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8. 29. 11:12

충성 싸움 (사무엘하 19장 40-43절)

본문 : 사무엘하 19장40-43절
제목 : 충성 싸움
듣기 :
음성 , 보기 : 동영상
문서 : 한글 , 인쇄 :
PDF


44강-삼하19장40-43(충성싸움)-2sa100829

충성 싸움

2010년 8월 29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19:40-43

(삼하 19:40, 개역) 『왕이 길갈로 건너오고 김함도 함께 건너오니 온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나 왕을 호행하니라』
(삼하 19:41, 개역) 『온 이스라엘 사람이 왕께 나아와서 고하되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이 어찌 왕을 도적하여 왕과 왕의 권속과 왕을 좇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네었나이까 하매』
(삼하 19:42, 개역) 『유다 모든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대답하되 왕은 우리의 지친인 까닭이라 너희가 어찌 이 일에 대하여 분내느냐 우리가 왕의 물건을 조금이라도 먹었느냐 왕께서 우리에게 선물 주신 것이 있느냐』
(삼하 19:43, 개역) 『이스라엘 사람이 유다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는 왕에 대하여 십분을 가졌으니 다윗에게 대하여 너희보다 더욱 관계가 있거늘 너희가 어찌 우리를 멸시하여 우리 왕을 모셔 오는 일에 먼저 우리와 의논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


사람은 눈에 보이는 사건들에 민감합니다. 어떻게든 판정을 내리고 싶고 옳고 그름을 해결지우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판정내린 그 판정에 만족하려 합니다. 신앙이란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한 신앙이라고 여겨서 이 세상에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독수공방하는 식으로 살고 싶어도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쉴새없이 판정과 평가를 내리게 만듭니다.

결국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접근되는 양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19:1-4에 보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에게는 조금도 ‘들리지 않는 소리’로서 세상은 상호 통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포착해야 합니다. 이 원리에 흡수되어야 합니다. 이 원리에 진입해야 합니다. 이것은 곧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온통 눈에 보이는 것으로 둘러싸여서 어떻게든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해야함을 요구받게 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러한 예입니다. 권력을 다시 찾게 된 다윗왕이 본래의 제자리를 찾아 환궁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좌하는데 주도적으로 나선 쪽이 바로 다윗왕과 같은 족보라 할 수 있는 유다지파와 그리고 연관된 베냐민 지파입니다. 12지파 중에서 두 지파가 따로 독자적인 행보를 보인 것입니다. 이로서 상대적으로 배제되었다고 여긴 무리가 나타났으니 바로 유다의 두 지파 외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윗을 왕으로 다시 옹립하는데 있어 유다 지파가 단독으로 실행한 것에 대해서 도적질 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즉 다윗왕은 모든 사람의 왕이지 결코 가까운 혈족들만의 왕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들은 나라의 두 조각으로 균열될 여지가 보임에 대해서 위기감을 갖게 되었고 그 원인제공은 다윗왕의 가까운 혈족들이 일을 주도적으로 저질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예전처럼 다시 다윗왕을 자신의 왕으로 견지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혈족보다 더 합리적 이유가 바로 숫적으로 2:10의 차이남입니다.

숫적으로 자신네들이 열지파나 되니 유다지파와 함께 하는 베냐민 지파는 자연적으로 이 10지파에게 주도권을 양도하는 것이 옳다는 겁니다. 이러한 사건은 우리 인생사에서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같이 어떤 식으로도 판정과 판단을 요구받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네 생활입니다.

이렇게 되니 우리들은 이런 와중에서도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 있다는 티를 내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세계’와 연줄을 닿아있음을 고백하는 겁니다. 즉 인간이 할 수 있는 일과 인간이 할 수 밖에 없는 일을 늘 생각하면서 구분지어면서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며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은 무엇입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눈에 띄는 모든 일들입니다. 소위 신앙생활이라는 이름붙이면서 벌리는 차별화된 모든 것, 전부가 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겁니다. 반면에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일까요?

시편 78:67-68에 보면,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과연 이 선택에 대해서 인간이 할 수 있을까요? 도저히 못합니다. 한다는 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정말 닿아야 될 ‘들리지 않는 소리’와 ‘보이지 않는 일’이란 바로 이 선택의 소리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름대로 이스라엘을 규정하면서 결코 두 조각 나서는 안될 나라라는 겁니다. 그 근거는 출애굽 할 때부터 충분합니다. 출애굽 당시에 12지파는 공동의 혜택을 입고 애굽에서 벗어났습니다. 따라서 그 어느 지파가 그 어느 지파 위에 오를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왕이시고, 그 왕적인 행사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계속 구원받는 상태 안에 놓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지파 위에 특별한 지파를 얹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왕되심의 효과를 가리는 경우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가 자기네들의 왕으로 다윗왕을 고집한다면 이는 그것을 저지하는 자신들의 10지파의 말이 원칙에 입각해서 옳다고 장담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이 모든 것이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겁니다. 즉 인간이 어떤 주어진 사건 속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가름하는 식으로 사태를 정리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인간들의 판정이 시편 78편에 나오는 말씀, 즉 ‘10지파는 싫어버린 바 되고 2지파는 내가 택했다’는 하나님의 숨겨진 약속과는 완전히 위배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즉 인간은 아무리 자기 딴에 바른 판정을 내린다 할지라도 자신의 구원에 전혀 보탬이나 도움이 되지 않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쫓아가는 신앙’이 아니라 ‘이끌리는 신앙’의 본질을 보여주는 바가 됩니다. ‘쫓아가는 신앙’은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들을 연결시켜 하늘에 까지 닿게 다는 겁니다.

반면에 ‘이끌림의 신앙’은 항상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들이 부정당하고 거부당하는 식으로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선택의 선’에 닿아있음을 드러내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 곧바로 ‘선택의 선’에 닿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인간이 ‘처리해야만 하는 눈에 보이는 일과 사건’들에 무주치게 되어 있습니다.

한 예를 들면, 사사기 8:22-23에 보면,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그 누구 하나 남 앞에서 나서서 지휘할 자격자가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인간도 인간이 인간의 구원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개인에게만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들이 어쩔 수 한 모든 일들이 신앙에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숨어있는 진실이 드러나는 계기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무엘하-2009/44강-삼하19장40-43(충성싸움)-2sa100829.mp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무엘하-2009/44강-삼하19장40-43(충성싸움)-2sa100829.avi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무엘하-2009/44강-삼하19장40-43(충성싸움)-2sa100829.hwp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무엘하-2009/44강-삼하19장40-43(충성싸움)-2sa100829.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