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30. 17:11

하나님의 조치와 선지자 (예레미야 8장 17-22절)

하나님의 조치

2009년 9월 30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8:17-22

(렘 8:17, 개정)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술법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뱀과 독사를 너희 가운데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를 물리라 하시도다』
(렘 8:18, 개정)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렘 8:19, 개정) 『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는고 하시니』
(렘 8:20, 개정)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렘 8:21, 개정)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렘 8:22, 개정)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


하나님께서 땅에 작업을 하시는 이유는 항상 근본부터 갈아엎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지식과 지혜의 일부만 취득하고자 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두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매일같이 우리의 바탕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쪽이 마지막 날에 버티는가는 뻔한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늘 우리의 근본에 주목을 하고 그 근본을 하나님이 주시는 새 근본으로 갈아치우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유대나라에 뱀과 독사를 보내겠다고 하십니다. 역시 근본을 갈아엎기 위한 조치입니다. 외부적으로 봐서 유대나라는 분명 실패입니다. 하지만 그 실패가 도리어 내부적으로 성공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됩니다.

뱀과 독사의 기능은 무는 기능입니다. 과연 뱀과 독사의 무능기능이 정상적인 것일까요 아니면 비정상적인 상황에서나 나올 수 있는 기능일까요? 하나님은 뱀과 독사를 보내어 이스라엘로 하여금 온전한 이스라엘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게 해주시겠다는 의도가 있습니다. 인간은 피조물과 더불어 삽니다.

하나님은 이점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흔히 주장하기를, “나는 이제 예수님 믿는다. 그러나 내가 성질 더러워도 주위 사람들이 좀 참아다오”라는 식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는 독사와 불뱀을 보내어 지속적으로 고통에 고통을 더하게 하십니다. 이럴 경우에 독사와 뱀의 살벌한 역할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죄를 겨냥한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이사야 65:25의 경우와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여기에서 이리와 어린 양이 이 대자연 안에서 원만한 사이라는 것을 당연한 상황으로 간주하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리와 어린양이 사이좋게 지낸다면 이는 뭔가 다른 질서가 형성되어 있다는 말이고 이 상황이 오늘날 이리와 어린양이 원만하지 못한 현실이 차라리 문제가 크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이리는 어린양을 공격하게 되어 있고 어린양은 이리를 공격하는 것이 잡아 먹히도록 되어 있음을 우리는 흔히 원칙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성산에서는 인간들의 상식에 문제가 서려있음을 밝혀줍니다.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는다는 것은 역시 공격성을 사라진 것을 말합니다. 공격성향이 사라졌다는 것은 더 이상 대자연 안에서 다른 피조물을 공격 상대로 간주하는 일은 없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서 공격 대상이 사라진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 전에는 왜 다른 피조물을 공격해야만 했습니까?

로마서 8장에서는 피조 세계의 탄식에 대해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20-23에 보면,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즉 피조물이 탄식하는 이유는 전 우주가 썩는 질서의 영향을 입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즉 처음부터 대자연은 썩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번성하게끔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자연을 썩는 쪽으로 방향을 틀은 것은 대자연속에 들어오지 말아야 할 것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12에 보면,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죄가 들어오게 되면 저주도 같이 따라 들어오게 되어있습니다. 전 우주적으로 골고루 썩어짐의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은 이미 이 우주가 정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뭔가 교체가 필요한 겁니다. 피조물 끼리 각자 독자적인 자기 의식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조차 썩어짐의 질서를 극복할 능력을 만들 수는 없고 오히려 썩어짐을 온 몸으로 느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서글픔입니다.

고린도전서 15:42-44에 보면,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썩지 아니하는 세계’가 곧 하늘이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서 짐승들이 서로 으러렁거리고 인간들 끼리 어르렁거리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저주와 질곡과 썩어짐이 만연해도 당연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독사와 불뱀을 보내시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도는 이 땅의 원리와 원칙과 질서에 그냥 머물러서는 아니되는 존재임을 말씀해주십니다.

민수기 11장에 보면, 진 끝에서 하나님께서 원망하던 무리들에게 사방에서 불뱀이 몰려와서 그들을 물어 죽이는 상황이 나옵니다. 우리가 평소에는 입안에 이가 있는 것을 못느끼다가 아플 때 비로소 이가 있음을 느끼듯이, 우리 성도로 하여금 하늘의 원칙을 주목하기 위해서 이 땅의 아픔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다가오시는 겁니다.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높이 듭니다. 이런 행동의 취지는 이것입니다. 사방에서 불뱀이 몰려온 것은 사단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한 조치였음을 인정하고 자신들이 그런 불뱀에 물러서 고통당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기는 사람만 놋뱀을 쳐다보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를 주목하고 거기에 모든 것을 건 사람은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저주받아 마땅함을 인정하는 사람에 국한되듯이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유대나라에 여전히 왕이 계시다는 겁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소위 성인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이나 석가모니나 공자를 그 분류에 집어넣습니다. 훌륭한 스승 정도로 봅니다. 하지만 어느 불교신자가 석가모니를 “왕”이라고 부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모범적인 인류의 스승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왕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백성입니다. 왕 덕분에 구원받는 겁니다. 왕의 공로가 없으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인정하는 자만이 왕을 왕으로 섬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환란이 도리어 인내와 소망과 구원을 이루는 과정인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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