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30. 22:46

선지자의 띠 (예레미야 13장 1- 7절)

선지자의 띠

2009년 12월 30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3:1-7

(렘 13:1, 개역)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베띠를 사서 네 허리에 띠고 물에 두지 말라 하시기로』
(렘 13:2, 개역) 『내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띠를 사서 내 허리에 띠니라』
(렘 13:3, 개역)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렘 13:4, 개역) 『너는 사서 네 허리에 띤 띠를 가지고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거기서 그것을 바위 틈에 감추라 하시기로』
(렘 13:5, 개역) 『내가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가서 그것을 유브라데 물 가에 감추니라』
(렘 13:6, 개역) 『여러 날 후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하여 거기 감추게 한 띠를 취하라 하시기로』
(렘 13:7, 개역) 『내가 유브라데로 가서 그 감추었던 곳을 파고 띠를 취하니 띠가 썩어서 쓸데 없이 되었더라』


선지자의 허리띠를 이방나라의 물을 맛보고는 그만 썩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를 하나님으로 부고, 우리를 허리띠로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아무 짝도 쓸데없는 허리 띠라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는 점에 알려주는 데 소홀하시지 않습니다. 즉 인간이 곧 비밀입니다.

흔히 ‘비밀’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이나 천사나 천국을 떠올리게 되면 가장 가까이 있는 우리 자신조차 우리에게 비밀에 붙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채 이 땅에서 계속 시간을 흘러보내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우리 자신이 누군지를 모르는 이유는, 우리 내부에서 우리 자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외부에서 우리 자신을 보는 안목을 우리가 갖고 있지를 못합니다. 진정 우리의 모습은 우리 외부에서 보는 시선이어야 합니다. 즉 우리가 만약에 허리 띠라면 이 허리띠를 두르시는 하나님께서 이 허리띠를 어떻게 보느냐가 그것이 정답이요 관권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선지자를 보내어 예루살렘의 교만과 강퍅을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이라는 허리띠는 썩어야 합니까?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루살렘과 유브라데와 대비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이 실은 유브라데에서 살기에 합당한 자들이라는 겁니다. 유브라데는 장차 예루살렘 거민들이 포로 잡아 갈 바벨론이라는 제국의 땅입니다. 곧 우상을 섬기는 이방민족이지요.

이 우상의 나라가 하나님 믿는 척하고 있는 예루살렘보다 힘이 우세에 놓여 있다는 겁니다. 인간의 정체를 밝히는데 있어 예루살렘과 유브라데의 대비로서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인간이란 내부에 자신을 평가하면 뭘 해도 참하고 사랑스럽고 귀엽고 자랑스러고 고귀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성경에서 ‘썩은 띠’라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너무너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아동들이 질문을 하기를, “이 세상에 누가 제일 좋아?” 물으면 이 질문은 정답은 오직 하나 뿐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나를 제일 사랑해”라고 말입니다. 아빼, 엄마를 말하는 아이들은 다 핑계대로 자신을 속이고 있는 중입니다.

자신이 자신을 제일 사랑하다보니 외부에서 자신에 대해 그 어떤 극한 말로 비난해도 항상 자기 사수와 자기 변화로 일관합니다. “그래도, 앞으로 잘하면 돼지”라고 말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이런 내부적 관점을 외부적 관점에서 지적합니다. 즉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말씀대로, 양심대로 바르게 살려고 한다. 하지만 자기 안에 들어있는 악이 도리어 그 선을 이겨 결국에는 악이 승리하는 쪽으로 행동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인간이 이러한 성질을 나타내는 것은 조상 탓입니다. 인간의 하나 밖에 없는 조상인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지 라는 하나님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따먹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그 조성의 본성을 전수받은 후손들 모두, 무엇이 선한 일인지를 알고 있으면서 여전히 그 선하지 않는 바를 궁금해지고 금지의 선을 넘어버립니다.

즉 아담이 실패한 그 성질로 인하여 계속해서 실패의 길로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선한 쪽으로 돌아섰다고 우기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아담의 후손이 아닙니다. 아마 외계인일 것입니다. 사람치고 선으로 악을 이긴 경우는 없습니다.

예루살렘은 교만하고 강퍅했기에 허리띠 모양으로 필히 썩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이 버틸 수 있는 것보다 더 센 죄악의 힘에 눌러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강력한 힘을 알려주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거민들은 유브라데의 제국으로 끌고가서 본인들의 제 모습대로 썩게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이런 본질을 왜 선지자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겁니까? 그것은 선지자가 곧 장치 오실 메시아께서 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문제가 제공되었다고 한다면 그 해결책은 예수님을 통해서 확정지어집니다. 흔히 알다시피, 예수님은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단순히, “우리 인간으로 자력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아담을 통해서 들어온 죄에 눌러서 못 벗어난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왜 예수님으로 하여금 죽었다고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살아있다고 여기는 모든 산 인간들이 실은 죽은 자라는 점이 발각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인간들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죄에 눌러 있습니다. 교만과 강퍅의 싹이 삐쭉 올라와 있습니다. 마치 양파를 오래 놔두면 싹이 나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그 어떤 인간도 예수님께서 경우와 같은 죄의 위세를 겪지 않고서는 구원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구원문제까지 꼭 ‘자기 사랑’을 포기 않기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오해합니다.

세탁소에 더러운 바지를 맡기면서 그 바지를 아예 세탁소 주인이 입으라고 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나중에 깨끗하게 세탁이 끝나면 언제든지 도로 찾아올 생각을 합니다. 이와같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대하면서 마치 자신의 더러운 육신의 죄를 씻어주는 세탁소 주인처럼 여겨서 잠시 맡겨놓았다가 도로 찾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가져간 더러운 바지는 깨끗하게 되어 예수님께서 몸소 자신이 입으시는 바지가 되고 맙니다. 이미 예수님의 몸이 맞는 허리띠로 차출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허리 띠 주인은 더 이상 허리 띠 자신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부적으로 자신을 보는 자가 아니라 외부에서 자신을 제대로 보는 자의 인간관입니다.

이것도 모르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은 자꾸만 “앞으로 바르게 살게요”라는 반응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뜻 바르게 살아라 는 것이 아니라 ‘너도 어찌 할 수 없는 죄가 너를 이미 장악하고 있다’는 현실을 말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짐승이 이 땅을 덮친 것입니다.

따라서 아주 깜깜합니다. 하지만 이 깜깜이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아주 깜깜해서 전혀 길이 보이지 않아야 “나는 길이요, 나는 빛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생명이다”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귀하게 들려오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깊은 절망이 도로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주는 계기임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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