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14. 16:20

저주받은 세상 (누가복음 3:15-17)

저주받은 세상

2010년 2월 14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3;15-17

(눅 3:15, 개정)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눅 3:16, 개정)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눅 3:17, 개정)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세례 요한이 했음을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보고 하라고 한다면 과연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자꾸 우리는 세례 요한같은 선지자가 아니라는 핑계를 댑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도 예수님 앞에 서 있고 우리도 예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믿는 예수님을 우리도 같이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진다’는 말을 우리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차마 이 말을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뭔가 불합리한 말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서 단정을 내립시다.

‘쭉정이는 불에 태워진다’는 말을 우리는 결코 할 수 없다고 단정지웁시다. 세상에 나서면 우리는 자꾸만 이 성경 말씀을 누려려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로 그런 똑같은 사람들 뿐입니다. 즉 누구는 천국에 들어갈 알곡이요 누구는 지옥갈 쭉정이가 된다는 식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동등한 존엄성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교회가 무엇이냐 하며는,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것을 해내는 사람의 무리’입니다. 즉 사람들이 교회 와서 목사 시키는 대로 여러 가지를 하고 교회 봉사를 하는 것은 결코 교회됨을 증표가 아닙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는 것을 해내는 자들만이 교회입니다.

세례 받는 것? 이것도 인간이 할 수 있습니다.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 그것도 인간이 할 수 있습니다. 기도? 전도? 헌금? 봉사? 예배 참석? 모두 인간들이 해낼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규정은 이러합니다. 인간이 도저히 못하는 것을 해내는 자들이 새로운 피조물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들이 과연 ‘인간이 내는 것만 하는 자’인지 아니면 ‘인간이 해내지 못하는 것을 해내는 자’인지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내가 표현하는 주님’과 ‘주님이 표현하고 만들어가는 나’를 구분하는 자를 말합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나오면서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해서 요구사항을 갖고 있습니다.

즉 이러이러한 주님이 되어서면 좋겠다는 식으로 예수님을 표현합니다. 예를 들면, 영어시간에 학생들이 영어선생님을 평가합니다. “선생님, 물을 영어로 뭐지요? 워터이지요?”라고 물으니 현지인 선생님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워터? 노! 워러!”라고 답변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이 선생님보고 발언이 좋지 않다고 발언을 고치라고 가르치려듭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교회 올 때는, 자신에게 맞는 하나님과 예수가 되라고 하나님에게 요청하게 됩니다. 자신이 신앙생활 잘 하도록 내가 요청하는 것을 들어주는 그런 착한 신이 제발 되어달라고 신에게 요청합니다. 즉 “워러가 아니라 워터”라고 발언하라는 겁니다. 여기에 비해서 하나님은 도리어 참된 인간은 이러이러하다고 그 규정을 제시합니다.

즉 이러이러한 인간일 경우에만 참된 내 자녀라는 겁니다. 바로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알고 있어야 참된 성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제시하는 참된 피조물상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 본문의 경우, “쭉정이 같은 인간은 영원한 지옥불에 들어간다”는 말을 함부로 고백할 수가 없는 겁니다.

만약에 이런 발언을 주변 사람들에게 했다간 단번에 “너는 뭐가 잘났어”라는 핀잔을 듣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말을 못합니다. 즉 우리는 알곡과 쭉정이로 구분되어야 되는 그 이유조차 모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인이 되어서 하늘에 어떤 결과를 낳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늘이 원인이 되고 우리 자체는 단지 결과로서 빚어졌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도저히 납득을 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불과 성령의 세례’ 의미가 밝혀집니다. 구약에 할례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남자의 생식기 끝을 잘라서 하나님의 백성임을 보여주는 티를 신체에 갖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문신을 새겨서 구원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입을 깨물고서라도 그 문신을 할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쭉정이로 남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미리 말씀드렸듯이 참된 구원받은 교회란, 인간의 힘으로 해내지 못하는 것을 해내는 사람들의 집합이기에 불과 성령의 세례라는 문신도 우리에게 그림의 떡입니다.

아니, 성경 전체가 우리가 행하기는 그림의 떡 같은 것입니다만, 그 말씀의 적용을 받아 심판받는 것인 필연적인 운명입니다.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5:24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결과는 우리가 우리에게 행한 것이 원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바로 불과 성령의 세례를 받는 사람에 한해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불과 성령의 성령을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행세하는 무엇이 아닙니다. 불과 성령 세례는 예수님께서 이 땅을 관통하면서 사셨던 그 일생이었습니다. 요단강에서 성령세례 받고 십자가에서 불세례 받았습니다.

바로 이 과정이 성령이 임한 성도에게는 전부 덮쳐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는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성과에 합류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성도에게 무슨 일들이 일어나는가에 초점 잡히게 됩니다. 성도의 일생 전체가 바로 불과 성령세례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즉 “주님, 앞으로 저를 어떻게 사용하실 참입니까?”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출애굽기 19:5-6에 보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세례가 다 내게 속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즉 그 어느 사건이든 예수님이 개입되지 않는 경우가 없다는 겁니다. 그 개입이 원인이 되어 이루시는 결과는 바로 언약 백성이라는 자기 백성 만들기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심으로 말미암아 산상설교나 기적같은 것으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십자가의 자신이 흘리신 피로만 우리로 하여금 천국 창고의 알곡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지킬 수 있는 말씀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우리 자신을 예수님의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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