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0. 20. 16:03

몰래 나음 , 누가복음 8장 41-48절

본문 : 누가복음 8장41-48절
제목 : 몰래 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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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강-눅8장41-48몰래나음-luk101017

몰래 나음

2010년 10월 17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8:41-48

(눅 8:41, 개역)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눅 8:42, 개역)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위하더라』
(눅 8:43, 개역)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눅 8:44, 개역)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눅 8:45,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
(눅 8:46,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눅 8:47, 개역)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니』
(눅 8:4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어떤 여인이 떨며 엎드려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의 조합이 구원된 모습입니다. 달리 구원된 모습은 없습니다. 즉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나간 적이 없다면 구원은 되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갖은 용을 다 쓰고 울부짖고 노력을 기우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능력을 결집하겠다는 것으로 구원이 안됩니다.

예수님에게서 직접 ‘구원의 능력’이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나간는데 왜 여인은 예수님 앞에서 떨며 엎드리게 되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바로 심판주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22에 보면,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더러운 귀신도 악마도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들도 구원되어야 할까요? 아닐 것입니다. 흔히 인간들은 상식에 준해서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라면 우리 인간의 죽음 이후까지라고 책임지고 행복을 보장해야하는 것이 하나님답다는 겁니다.

만들었다면, 그리고 만드신 분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그 사랑이 끝까지 인간들에게 예외없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우깁니다. 그래서 그들은 상식적으로 주장하기를, 하나님의 심판이란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들을 가지고 심판해야 공정하다고 말합니다. 즉 일생을 통해 착한 일 한 것과 나쁜 짓 한 것을 다 보태어 견주어봐야 착한 일의 양이 많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 넣어주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또한 비록 구체적으로 착한 일을 하지 않더라도 삶의 방향을 착한 쪽으로 얼굴 돌리고 살았다면 착한 사람이라고 간주해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시간이 없어 착한 일을 많이 못했는 경우라든지 아니면 착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런 사람들을 좋게 봐준다면 이미 착한 영역에 속했다고 간주해주어야 한다고 우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심판한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의 모든 상식과는 완전히 대치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어느 청년에서 더러운 귀신들려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다가오니까 귀신이 먼저 말을 던집니다.

“우리들은 당신이 누구인줄 압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를 멸하려 오신 분인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이 하실 일을 이미 악마가 알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의 일은 심판하는 일입니다. 그 더러운 귀신들은 심판주되시는 예수님을 피해 도망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돼지에게 들어가게 하니 그 돼지들은 예수님이 안 보이는 곳, 곧 바다 속으로 다 뛰어들었습니다.

만약에 이 더러운 귀신이 인간 속에 있다면 그 인간은 기어이 예수님의 심판주 되심을 인정하지 않으려 해서 예수님 없는 곳, 곧 자비로운 하나님 계신 곳으로 도망치려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 앞에서 떨며 엎드리는 현상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과연 심판이 애ㅔ수님에게 넘겨졌다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는 기준이 뭘까요?

로마서 9:33에 보면,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지신 십자가로서 인간의 본래의 수치성을 드러내고야 말겠다는 겁니다. 즉 인간이 자기 행위로 자신의 수치를 가리고자 한다면 십자가 앞에서 어림도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12년 동안이나 하혈하는 병을 앓아온 여인이 나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떠밀다시피 움집한 그 군중들과 이 여인 사이를 예리하게 구분지을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떠밀든 그 누구에게도 예수님의 능력이 나가지를 않았고 오직 12년동안 난치병을 앓아온 이 여인에게만 예수님의 능력이 나갔기 때문입니다.

12제자들을 비롯해서 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또한 예수님의 옷을 만지면서도 자신의 수치성을 인정하지 않은채 떠밀고 있는 겁니다. 이는 곧 자신들이 건강하다는 겁니다. 자력으로 예수님을 대할 충분한 입장이라고 보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이 12년동안 피흘리는 병을 앓은 이 여인은 자신의 수치성에 입각해서 몰래 예수님의 옷을 만집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수치를 자기 힘으로 커버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인간들의 모든 수고와 행동은 자신의 수치를 가리기 위한 행위입니다. 안 수치스럽게 당당하고 싶어합니다. 인간들과 사람들 앞에서만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수치를 가릴 만한 것들을 신에게 요구합니다.

크게 부유하게 사는 것도 수치를 가리는 것이요, 몸이 아프지 않는 것도 자기 수치를 가리는 것이요, 승진하는 것도, 교회가 부흥, 발전하는 것도 자신의 수치를 가리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가정이 화목하는 것도, 자식이 공부를 잘하는 것도 자신의 수치를 가리는 것이라고 간주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자기 행함을 원활하게 신이 돕지 아니하면 신에게라도 언제든지 원망할 태세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압니다. 수치를 가리는 것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심판주의 배려인 것을 말입니다. 구원이란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힘으로만 성사됩니다. 히브리서 7:25에 보면, “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0:19에는 좀 더 자세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고 되어 있습니다. 곧 피라는 용서의 힘이 우리의 모든 수치를 가려줍니다. 수치란 딴 게 아니라 우리 인생이 쫄딱 망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악마들의 수치는 바로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피하므로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돼지를 치던 그 당시 목축업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발 예수님이 자기 동네에서 떠나주시기를 부탁했습니다. 이는 곧 십자가 기준으로 제발 심판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작업은 이러합니다.

예수님의 피 용서 앞에서 인간의 모든 수치는 다 드러나야만 한다고 말입니다. 이 여인은 12년동안이나 불치병에 시달리는 그것조차 예수님께서 그 인간의 수치를 드러내기 위해 송곳으로 쑤신 일입니다. 이로서 이 여인의 주체는 여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바로 이점을 이 여인은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힘입어 구원된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심판주가 되셨기에 유일하게 구원을 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알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 심판주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수치가 다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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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강-눅8장40-48(몰래나음)-luk101017-(이 근호목사)

2010-10-20 08:46:05  녹취 : 오용익
 
 
047강-눅8장40-48(몰래나음)-luk101017-(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8장 40절에서 48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05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8:40-48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위하더라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血漏症)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46절에 “내게서 능력이 나”갔다고 하고 그 다음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데 여자가 “떨며 나아와 엎드”렸다고 합니다. 구원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에게서 뭔가 능력이 빠져 나가야 구원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교회 와서 용쓴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능력을 끄집어내어 그것을 뭉쳐서 신 앞에 복종하고 순종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추운 날 갓 바위에 가보면 많이 하고 있습니다. 수능 철이 되면 갓 바위에 많이들 갑니다. 이쪽 방면의 교통편이 문제가 되는데 일찍들 오셔야 되겠지요. 주님에게서 나간 능력이 되어야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럼 반대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주님에게서 능력을 뽑아내지 못했으면 구원이 안 되는 겁니다.

교회라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어요.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뽑혀 나와서 그 사람에게 도달되지 아니하면, 교회 세우고 장로하고 목사하고 십자가까지 다 전했는데 구원이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구원이 됩니까? 주님에게서 능력이 나와야 돼요. 어떤 사람은 아버지가 목사라서 ‘모태신앙’이 어쩌고 하는데 모태신앙 같은 것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유아세례 같은 것은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나와야 구원이 되는데 이것이 너무나 엄청난 이야기라서, 천기의 비밀을 누설하는 것처럼 엄청난 이야기라서 교회에서도 함부로 이야기를 꺼내지를 못해요. 대부분이 주님의 능력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주님에게서 나온 능력을 받은 적이 없는 자들끼리 모여서 큰 교회를 하기 때문에 나중에 땅이 갈라져서 몽땅 지옥 갑니다.

큰 교회, 천하제일의 교회라도 소용없습니다. 그렇다면 능력이 나간 사람의 특징이 뭐냐? 간단해요. 주님 앞에 ‘떨며 나아와 엎드리’게 되어 있어요. 진짜 능력을 받은 사람은 자기에게 능력을 주신 분 앞에 아무소리 안하고 ‘죄송합니다. 주님! 제가 워낙 더러운 사람이 되어서 주님 능력 아니면 저는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하고 부들부들 떨게 되어 있어요.

‘주님 때문에 이렇게 살아보려고 주님에게 왔습니다.’라고 부들부들 떨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개척교회를 시작했는데 그 개척멤버가 서울의 건국대학교 음대교수와 공예학과 교수라는 거예요. 그 목사님이 걱정이 늘어졌어요. 그 두 교수님 가정이 얼마나 복음에 대해서 버티는지 화살을 쏘면 튕겨 나오는 식이라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은 ‘우리는 예수 믿고 반듯하게 산다.’는 겁니다. 부들부들 떨며 ‘나는 주님의 능력이 없으면 살 수가 없어요.’ 이렇게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나는 그 동안 교회에서 반듯하게 살고 흠 없이 살았고 나는 이 서울의 시민으로서 남에게 책잡힐 일 없고 신사답게 살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참 떳떳하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구원입니까? 자기 능력으로, 자기 위대함으로 구원되는 것이지 예수님에게서 빠져나간 능력이 무슨 그런 능력이 다 있습니까? 거기에 떨면서 엎드리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일본에 가면 선불교가 발달되어 있어요. 선불교는 다도(茶道)같은 것을 통해서 인간을 발전적으로 순수한 인간으로 성화시키는 것으로 진리를 다하는 종교입니다. 불교가 다 그래요.

불교에서 주장하는 것은 조화와 존중과 정결과 평정, 이 네 가지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무슨 말인지 몰라요. 그 네 개가 어떻게 차이나는 지도 몰라요. 하여튼 좋은 것은 다 끌어당겼어요. 그게 무슨 예수님에게서 나온 능력입니까? 구원이 안 되는데도 교회 다니겠다고 고집부리는 것, 구원이 안 된 상태에서의 고집입니다.

처음부터 교회 다닐 생각하지 말고 말씀 속으로 들어와야 돼요. 누가복음 8장의 말씀 속으로 들어와야 됩니다. 말씀 속으로 안 들어오면 교회 다니면 다닐수록 점점 더 교만이 하늘을 찔러요. 말씀 속에 들어와야 됩니다. 말씀 속에 들어오면 이 말씀속의 모든 배열과 배치라는 것이, 왜 예수님 쪽에서 구원의 능력이 나와야 구원이 되고 왜 인간 스스로는 자신을 하나님나라로 올려 보낼 수 없는지, 거기에 대해서 죽 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무덤에 있는 청년을 찾아왔잖아요. 그래서 그 청년이 예수님 때문에 고침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다음에 귀신들은 어디에 갔겠는가, 그 문제입니다. 귀신들은 무저갱이라는 곳에 가두어져야 되는데, 본문에 보면 귀신들이 ‘우리를 무저갱에 보내지 말고 다른 곳에 보내 달라.’고 부탁하니까 예수님께서 ‘돼지 떼에 들어가라.’고 합니다.

그 많은 돼지 떼에 귀신이 하나하나 다 들어가니까 이 많은 돼지 떼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서 어디로 가느냐하면, 자기들이 죽는 것도 모르고 전부 바다로 내리달려서 다 자살했어요. 그것이 돼지자살사건이에요. 그때에 돼지를 팔아서 자기들의 생계를 유지하겠다는 그 목적 하나로 살아가는 목축업자들이 놀랬지요.

이 돼지 떼들이 영문도 모른 채 때려도 소용없고 막아도 소용없고 마리당 수십만 원씩 하는 돼지가 다 몰려가서 바다에 빠지니까 기가 막힐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원인을 조사해보니까 예수님에게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돼지 치는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가서 사정사정 합니다. ‘제발 이 동네에서 좀 나가주세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에게서, 예수님의 능력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돼지 치는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제발 예수라는 당신은 우리 눈앞에서 좀 사라져 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귀신들린 사람이나 돼지 치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느냐하면 ‘예수를 피하는 그것이 행복하게 사는 길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찾았고 심지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막 떠밀었어요. 그런데 12년 동안 하혈하는 병을 앓던 어떤 여인이 몰래 가서 예수님의 옷을 만졌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하신 말씀이 ‘내 옷을 만진 사람이 누구야?’ 하니까 베드로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하는 말이 ‘다 만졌는데요, 지금 사람들이 몰려서 다 밀고 있는 판국이라 다 만졌습니다.’

예수님이 ‘아니야, 내게서 능력이 나간 사람이 있다. 그게 누구냐?’ 미는 것 말고 내게서 능력이 나간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은 예수님의 옷을 만지고 그저 밀기에 바빴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밀수 있고 그 옷을 만질 수는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나간다는 것은 민다고 해서 능력이 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게서 능력이 나간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여인이 마치 도둑질하다가 들킨 것 마냥 몸 둘 바를 모르고 벌벌 떨면서 ‘주님, 제가 외람되게 주님의 몸을 만졌습니다. 주의 능력을 의지해서 만졌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여인아, 걱정하지 말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는 이야기를 해요.

우리는 여기서 분리를 해야 됩니다. 그 많은 사람이 예수를 만졌는데 같이 만져도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나가서 고침 받은 12년 동안 하혈한 이 여인과, 그 당시 예수님을 둘러싼 수많은 인파들, 요새 같으면 예수님을 에워싸면서 밀기도 하면서 카메라로 찍어대기도 한 그 수많은 사람들과 예리하게 분리를 해줘야 돼요.

예수님을 관광 삼아 오는 사람들하고 예수님에게 자기 몸을 의탁하는 사람들과 분리를 해야 됩니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분리하느냐? 열두제자를 비롯해서 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몸이 건강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12년 동안이나 아무도 자기 병을 고칠 수가 없었어요. 자기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습니다.

이제 기댈 데는 예수님밖에 없어요. 소문 듣고 예수님에게 접근한 겁니다.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건강하기 때문에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지요. 여기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능력이 어떤 식으로 예수님에게서 빠져나가는지 그 내막을 엿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돼지 치는 사람들이 예수님보고 자기들 동네에서 나가달라고 추방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가 남들 보기에 수치스러우면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러면 사람이 언제 부끄러우냐 하는 거예요. 지난시간의 본문을 다시 살펴보면 무덤가에 있는 청년에게 예수님이 왔습니다. 청년은 입을 다물고 있는데 그 속에 있는 귀신이 예수님과 대화합니다. 대화내용은 ‘나는 당신을 압니다. 당신은 우리를 멸망시킬 수 있는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갈 데가 없으니까 차라리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귀신들은 뭘 아느냐하면 예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귀신은 알고 있어요.

돼지 치는 사람, 인간은 모르지만 귀신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하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과 어떤 차이가 나는지를 봐야 돼요. 인간은 누가 만들었는가?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 교회 다니지 않더라도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압니다. 옛날의 할머니들도 다 알았어요. 우리 할머니도 교회는 안 나갔지만 부엌에 가서 종이 태워서 제사지냈어요.

제사하는 기도내용을 들어보니까 ‘우리를 만드신 조물주시여, 올 한해도 복 받게 해주시고 내 자식들과 손자들이 남산위의 노루새끼처럼 잘 되게 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그 멘트는 변하지도 않아요. 맨 똑같은 멘트를 또 써먹어요. 가만 보니까 지난해부터 넣어둔 냉동문어를 해가 바뀌어도 그대로 사용해요. 귀신이 열 받을 거예요. 그런 성의 없음에.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을 천국에 넣어준다는 생각, 이것은 복음을 모르면 그냥 그대로 가는 줄로 알고 있어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을 행복 되게 끝까지 책임질 거라는 이 생각은 모든 사람이 다 갖고 있습니다.

성경을 덮고 성경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누가 만들었지?’ ‘신이 만들었다.’ ‘그러면 나의 미래, 죽고 난 뒤의 모든 행복은 누가 보장하지?’ ‘신이 보장해주면 행복할거야.’ ‘그러면 신은 무엇을 원하지?’ ‘아마도 나한테 양심이 있는 것을 보니까 착하게 사는 것을 원한다. 평생토록 교회 한번 나가지 않더라도 파출소 갈 짓 한번 안하고 남에게 해코지 않고 살면 죽은 다음에 나쁜 짓 한 양과 착한 짓 한 양과 비교해서 나쁜 짓 한 것 보다 착한 일 한 것, 효도나 형제우애 같은 것들의 양이 많으면 그 양만큼 하나님께서 극락에 보내줄 것이다.’라는 생각은 모든 사람이 다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상식입니다.

상식이 통할 때 교회는 부흥돼요. 교회에서 자기 상식과 어긋나는 소리를 하면 그 교회는 두 번 다시 가기 싫어합니다. 1. 착하게 살았잖아. 2. 착하게 살 고픈데 바빠서 못 살지만 착하게 살려고 맘은 먹잖아. 첫 번째는, 착하게 살았잖아. 두 번째는 착하게는 못살았지만 착하게 살 맘이라도 먹었잖아. 세 번째는, 나쁜 짓이 나쁜 짓이라고 할 양심은 살아 있잖아.

1, 2, 3 다 천국에 넣어달라는 거예요. 김 ○훈이라는 가수가 돈 수십억 벌어서 그 돈으로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선전하고 자기 지역의 어려운 사람들을 돌볼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나도 돈 벌면 할 수 있는데 지금 밥 먹고 살기 바빠서 못한다.’고 하지요. 만약에 어떤 목사가 ‘김 ○훈은 지옥 간다.’고 하면 사람들이 그 교회 안 나올 거예요.

왜, 상식에 반하기 때문에, 상식에 반대가 되기 때문에. ‘김수환 추기경은 지옥 갔습니다.’라고 하면 누가 믿습니까? ‘법정은 당연히 지옥이고.’라고 하면 상식에 반대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떻게 그 교회 다닐 수가 있을까요?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자체가 우리의 상식과 대립됩니다. 상식과 싸우고 있어요. 만들기는 하나님이 만들었지만 심판은 신, 하나님이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아들이 한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5장 22절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만들어졌다고 해서 죽고 나서 천국까지 보장하는 그런 하나님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비록 교회는 안다녔어도 날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한다. 따라서 그렇게 인정하는 것으로 죽어서도 지옥가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 그 사람은 지옥 갑니다.

그 사람은 귀신이 갖고 있던 예수님에 대한 생각보다 더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귀신은 천사입니다. 천사는 신이 천사를 만들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서도 천사를 심판하는 것은 예수님 소관이에요. 그래서 귀신은 예수님을 만날 때 ‘예수여, 당신은 우리를 멸하실 분이지요.’라고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 악한 천사가 ‘주여, 날 만들었지요? 날 만들었으면 책임을 지라는 말입니다. 만들어놓고 왜 책임을 안 져.’ 이런 식으로 안 나왔습니다. 자기를 만든 것은 하나님이지만 심판하는 것은 누구 몫인가, 예수님이 심판한다는 것을 마귀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갈 곳은 무저갱이라는 지옥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는 것을 예수님께서 허락했을 때 돼지 떼는 예수님이 서 계신 곳에서 반대되는 쪽으로, 지금 예수님이 땅에 계시니까 예수님을 피해서 안 보이는 쪽인 바다로 다 기어들어갔어요. 예수님 안 보이는 곳으로, 심판주가 눈에 안 보이는 곳으로 도피하고 도피하는 것, 이게 바로 악한 귀신의 특징입니다.

그 악한 귀신이 돼지에 들어가서 생긴 현상인데 그게 돼지가 아니고 우리 인간의 몸이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신을 이야기하면 다 부흥되지만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곳은 다 나가버려요. 왜, 우리의 상식에 반대되기 때문에. 구원이라 하는 것은 이러한 상식을 깨는 거예요. 구원된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식으로는 구원이 안돼요.

구원이 되는 순간이란 내가 알고 있던 상식이 악마의 생각이었음을 발견하는 겁니다. 그것이 깨지는 거예요. 우리가 궁금한 것은, 하나님이 심판이 아니고 예수님의 심판이라면 예수님은 어떤 기준에 의해서 우리가 지옥가고 천국 가는 것을 결정하는가? 로마서 9장에 보면 단어 하나가 나옵니다. ‘수치’라는 단어가 나와요.

로마서 9장 33절에 십자가를 설명하면서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십자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인간들의 부끄러움은 한 가지에서 나옵니다. 그것은 ‘내가 인생 실패했다.’는 겁니다. 쫄딱 망했다는데서 부끄러움을 느껴요.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 부끄러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금요철야하면서 신에게 기도합니다. ‘남들은 다 건강한데 나는 건강하지 않으니 건강하게 해 주셔야죠, 그리고 남들은 다 승진하는데 왜 나는 승진이 안 됩니까? 남들은 다 부자로 사는데 왜 나는 부자가 안 됩니까? 남들은 다 아들이 있는데 왜 아들이 없나요? 남들은 가정이 화목한데 왜 우리가정이 화목하지 않습니까? (특히 목사들은)남들 교회 다 부흥되는데 왜 우리교회는 부흥이 안 됩니까? 다른 교회들은 선교사도 많이 보내는데 우리는 선교사도 한명도 없어요. (특히 복음 아는 목사님들) 저 교회 교인들은 목사님이 설교하면 다 아멘, 하면서 듣는데 왜 우리교회 교인들은 고개 푹 숙이고 있고 삐지고 설교 마치고 기도해도 모기만한 아멘 소리도 안 나옵니까?’

‘나가란 말이야. 갈 데 찾아서 빨리 나가란 말이야.’라는 눈초리로 마구 쏘아댈 때 부끄럽기 짝이 없는 거예요. 부끄, 부끄, 부끄, 부끄럽기 짝이 없어요. 참 부끄러워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부끄러운데서 벗어나기 위해서 오늘도 죽기 살기로 일하는 겁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 오죽 부끄러웠으면 사법고시 합격해도 부엉이 바위에 올라가서 뛰어 내리잖아요. 얼마나 부끄러웠으면 그랬을까요?

볼리비아의 어느 축구선수는 골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공을 쳐 낸다는 것이 실수로 골 안으로 집어넣고 말았어요. 그래서 게임에 졌는데 고국에 돌아와서 권총 맞아 죽었습니다. ‘너는 우리나라를 부끄럽게 한 축구선수다.’ 해서 권총으로 죽였습니다. 자식이 구치소에 들어가면 부모는 부끄러워서 말을 못합니다.

호적에 파내니 마니, 하면서 ‘너 같은 자식은 둔적이 없다.’고 합니다. 사람이 고생은 다 참을 수가 있어요. 역경도 아픈 것도 다 참을 수가 있는데 부끄러운 것은 못 참아요. 그것이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타고난 저 밑바닥의 근본입니다. 심지어 인간만 그런 것이 아니고 더러운 귀신도 그래서 심판 주되시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피하는 방법이 땅에 사는 것이 아니고 바다 속으로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바닷물에 빠져도 좋다는 겁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의 얼굴을 회피할 수 있으면 무슨 수라도 다 쓰겠다는 겁니다. 로마서 9장 3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인간적인 상식, 착하면 구원된다는 이 상식은 십자가 앞에서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런 상식에 근거하는 것은 사정없이 지옥 보냅니다.

그러나 십자가 피를 믿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치 않는다 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렇게 보장하겠다는 겁니다. 로마서 9장 32절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자기 행함을 가지고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하는 사람들은 결국 십자가 앞에서 다 들통 나고 깨진다는 겁니다.

따라서 자기 행함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행함으로 자기부끄러움을 가릴 수가 없음을 아는 사람은 십자가 앞에서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자기가 소망한 부끄러움이 가려지는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피가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이 로마서의 이야기는 에베소서 5장 11절 이하에도 계속됩니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인생 성공 실패를 결정하는 심판은 사람이 자기가 내세우는 기준을 사용하지 않고 예수님 자신이 내세우는 기준을 사용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입니다.

십자가 피가 뭐냐 하면, 로마서 5장에 보면 ‘용서하심’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 결코 내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다.’ 이런 것으로 우리의 부끄러움을 해소시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예수님 앞에서 아직도 자기 행함을 주장한다면 그 더러움을 다 노출시켜서 부끄럽게 만들어버리고 나중에 지옥 가서 뜨거운 불에 있으면서도 자기 신세가 자기가 보기에도 너무너무 처참한 신세니까 ‘내가 평생 동안 내 인생 이렇게 만들려고 그 애를 다 쓰면서 살았나. 그 동안 내가 예수 안 보려고 도망간 것, 내 인생을 이런 꼴로 망가지게 하기 위해서 내가 복음을 기피했나.’ 하고 스스로 생각해도 수치스럽기가 짝이 없는 결말을 낳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지 않고 자기 아들에게 심판을 맡긴 결과가 그런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죄 많고 부끄러운 사람이 무슨 힘으로 구원받느냐 하는 거예요.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힘으로 구원받는다고 되어 있어요. 제가 설교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나에게서 능력이 나갔다.’ 그 다음에 ‘어떤 여인이 벌벌 떨면서 예수님께 엎드렸다.’

이 두 가지 사항이 짝을 이루지요. 이것이 ‘구원시켜줌 - 구원받음’의 짝을 이루는 세트입니다. 이 구원 말고 다른 구원의 현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능력이 나오는데 그 능력이 나오는 것을 성경에서는 ‘예수에 힘입어 구원받는다.’고 하는 거예요. ‘예수에 힘입어 구원 받는다.’ 하는 것을 사람들은 교회 와서 열성내서 자기 힘으로 구원받고자 하니까 도리어 구원이 되지를 못하는 겁니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닦달 내는 이유가 뭐냐 하면,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데 왜 여러분이 손을 놓고 있습니까?’라고 하는 거예요. ‘할 수 있는데 헌금을 왜 안 하십니까? 교회를 나올 수 있는데 왜 교회를 안 나오십니까? 봉사할 수 이는데 왜 봉사를 안 하십니까? 여러분이 안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구원 못 받습니다.’라고 우리의 구원의 근거를 우리가 할 수 있는 그 힘에다가 호소를 해요.

그런데 빌립보서 3장 끝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율법에서 난 의 말고 예수님의 의로 구원받는다.’(빌 3:9)고 되어 있어요. 우린 법의 의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힘으로 구원받는데 히브리서 10장 19절에 보니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히브리서 7장 25절에 보니까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자기를 힘입어’, 예수님을 힘입어 나갈 때에, 곧 주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나갈 때에 우리는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수치스럽게 만들고 이 수치가 바로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수치인 것을 깨닫는 사람만 감히 심판 주 앞에 벌벌 떨면서 몰래 옷 가를 만지게 됩니다. ‘나같이 저주받은 여인에게, 이 부끄러운 실체를 주신 분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나를 더욱더 부끄럽게 하는 분을 내가 피하지 않으리라.’

나를 더욱더 부끄럽게 하는 분을 내가 피하지 않으리라 하는 그 모델이 바로 12년 동안 피 흘린 사람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열 두 제자와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 앞에서 건강해요. 건강하다는 말은 아직도 자기는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조차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이제는 내가 예수님하고 동등 된 상태에서 ‘주님, 제가 뭐할까요? 잡혀가신다고요? 제가 목숨 바쳐서 주님을 지켜드립지요.’ 베드로가 이렇게 이야기했잖아요.

아주 당당합니다. 자기의 수치 됨을 몰라요. 그래서 주님께서 수치를 만들어야 구원되니까 수치를 만들어버립니다. ‘오냐, 그 말 잘했다. 네가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세 번 부인하는 가운데서 베드로는 ‘내가 주님 앞에 쫄딱 망했다.’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거예요. 내가 그동안 잘난 체했던 것, 믿음이 좋은 척 했던 것, 열두 제자의 수제자라는 것,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주님을 저주하는데 힘을 보탠 거예요.

예수님 앞에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구원 안 받기 위한 악을 쓴 겁니다. 사람이 교회 오래 다니면 그 만큼 구원과 전혀 상관없는 짓들이 많이 나와요. 총회장, 노회장목사들, 전혀 구원과 상관이 없는, 추기경이니 주교니 신부들. 세상에, 수치스런 그 베드로, 저주받아 죽었던 그 위에다 큰 성당(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을 세웠어요.

그게 뭐가 좋다고 거기에 미켈란젤로라는 천재를 동원해서 큰 성당을 세워놓았어요. 스페인에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데 거기에도 성당을 세웠는데 중세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성지순례 한다고 바쁘니까 거기에 관광지를 만들어서 이벤트를 한다고 중세미술이 발달한 거예요. 이번에 여행하면서 공부 많이 했습니다. 그것도 주의 힘이 아니고 내 힘으로 했어요.

가는 곳 마다 만화 같은 그림으로 이벤트를 벌여놓았어요. 왜, 사람들이 원하니까. 성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죄짓는 그 현장이 성지순례의 현장입니다. 안방에서 죄지으면 그곳이 성지입니다. 그게 부끄럽게 하기 위한 거예요.

빨간딱지 냉장고에도 텔레비전에도 다 붙어있는 그것이 나의 성지에요. 그 여인이 12년 동안 하혈한 그 장소고, 위암 걸려서 내시경 받는 그 침대 위가 바로 나의 성지입니다. ‘안되겠습니다. 도저히 손 쓸 수가 없으니 집으로 모시세요.’ 이것이 바로 우리의 본색입니다. 인간 쫄딱 망함, 더 이상 회복할 길이 없음.

오늘 본문 앞에 8장 41절 42절에 보면 “이에 회장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열두 살 먹은 딸이 죽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오시라고 한 겁니다. 죽어가고 있었던 거예요. 다음 시간에 이야기할 것인데 그 딸이 완전히 죽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딸을 잔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제일 기분 나쁜 경우 중에 하나가 자는 사람 깨우는 거예요. 이 사람들은 딸이 정상적인 코스를 밟아서 주님 품에 안긴다는 사실은 생각 못하고 자기 딸은 지금 쫄딱 망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만큼 살아 있는 것이 수치가 없는 상태로 살아 있다고 오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는가? 구원의 능력이 빠져나가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구원의 능력이 빠져 나오려면 멀쩡한 사람 12년 동안 하혈해야 되고 그 다음에 어떤 의사도 그걸 못 고쳐야 돼요. 고치지 말아야 돼요. 4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다 아시면서도 베드로에게,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내게 손 댄 가 누구냐.’ 베드로가 나서서 ‘주여, 모든 사람이 다 밀었습니다.’

인간들의 구원방법은 자기가 갖고 있는 이 더러운 죄 문제의 원인을 두고 ‘내가 배가 고팠기 때문에, 내가 시간이 없기 때문에, 내가 마음은 있는데 여러 가지 분주한 일들로 인해서 그랬으니까 주님께서 나에게 보다 큰 능력을 주시면 주님 앞에 쉽게 다가설 수 있겠습니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주님 앞에 잘 보이기 위해서 아양을 떠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구원하는 방법은 멀쩡한 12살 먹은 애를 죽이고 사람들을 12년 동안 병 낫지 않게 만들고, 인간으로 하여금 우리가 원래부터 수치당해야 마땅하다는 것을 노출시키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 힘으로 수치를 가리는 그 모든 작당들, 우리 힘으로 부끄러움을 가리는 모든 시도를, 그 모든 힘을 빼고 다 포기를 해줘야 돼요.

모든 것을 다 맡겨야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심판 주 앞에서 우리는 그렇게 노출되는 것으로 심판이 이미 시작된 것을 온몸으로 받아가면서 인생을 살아가야 됩니다. 이미 심판은 시작된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셨어요. 나를 12년 동안 피 흘리게 만든, 내 부끄러운 면면을 그대로 드러내신 이 고마우신 주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깁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모든 것을 맡기지요.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주님께서 내 인생을 이렇게 망가뜨렸습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누구였느냐 그 말입니다. 내가 잘못해서 인생이 망가진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내 인생을 그렇게 조성하신 것이고 그렇게 유도하신 것이고 그렇게 인도하신 거예요.

인도의 22조원 가진 재산가가 최근에 집을 한 채 지었어요. 1조 2천 억짜리 집이랍니다. 제일 못사는 동네의 언덕 높은 곳에 1조 2천 억짜리 집에 살면서 그 부자는 이렇게 호소해야 됩니다. ‘누가 나를 이렇게도 부끄러운 인생으로 살게 했습니까? 이렇게도 나를 부끄럽게 살게 하십니까?’ 하시면 그 부자는 구원받습니다.

왜냐하면 그 주체를 ‘내가 이만큼 돈 벌었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주셨다는 이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식으로 갓 바위에 빌려고 올라가는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상식인데 그것 말고, ‘심판주가 이렇게 나의 부끄러움을 드러내게 하셨다.’ 하는 것으로 주체를 항상 주님에게 양도하는 사람, 그 사람은 매일같이 지금도 주님의 옷을 만지는 사람입니다.

교회 나오셔서 늘 말씀 속에서 주님의 옷을 만지는 겁니다. ‘오늘도 주께서 나를 이렇게 만드셨습니다.’ ‘누구야! 나에게서 능력이 나가서 그 점을 알게 된 자가 누구야?’ ‘부끄럽지만 접니다.’ ‘네가 네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조성하신 이 세상에서 십자가라는 것이 심판하는 기준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가만히 머물러만 있는 피가 아니라 그 피가 적용되어서 주님의 자기 힘으로 구원되어야 할 사람을 찾아가는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받은 사람은 특징이 그 십자가가 꽂혀 있기 때문에 항상 주님 생각하면 자기자랑이 쏙 들어가 버리고 엎드리게 됩니다. ‘어제 제가 또 죄를 지었습니다. 다른 사람한테는 안 그런데 말씀 앞에 나오면 부끄럽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렇게 낯짝 두껍게 살면서 주님의 피를, 그 용서를 받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분을 지난주에 한분 만났습니다. 우보라는 동네에 갔는데 점심 먹으려고 식당을 찾아갔습니다. 허름한 중국집인데 손님은 하나도 없고 주인장 일기장만 죽 붙어 있는 약간은 이상한 곳을 가게 되었어요. 그래서 별 기대를 안했습니다. 잘 모르는 중국집에 가서 음식 맛에서 실패를 제일 줄이는 요령이란 자장면을 시키는 겁니다.

아무리 맛없는 집이라도 중국집이니까 적어도 자장면 하나는 제대로 할 것이라는 계산입니다. 그 다음에는 아무리 맛없는 집이라도 아주머니가 집에서 잡채는 만들어 드실 테니 그것만큼은 제대로 할 것이라는 심산에서 잡채밥을 시켰어요. 그럭저럭 먹었는데 다 먹을 즈음에 주인아주머니가 ‘무 가져가시렵니까?’ 하더니 무를 주고 밤고구마를 주더니 호박잎에 가지에 만 오천 원어치 정도를 받았어요.

둘이 합쳐서 음식값 8천원쯤 계산했는데 받기는 만 오천 원어치쯤 받았습니다. 그 분의 말이 ‘땅콩도 주려고 하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다 가져가서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하면서 줘요. 얼마나 제가 부끄러운지 음식 값 만원 내고 2천원 안 받았습니다! 세상에, 만 오천 원 어치를 받아놓고 그 거스름돈 이 천원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주님 앞에 한 게 이 땅에서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세상에 나가서는 남에게 안 지려고 잘난 체 하고 똑똑한 체 하고 아파도 안 아픈 체 하고 못났어도 난 척 하면서 철판 깔고 살아갑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그 주님은 심판 주니까, 지옥이냐 천국이냐를 결정하는 분이니까 우리는 그 분이 해주시는 그 피의용서 앞에서, 무, 가지, 호박잎, 땅콩, 그 앞에서 우리는 돈 내는 것이 부끄러워서 아무 소리 못하고 엎드릴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 주께서 주신 약속입니다. 그 믿음으로 구원받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교회 다녔다고 구원 되었는지, 우리가 확인할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과연 주님 앞에서 주님을 피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주님을 만나보고 싶은지, 우리 속에 악한 마귀가 들어있는지 아니면 성령이 계셔서 주님 앞에 나와서 엎드리고 싶은지 다시 한 번 자기를 보게 함으로 말미암아 인생 살아온 것이 주의 은혜인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