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7. 8. 13:47

선지자의 형편 (예레미야 20장 7-10절)

본문 : 예레미야 20장 7-10절
제목 : 선지자의 형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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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강-렘20장7-10(선지자의형편)-jer100707

선지자의 형편

2010년 7월 7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0:7-10

(렘 20:7, 개정)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렘 20:8, 개정)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렘 20:9, 개정)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 20:10, 개정)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예레미야는 본인이 원하는 인생을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사는 인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기보다 하나님이 더 강하시다는 것을 보여야만 하는 인생인 것을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하고 기이한 일입니다.

집에 키우는 개가 오늘 갑자기 “뽕!”라고 사람으로 변신되었다고 한다면 얼마나 놀랄 일입니까. 그런데 이 일보다 더 놀랄 일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되는 일입니다. 개보다 더 못한 자가 단순히 사람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집니다.

사람이 보다 나은 사람, 훌륭한 사람, 거룩한 사람, 고상한 사람, 점잖은 사람, 진리를 아는 사람으로는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도저히 가당치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 사태입니다. 바로 그런 면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의 입장을 부담스러워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생각은 다르십니다. 예레미야가 이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의 아버지는 부시입니다. 예레미야의 아버지는 힐기야입니다. 이처럼 사람이란 그저 평범하게 사람의 사람이 될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고 그 말씀에 내장되어 있는 ‘아들 되기 능력’으로 인하여 도저히 될 수 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아들의 출몰은 기존의 세상 사람들로부터 극한 박해와 학대를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된 자들에게 터져나오는 말씀의 내용 중에는 필히 인간 세계에 대한 단호한 저주와 멸망과 심판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사실을 부정하려면 소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들의 입을 틀어막고 그들 스스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인식 자체에 회의가 들도록 압력을 가하게 해야 되는 겁니다.

사람에게 있어 세상이란 사람들이 납득이 되는 현실을 두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납득이 안되고 이해안되는 세계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간주하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흑인들만 사는 세상에 흘깃 백인 한 사람이 창가에 스쳐지나갔다고 한다면, 그것은 목격한 흑인 아이가 동네 사람들에게 자신이 목격한 바를 말하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아저씨들, 나 어제 밤에 창가에는 하얀 사람을 보았어요”고 한다면 마을 사람을 이구동성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 동네에는 피부가 하얀 사람은 없단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없습니다. 모두 ‘사람의 사람’일 뿐입니다. 사람의 사람들만 사는 동네는 ‘세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 있다면 이쪽 아담의 세계는 아닙니다. 다른 세계에 속한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는 ‘없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누가복음 17:20-21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경우란 시간상 어느 시점에 있는지, 혹은 공간상 어느 지점에 있는지가 파악되어야 진정 ‘있다’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자기 인간 세상에서 파악 가능한 하늘 나라를 알려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이러합니다.

하늘 나라에 속하지 않는 딴 동네 사람들에게 파악이 되는 하늘 나라라면 애초부터 엉터리에 가짜에 허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합니다. “하늘 나라는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정도만 말씀하신다면 인간으로서 대뜸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 나라는 하늘나라 따로 일하시고 우리 인간은 이곳에서 우리끼리 일하면서 서로 간섭 안하는 식으로 사는 것이 편하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 번째 언급을 하셨습니다. “하늘 나라는 바로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것은 곧 이 인간 세계는 쳐들어온 하늘 나라에 의해서 멸망당할 대상이다 는 겁니다.

이런 소리를 듣고 인간들이 가만 있지를 않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무시하고, 모독하고, 공격하게 되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수모를 예수님 이전에 예레미야도 미리 당하고 있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손에 잡히지도 않고 또한 사람이 다룰 수 있는 대상도 아닙니다.

요한복음 1:12-13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로 난 자가 아니면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극구 ‘하나님께서 자기보다 강하심’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증언이 제대로 되려면 자신이 자신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평소에 규정하고 사느냐를 알아야 합니다. 즉 사람이 생각하기를, “그래 나는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야. 진정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의 사람이야”라는 생각이 뚜렷이 갖고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지만 자신이 거부할 수 없는 말씀의 위력이 여지없이 발산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자기 몸에 이질적인 생물체가 침투해서 꾸불거리면서 온 몸을 기어 다닌다면 얼마나 징그러운 일이겠습니까! 칼로 피부를 째서 그 물체를 외부로 끄집어 내면 속이 다 시원하겠지요. 바로 강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우리 속에 넣어주신 말씀이 이런 식으로 꿈틀거리며 돌아다닙니다.

그 말씀을 외부로 전하게 되면, 인간의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공격한다고 하면서 그 말씀을 던져 성도를 공격할 것입니다. 이로서 예레미야는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 시련을 당합니다. 예레미야나 성도나 하나님의 아들 된 사람은 바로 이 세력 사이에 끼인 막(스크린)같은 입장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승리입니다. 출애굽 당시에 애굽을 승리하신 그 승리가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말씀의 승리를 구가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말씀을 통해서 그대로 다가와서 침투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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