 봉사를 많이해도 그것이 힘을 모으고자 하는 일이라면 곧 악마의 일입니다. 저주를 받으려고 그동안 고생 많이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를 만났는데, 악마가 예수님에게 제안한 것은 바로 “나와 손 잡고 힘을 모으자”입니다. 바로 이것이 보편적인 인간 세계의 사람 사는 원리입니다. 따라서 그 어느 인간도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란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거룩을 제공하는 곳입니다. 거룩과 더러움의 차이란 바로 ‘섬김’과 ‘힘 모음’의 차이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힘을 원하는 자신의 죄악성을 미처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언약의 자리를 사모하다가 그들은 저주를 듬뿍받는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언약이란 축복만 나오는 자리가 아니라 저주도 야무지게 나오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처럼 남을 위하여 섬기려는 것이 아니라 악마처럼 힘을 모으겠다는 자들에게는 저주가 가득 쏟아지는 자리가 바로 다윗의 자리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착함의 힘과 섬김의 힘, 구제와 봉사의 힘, 십일조의 힘을 믿었던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는데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으로 불리워지기를 원했다가 졸지에 예수님 만나서 저주받은 자들입니다. 반면에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세리는 예수님 만나서 의인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언약에 있어서 축복과 저주란 반드시 다 등장되어야 합니다. 에서가 저주받아야지만 야곱의 축복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이 힘을 포기하고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명이 사적인 힘을 찾는 것보다 항상 더 세게 작용합니다.

사명의 노선에 이끌려들어간 자들은 항상 그 끝을 보고 사는데 그 끝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거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아브라함 품에 들어갔고, 부자는 뜨거운 지옥 불에 들어갔습니다. 바로 사명자는 이 이야기를 배경을 깔고 누구를 만나도 만납니다.

마치 옛날 시골 장터 사진관에 보면, 아름다운 야외 풍경 그림을 뒷 배경으로 설치해놓고서는 그 앞 의자에 앉아서 가족 사진을 찍게 합니다. 그러면 사진을 보면, 마치 경치 좋은 곳에서 온 가족이 놀러가서 기념 사진 찍은 것처럼 보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사명자는 그 누구를 만나도 먼저 뒷 배경부터 둘러칩니다. 그 배경이란 바로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입니다.

거짓 나사로의 경우, 힘을 얻고자 해도 얻을 건덕지도 없었습니다. 몸마저 아팠습니다. 개들이 와서 핥았습니다. 반면에 부자는 세상이 부러워하는 힘을 축적했습니다. 매일같이 파티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그 부자에게는 사명이 이끄는 힘이 없었습니다. 부자는 그렇게 살다가 자신의 뒷배경이 되는 그 지옥불에 실제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 힘을 지향하고 추구한다는 것은 곧 세상이 가져다주는 술에 잔뜩 취해서 정신을 못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거지와 부자의 뒷배경을 깔아놓고 봅시다.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누구든지, 교회에 와서 어떤 자기만의 힘을 원한다면 그 사람은 저주를 자청하는 셈이 됩니다. 마치 ‘다윗의 자리’가 축복주는 자리인 줄 착각한 유대인들과 같습니다.

술취한 대표적인 자는 요한계시록 17:1-3에 나옵니다.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래 여자란, 자신이 섬길 남자를 찾아야 하는데 이 음녀는 자신이 사랑할 남자를 만나지 못해 맨날 술에 취해있습니다. 그래서 이 남자, 저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음행’이며, 그 남자라는 것이 바로 음녀처럼 독자적인 힘을 찾는 세상 권세자들입니다. 바로 이 원리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힘’이라는 음녀의 매력에 빠져서 저주의 술에 잔뜩 먹고 취한 상태가 되는 겁니다. 참된 사명을 받은 자들의 눈에만 힘을 추구하는 이 세상이 음녀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명을 받게 되면 오로지 자신이 섬길 ‘어린양’을 발견하고 세상의 힘이 부럽지 않고 그 어린양에서 주어지는 축복과 저주의 세계를 사모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의 자리가 새삼 힘을 모을 자리가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를 도로 복음을 위하여 드릴 자리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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