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7. 11. 10:27

무너진 집 (누가복음 6장 46-49절)

본문 : 누가복음 6장46-49절
제목 : 무너진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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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5강-눅6장46-49(무너진집)-luk100711

무너진 집

2010년 7월 11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6:46-49

(눅 6:46, 개역)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눅 6:47, 개역)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눅 6:48, 개역)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눅 6:49, 개역)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위의 말씀을 던져놓으시고 곧바로 하늘나라로 올라가신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각가지 일을 하시면서 십자가 지시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단언하시기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시는 새언약이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부터 교회도 예수님을 기념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각가지 일들과 기적들이 있다할지라도 그 대표되는 바는 십자가에게 일어난 일, 곧 ‘피와 살’입니다. 그래서 새언약을 일컬어 ‘영원한 피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 새언약 이전에 상황에서 인간이란 ‘자신들이 언약을 행하는 피조물’입니다.

하지만 새언약 이후에는 ‘언약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아예 ‘새언약 사람’이 됩니다. 즉 새언약 되시는 예수님께서 새언약의 작품으로 등장하는 이들이 바로 성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란 ‘하나님의 피’를 값주고 산 모임이 되는 겁니다. 새언약의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어떻게 해서 숱한 예수님의 말씀이 이 십자가의 피와 살과 연관되느냐를 말입니다. 하지만 옛 언약에 속한 자들은 모든 성경 말씀은 여전히 자신의 행함으로 달성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렇게 되면 그 인간들은 자신을 ‘착한 인간’으로 개조시켜 그 개조된 인간으로 천국까지 밀어붙이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만이 볼 수 있는 천국과 지옥의 뽀족한 기준점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겁니다. 산 위에 올라간 등산가만이 산꼭대기 저편에는 지옥같은 낭떠러지가 있음을 압니다. 하지만 산 밑에 있는 일반인들은 그 위험한 꼭대기 너머의 세계를 알지를 못합니다. 이 말은 곧, 지옥이란 예수님의 말씀대로 다 행하지 않는 자들만 가는 곳이라는 것을 감히 상상도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인간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세상 만사가 인간 개별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이사하는 날, 아이들은 그동안 자신이 가지고 놀았던 어린이 용품만이 한 가득 담은 바구니에만 신경을 씁니다. 즉 흩어져있는 온갖 것들이 할지라도 바구니 하나에 담게 되면 그 모두는 ‘하나’가 됩니다.

만약에 부모가 어린이의 그 하나된 용품 바구니를 놔두고 이사했다면 그 아이의 과거를 몽땅 잃어버린 것이 됩니다. 이처럼 인간이 자신을 위해 살다가 마지막 병원 입원실 침실에 누워서 비몽사몽 상태에 돌입하게 되면, 결코 자신이 이 세상의 중심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곧 죽게 되는데도 불구하고 축구 경기는 계속되고 젊은 이들은 스포츠카를 타고 동해안으로 놀러갑니다.

자신의 전부를 잃는다는 것은 그동안 자기를 세상 중심으로 삼고 자신을 착하고 건전하게 살기 위해 애쓴 모든 장난감 같은 짓들도 더 허사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신 모든 율법과 말씀은 예수님의 중심으로 세상을 본 그 시선과 관점을 가져야 지옥과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제대로 아는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높은 산 꼭대기에 설 수 있는 자만이 산 등선 너머 어떤 세상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압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안목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흘려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늘의 문을 여는 효력이 있는 동시에 지상에 있는 악마의 지옥 문을 같이 열어제치는 위력이 동시에 발휘하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심판은 상호 질이 다른 세계를 더불어 개시하게끔 하십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다 지켜야만 지옥가지 않는 현실이 옳은 현실이라면 인간들이 찾고자 하는 신의 기적이란 실은 아무 짝도 소용없는 것들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한 번도 자신이 물 위를 걸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물을 ‘내가’ 걸었다고 여기는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물 위를 걸은 자격이 못되고 물 속에 빠져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어떤 말씀이나 율법이라도 ‘내가 지킨다’, ‘내가 행한다’를 의식하게 되면 그것은 지키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의 세상 살이는 항상 “내가 여기 있음. 나는 분명히 이 세상 안에서 태어나 있음”을 기준으로 하여 진행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그 인간은 ‘있음’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있음은 별도 아니요 해도 아니요 달도 아닙니다. 바로 ‘나 있음’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상대하려고 할 것입니다. 어떤 목사가 자기 부인을 목졸아 죽이고 시신을 토막내어 여기저기에 갖다 버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목사가 칼을 들고 자기 부인을 토막내는 그 즐거운 행위 심보가 어떠한 지를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그 때 기분은 이럴 겁니다. “감히 나에게 달려들다니. 너는 나 있음의 중요함을 몰라!”라고 말입니다. 즉 그 목사는 자기 아내의 ‘있음’을 자기의 ‘있음’보다 못한 있음으로 여긴 것입니다. 즉 나는 살아야 하지만 너는 죽어도 상관없을 정도도 너는 나에게 뒤떨어진 있음이라는 겁니다.

만약 그 아내 자리에 예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마찬가지로 목졸라서 시신을 토막낼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살인 목사의 심정으로 우리 모두가 오늘도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즉 자신들의 세상 보는 기준이 확립되어 있는 입장에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을 언급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세상 보기와 우리들의 세상 보기가 틀려집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슬슬 예수가 싫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귀찮아지다가 나중에는 죽이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많은 새언약의 피조물들이 옛언약에 속한 자들로부터 핍박과 미움을 받습니다.

오늘날의 신의 역사는 요나의 표적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예수님과 더불어 죽지 않고서는 세상에 대해서 전혀 알 길이 없음을 분명히 하는 기적입니다. 그 요나의 표적이 십자가이고 성령님께서 그 요나의 표적 속으로 자기 백성을 끌어드립니다. 그렇게 되면 비로소 행함으로 천국 온 것이 아니라 순전히 예수님의 피의 능력으로 천국오게 된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지옥간 자들을 불만이 넘칩니다. 천국간 자들이 행함으로 자신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는 점 때문에 정죄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인 맞는데 예수님의 용서하심으로 구원받은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것이 없고 아예 무의미함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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