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6. 2. 22:51

용서할 수 없는 자 (예레미야 18:21-23)

용서할 수 없는 자

2010년 6월 2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8:21-23

(렘 18:21, 개정) 『그러하온즉 그들의 자녀를 기근에 내어 주시며 그들을 칼의 세력에 넘기시며 그들의 아내들은 자녀를 잃고 과부가 되며 그 장정은 죽음을 당하며 그 청년은 전장에서 칼을 맞게 하시며』
(렘 18:22, 개정) 『주께서 군대로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게 하사 그들의 집에서 부르짖음이 들리게 하옵소서 이는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구덩이를 팠고 내 발을 빠뜨리려고 올무를 놓았음이니이다』
(렘 18:23, 개정)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 계략을 주께서 다 아시오니 그 악을 사하지 마옵시며 그들의 죄를 주의 목전에서 지우지 마시고 그들을 주 앞에 넘어지게 하시되 주께서 노하시는 때에 이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하니라』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자기 유익을 기대하는 예상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예상을 항상 벗어나게 하시면서 일하십니다. 인간이 아무리 예상해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저주받게 해서 지옥하게 하시는 일입니다.

왜 인간들은 이런 일을 예상하지 못하느냐 하면, 인간 머리에서 끄집어내는 모든 생각은 항상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결과가 나오는 방향으로 결론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도 자신이 내린 결론에서 만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세요.

감히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기대 못한 저주와 심판을 유대백성들에게 내려버립니다. 그만큼 그동안 인간들이 성경 말씀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말씀 구조 안에 사람이 들어가게 되면 마치 신선한 공기가 방출되는 숲 속에 들어가 있는 양상이 됩니다. 사방에서 산소가 쏟아지듯이 그 사람은 세상 만사가 다 말씀이 내뿜는 능력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압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대 백성들이 측은할 정도로 형편없이 죽음과 죽음의 저주를 받는 것을 보면서 이런 저주가 주어지는 이유나 기준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사도행전 2:16-17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는 너무나도 대조가 되는 대우를 받는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가차없는 저주가 주어지는 반면에 신약 시대의 교회는 하늘에서 성령을 받아서 그들이 예언을 한다는 겁니다. 같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실은 양쪽 다 하나님의 약속에 준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즉 하나님의 성령은 인간들이 기대할 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서 활약합니다. 따라서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설마 하나님이 나를 버릴까”라는 생각이 기초가 되어서 튀어나온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레미야가 말씀하신 오늘 본문 말씀을 통과하지 않은 채 신약을 바라보는 것은 전혀 성령받은 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은사는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서 거저 주시는 형식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미리 예상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참으로 하늘의 성령을 받은 자라면 그 바탕에는 예레미야의 오늘 말씀이 전제가 되어 있게 됩니다. 즉 “나 같은 인간은 이 땅에서 죽어 마땅하고 저주받아 마땅하고 지옥가도 당연합니다”를 바탕으로 한 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에게 성령이 주어지므로서 성령받은 사람의 입에는 오로지 예수님의 은혜와 공로만 증거되고 자랑하게 됩니다. 만약에 예레미야의 오늘 본문 말씀을 통과하지 않은채 성령을 운운하면 그 모습은 곧 여전히 자신이 주인공이 된 양상입니다. 자기 자랑을 늘어놓으면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자기 포기나 자기 부인이 되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이 여전히 주인공으로 산다는 것은 이 땅 위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한 자 취급을 받게 됩니다. 열왕기상 22:19-24에 보면, “미가야가 가로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고 되어 있습니다.

이 땅은 예상 밖의 하나님의 작용을 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악령도 내려오고 성령도 내려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악령받은 자의 특징은 결단코 자신의 가치를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반면에 성령받은 사람은 오로지 하늘만 쳐다보고 사는 사람이 됩니다. 말씀 수풀 안에서 모든 것이 말씀대로 진행됨을 인정합니다. 뺨을 맞더라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땅을 다루시는 이유는, 이 땅이란 그저 가만히 있는 땅이 아니라 쉴새없이 저주가 올라오고 있는 중입니다. 레위기 26:42-43에 보면,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고 그 땅을 권고하리라 그들이 나의 법도를 싫어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으므로 그 땅을 떠나서 사람이 없을 때에 땅이 황폐하여 안식을 누릴 것이요 그들은 자기 죄악으로 형벌을 순히 받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살인자 가인을 계속 살려두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이 땅이 제공하는 저주를 인간들은 받아 마땅함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즉 가인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마크가 있습니다. 그 마크란 바로 “인간들이 하나님마저 우습게 여기고 고집부려 가면서 하나님의 뜻에 도전했어도 이렇게 살아남았다”는 그 과시성과  관련있습니다.

그래서 온 천지에 가인의 생각이 범람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셔서 그들에게 대한 저주와 멸망과 징벌이 얼마나 합당한 조치인 가를 세상 끝날까지 증명하려 하시는 겁니다. 성도가 하나님에게 감사한 것은, 이 땅 위에서 자신이 저주받아 죽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하나님의 조치임을 수긍하기 위함입니다.

즉 ‘자신은 죽어서는 안돼’가 아니라 ‘나는 죽는 것이 마땅해’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합당함을 증거하게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언약을 지킨 것이 아니라 그들을 언약 안에서 이끄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은 하늘의 통풍구를 통해서 위해서 내려옴을 감사히 여기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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