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0. 20. 16:08

다윗의 찬양 , 사무엘하 22장 1- 3절

본문 : 사무엘하 22장1-3절
제목 : 다윗의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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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강-삼하22장1-3다윗의찬양-2sa101017

다윗의 찬양

2010년 10월 17일                           

설교 본문: 사무엘하 22:1-3

(삼하 22:1, 개역)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삼하 22:2, 개역) 『가로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삼하 22:3, 개역)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의 구원과 관계되는 적이 두 종류가 됩니다. 하나는 이방민족이라는 적이요 다른 하나는 사울이라는 적입니다. 이것은 곧 다윗이 처해 있는 이스라엘 유리한 쪽으로 잡혀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단순히 이스라엘의 왕이라면 다윗을 대적하는 자들은 모두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자들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전쟁이나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을 무조건 옹호하는 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뒤에 보면 다윗의 적들 속에서는 이스라엘의 왕 사울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렇게 본다면 다윗은 자기 나라 백성들로부터도 공격을 받은 바가 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다른 민족들 뿐만 아니라 같은 아브라함 혈통이라고 여기는 유대인들로부터도 밉상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다윗이나 예수님의 이러한 입지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구원이라는 것과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로의 옮김인 가를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주는 바가 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 집이나 사무실이나 상점에 가면 오늘 우리가 앞서 읽은 오늘 본문 말씀이 많이 걸려 있습니다.

여러분 천천히 한번 읽어 보시며 생각해 보세요.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위로가 됩니까 되지 않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그렇다면 이이 말씀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볼 때에 어떨까요?

그들은 이 시를 보면서 다윗의 주관적인 생각이라고만 할 것입니다. 따라서 보편적인 진리가 될 수 없다고 매도할 것입니다. 진리란 객관적으로 모든 인류에게 고루 적용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뭔가 모르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전쟁이라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구원을 말씀하신다는 점입니다.

오늘 시를 오해하게 되면 “하나님의 나의 편이다”고 요약된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전쟁이라는 것이 없는 바가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씀하시는 ‘나의 반석’에서 ‘나’란 다윗이 앉은 특수한 자리를 근거로 한 겁니다. 이 특수한 자리는 장차 오실 예수님과 다윗과의 관련성 속에서 그 본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 관련성이란 바로 의인과 죄인의 만남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비로소 드러난 사실이 바로 그것인데 즉 구원이라는 것이 아담의 자리에서 두 번째 아담의 자리로 이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이동에서 그 어떤 아담의 속성도 허락받지를 못하는 겁니다. 만약에 사람이 자기 자신의 자리, 곧 아담의 자리에서 구원받지 못한채 천국을 가 버리면 거기서도 여전히 자기 자리를 고수할 것이 뻔합니다.

그렇다면 그 천국에서 해괴망측한 사태가 다 일어나게 됩니다. 즉 “왜 어린양만 찬양 받아야 되고 구원받은 우리 자신의 가치는 모독하느냐?”는 식으로 데모나 파업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왜 나만 구원시키고 내 사랑하는 자식은 지옥에 빠지게 하느냐? 자식이 지옥간 이상, 나는 더 이상 이 서글프고 우울한 천국 생활을 못하겠다”고 나올 것이 뻔합니다.

그동안 인류사에서 성경을 대하는 주류들의 생각은 모두 권력 결집과 관련 있습니다. 즉 교회 바깥에서 돌아가는 분위기와 교회가 상호 교류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바깥 세상에서 돌아가는 그 요구에 부응못하면 문 닫데 됩니다. 소위 종교개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모두 왕의 종교에 일반 백성들이 무조건 따라야 하는 세상이었습니다. 오늘날 북한에서 김정일의 정책에 따르지 않으면 집안이 거덜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이 살던 그 바벨론 시대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느부갓네살이라는 왕이 섬기는 신 말고 다른 신을 섬기면 천하의 다니엘이나 다니엘 세 친구도 사정없이 사형당하는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따라서 소위 종교개혁을 했다는 이 교회들이 바깥 사정에 눈치를 보면서 어떤 식으로 성경을 가르치고 해석하고 전했느냐는 하며는, “이제는 각자 본인들의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오직 믿음, 오직 성경, 그리고 만인제사장입니다”고 외친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결국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 중심주의 세계관’을 부추긴 꼴이 되어버린 겁니다.

즉 자기로부터의 구원이 되지 않아도 천국갈 수 있는 식으로 사람들을 선동한 것입니다. 로마서3:9에 보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이미 선언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실 때 왜 자신을 비롯해서 과거 아브라함은 제외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 구원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언약을 위한 말씀으로 말씀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다윗의 찬양은 실은 하나님의 예언이요 계시입니다. 그의 찬양 속에는 장차 오실 메시아상이 구현되어 있습니다. 이 다윗의 찬양은 전쟁을 경유해서 나오는 찬양입니다. 전쟁이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쟁이란 생존 차원이 아니라 죄를 겨냥한 의 차원에서 벌어지는 전쟁입니다.

이 의 차원에서의 전쟁에서 ‘나의 의로움’을 챙길 그 어떤 여유란 없습니다. 그런 의를 하나님이 주신 적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의 뿐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벌린 모든 전쟁도 바로 이 의로움 전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를 획득하기 위해서 그 어떤 행위가 불사하겠노라도 덤벼들었지만 도리어 그런 행위가 예수님의 의를 핍박하는 하나님의 원수로서 작용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6:28-29에 보면,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미 우리 자신이 악마에 꽁꽁 묶어서 같이 구조적으로 하나님에게 대드는 처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수가 따로 없습니다.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이란 바로 예수님의 일하심으로만 성사됩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예수님의 일하심 속에서 같이 움직이면서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쉬지 않고 일하시면서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 자신으로부터 구원을 성사시켜 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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