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3. 15:08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

2009년 8월 19일 수요일 오후 1:21:34  이름 :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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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을 수정해서 다시 올립니다.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

09-12-05 12:53 

- 이근호


Ⅰ 서 론  

말씀이 없으면 사람은 죽게 된다. 그 이유는 말씀 안에 ‘종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종말됨’을 계속 거부하면 ‘종말’ 이후의 혜택에서 제거된 자가 되어 버린다. ‘종말 이후의 혜택’이란 ‘심판 너머에 있는 구원의 혜택’을 의미한다. 이 구원의 혜택이 벌써 말씀 안에 들어 있어 이미 우리 앞에서 제공되어있다.

문제는 그 ‘심판성’을 어떻게 타넘느냐는 것이다. 역사적 존재인 인간은 정렬된 역사적 시점들을 헤아려가면서 다음 순서를 기다린다. 하지만 역사적 산물로서의 인간 몸은 닳아져 없어지는 시간과 더불어 함께 삭제된다면 그 ‘기다림’조차 삭제대상이다. 자신의 신체가 살아있다는 조건 속에서 헛꿈 꾼 것이 된다. 즉 인간은 종말을 곱게 통과할 신체는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심판과 저주와 죽음과 만나게 되는데 그 만남은 비거룩에 대한 ‘거룩의 공격’이라는 형태를 띠기에 아담의 육이 내뿜는 죄의 고유성으로 인해 거룩의 공격을 버텨낼 수가 없다.

하나님 쪽에서 희망을 전해오셨는데 그 희망이란 바로 인간조차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말씀에 준해서 내민 영속성 있는 자비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이 말씀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말씀이 옛인간을 삼켜서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 토해내면 된다. 이런 취지의 말씀이 다니엘에게 주어졌다. “인자(人子)야”라고 호명되면서 제공된다.(단 8:17)

호명(呼名)이란, 호명 받은 자가 호명한 자에 의해서 비로소 주체적 의미를 갖는 관계를 말한다.각주1) 이렇게 되면 호명 받은 자의 선택은 호명하신 분의 선택에 의해서 전부 박탈당한다. 이는 인간들이 ‘본래의 것’이라고 여긴 것이 실은 ‘비본래적 선택행위’를 그동안 발휘해왔음을 비로소 지적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호명이 일어나면 이는 곧 ‘박탈의 장(場)’, 곧 주체의 공터(무)를 발생시키는 사건이 되고 이 무(無)는 하나님의 창조 이전에 숨어있는 바를 배태하고 터져 나오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그러면 거기서 무에서 올라와서 새로운 유를 창조하는 새 주체자가 등장의 조짐은 ‘묵시적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적 지평위에 지뢰처럼 수시로 터지게 된다.

구약 성경에서는 이런 기존 주체자를 부정하고 새로운 말씀 주체자로의 이전과정을 ‘이름’을 통해서 밝힌다. ‘하나님의 이름’이란 기존의 이름들을 공격하는 전략적 이름이요 전술적 군사 개념이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출 15:3)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그 역사적 현장은 군대 활동 개념에 준해서 해명되어야 한다. 이스라엘 또한 그러하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다.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출 7:4/겔 37:10)

적은 산출되어야 한다. 적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되면서 역시 ‘무’에서 호출되어야 한다. 다니엘서에서는 바다에서 올라온다.(단 7:2-3) 하나님 창조에 있어 바다란, 땅의 경계 너머로의 침범을 허락받지 못한 세계를 의미한다. 이는 땅 위에서 진행되는 역사에서 자체적인 한계의 징후를 말해주기 위해 대기된 세계이기도 하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거세게 이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렘5:22) 이 창조의 원칙은 그동안 노아의 언약에 근거해서 확정된 것이다.(사 54:9)

그런데 노아 언약으로 형성된 땅의 질서는 바닷물의 침범을 차단하는 장치가 되어있었다. 노아 언약의 본질은 하늘과 땅에 새 요건을 추가시키므로서 알리게 된다. 우선 하늘에 장치가 있었는데 그것은 무지개이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비 내림’이란 곧 ‘죽음’을 의미했고 ‘비 그침’이란 생명을 의미했다. 그런데 이 죽음과 생명의 가운데서 존재해서 더 이상 죽음이 생명의 세계에 침입하지 못하게 막아주겠다는 사랑의 표징으로서 하나님께서는 무지개를 설치시켰다. 세상의 질적 차이를 말해주는 시간적 타이밍이 각주2) 공간적으로 하늘에 나타난 것이 무지개다.  

그런데 이 무지개 구조물이 제대로 기능이 작동하게 하는 조건이 지상에 마련되어 있었다. 그것은 ‘피’였다.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 9:3-6)

지상에서의 축복과 저주, 곧 생명이나 죽음이냐의 결정짓는 기호로서 새롭게 등장된 것이 ‘피’이다. 각주3) 하늘의 무지개는 지상의 피의 유무와 관련지어 그 지상 보호 기능을 유지하게 된다. 하늘의 무지개는 지상에서 벌어지는 피의 기호적 의미를 받아서 그 보호 기능의 원활함 유무를 발휘하게 된다. 이것은 하늘의 운명은 땅에서 일어나는 피 중심적 사건에 따르게 됨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이제부터 ‘피’가 주도권을 갖고 땅의 운명을 결정짓기에 앞으로의 모든 지상의 인간들도 역시 흘려서는 아니 되는 ‘억울한 피’가 땅을 적시면 땅이 분노하고 저주하는 그 질서에 저촉을 받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인간을 규정하는데 있어 인간이 처해 있는 ‘땅’의 속성 에 따라야 함을 말한다.

인간은 환경이 결정하는 것이다. 그만큼 인간 상황은 줄곧 어떤 세력 속에 감금되어 있는 상태다. 만약에 인간 자신들이 언약의 주체로 나서려고 한다면 이는 곧 비현실적 처신이 된다. 언약으로 굳혀져버린 체계와는 맞지 않는 비현실적 몸부림이다. 언약에 의하면 인간은 날 때부터 생각하는 바가 악하기 때문에 비중심적이고 비독자적인 위치만을 배정받고 있을 뿐이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창 8:21)

이는 곧 세상 해석에 있어 이미 주도권이 상실되었으며 실제적인 언약 실행자 쪽으로 넘겨지는 것을 체득하면서 살아야 될 운명이다 는 말이다. 만약에 인간이 인간을 규정하려고 든다면 실제 현실을 조성하는 언약적 조치와 마찰을 일으키게 된다. 육으로는 말씀을 해석할 자격과 권한도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런 언약 중심이 타인으로 느껴진다. 인간의 역사는 이 타자를 배척하는 역사가 되면서 자체적인 동질성으로 내용이 채워진다.

이로서 인간의 자체적인 역사관 언약과 충돌을 일으키는 역사관으로 자리 잡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게 되고 다른 해석을 내놓게 된다.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 형제들의 제사에 관여하게 됨으로서 졸지에 아벨은 형 동생에게 있어 배척당해야 하고 거부당해야 될 타인으로 전락하고, 이로 인해 그는 죽어야 했고, 그가 흘린 억울한 피는 땅으로 하여금 하늘에 호소하게 만들었고, 공간의 질로 감시받고 규정받는 인간상을 거부한 가인은 공간의 무서움을 새삼 체험해야 하는 징벌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된다. 하나님의 저주가 대지에 깔려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지에 저주가 상주하는 이유를 모르는 인간들은, 역사에 희망을 거는  식으로 자기 긍정적 역사를 짜나가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억울한 피’를 발생시키시면서 그러한 역사관은 일방적인 환상에 불과한 것이고 우상이 된다는 사실을 종말에 이를 때까지 쉬지 않고 말씀을 통해서 추적하신다. 

‘억울한 피’들로 인하여 땅이 저주받으면 언약적 보호 장치가 한계를 드러내면서 풀리게 되고 그렇게 되면 땅은 바다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되면서 바다에 자리 잡은 ‘무’의 세력이 땅을 점령하게 하는 구실이 되고, 여기에 ‘주의 이름’이 등장하면 세상은 온통 원초적 전쟁터가 되어 버린다. 새로운 창조 세계를 배태하기 위한 전쟁수행이다.


Ⅱ. 본 론

다니엘 70이레는 성전의 위상이 배출한 차이나는 시간관이다. 성전이 어떻게 독자적인 시간을 배출할 수 있는가? 고정된 공간을 점유하고 있으면서도 그 구원의 혜택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전달되고 땅이 전체 공간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들의 주체적으로 구성하는 시간관과 또 다른 차이를 보여주는데 이는 ‘주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 사이의 차이다.


1. 성전의 의미

“그의 전을 하늘에 세우시며 그 궁창의 기초를 땅에 두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니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라”(암 9:6)

성전은, 전쟁하는 신, 곧 여호와의 이름이 계시는 곳, 그 이름을 기념하는 곳이다. 자신이 친히 전쟁을 벌려 획득한 자랑스러운 전리품 가운데 하나님은 영원히 거주하시겠단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의 다스림 영원무궁하시도다”(출 15:17-18)

성전에는 ‘주의 이름’ 이외의 이름은 용납될 수 없다. 주의 이름만 좌정하신다. 그것은 주의 이름으로 벌리시는 전쟁이 성전의 존립과 관련해서 그 경유를 함유한다는 말이다. 전쟁의 경유와 성전의 등장과 사라짐이 같이 간다. 그런데 이제는 그 성전이 무너진다. 왜 무너져야 하는가? 주의 원수의 실체를 성전 존립을 통해서 엮어내기 위해서다. 즉 ‘주의 원수’를 역사 속에서 구체화시켜 나가시는 것이다. ‘주의 이름’의 적을 역사 속에서 분명히 드러나게 하시므로서 주의 이름도 병행해서 역사적 대립되는 인물과 시간관을 품고 등장케 하기 위함이다.  

“영구히 파멸된 곳을 향하여 주의 발을 옮겨 놓으소서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 가운데에서 떠들며 자기들의 깃발을 세워 표적으로 삼았으니 그들은 마치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으니이다 이제 그들이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시 74:3-7)

악의 속성을 검출해내기 위해 마련된 장치가 바로 성전이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성전은 ‘주의 이름’이 상주하시는 곳으로 세상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역사적 사태가 일어나든지 주의 성전이 공격받으면 곧 ‘주의 이름’이 공격받는 것으로 간주하실 요량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원수가 하나님을 본거지를 공격하는 공간적 거점으로 이미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지정해놓으신 바가 된다.

이로서 성전은 인간이 하나님을 직접 공격할 수 있는 유일한 역사적 접전 지점으로 허락된다. 물론 이방인들의 눈에는 성전이란 일반적인 종교적 건축구조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인간의 싸움이 신체와 신체의 충돌로서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염연히 현실 속에서 공존할 수 밖에 없는 간극을 띤 관점을 요구한다.  

낯선 시간의 질은 선지자들의 신체를 둘둘 감아 나타난다. “그 때에 주의 영이 나를 들어 올려서 여호와의 전 동문 곧 동향한 문에 이르시기로 보니 그 문에 사람이 스물다섯 명이 있는데 내가 그 중에서 앗술의 아들 야아사냐와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를 보았으니 그들은 백성의 고관이라”(겔 11;1)

성신이 동쪽에서 빠져나가고 남은 성전은 불탄다. 하지만 새성전이 완성되면 성신은 동편으로 다시 들어와 충만하게 된다.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겔 43:4-5)

주의 이름의 원수가 이미 역사적 구조물인 성전까지 침입하여 그 거룩한 공간이 우상의 자리에 세워진 공간으로 바뀐(겔 8:4) 이상, 이제 주의 이름이 머물 공간은 ‘인간들 속’이라는 새로운 공간형을 취하게 된다. 이를 위하여 에스겔 선지자는 성신이 임한 상태에서 예루살렘의 거리에 다니면서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도장을 매겨야 한다.(겔 9:3-5) 도장이 찍힌 사람만 산다. 주의 이름이 훼손됨으로 갖게 된 주님의 억울함에 참여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의 이름’은 포로 잡혀 가는 사람과 동행하면서 포로 생활을 같이 하신다. 그곳이 성소가 된다. 새언약이 완료되는 날, 그들의 마음속에 새 영이 부어지게 되고(겔 36:26) 하나님은 다윗이 되셔서 영원히 그들의 왕이 되면 그곳이 바로 영원한 하나님의 성소가 된다.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에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 가운데에 있으리니 내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을 열국이 알리라 하셨다 하라”(겔 37:26-28)

그런데 이 새 성전에는 물이 흘러야 한다.(겔 47장) 물이 끊임없이 나오지 않는 성전은 아무리 우겨도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 새 성전이 아니다.각주4) 이로서 새 성전을 구성은 기존 인간 신체가 뿜어내는 역사적 인식의 이해 한계에서 벗어나게 된다. 다니엘은 본인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본인도 이해 못한다. 이것은 그동안의 역사적 인식에서 나온 해석은 모든 것이 오류며 오해에 불과했다는 것이 발각 당하는 사태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포로 잡혀 있는 나라에서 일어나는데 그것은 인간들이 스스로 변화를 시도해서 획득할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어느 순간에도 스스로 자신의 주체성 바꿀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반발하게 되고, 거부가 일어나게 되고, 나름대로 쇄신을 모색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여전히 기존 주체성 주변을 맴돌고 있을 뿐인데 이는 기존의 주체성을 갖다 버릴 적당한 처소를 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나 선지자에게는 자살로 이어진다. 스스로 자기 자리를 처분하려고 했다. 하지만 성전과 관련되어서 바다 밑둥치에서도 살아남은 요나 선지자는(욘 2:4) 그 성전의 의미와 속성을 덧입는 사명을 끝까지 수행해야만 한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조성한 환경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그 환경은 성전에서 뿜어져 나온 환경이다. 그 안에서 선지자의 신체는 움직인다. 반항하는 신체다. 예언의 일관성에 이의를 제기한다. 본국에 있을 때는 니느웨성이 반드시 40일 지나면 멸망한다는 예언이었지만 졸지에 그 소식을 접한 니느웨성이 회개하고 마음을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돌아오자 그만 멸망의 시점도 소멸되고 판결도 취소되어 버린 것이다. 여기서 요나 선지자는 인간의 주체적인 시간과 공간적으로 절대로 파악이 불가능한 다른 층에서 ‘주의 이름’이 제공하는 은혜와 자비성이 일관성을 가지고 작동하고 있음을 주체의 죽음을 통해 접하게 되었다. 이렇듯 선지자의 자리는 선지자 본인의 주체적인 삶의 자리가 아니라 ‘주의 이름’을 실체를 드러내기 위한 자리다.


2. 다니엘 선지자 속의 일관성

다니엘 선지자도 이 요나 선지자의 노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가 이해한 역사적 상황이란 바로 ‘포로 잡힘’이라는 처지다. 이 처지는 이미 자신의 생명의 주도권이 다른 신, 다른 나라에게 이미 넘어가 버린 상황을 의미한다. 즉 자기로서는 어쩔 수가 없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선지자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과연 말로만 선지자이지 그의 선지자 기능은 과연 정지나 중지될 것인가? 아니다.

예언의 일관성은 인간의 신체성과 육을 공격하는 해석을 바깥으로 드러낸다. 즉 해석 불가를 해석 가능으로 시도하게 되는 인간들의 역사 이해를 통해서 육의 한계를 외부로 방출하는 것이다. 다니엘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도 예수님의 십자가 지시기 전까지는 자기에게 주어진 예언의 의미를 온전히 알 수 없는 것이다.각주5) 


3. 70년 포로 기간의 의미

다니엘은 인간이다. 육이다. 따라서 모든 것을 역사적으로 해명한다. 다니엘은 성전 파괴를 잊을 수 없고, 언제가 역사적인 건축구조물로서의 성전이 다시 세워지기를 원한다. 변치 않는 구원약속의 일관성을 드러내는 표식으로서 성전 회복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한 그 70년이라는 실제 역사적 기간만 지나면(대하 36:21) 필히 하나님께서 성전은 다시 본래의 자리에 건축되리라 믿었고 하나님은 다시 그 성전에 임재하리라 여겼다. 그렇다면 지금의 포로 기간은 그냥 자숙하면서 고난 속에서 잠잠히 있으면서 그냥 속히 지나가기만 고대하면 되는, 자체적으로 무의미한 시간이 될 것이다.

즉 다니엘이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언약적 사건은, 부서진 성전을 대신해서 예루살렘에 세워질 그 새 성전 건립 때까지 유보되는 것이다. 그런데 포로 기간 70년이 지나도 다니엘은 성전 건립을 위해 다시 본국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아니, 되돌아갈 이유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 회복이라는 것이 결코 성전 재건립이 아닌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지상의 성전 재건립이 하나님께서 진정 약속하는 구원의 완성에 합류되기 위한 노선에로의 진입이 아니라면 이것은 성전이라는 개념이나 땅이라는 개념의 수정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역사 자체에 대한 개념 변화가 다니엘 내부에서 일어났음을 뜻한다.

다니엘은 현실을 또렷하게 의식하고 있다. 결코 다니엘은 자신의 꿈이나 상상이 새로운 현실을 창조한다고 생각하지 아니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회개해야 될 집단 가운데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죄를 생각하면서 율법을 무시하지 않는 처신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그 어떤 행위도 70년 포로 기간을 무효화하거나 단축시키거나 취소시킬 능력으로 작용하리라고 생각하지 아니했다. 70년 포로 기간 이외의 다른 현실을 그 시점에서 따로 상정할 입장이 못 된다. 묵시세계를 끌어당기겠다는 의도 자체가 죄인으로서 주제 넘는 일이요 자신의 처지를 의식적으로 부정하고자하는 경솔한 반항심이다.

역사를 뒤집을 만한 그 어떤 틈도 보이지 않고 현실은 빡빡한 질서다. 느부갓네살의 통치가 장난이 아니다. 환상도 아니다. 바벨론 제국은 하나님의 파트너였다. ‘아래로부터 시작해서 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가 느부갓네살에게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다. 다니엘과 유대인에게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굳어져버린 현실이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왕이 명하지 않는 음식을 거절했다고 해서 나라가 바벨론 제국이 유대나라 손에 전복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질서를 지탱하는 힘에는 누수가 없다. 하지만 여분의 지혜가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 덧입혀진다.

이 지혜로 인해 유대나라가 다시 회복되는지는 않는다. 유대나라의 영속성을 지대할 수는 없고 지혜 속에 녹아버린다. 천하를 뒤덮고 있는 바벨론 제국의 무너짐은 지혜로 인해 유대나라의 영속성이 보장받는 것이 아니다. 그 무너짐은 대체해서 등장될 그 다음 나라와 관련 있다. 즉 다니엘과 세 친구는 단순히 같은 역사 속의 나라인 바벨론을 맞상대하는 자들이 아니라 본인들부터 역사 속에서 동일하게 무능자 신세일 뿐이다. 결코 바벨론 제국은 다니엘과 세 친구의 원수의 나라가 아니다. 도리어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역사적 제국이다. 그런데 왜 70년 포로기간이 지나면 자신들은 앞으로 이 역사적 제국이 아닌 비역사적 제국에 복속되어 지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줄 나라와 관련된 채 이 지상에서 지혜자로 살아가게 된다.

이렇게 되면 70년 포로기간은 다시 역사적으로 유지되는 유대 나라와 연결되는 기간이 아니라 역사에서 비역사적 나라로 이전을 통해서 ‘주의 이름’이 하시는 일관성을 비로소 밝히 보여줄 수 있다는 사태와 관련된 기간이 되는 것이다. 이 여부는 다니엘과 세 친구의 행함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없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그 어떤 경건스러운 자세를 취하며 살더라도 새로운 나라에 편입은 남들과 다를 바 없이 여전히 불가능하다.

그동안 유대나라는 이방민족화 되어서 도리어 이방민족의 통치권 안으로 삼키어졌다. 따라서 70년 포로 기간 중에, 왜 자신들이 여호와 하나님 보다는 이방우상을 섬기는데 더 열중할 수밖에 없는 몸을 가졌음이 들통 나는데 이러한 우상 친화성을 보여주는 자신들의 신체성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는 70년 포로기간 중에 알아채야 했다. 만약에 그래도 유대민족들이 제대로 자신의 한계와 죄성을 모른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70년이라는 포로기간이 다 채워졌을 때,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려보낼 마음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로 남는다.

하지만 다니엘이 나중에 깨달은 바는, 70년이라는 포로기간은 그 전에 자신이 스스로 규정해놓은 그 죄관에 의해서 회개를 하라고 촉구한 기간이 아니라 유대인 자신들도 미처 몰랐던 죄에 대한 다른 규정의 적용을 받기에 사람의 반성 여부와 상관없이 70년이 차면 필히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즉 인간은 회개조차 불가능한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다니엘이 포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계시를 내려준다면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 일차적으로 영향을 입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새로운 변화는 다니엘과 유대민족을 통제하고 있는 권력자인 느부갓네살 몫으로 1차적으로 제공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느부갓네살은 유대민족의 대변자 노릇을 하나님 앞에서 나서게 된다. 여기서 느부갓네살은 ‘보편적 단독자’ 입장에 있게 된다. 즉 그의 운명이 모두의 운명을 대표하는 개인이 된다는 말이다.

매를 맞아도 그들이 먼저 맞는다. 바벨론 제국이 먼저 지적받지만 그 속에는 지난날 유대나라가 이방나라에게 왜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가를 같이 지적하시는 내용이기도 하다. 느부갓네살에게 일어나는 일이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유대민족은 새로운 차원에서 남의 땅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제대로 된 기준에 의해서 지적받은 기회를 갖는 기간을 갖게 된 것이다. 만약에 이 새로운 죄의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70년 포로기간이 지나 본국의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축하더라도 ‘인자人子의 나라’로서 보장받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왕에게 계시를 주시므로서 인간 세계는 ‘주의 이름’에 대드는 악의 세계 속에 다함께 감금되었음을 알려주셨다. 즉 ‘차이’를 발생시키시는 것이다. 지혜의 계시와 말씀 해석의 차이에서 발생된 틈을 통해서 숨어있던 ‘주의 이름’의 행사를 역사 표면에다 토해내시는 것이다. 

느부갓네살왕은 지난밤에 꾼 꿈의 내용을 모른다. 신하들도 모르고 당연히 다니엘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모르면 모르는 채 그냥 묻어버리고 지나가면 그만인 것이 아닐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대체 최고의 권력자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가 하는 점이다. 최고 통치권자 위에서 따로 최고 통치권이 없는 법이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없는 낯선 지혜의 출몰에 그는 두려워해야만 했다. 느부갓네살만큼은 눈치 챘다. 자신이 지난밤에 꾼 꿈은 분명 자신의 장래와 제국의 운명과 관련 있는 꿈인 것을!

여기서 느부갓네살왕은 반드시 그 꿈을 알아내어 미래를 보장받기를 원했다. 그래서 지혜자를 찾게 되는데 이로서 지혜는 현재라는 시간을 너머서서 현재를 장악하는 미래의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 인간들의 시간관에 잉여부분이 주어진 것이다. 이것은 위기를 부르는 사태다. 왜냐하면 인간의 미래란 어디까지 현재의 상황에서 자신의 욕구를 덧붙여 상상한 것이고, 그 현재라는 것도 실은 과거의 기억 가운데서 자신의 몸 유지를 정당화시켜줄 기억을 재료로 하여금 일방적으로 편집하고 조작해낸 ‘지금을 위한 과거’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래가 미리 현재를 덮치게 되면 이런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된 시간관이 정죄 당하게 되기 때문에 더 이상 기존의 주체성으로는 해독이 안 되어 견딜 수 없게 된다.각주6)

바로 이러한 보편적 인간성은 느부갓네살을 정점으로 하여 포로 잡혀온 유대민족마저 현실 안에다 잠가둔다. 또한 유대민족이 왜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대리해서 보여주는 바가 된다. 그런데 설사 다니엘을 통해서 느부갓네살 왕이 자신의 미래를 알았다할지라도 그 미래의 모습은 느부갓네살의 몸으로서는 감당할 수 있고 대책을 세울 수 없는 미래다. 인간의 몸에서 고대하는 미래상과 경쟁관계에 놓이게 되는데 이로서 ‘인자의 나라’에 입성은 성사될 수 없다.

다니엘로부터 꿈 해석을 들은 후 12달 만에 느부갓세살 왕은 꿈의 내용대로 짐승이 되어버린다(단 4:28). 미래란 미리 대처하라고 알려 준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어 과거란 다시 되돌아갈 수 없고 수정시킬 수 없는 불가역적 영역에 속하는 것처럼, 묵시적 미래는 현재를 누리고 있는 자들로 하여금 바로 그 현재가 미래에 의해서 미리 불가역적 영역으로 지정받은 상태인 것을 통고해주고 있는 것이다.   

즉 지금 자신이, 자신을 바라보는 식으로 자신이 존재한다고 우기나 미래에서 봐서는 이미 죽어있는 상태에서 존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유일하게 살아있음을 느껴지는 현재에다 해석기준을 갖고 싶어하나 이것은 자기 신체가 느끼는 미래적 방향성과도 맞지 않는다. ‘아직도 살아있다’고 우기면서 자신의 몸을 더듬으면서 확인하려고 하지만 자아는 잦은 반성으로서 인하여 자꾸만 미래쪽으로 미끌어지면서 자아의 가치를 재해석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체가 아니라 ‘영혼’을 들고 나온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신과의 공유적 개념을 매개로 해서 자기 ‘영혼’을 불멸의 존재로 상정하고, 자아는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루면서 거기에다 실어보자는 것이다. 영혼이 살아있다면 거기에 몸을 덧붙여서 자아를 산 채로 (자율적 행위 결정권을 보장받은 채로) 미래 속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다는 아이디어다. 그렇게 되면 현재의 불가역성마저 수정 가능한 것이 되고 현재를 바꾸어서 미래마저 바뀌게 하는 시도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아이디어는 자아 속에서 ‘영혼’이라는 계정을 따로 장만하는 회계장부를 만드는 방식을 도입하는 것이다. 아직 자신이 살아있다는 의미를 살아있는 몸만 만지면서 확인해 볼 수 있다고 우기기 때문이다.각주7)

다니엘서의 묵시에는 이점을 달리 처리한다. ‘죽은 자의 부활’ 사건으로 설명한다. 즉 책에 명단이 있지 아니하는 자는 그 어떠한 자라도 미래의 ‘인자 나라’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포로 잡혀 온 유대나라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유대나라 사람이라고 해서 다 회개하여 ‘인자의 나라’에 참여되는 것이 아니라 다니엘과 같은 새로운 층위에서 죄와 세상을 새롭게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다니엘은 금신상을 꿈의 내용으로 알려준다. 금과 은과 놋과 철과 철과 진흙의 혼합물로 된 신상이다. 그런데 그 신상은 결국 땅에 엎어진다. 역사 위에 엎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로서’ 땅 위에 엎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이 땅의 세계는 우상을 그렇게 넘어뜨리는 묵시의 위력이 작렬하는 범주에 예속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우상을 공격하는 돌이 되는 식으로 출발한 새로운 나라는 역사 자체를 없애버리는 나라다. 즉 비역사적 나라인 것이다. 신상이 엎어지므로서(세워진 금신상은 그 자체로서 의미 없다) 느부갓네살에 찾아들었던 꿈의 계시(啓示)는 더 이상 신상과 ‘인자의 나라’에 그 어떤 시간적 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맞닿아있으면서 신상이 덮친 그 역사적 시간관을 따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 ‘인자의 나라’에 합류될 자들은 엎어진 신상의 역사를 통해서 특정 나라가 어떻게 망했느냐가 아니라 도대체 어떤 시간관이 남은 모든 제국을 바벨론 제국화시켜서 망할 수밖에 없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을 짐승화시키게 하는 시간관이 그동안 지배해 왔던 것이다. 느부갓네살과 다니엘의 두 번째 만남에서 느부갓네살은 졸지에 짐승이 된다.(단 4:16) 원래부터 느부갓네살은 하나님 보시기에 짐승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의 본질을 말해주는 특별한 질적  시간이 일곱 때, 7년으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느부갓네살이 제작한 금신상은 곧 자신의 본질을 나타낸 신상이 되고 그 신상은 곧 ‘짐승의 존재’가 하나님으로부터 유일하게 허락받는 기간인 7년의 시간성에 잠긴 상태다. 묵시가 역사를 족쇄 채우는 것이다. 

쉽게 정리해서, 아무리 인간역사가 길어도 하나님 보시기에 7년에 불과한데 이는 그들이 짐승이기 때문에 자신의 짐승임을 분명히 드러나는 기간이 하나님의 시간대에서 7년이면 충족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점을 모르고 자신들을 서로서로에 의해서 조작한 인간상을 뒤집어쓰고서 ‘인간으로 행세’해 왔으며 그 증거가 바로 시간을 길게 끌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시간적 바벨탑을 영원까지 연장시키면서 희망을 품고 살아가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런 시간관을 통해서 인간의 짐승됨을 표현해주고자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에게 꿈을 꾸게 했던 것이고 왕은 해몽이 없이는 못 견디게 되어 인자되는 지혜자 다니엘을 초빙케 한 것이다.

여기서 ‘7년’이란 피조물이 피조물로서 움직이는데 모자람이 없이 충분한 시간을 뜻한다. 쉽게 말해서 7년이란 곧 피조물의 기능을 충족시키는 하나님의 ‘창조의 단위’가 되기에 이 7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마음껏 피조물의 피조성에 대해서 책임을 묻을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종말조치는 정당하다. 짐승이면 짐승으로서 얼마든 그 시간 안에서 다 발휘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조치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세기 2:1에 나오는 ‘7일만의 완성’은 그 층위를 피조물 세계에 머물러있지 않고 하나님의 자리로 이동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피조세계는 7일의 반복이 아니라 7일의 확대로서의 세상이다. 안식일이란 어디까지나 시간적 그림자로서만 작용하지 그 실체는 위에 있다.(“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의 있는 것들의 모형과 그림자라” 히 8:5)


4. 70 이레의 의미

70년 포로 기간은 7일이라는 원래 창조완료 시간과 70이레라는 확정된 종말의 날 시간대 가운데 끼어서 그 창조성을 종말까지 전달하는 매개구실을 하게 되고 이 매개구실은 새로운 몸이 필요한데 그 몸은 ‘포로로 잡혀 있는 백성들과 함께 계시는 의로운 인자 같은’ 이를 통해서 가능하다.

창세기 1장에 나열된 창조성은 궁극적으로 한 몸을 지향해서 진행되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몸’의 창조다. 하나님의 형상은 창조대상이 아니다. 원래 계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몸은 창조 속에 포함되고 원 창조의 일관성 있는 노선을 따른다. 이렇게 되면 창조된 모든 것들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분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5-17)

시간이란 이 몸을 따라붙는다. 몸이 없는 곳에는 시간은 없고, 시간이란 오직 몸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시간을 통해서 숨은 몸이 지상에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간은 날이나 년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레에 따른다. 이레는 7일이나 7년으로 분해될 성질이 아니다. 그렇게 풀이해서도 아니 된다. 왜냐하면 기존의 짐승적 시간의식을 공격하고 붕괴시킬 원창조를 나타내어주는 시간적 형식으로 쓰이는 창조적 단위이기 때문이다. cm 거리단위를 c +m로 나눌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이레와 해(年)의 차이성을 견지해 주어야 ‘이레' 시간단위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몸과 만남이 성사된다. 문제는 왜 인자 같으신 분이 자신의 원창조단위를 다니엘에게만 알려주었느냐 하는 점이다.

그것은 70이레는 두 개의 관절을 각주8) 가지고 세 구문으로 나누어서 의미를 나타낸다. 즉 70이레=7이레+62이레 + 1이레 이다. 70이레 계시를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알려주기 전에 먼저 다니엘은 70년 포로 시간의 의미를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 있었다. 즉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을 끼고 있는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와 달리 ‘죄’의 의미가 되돌아와서 덮쳐지는 민족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범죄함’이 무엇인지를 유일하게 아는 민족이 바로 다니엘이 속해 있는 이스라엘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특히 다니엘은 ‘죄를 앎’이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유일무이하게 이스라엘에게만 ‘죄에 대한 속죄의 은총’을 아는 민족이 되게 하는데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속죄의 은총은 두 번 다시 죄가 생겨나지 못하게 만드는 장치가 장착된 속죄라는 점에서 ‘영원한 속죄’가 되고 이 의로운 은혜를 입는 자만이 진정 회개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단 9:18-19)

이런 기도 이후에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70이레 계시가 주어진다. 바로 이 70이레란, 어떤 역사적 과정을 경과해서 역사 속에서 영원한 속죄의 은혜가 생산될 수 있느냐를 말해주기 위한 시간적 형식이 된다. 초점은 끝머리 1이레에 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단 9:24) 여기서 영속(永續)이란 영원히 속죄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70이레에 대한 해석은 다니엘의 70년 포로 기간과 보조를 맞추어 이루어져야 한다. 다니엘 9:7에 보면, “주여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치는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과 같아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과 이스라엘이 가까운 곳에 있는 자들이나 먼 곳에 있는 자들이 다 주께서 쫓아내신 각국에서 수치를 당하였사오니 이는 그들이 주께 죄를 범하였음이니이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바로 1 이레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성읍과 성소가 훼파하려니와” 단 9:26) 무엇이 같은 점이냐 하며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훼파케 하신다는 점에서 다니엘이 기도 가운데 깨달은 것과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부응해서 정리해주신 창조의 단위로서의 70 이레가 보조를 맞추어 연결된다. 그렇다면 가운데 있는 62이레는 별 의미가 없다. 즉 62이레는 7이레와 1이레의 간격을 나타내기 위한 설정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70이레는 두 개의 관절(절단점)을 가진다. 기간을 말하기 위한 절단점이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사건의 층이 유지됨을 말하기 위해서 창조단위를 그렇게 배치해 놓은 것이다. 즉 사건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인자라는 호명으로 호출 받은 선지자의 자격으로 기도하는 다니엘의 기도가 응답이 되었는데 그 응답에 맞추어 하나님께서 일하시겠다고 나다나엘 천사를 통해서 통보해 오신 것이다. 이 작업을 위하여 역사는 계속 끌어가야 한다. 즉 왜 예루살렘에서 성전이 파괴되었는지, 무슨 차원에서 볼 때 이스라엘이 죄악이 우상숭배에 해당된 죄인지를 알리기 위해 성전은 다시 재건축되어야 하는데 그 질의 역사가 역시 종말까지 진척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7이레다.

실제로 건축구조물로서의 성전 복구가 포로 귀환민들에 의해서 진행된다. 그런데 그들의 성전은 이미 마감이 확정된 역사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전 건축이 되는데 그 이유가 바로 그 성전건축에 주도적으로 도와주는 배후 나라는 짐승의 나라, 바벨론 정신의 줄기에서 뻗어 나온 메데·바사라는 나라다. 하나님께서는 짐승의 나라의 도움으로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하신다. 

이것은 그 성전 중심으로 짐승의 나라를 전복시키고 진정한 인자의 나라를 세울 수 없음을 그리고 그 이후에 등장하는 헬라라는 짐승에 의해서 그 성전이 난도질당하도록 하신다. 다니엘 11장 보면, 남, 북 왕들의 자기네들 싸움을 벌이지만 본의 아니게 그 가운데 끼인 성전은 짐승의 성질에 의해 피해를 입게 된다. 포로 이전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역사적 상황을 되풀이하도록 연극 무대를 조성하신 것이다. 도대체 어디서 잘못되었으며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이 거주하신 그 성전을 파멸시켜야만 하는지를 알라야 비로소 죄를 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7이레에 벌어진 성전 건축은 인류 처음부터 망할 때까지 전 역사를 뜻한다. 인류사 전체가 연극무대였던 것이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농락당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었음을 알려주기 위해 일정 역사적 기간 동안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시 포로 생활마치고 귀환해서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재건토록 하신 것이다. 그것도 바벨론 제국의 일부라고 볼 수 있는 짐승의 나라의 후원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70년 포로 생활 마치고 귀환해서 성전 복구에 참여했던 자들은 성전의 세워짐과 무너짐을 한꺼번에 참여되는 기회를 갖게 되고, 그 무너짐을 통해 전에 다니엘이 알아챘던 그 70이레의 의미에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각주9) 즉 7이레가 전체 70이레에 포함되면서도 실은 7이레 자체가 독자적인 층위를 갖는 구조로서 자리 잡고 있고 그 7이레는 인류 전체사를 다 커버하는데 실제 성전 재건립 작업에 소요된 역사적 기간은 사건이 터져 나온 구멍으로 자리 잡고 있다.각주10) 하지만 그 구멍이 소요한 시간이 어느 정도냐 하는 것이 사건 이후에 새롭게 정립된 주체 인식에 따라 각기 달라진다. 최종 주체, 최종 몸은 오직 다니엘 7:13에 나오는 ‘인자人子같은 이’다.

즉 사건이 터진 기간과 사건이 적용되는 기간은 다른 것이다. 사건이 터진 기간조차 그 사건을 받아들이는 몸에 따라 얼마든지 천년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단 하루로 이해할 수가 있다. 누가복음 9장에 나오는 변화산 광경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점을 가질 수 있다. 즉 엘리야가 오래 살고 있을까 아니면 모세가 오래 살고 있을까? 비록 지상의 생은 따로따로지만 천국에서 수명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다. 죄가 영원히 제거되므로서 죽음이 영원히 제거된 상태이기에 예수님의 생명에만 적용받는다. 그 누구도 수명도 영원하다. 하지만 엘리야가 살았던 역사적 시간대가 따로 있고 모세가 살았던 시간대가 각자 존재한다.

땅에서 보면 묵시 세계의 현상이 사건으로 보이지만 묵시의 세계에서 보면, 역사적 시간 속의 생활이 한 경점에 지나지 않는 사건에 불과하다.(시 90:4) 주체, 혹은 몸에 따라 사건을 포착시키는 시간대는 각자 다르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자아라는 주체는 일어난 사건을 차후적으로 해석하는 가운데 차후적으로 시간 속으로 정립되기에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면 거기에 따라 주체, 즉 자아의 몸은 새로운 인식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주체가 아니라 몸이다. 사도 바울의 몸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의해서 땅에 엎드렸다.(행 9:4) 몸과 몸의 만남이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에게 신학적으로 한 수 배운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몸이 육이요 악이 창궐하는 몸인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몸은 주체나 자아가 손을 쓸 수가 없다. 자아나 주체는 그저 자아의 주체성 조절만 수시로 해나갈 뿐이지 결코 죽고 썩을 몸을 썩지 않는 몸으로 변화시킬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자아가 납득이 되는 역사성을 썩을 몸을 가지고 배출하고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묵시적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한 몸의 영광으로 흙에 속한 몸을 공격하는 사건이다. 이러한 묵시적 사건에 의해서 논리상 차후에 정립된 주체관에 의해서 역사를 바라보면, 요한계시록 7인, 7나팔, 7대접도 역시 역사 전체를 덮는 시간이 된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 역사적 시간으로 기간을 정할 수 없는 사건들이 가득 담겨 있어 하나하나의 사건들의 시간적 길이를 합산해서 전체 역사적 시간대를 도출해 낼 수는 없다. 이것은 예수님의 종말에 관한 예언을 풀이하고 해석하는데 마찬가지 원리로 작용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며는 묵시적 사건이 인간들이 고정된 주체를 가지고 일으킨 것도 아니요 고정된 주체관을 용납하면서 예수님께서 일으킨 사건도 아니라 사건을 통해서 그 사건을 해석하고자 시도하는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해석관 자체를 ‘육’이라고 부정적으로 규정시키는 작업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영선수가 헤엄치는 것을 속도를 따라잡으면서 동시간대에 움직임을 찍어대는 카메라가 있더라도 수영선수가 수영을 하면서 수시로 그 카메라를 부셔버린다면 그 수영선수가 한 모든 행위는 전혀 그 카메라가 포착할 수 없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인식에 한계를 느끼지 못하는 한계를 갖는다.

70이레 가운데 마지막을 장식하는  1이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1 이레는 자체적으로 또 하나의 절단지점을 가지고 반 이레와 반 이레로 나뉘게 되는데 역사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를 뜻하면서도 그 예수님의 신분이 ‘인자 같은 이’로서 묵시적 존재로서의 ‘인자’이심을 감안한다면 전 인류 역사를 커버하는 1 이레가 된다. 그러면서도 7이레 위에 놓여있는 층위가 되는데 그것은 금신상을 엎어놓으면 역사가 되고 다시 세워놓으면 모든 역사를 커버하는 묵시적 사건으로서의 ‘금신상 만들기 사건’으로 자리 잡는 것처럼, 70이레라는 역사적 형식을, 하나님이 보좌라는 수직적 하는 꼭짓점과 연결시켜 곧추세우면 층이 구분되는 식으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 개의 층, 즉 제일 아래층에 자리 잡은 7이레라는 층은 비록 ‘성전 재건축’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품고 있으나 그 역사 자체가 1 이레층의 입장에서 보면 ‘묵시적 사건’이라고 규정할 만한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7이레가 지닌 역사는 인류 전체 역사를 대변해주는 묵시적 의미층으로 작용하게 된다. 바로 그 윗층이라고 할 수 있는 62이레의 층도 ‘7이레’ 묵시적 사건에 대해 역사적 조치로서 자리잡은 역사기간을 가지지만 제일 윗층인 1 이레의 층에서 보면 그러한 역사적 기간도 하나의 ‘묵시적 사건’으로 응축될 수 있으며 이 ‘묵시적 사건화’로 인하여 아래층인 7 이레층이 전체 역사를 덮고 있는 묵시적 의미를 새삼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해명해 낼 수는 위치에 있다.각주11)

역사가 다시 묵시화되면서 이동하는 예언 성취의 그 최종 도달층은 선재하시는 몸이신 인자가 계시는 1 이레 층이 된다. 1 이레 층에서 보면 밑의 두 층의 역사이해는 한계를 갖고 있다.각주12) 최종적 비밀은 ‘어린양이 보좌’에서 뿜어져 나온다. 7인을 떼어서 역사적 내막을 묵시적해석할 자격자는 다윗의 뿌리인 예수님 뿐이다.(계 5;1-5) 1 이레층도 예수님의 공생애라는 역사적 사건을 품고 있으나 그 묵시적 신분으로 인해 ‘처음이요 나중’으로서의 몸으로(계 1:8) 전체 역사까지 연장시킬 수 있는 그림으로 묘사될 수 있다. 그 가운데 있는 62이레는 제일 밑바닥에 있는 7이레라는 역사적 사건과 1 이레라는 예수님의 사역 사건을 역사적 시간 형식으로 묘사한 그 층과의 간격을 독자적인 역사적 시간대를 가지고 흘러갔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로서 70년 포로 시간에 합류한 인자(人子)의 다니엘은 ‘70⇒1’로 나아가는 것을 깨달았다. 즉 70년 포로 잡혀간 그들이지만 그 시간적 의미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한 분, 인자 같은 분에게 종속된 ‘인자의 나라’의 백성으로 자리 잡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였음을 알았던 것이다. 


Ⅲ 결 론

다니엘을 비롯해서 모든 인간은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51:4) 하나님께서 이 죄를 더욱 죄로 드러내기 위해 사건을 투입하셨는데 그 사건 하나하나가 다 시작과 종말을 지니고 있는 사건들이다. 그런데 그 사건을 맞이하는 인간들은 자기 몸 중심의 시간관을 고집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시간이라는 것이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처 미래로 흘러간다는 것이다.각주13)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자기 몸이 이해하기 위해 설정해 놓은 이런 시간관 안에서 파악하는 것이라서 ‘지나감’과 ‘소망’ 사이에 자기 몸을 배치한다. 그리고 자기가 자신을 구원해내기 위해 자신의 몸을 관리하고 지식을 집어넣고 조정하려 한다. 바로 이런 태도가 악의 본질과 연결된 근성이다.

성전이 훼파되고 난 뒤, 유대나라에는 나름대로 조상과의 연속성을 지탱하고자 에스라나 느헤미야가 했던 바를 모방하면서 (“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 느 8:8) 말씀 중심의 유대주의로 구원에 대한 소망을 쌓아나갔다.

하지만 예수님이 70이레의 성취를 위해 그들은 짐승의 앞잡이가 되어야만 한다. 뱀은 땅에서 올라오는 저주를 신체화시켜 흡수하면서 뱀답게 살아가듯이, 이들 저주받기로 작정된 자들도 정신적으로 철저히 역사적 해석으로 무장되어야만 했다. 땅의 미래에 기대를 거는 식으로 주체를 미래로 밀어가고 있었다.각주14) 달리 말해서 자기 행함에 미련을 두고 있다는 말이다.

70이레의 완성은 인자되시는 예수님의 묵시적 몸에서 이루어지기에 그동안 땅을 지배한 배후의 영적 존재도 인자의 등장에서 역사에 등장되게 된다.각주15) 그래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1 대 1 대결구조는 주변에 역사적 해석으로 둘러싸이는 가운데 진행될 필요가 있었다. 묵시는 그 역사적 해석으로 인해 핍박받는 몸 중심으로 해석되어지기 때문이다.  

 말씀 해석은 역사적 몸과 묵시적 몸 사이의 마찰이다. 유대인들은 “나사렛 예수는 이단이다”는 점을 확실하게 대중들에게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세간살이에 비유하셨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마 12;29) 천국이 이루어지든 아니 이루어지든 상관없이 ‘세간살이’라는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세간이란 개인적으로 법을 다룰 수 없는 입장이다 는 말이다.각주16)

오히려 천국은 인간의 ‘세간살이’ 신세를 영적인 구조 속에서 확실히 한다. 이런 식으로 묵시의 몸은 인간을 용서하지 않으시면서 용서를 적용시키신다. 용서 안에서 성도를 늘 배태해내시기에 성도의 모든 행위를 용서치 않으시는 것이다. 그것은 70이레의 성취를 묵시적 선물로서 나타내기 위해서 그 선물의 수혜자도 함께 출몰해야 하는 이유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 3:27) 

모든 것에 ‘선물’의 취지가 살아나기에 성도의 존재는 하나님께서 사로잡힌 신세가 된다.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6)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엡 4:8)

이 선물은, 예수님 홀로 성취해 내신 말씀의 전부이다. 곧 예수님의 행하심이다. 그래서 모일 때마다 주의 이름의 공로만 찬미되는데 이것조차 말씀에 성취성이다.(막 14;49) 이 성취성이 몸을 관통하면 인간은 안개가 된다.(약 4;14) 이처럼 모든 것은 묵시에 갇혀있다. 묵시는 은유적으로 땅의 역사를 취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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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脚註

1) 다니엘 드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에서 크루소는 무인도에서 원주민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이름 없는 그 원주민에게 ‘Friday 금요일’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그것은 크루소가 그 원주민을 만난 요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금요일’이라는 의미는 원주민 주체입장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이름을 붙여준 크루소에게만은 의미가 새로이 발생되는 관계다. 이처럼 호명을 당한 자는 호명하면서 다가온 분에 의해서 비로소 주체가 발생되는 것이다. ‘베드로’나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같은 이치다(시 135:4)

2) 다니엘 70이레 해석에서 기본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은, 인간의 주체성 정립에 있어서 독아적(獨我的)인 성격을 지닌다. 여기서 독아적이란 자기 혼자 밖에 없다는 의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타당한 것은 만인에게 타당하다는 생각을 말한다. 그러나 타자는 늘 홀연히 주변에 나타난다. 이 타자는 순간적으로 내면화될 수 없는데 여기서 주체는 시차적(視差的적) 관점을 나타낸다. 지시와 명령과 법이 주체에게 주어지면 주체는 시차적(視差的)으로 자신을 대상으로 삼아 재관리에 나선다. 시간 의식을 지니고 있는 주체는 시차(時差)에 의해서 영원히 이 시차(視差)적 관점을 극복 못하고 틈을 드러나는 주체상으로 계속 이어진다. 따라서 질적 차이를 허용하면서 시차의 공존을 인정하는 새로운 주체관이 마련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질적으로 불가능한 것들 사이의 공존을 허용하는 공간으로 주체를 이해하는 것이다.  즉 ‘나 구원을 위한 구원관’ 입장에서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다루어지면서 드러나는 구원관을 수립하는 것이다.  

3) 옐름슬레우에 의하면, 기호는 그 자체로서는 의미가 없고 기능으로 작용하면서 의미가 발생된다고 보았다. 기호 기능의 작동은 ‘내용’과 ‘표현’면으로 드러나면서 진행된다. 이럴 경우에만 기호는 실체와 연관된 채 제구실을 할 수 있다. 실체와 연관되지 아니하는 기호라면 실제성이 상실되고 허무맹랑한 무의미한 기호로 전락된다. 따라서 내용면에서든지 표현면에서든지 모두 실체와 연관된 형식으로 갖추어지게 된다. 들뢰즈는 이 방식을 도입하여 실체와 형식이라는 두 개의 의미층을 상정하고 각각의 충에 내용-표현의 관계를 구성시켰다. 이렇게 되면 의미는 인간의 주관성에서 벗어나 물질 자체가 뿜어내는 의미에 합류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피’라는 것을 단순히 ‘거룩한 희생’, 혹은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이라는 대체 의미로 풀이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왜냐하면 왜 하나님께서는 꼭 예수님의 그 ‘피’만을 요구하시는 이유가 밝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새언약은 피언약이다. 피라는 실체성이 없이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진정한 의의도 사라진다.

4)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에로 와서 마려고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리 흘러나리라“(요 7:37-38)

5) 이미 천국에 들어온 작은 아이보다 선지자들은 더 아는 것이 없다.(마 11:11)

6) 묵시란, 종말을 품고 다가선 먹구름 같다. 이 종말성으로 인해, 과거를 답습하는 것으로 계시의 효과를 줄곧 소장하고 싶어하는 의식은 자신의 근원마저 최종 묵시에 노출시킨 적이 없는 태도로 들통난다. 즉 주체와 묵시와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는 주체의 지속적인 긍정을 포기하지 않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말씀이 지닌 묵시성(고발성=종말성)을 떨어져나가고 말씀을 시간의 순차적 용도로만 사용하게 된다. 이 지점이 바로 왜곡된 해석이 피어나는 지점이다. ‘역사적 필연성’을 위해 ‘말씀의 필연성’을 거절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니 은혜로 순응하라”는 식이다. 이런 해석은, 가공의 허구로서 묵시 앞에 노출되어야 될 그 주체를 도리어 과도하게 변호하기 위해 과잉된 해석들을 동원시켜서 주변에 배치시키게 된다. 즉 복음을 선택할 자율권이 구원받을 주체에게 있기에 압박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다른 복음으로 인하여 역사 안에서 묵시는 핍박받게 된다.   

7) 몸의 불멸을 보장하기 위한 방안으로 인간들은 ‘영혼론’을 창안했다. 몸은 비록 죽어도 자아의 동일성을 영원까지 실어서 보장받을 수 있는 하는 그릇으로 영혼의 존재를 상정한다. 문제는 물질과 영혼과의 관계였다. 과연 물질과 영혼은 어떤 식으로 영속성을 가질 수 있을까? 물질을 미세하게 자르고 또 자르면 과연 영혼화될 수 있을까? 물질의 끝자락에서 영혼으로 건너뛰기 위해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는 각기 다른 아이디를 내놓았다. 신의 존재와 그 능력에 기대를 거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냉철하고 합리적으로 파악하되 우리가 모르는 대목은 신의 몫으로 넘기자. 신은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면 된다”는 식이다. 스피노자는 “우리 자체가 신의 영원한 모양새로서 존재하고 변화하면 된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물질이 아무리 작아도 계속해서 쪼갤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물질마저 영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과거를 등에 업고 미래를 품에 안음으로써 스스로 확장된 지평을 지니는 개별적 자아 자체를 완전한 신의 창조물로 보면 아무 문제가 없다. 내가 나를 만드는 일이나 신이 나를 만드는 일이나 결국 같은 일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런 일을 하도록 신께서 이미 예정하시고 조화롭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나처럼 영원히 살아간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되면 신을 배제하고 나만 남아도 상관없는 셈이 된다. 이처럼 신의 존재를 배제하고 현재 몸을 가지고서도 몸의 영원함을 보장받는 아이디어가 제3시기 불교라고 할 수 있는 유식(唯識)불교에서도 나온다. 고통과 번민의 원인이 자아의식에 있음을 발견하게 자아를 없애서 무아(無我)로 전환하면서도 윤회설로서 자아의 영원성도 더불어 보장받을 수 있는 견해를 함께 수용하기 위한 설이 바로 종자(種字)설이다. 보다 고품질의 자아로서 영원히 윤회하기 위해서 종자라는 영혼의 씨앗에 선행이라는 업(행위)을 가미해서 빠른 시간 내에 윤회를 멈추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야 완성이라는 주장이다. 일종의 불교적 성화론인데, 수행의 단계는 41단계에 이른다.  이경호, 『〈成唯識論〉에서 본 유식사상과 화이트헤드의 과정 사상의 비교 연구』, 2007년도 감리교신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51   

8) 관절은 ‘단절’과 ‘절단’의 의미를 지닌다. ‘절단’은 역사의식을 쪼개어서 느부갓네살왕의  경우처럼 도저히 예상 못할 돌발적인 사건이 그 쪼개진 틈을 통해 역사 지평 위로 실체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단절’이란 그 방출된 계시가 역사적 의미들을 벼랑까지 밀어붙이므로서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마음이 있어도 깨닫지 못하는’ 상황들을 확대시켜 나가는 시도를 의미한다. 즉 코끝까지 성경 글자를 들이대고 수천 번 성경을 보고, 필사를 해도 비밀은 여전히 노출되지 않은 채 역사 세계를 공격하겠다는 묵시적 의도를 말한다. 전도란 십자가 도를 전하는 것으로서 ‘이것이 복음이니 믿으세요’라는 식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전한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는다’는 식으로 전달되게 된다(갈 1:8) 즉 ‘다른 복음’이 뭔지를 겸하여 모르고 정리되지 못하면 여전히 복음을 모르는 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적으로 이단들이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복음도 얼마든지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십자가’로 변질된다.(고후 11:4) 그래서 복음은, 복음을 접수하는 주체 내부에 편절(片節)을 야기시킨다. 즉 복음은 소유용이 아니라 소유 당함 이외의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한다.     

9) 70이레에 대해서 역사적 해석을 고집하는 자들의 의도는, 어떻게든 유대공동체를 ‘이스라엘의 남은자’로 인정해주어서 하나님의 언약의 일관성과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 약속보장의 영속성의 흔적을 이들의 역사적 존재성에서 이끌어내기 위함이다. 그들 생각에, 이것이 담보되어야지만 후기 선지서의 편집을 둘러싼 정치 사회적 배경과 더불어 그 선지서 내용이 윤곽이 드러나고, 비밀로서만 회자되는 묵시문학의 내막이 역사적 근거를 확보하면서 납득이 가능한 해석지평으로 끄집어 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께서 유대공동체의 존재를 긍정하는 식으로 대하신 것이 아니라 아예 ‘공동체 죽음’을 요구하신 것을 알지 못한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8장에서 말씀하시기를,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즉, 천국의 본 자손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천국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하셨다. 유대 공동체는 짐승의 세계에서 야기된 짐승의 결절(結節) 현상이다. 즉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땅과 씨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지상 권력을 구체화하면서 자체적으로 정당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정치적 명분이 실은 지상에서 벌리는 짐승의 활동과 연류되어 있다. 짐승이 정치적이고 법적인 지배를 통해서 거룩 생산에 나서게 되는 취지는, 인간의 주체(자아)란 실은 영적 다스림의 성격을 드러내는 기능점으로서만 발현되기에 그러하다. 권력이 ‘실체없는 효과’로서 작용하는 이유는, 인간이라는 이름의 주체자들이 자신의 허한 주체 공백을 메우기 위해 타인의 절대적 욕망에서 그 대상을 찾기 때문이다. 인간이 곧 괴물이다. 짐승의 실체 노릇을 한다.
 
짐승이 노리는 점은 분명하다. 정치적 권위로 위장한 영적 지배다. 그래서 권력조직을 지향하는 모든 종교집단은 짐승의 결절이라고 할 수 있다.(고후 11:13-20) “저희는 양의 탈을 쓴 악마 나라의 직원들이다… 너희들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잘도 용납하는구나”  결절, 곧 갈라짐이란, 발뒤꿈치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각질과 같은 것으로서, 짐승의 내부 속성이 자꾸만 표면화되는 올라오는 현상을 말하는데 곧 정치적 면으로 등장하는 영적 발현체를 말한다.

거룩한 가치를 사수한다는 명분으로 정치적 권력 집중화를 정당화하는 것은 특정 주체자의 영적 효력을 특화시켜 숭배케하는 짐승의 속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이 된다. 비록 뿔과 뿔 사이에 끊임없는 다툼이 일어나더라도 (단 7:7-8) 그들이 노리고 또한 보여주는 것은 숨겨진 있는 짐승의 속성이다. 그 속성은 바로 일괄성으로 움직이는 영적 집중성을 보여준다. (모든 인간들이 은근히 희구하는 표준적 인물을 그들은 지상에서 눈으로 목격하기를 바라고 있다. 악마의 영적 지배의 효과들이다) 땅의 역사 자체가 이런 집중성 있는 시간들로 소비되면서 짐승의 특정 목적성을 드러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대신한 그리스도 행세이다. 묵시는 이점을 놓치지 않고 그 목적에 동반승차하면서 짐승의 실체를 드러내면서 고발한다.

유대공동체가 갖고 있는 이와같이 권력 집중성을 발휘하는 짐승적 특이성으로 인해 유대나라를 압박하는 이방민족과 말씀을 사이에 두고 대척점을 형성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동일한 목적(권력이란 허구가 보여주는  효과=영적 지배)을 지향하면서 같이 움직인다.

예수님이나 세례 요한이 상대하는 유대집권층은 그당시 유대공동체 전체를 상징하는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아비를 악마로 보았다. 그들은 뱀의 자식들이다. (요 8:44/마 23:33) 그들은 본인들도 천국을 가지 못하면서 천국가려는 자들까지 막는 자들이다.(마 23:14) 역사적 해석의 결과로 자칭 남은 자로 간주하는 이들 유대공동체의 손에 예수님이 피살되므로서 새로운 해석이 ‘인자’라는 묵시적 몸에 의한 묵시적 해석이 전 역사를 소급해서 적용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단 유대라는 이름의 공동체적 나라와 다른 짐승의 나라의 차이점은, 하나님의 말씀의 수혜자라는 입장이 곧 하나님의 백성됨을 증명하는 역사적 혜택임을 자부하면서 나름대로 종교적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형식으로 말씀을 적용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다. 즉 예언과 권력집중화 현상을 엮어서 실제로 지상에 권력체를 건립할 수 있는 ‘가공의 허구’의 장(場)을 성사시킨 주체자들이 되므로서 모든 정치적 다스림은 실은 배후에 종교적이고 영적인 이상(理想)체 실현과 관련된 ‘영적 전쟁’의 단면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었다.(요한계시록의 테마)  

예수님은 이런 현상을 묵고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부르짖는 ‘하나님 나라’라는 유토피아 실현을 부정하므로서 그들이 품고 있었던 짐승의 속성을 직접 메시아의 죽음과 관련 있음을 증명하려고 하신 것이다. 즉 짐승의 속성이 가장 급속히 접근하는 방법으로 예수님은 유대공동체를 상대자로 삼으신 것이다. 유대공동체와 마주쳐서 발췌된 악마성은 전체 역사적 지평으로 확산된다. 종교적 성격을 지니고 땅의 세계는 ‘색출의 현장’이 된다.  영적전쟁의 주력들은 자기 사람들을 호출해내면서 자연스럽게 세상을 두 조각낸다. 이 때 각자의 세계에서 내민 고른 시간판이 사용되는데 고유의 역사관 끝에 종말을 매달므로 서 주력 단체의 호황 여부에 따라 종말의 시점은 자꾸만 역사 끝에서 변동이 일어난다.  

이런 경향은 유대공통체뿐만 아니다. 성전 재건과 관련된 7이레의 특정 연도를 시간선분 상에 찍어두므로서 그 확실한 사건을 근거로 해서 62이레의 구간과 1이레 시점을 분명히 측정할 수 있다고 유대공동체의 그 다음 활동상에 주목하려는 시도는 바로 다니엘 이후에 유대공동체의 처신과 한 통속임을 자진해서 고백한 것에 불과하다.

이들 역사적 해석의 과오는 말씀 해석에 있어 과거에서 미래로 쳐 올라오는 식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1이레가 확고하면 그다음 62이레의 기간과 1이레의 기간과 확실하게 점찍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1이레 시점을 예수님의 출현과 관련지으려는 기독교적 견해를 고수하는데 있어 무리가 발생하게 된다. 70이레 해석이 전반적으로 교착상태에 빠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떻게든 유대공동체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인정해주어야지만 이스라엘 회복과 메시아의 출현 사이에 계시적 연결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태복음 1장의 족보나 누가복음 3장에 나오는 족보는 결코 언약완성의 파트너로서 유대공동체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식으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혈통이라는 노선 내부에 흐르는 해석은 인간의 역사의식과는 정반대 흐름으로 진행되는데 해석을 관장하는 내용은 십자가, 부활 사건층에서 자꾸만 유입되어 거꾸로 흐른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느니라”(벧전 1:10-11)  

10)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을 받는 수동적 언질(단 9:25)이 주체의 동일성 지향 작용으로 필히 능동적 기획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수동성은 다음 행위를 위한 주관성 속으로 녹아버리면 그 결과로 나오는 것은 주체의 능동성이다. 이 능동성으로 인해 ‘타인의 자리’는 주관정립을 위한 기억으로만 재생된다. 하지만 ‘타인의 자리’는 주체에 질식당할 자리가 아니다. 도리어 새로운 사건 돌출의 장소로서 활용되기 위해 구조잡힌 것이다. 상황의 구조가 상황을 장악하지 못한다. 상황은 불가피하게 움직인다. 초과분이 있었던 것이다. 이로서 이스라엘은 묵시를 견뎌내지 못하고 사라짐과 동시에 이스라엘이 세워놓은 역사적 종말론도 당연히 함께 부정된다.

주석가들은 70이레의 첫 번째 마디를 장식하는 7이레의 시점까지의 기간을 70이레 안으로 들여와서 장착하게 되면, 그 확실한 역사적 실재성으로 인해 나머지 70이레 전체 의미도 역사적인 반증을 갖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이로서 7이레의 시점까지를 정하는데 여러 가지 이론들이 제시된다.

최만수는 70이레가 시작하는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말씀을 주전 538년 다리오/고레스 칙령을 두고 말한다고 했다. 『Pro Ecclesia』 Vol 7. No.2 (서울: 프로에클레시아신학회, 2008), 92

崔永憲은 『단 9:24-27 “70이레” 해석』(아세아연합신학대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9)에서 여러 주석가들의 7이레 시점의 견해를 소개해주고 있다. pp.13-20

칼빈은 처음 7이레를 49년으로 여겨서 고레스의 칙령에서부터 다리오 6년까지로 보았다. 그리고 그리스도 세례까지를 62이래로 보았고, 주후 70년 성전 파괴까지를 1이레로 보았다.    

카일(C. F . Keil)과, 류폴드 (H. C. Leupold)의 견해는, 주전538년 고레스 칙령에서부터 시작해서 에수님의 초림까지를 7이레로 보았으며 신약시대 전체를 62이레로 보았고, 재림 전 환란 때를 1이레로 보았디.

몽고메리(J. A. Montgomery)와 포르튀우스(N. W. Porteous)의 견해는 주전 587/6 예루살렘 멸망부터 시작해서 539/8년의 바벨론멸망 및 고레스 칙령 까지를 7이레로 보고 있는 견해다.(18페이지) 그래서 171/0년 안티오쿠스 아니아스 3세의 살해 까지를 62이레로 보고 있고, 164년 성전 재봉헌을 마지막 1이레로 보고 있다.

헹스텐베르그(E. W. Hengstenberg), 하젤(G. F. Hasel)의 견해는, 주전 457년 아닥사스다의 첫 칙령을 시작해서 408년 예루살렘의 재건까지를 7이레로 보고, 주후 27년 예수님의 세례까지를 62이레로 보고, 주후 34년 스데반 집사의 죽음까지를 1이레로 보고 있는 견해다.

영(E. J. Young)의 견해는, 주전538년 고레스 원년을 기점으로 하여 에스라 느헤미야의 사업의 완성까지를 7이래로 보고, 예수님께서 언약을 굳게 하신 시점까지를 62이레로 보고,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성전에 나타날 때를 1 이레로 보고 있다.     

최영헌은 70이레의 시작점은 다음 네 가지 설로 압축한다.
첫째, 주전 538/537년 고레스설인데, 약점이 있다면, 고레스 칙령은 예루살렘 중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성전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둘째는, 주전 520년 다리오 1세설인데 중단된 성전이 새로 개시한 시기를 말한다. 약점은 여전히 예루살렘 성읍 재건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세째는, 주전 457년 아닥사스다 1세 7년설이다.(하젤의 견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시기다. 이 계산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신 주후 27년과 490년이라는 태양력 시간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넷째는, 주전 445/444년 아닥사스다 1세 20년 설이다. 느헤미야가 귀환한 시기다.    

간하배는 주전 538년 고레스원년을 70이레의 시작점으로 보는 건해를 내어놓았다. 『다니엘서의 메시야 예언』(서울:개혁주의신행협회, 1984), 201.

이희락은, 예레미야 30:18에 근거하여 70이레의 시작은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부터 메시아(기름부음 받은 지도자)가 나타나는 오니아스 3세까지를 7이레 기간으로 보고 있다.  『성서주석』,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4), 440.
  
이처럼 70이레에 담긴, 역사적 내용들은 (예루살렘 중건하라는 영 하달, 기름부음 받은 왕의 등장, 기름부음 받은 자 끊어짐, 성읍과 성소 훼파, 언약 굳게 함, 제사와 예물 금지, 종말이 될 때까지 하늘의 진노가 황페한 자에게 쏟아짐) 자기 시대 환경에 속한 자들로 하여금 자기 시대의 해당되는 묵시로 해명하게끔 되어서 그 자체가 부정적으로 묵시에 접목되는 계기로 작용한다. 곧 회개해야 될 죄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주체는 끊임없이 역사층과 묵시층에 관한 아이디어들이 쏟아내고 있다. 이로서 종말론은 인간의 주체적 삶을 구성하는 본질임이 드러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이런 종말론을 십자가 피의 역사(役事)로서 부정하시므로서 참으로 종말을 감행하신다. 불결한 몸에서 나오는 종말론도 불결하기 마련이며 거룩한 피를 모독하는 것이 된다. (히 10:29)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롬 3:4) 인간의 몸으로 구성되는 주체의 반발심은 만만치 않아서 인간 몸의 일반성에서 벗어나 자기 몸의 영원한 보편성을 추구하면서 초월적인 타자(신)과 초월론적인 타자(본인의 욕망을 야기시키는 미지의 타자)를 구분하고 간격을 남겨두므로서 유한성 속에 무한성을 안치한다. 그래서 인류는 묵시(=신의 계시)에 근거해서 정당한 역사를 이루어나가기 위해 애쓰면서도 동시에 언젠가 그 역사를 한꺼번에 와해시켜주어도 상관없는 신선하고 거룩한 묵시적 사건을 고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대감은 늘 묵시냐 역사냐는 허상적인 양식 사이를 오고가면서 현실과 조율에 나선다. (묵시에는 축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주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주가 자신들에게 임하기를 요청하지는 않는다. 묵시에 대한 수상한 기대감이다) 하지만 이러한 동경이 죄가 될 줄이야! 이러한 소망심이 악마의 성품으로 규정받게 될 줄이야! 사람들은 묵시적 사건이 이런 주체를 죄라고 규정하면서 찾아오심을 상상조차 못한다.

도리어 하나님의 메시지가 환란과 역경 속에서 미래를 소망하는 자들을 위해 견뎌낼 수 있도록 참고될 만한  흔적을 역사 위에 뿌려준 것이라고 여기고 일반적으로 납득이 될 수 있다는 사건과 사건 사이에 필연적 원인 요소를 집어넣는다. 그렇게 해서 ‘계시 공백(구멍)’이 생겨나지 않으려 한다.   

11)  다니엘 시절의 다니엘이 예언해 둔 역사 진행은, 다니엘이 해석했던 그 해석에 대해 다음번에 전개되는 핍절한 유대역사 내에서는 자기 시대에 성취되어서 적용되는 예언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런 해석 자체가 그 시대의 역사를 형성하면서 그 역사 자체가 또다시 나름대로 차기 시대의 해석이 요구되는 선행 묵시적 예언 사건으로 굳어진다. 이것을 일직선분으로 묘사되는 시간관에 비추어보면 한 직선 위에서 ‘완료-미완료’, 혹은 ‘이미- 아직’이라는 모순을 지점을 찍어가도록 만드는데, 이 모순 자체가 시간의 한계 때문에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자신의 몸을 구성하는 역사적 시간관을 고수하는 가운데서 예수님의 몸을 위한 시간성을 받아들이는 무리(無理)에서 비롯된 것이다. 네델란드 신학자 헤르만 리델보스를 비롯해서 개혁주의적 성경신학자들이 이해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해석 오류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적 시간관에 준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한 점에 있다. 『하나님 나라』, (서울: 엠마오, 1989) 하지만 그 역사관은 최종 묵시성취에 준해서 죄악되고 한계를 지닌 것으로 날마다 깨어지고 부정되어야 될 해석에 불과하다. 즉 십자가 복음에서 송출되는 ‘죽은 분’의 시간 잠식 능력을 그들은 아직 살아있는 몸을 가진 자신의 몸을 규정하는 용도로 시간을 설정했고 그 시간 위에 ‘하나님 나라’를 실으려고 한 것이다. 이들은 ‘날마다 우리는 죽음 몸’으로 변모 시키는 묵시적 완성도로서의 성령의 능력을 이해못한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1) 역사적 몸인 우리의 몸도 그리스도 안에서 묵시적 사건을 품은 몸이다는 해석에 날마다 내어주면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12) 계시를 무산시키는 죄악된 힘이 새로운 계시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된다. 주체세력마다 종말됨을 설정하는 임의의 시간들을 세상에 내놓게 되는데 이들 시나리오마다 ‘이미-아직’의 시차적 구성을 갖추어놓고 있다. 따라서 종말론적 구상들이 종말의 종말성을 부각시키는 것이 되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간적 특이요소에 주목케 하므로서 그리스도 몸의 묵시적 현존성을 훼방하기 때문이다.

13) 역사란 순서를 갖추고 정렬된다. 그러나 그것으로 주체에 입각해서 묵시를 파악하려고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로서 역사적 현장이 곧 묵시적 현장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묵시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 뭐든지 일어날 수 있는 현장이다. 따라서 묵시적 관점이란 주체가 역사를 부정하고 부순다고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묵시적 사건 안에 장악당할 때 드러난다.(고후 12:2 “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이 자체가 완료다

14) 마태복음 23:41-46에서 예수님께서 먼저 바리새인에게 시비거신 내용이 나옵니다. ‘다윗의 자손’에 관한 해석 문제였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한 말도 대꾸하지 못했다. 역사적인 해석이 교착에 빠진 것을 자인한 셈이 된다. 

15) 다니엘에게 인자(人子)라는 호칭은 몸과 공간의 결합을 의미한다. 다니엘이 보여줄 인자로서의 몸은 장차  인자라고 자처하시는 메시아의 몸과 일치된다. 이는 몸이 곧 공간의 가치를 담고 있는 바인데, 예수님의  인자됨은 묵시적 공간이 된다. 곧 ‘언약적 신체다’ 인자께서 공간을 묵시적으로 주도하신다.

16) 율법은 규칙이다. 이것을 인간은 ‘규칙성’으로 바뀌어서 이해한다. 즉 법대로 살려고 한다. 자신이 원하는 행위를 먼저 해놓고서는 과연 자신의 행위가 법대로 했는지 살펴보려는 것이다. 변명과 조정이 작용하는 것이 뻔하다. 이는 처음부터 법에 의해서 행위를 하는 예수님의 행위와 차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