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23. 17:02

하나님의 법을 버린 결과 (예레미야 8장 8-12절)

하나님의 법을 버린 결과

2009년 9월 2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8:8-12

(렘 8:8, 개정) 『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냐 참으로 서기관의 거짓의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
(렘 8:9, 개정)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두려워 떨다가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
(렘 8:10, 개정) 『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아내를 타인에게 주겠고 그들의 밭을 그 차지할 자들에게 주리니 그들은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욕심내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렘 8:11, 개정)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렘 8:12, 개정)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율법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복을 더 누리라고 준 것이 아니라 율법 자체가 갖고 있는 축복과 저주의 기능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율법 어겨서 저주받는다면 우리는 그 저주받은 자들을 같은 인간이라는 입장에서 동정하려고 하지 말고, 율법의 실질적인 효력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탄해야 합니다.

한 예를 들면, 어느 엽기적인 엄마가 방바닥에 기어다니는 바퀴벌레 등짝 위에다가 가, 나, 다, 라 같은 글씨 조각을 붙이고서는 어린 자기 자식에게 한글을 가르친다고 봅시다. ‘가’라는 글자를 짊어진 바퀴벌레가 기어 나오니 엄마가 아기에게 묻습니다. “애야, 저것은 무슨 글자이지?” 아기가 대답합니다. “가!” 엄마가 말했습니다. “참 잘했어요”. 그런데 이 광경을 보고 있는 손님이 말합니다. “저건 글자가 아니라 바퀴벌레입니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엄마는 말합니다. “우리집에서의 글자종이는 바퀴벌레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짊어진 이스라엘은 바퀴벌레들이 아닙니다. 죄인들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반발합니다. “우리 인간의 가치를 찾아먹겠다”고 말입니다. 즉 죄를 지어도 복받을 수 있는 방안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그들은 “평강하다, 아무 일 없을 것이다. 괜찮아”를 부르짖었는데 이것조차도 하나님 보시기에 저주스러운 일이 되어서 그들의 토지와 아내는 남들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겁니다.

흔히 율법이 제공된 상황이라면 축복과 저주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일단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을 본질과 진위를 모르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즉 시험을 치기 위해 볼펜 및 안경을 준비했는데 중요한 것은 문제의 뜻을 모르면 풀어내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율법의 진위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신약시대에 풀립니다.

로마서 7:1-4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 보면 남편 자체가 율법이요 또한 그 남편과 결혼한 여인 사이에도 율법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만약 여인이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남자와 사귀면 음부가 된다는 것이 바로 율법에 의해서 규정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율법’이라는 남편이 죽어버리면 흔히들 여인은 더 이상 율법과 무관하다고 여기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이라는 남편이 죽어도 이 여인이 처신할 율법적 규정은 사라지지 않고 역시 율법 속에 놓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 두 가지 기능입니다. 하나는 율법의 폐지요, 다른 하나는 율법의 완성입니다. 이 여인이 새로운 남편과 혼인하게 되는데 아무나 남편하고 혼인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율법이 남편이었을 때 형성된 그 율법적 기능을 완성해내는 남편하고 혼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성령이라는 새로운 남편과의 관계는 율법이 아니라 ‘율법 완성’의 관계, 곧 사랑의 관계요 새 계명의 관계입니다.

이로서 성도는 율법에서 벗어난 정도가 아니라 율법의 완성 속에 놓여 살게 됩니다. 그 누구도 영원히 정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의’ 안에서 살게 됩니다. 이 때부터 율법 완성차원에서 축복과 저주가 퍼부어지는데, 축복이란, 그 어떤 경우서라도 기어이 자기 여자를 천국 갈수 있도록 조치하면서 예수님이라는 남편을 믿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저주란 옛날처럼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되시는 예수님이 결정하시는데,그 어떤 경우라도 그 사람이 복음을 믿어지지 않도록 전력을 하여 밀어내는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율법을 접수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떤 관계 영역을 형성하게 되었는지가 나오게 됩니다. 율법은 받은 그들은 율법을 통해서 주어지는 두 가지 결과, 즉 축복과 저주 사이에서는 그들은 서슴없이 축복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이 주도권이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가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의 구분은 성도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남편되시는 예수님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바로 이러한 남편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늘 깊이 확인하기 위해서 여기에 이단들이나 불신자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서 율법의 저주 기능을 보여주기 위해 유대인들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보면, 성도는 여전히 자신의 옛날 율법적 남편을 섬기는 식으로 습관을 드러냅니다. 즉 자체적으로 의를 이루려고 합니다. 하지만 곧장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는 절망을 느낍니다. 하지만 늘 축복을 주시는 성령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 인하여 감사하리로다‘고 외치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지난날 율법이나 이방인들의 양심법에 의해서 축복을 따내려고 하는 습성 자체가 버려야 될 죄인 것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면, 노상 방뇨가 나쁘다고 여기는 그 마음이 나쁜 겁니다. 뿐만아니라 노상방뇨를 하지 않는 것이 의라고 여기는 그 마음이 나쁜 겁니다.

현재 있지도 않는 남편인 율법이나 양심을 따라서 축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옛 습관의 허구가 빠져 있는 것 자체가 바로 죄라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새로운 영역에서의 죄관입니다. 골로새서 2:14-15에 보면,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드러내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째서 율법을 폐기하는데 우리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일까요? 그것은 우리 몸 내부에 잘못된 선악체계가 자리잡고 있어 잘못된 법으로 마치 율법을 지켜낼 수 있으리라고 여긴 이 죄된 몸 자체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게 함께 죽여버림으로서 더 이상 율법 미완성이라는 말을 듣지 않게 해주셨다는 겁니다. 이로서 우리는 늘 축복받는 의인이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눈이 우리 남편되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늘 마주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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