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0. 6. 08:12

복수와 속죄 (사무엘하 21장 1- 6절)

본문 : 사무엘하 21장 1- 6절
제목 : 복수와 속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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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강-삼하21장1-6복수와속죄-2sa101003

복수와 속죄

2010년 10월 3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21:1-6

(삼하 21:1, 개역) 『다윗의 시대에 년부년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삼하 21:2, 개역)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저희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저희 죽이기를 꾀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물으니라』
(삼하 21:3, 개역) 『다윗이 저희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삼하 21:4, 개역) 『기브온 사람이 대답하되 사울과 그 집과 우리 사이의 일은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나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왕이 가로되 너희의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
(삼하 21:5, 개역) 『저희가 왕께 고하되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경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의』
(삼하 21:6, 개역) 『자손 일곱을 내어 주소서 여호와의 빼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저희를 여호와 앞에서 목매어 달겠나이다 왕이 가로되 내가 내어 주리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개입하셨습니다. 3년 연달아 기근이 되게 하시므로서 개입하셨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감잡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기브온 마을 사람들과 사울왕과 관련시켰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약자로서 억울한 일을 사울쪽에서 당했다는 겁니다.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의 한 맺힌 사연을 들어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한을 들어주기로 조치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친히 먼저 개입하시면서 ‘속죄’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의미를 부가하셨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즉 ‘속죄’란 ‘복수’없이 되는 일이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세상을 향하여 “나는 구원받았다”고 말할 때, 반드시 그 근거를 제시해주어야 합니다. 근거가 빠진 구원 이야기는 자기 자랑밖에 안됩니다. 그 근거는 바로 하나님과 우리의 원수를 하나님께서 친히 ‘복수’해 주셔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천주교에서 주장하기를, 교회가 사람을 구원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원수에 대해서 복수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사람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벌리는 복수는 하나님의 복수가 아닙니다. 도리어 진짜 하나님의 복수를 막는 자기 종교 사업을 위한 이기적 조치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복수’를 알려면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했다는 점을 감안해서 기드온의 주님들의 원수가 곧 하나님의 원수임을 감잡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의견을 듣는 와중에서 기드온 사람들이 하나님의 맹세를 지속적으로 믿고 의지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 9장에서, 기브온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아모리라는 이방민족이라는 멸망의 대상이지만 묘책을 써서 위장술로 동원해서 기어이 약속의 땅에서 자신의 땅을 계속 경작할 수 없는 권리를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울 정권이 그들이 경작한 땅이 탐나서 그들을 추방해버리고 죽여버리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맹세를 위반하는 것이 됩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맹세를 위반하는 것이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기브온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체적인 힘으로는 사울의 횡포에 대항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의 땅이 하나님의 맹세에 의해서 여타의 땅들과 같이 이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이 친히 주신 유업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사울은 기드온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을 무참하게 짓밟아버린 것입니다. 그 원한이 하나님께 도달된 것은 하나님 스스로 내린 그 맹세가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짓밟히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복수에 나서시는 겁니다. 그 복수의 주체자로서 지상에 있는 다윗왕을 지목한 겁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원수=하나님의 맹세 모독자’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누구를 의미할까요? 교회 나오지 않는 그들을 의미하는 겁니까? 교회를 기준으로 삼아 하나님의 원수됨과 원수되지 않음을 가름할까요?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원수가 들어있습니다. 육적이요 세상적입니다. 로마서 7:16-21에 보면,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자기를 미워합니다. 자기 속에 하나님의 법을 위반하는 그 죄 세력이 싫어집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면 ‘하지 않고’ 하지 말라고 하면 반대로 보란 듯이, 일부러 모욕을 주듯이 저질러 버리는 그 죄가 밉니다. 그리고 그 죄는 우리의 양심이나 의지로 다스릴 수 없음도 또한 압니다.

세상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교회를 비웃고 예수님을 비웃는 것을 이해하는 이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가 활개치는 것도 이해해야 합니다. 마음 속으로 하나님 두기를 원하지만 또다른 마음이 우리 마음에 하나님 생각하는 것을 거절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인 것을 알지만 우리는 그 돈이 넘치도록 있었으면 바라고 있습니다.

이처럼 육신을 안고, 육신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맹세를 믿습니다. 다윗왕은 기브온 사람들의 복수 요구에서  므비보셋을 제외시킵니다. 이렇게 하는 가운데 이들 일곱이 사울왕과 요나단의 뼈와 함께 사울의 아비 기스의 묘에 장사되므로 하나님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약속의 땅이란 이런 곳입니다.

어떻게 해서 다윗은 므비보셋을 하나님 원수에 대한 복수에서 면제할 수가 있었을까요? 사무엘상 20:14-17에 보면, “너는 나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를 내게 베풀어서 나로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를 내 집에서 영영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나중 맹세가 앞의 맹세를 취소할 수 있는데 그럴만한 권한은 아무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택한 다윗에게 뿐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분입니다. 다윗에게 주어진 모든 혜택을 자신의 피로서 그대로 우리에게 덮쳐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마지막 맹세를 믿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그 새언약을 믿으면서 우리는 기브온 사람들처럼 우리 인간들의 손으로, 세상적인 힘으로 구원을 해결하고자 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알아서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실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맹세가 2중으로 층을 이루었습니다. 새언약이 옛언약에 속한 자들 중에서 구원할 자를 구원해내는 원리를 우리가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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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강-삼하21장1-6(복수와 속죄)-2sa101003-(이 근호 목사)

2010-10-06 06:54:51 조회 : 2     이름 : 이한례
 
 
047강-삼하21장1-6(복수와 속죄)-2sa1010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하 21장 1절에서 6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500페이지입니다.

사무엘하 21:1-6

“다윗의 시대에 년부년 삼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저희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저희 죽이기를 꾀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물으니라 다윗이 저희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기브온 사람이 대답하되 사울과 그 집과 우리 사이의 일은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나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왕이 가로되 너희의 말하는대로 시행하리라 저희가 왕께 고하되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경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의 자손 일곱을 내어 주소서 여호와의 빼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저희를 여호와 앞에서 목매어 달겠나이다 왕이 가로되 내가 내어 주리라 하니라” 아멘


이렇게 문자를 대해도 이 당시의 상황에 우리가 뭔가 깊이 들어가야, 여기서 이야기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우리가 접선이 될 것 같은데, 우리가 읽었던 본문 내용을 실제로 그런 일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벌써 이 시대에서 훌쩍 떠나버린 먼 미래의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이쪽 일이난 일에 우리가 같이 동참하거나 같이 체험되지 아니하면, 무슨 뜻으로 이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했고, 다윗은 무슨 뜻으로 이런 대꾸를 했으며, 거기에 하나님까지 여기서 개입을 하셨으니까 분명히 필시 중요한 일이다 말이죠.

하나님께서 개입하셨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일인데, 인간 대 인간 이야기가 아니고, 흥정이나 협상이 아니라, 여기 21장 1절에 보면, “다윗의 시대에 년부년 삼년 기근이 있으므로” 계속해서 삼년동안 기근이 있었는데, 이것은 무슨 사연이 있다 말이죠. 무슨 기호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암시하는 바를 자연을 통해서 이렇게 암시했거든요.

하나님께서 개입한 겁니다. 개입한 사건인데, 우리는 하나님의 개입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그 당시 상황에서 우리가 이 사실을 수용돼야 될 텐데, 우리가 삼년동안 비 안온다고 하나님의 계시라 이럴 수 없는 거고, 왜 하나님께서 개입할 때, 기근이란 것을 개입 했는지, 그렇게 개입했던 관심점이, 하나님의 관심점이 어디 있었기 때문에 왜 삼년동안 일부러 비가 오지 않아서 전 이스라엘이 다 같이 사는데 힘들게 만드셨는지, 그런 점을 우리가 그냥 모른 체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삼일동안 비를 내리지 않는 식으로 인간 대 인간 일에 개입하신 그 촛점은 단어 하나에 거기 모아졌습니다. 그것은 3절에 보면,

“다윗이 저희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속죄하여야....”

‘속죄’ 라는 말이 나옵니다. 속죄. ‘속죄하여야‘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우리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브아’ 라는 당신네 동네한테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당신한테 용서를 받고, 어떻게 없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겠습니까? 속죄하겠습니까? 우리의 지은 죄가 분명히 있는 가운데,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삼년동안 기근이 내려서 벌 주셨는데, 어떻게 하면 우리가 당신에게 지은 죄를 없애서 다시 비가 내릴 수 있는, 하나님께서도 “어, 잘했어, 잘했어,” 이렇게 할 수 있는 길을 주겠습니까? 라는 연결이 있거든요.

그러면 속죄를 하려면, 첫째 조건이 뭐냐 하면, 지은 죄가 있어야 되잖아요. 지은 죄가 있고, 그 죄를 “죄 맞습니다.” 고 수용해줘야 속죄과정이 고담에 뒤 따라 오는 겁니다. 그런데 속죄할 때 속죄 방법에 대해서 기브온 사람들은 뭣 땜에 이렇게 분통을 터뜨리고 있느냐하면, 억울하게 당했다는 겁니다. 누구에게 당했느냐 물어보니까 사울시대에 있던 그 왕과 그 밑의 부하들에게 우리들이 억울하게 많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우리 땅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니 너무 억울합니다.

그럼 다윗이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느냐 할 때, 기브온 사람들이 요구한 것이 ‘복수’였습니다. “돈을 줄까?” “돈 필요 없습니다.” 요새는 뭐 돈으로 다 해결 되지만....  금은 줄까? 금은 같으면 우리가 그 사람하고 직접 상대하지, 다윗 임금에게 묻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는 사람을 죽여서 복수하는 권한은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임금님이 우리입장이라 생각하고, 우리가 사람 죽이고 싶은 대로 좀 죽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래서 속죄는 그냥 “미안하다, 미안하다.” 이렇게 미안하다는 말로 때울 수 있는 게 아니고, 필히 보복이라는 것, 복수를 시행해서 복수할 사람의 그 무게와 그리고 지었던 죄가 일치가 될 때, 속죄가 성립이 된다 말이죠. 그 일에 하나님께서 삼년 기근이란 방식으로 여기 이 사건에 개입을 한 겁니다. 상당히 복잡하죠?

아무것도 안 해도 구원받는다. 그것만 복음이 아니죠. 그러면 지 잘난 게 되니까. 나 아무것도 안 해도 구원받았어, 그러면 지 잘난 게 되고, 지 챙기는 거 자랑거리만 되니까, 그거는 복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당신은 하나님께 속죄 받았어? “ 받았어.” “어떻게 해서 속죄 받았어?” “하나님께서 복수를 감행해가지고, 보복을 하셔서 나는 속죄 되었어.” 라는 식이 하나님께서 장차 구원 속죄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힌다는 겁니다. 정립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우리의 속죄할 수 있는 단체가 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믿으면 지옥 갑니다. 교회는 복수를 하지 못합니다. 물론 교회 복수라 하니까 교회 확성기 크게 틀어놓고, 앞에 있는 알박이 해가지고 교회 주차장 짓는데, 기어이 다른 사람은 1평에 백만 원 해서 다 나갔는데, 못된 불자라 해가지고, 중앙에 딱 박아놓고, 두 평짜리 1평에 1억 내 놓으라 해가지고, 교회 교육관도 못 짓게 하려고 거기에다가 마이크 대가지고 음향폭탄 대가지고, 쾅쾅~~장사 못하게 하는 것,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교회복수. 주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주님과 아무 상관없거든요. 그래서 교회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 입장에서의 복수를 교회단체가 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천주교는 교회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거예요. 어떻게 구원하느냐 물어보니까, 사랑으로 한다는 거예요. 사랑으로. 어떤 사랑? “아이구, 이쁩니다. 사랑합니다. 당신을... 말로만.. 말로만 구제하고, 어려운 사람 도와주고, 노인네는 봉투에 돈 넣어주고, 점심주고....., 그러면 사람은 천주교회나 교회에 모이겠죠. 모이면 뭡니까? 친목 단체인데, 친목곈데... 그런 친목계는 세상에서도 더 재미나게 살아요.

시골 사람들 가끔 농사짓고 놀러갈 때 보세요. 차 대절해서 갈 때 보면, 묻지 마 관광가고, 잘 놉니다. ‘해바라기를 아시나요‘ 하면서 할머니들 이 노래 부르면서 춤을 추는 것 보면, 세상에 그런 사랑이 없고 그런 친목이 없어요. 교회는 훨씬 재밌어요. 교회는 울면서 ’주여~, 아버지여~, 아버지여~, 신앙촌 고사리처럼....ㅎ 아버지여 맨날 이러고 있지만, 교회는 화끈하게 놀잖아요.

하나님께서는 화끈하게 복수해 줍니다. 화끈하게 복수해 줄려면, 바로 내 죄가 내 인생을 망가뜨렸다는 사실을 화끈하게 인지해야 돼요. 나는 하나님의 법을 원하지만 내 속에 또 다른 법이 있는데, 그 놈의 죄의 법이 나로 사로잡아 오는데, 내 대신 복수할 내 죄에 대해서 복수할 위인이 없어요. 어떤 인간도. ‘하지마라’하면 하고 싶고,  ‘하라’하면 하기 싫고, 교회오라하면 교회가기 싫고, 교회오지마라 하면 오고, 하나님 “당신들 구원하지 않는다. 두 번 다시 교회 오지마라” 하면 오고, 와 주쇼 하면 안 오고, 청개구리 47만 마리 되는 것 같아요.

꼭 반대로, 반대로 이렇게 해나가는 여기에 뭔가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애통해야 돼요. 니 때문에 내 인생 조졌다고 애통할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있는 죄가 내 허락도 없는 아담의 죄가,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 두기를 좋아하는 이 마음을 싫어하는 마음으로 바꾸어 놓는데, 내보다 더 센 놈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못 돌리게 하는 거예요.

내가 원수라. 내가. 제가 아침에 그렇게 얘기했잖아요. 풍랑이 일면 왜 깨우느냐 말이죠. 안 깨우면 되는데, 기어코 깨우고, “주여, 죽겠나이다. 주여, 드디어 주와 함께 몰살하는군요. 감사 합니다.” 이러면 될 터인데, 꼭~ 주를 깨운다 이 말이죠. 살라고. 주님은 죽으라 하는데. 이게 인력으로 되지 않아요.

그래서 이 본문에 대해서 삼년동안 기근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여기서 어려운 얘기를 하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자연 현상은, 그 약속의 땅의 자연현상은 그 당시 언약체계 안에서는 자연현상은 그 약속 사람,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방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 많이 어렵죠? 약속의 땅에서 일어나는 대자연의 변화는, 엘리야가 갑자기 전하는데 하늘에서 불 떨어진다든지.. 이 모든 것은 다른 이방 민족들 말고요. 고 속의 땅에서, 약속의 백성답게 살아야 될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관련이 있어요.

지금은 새 언약이기 때문에, 목사님, 지금도 우리가 죄 지면 하늘에서 가뭄 들고 이렇습니까? 지금은 뭐냐 하면, 지금은 관련 있기는 있는데, 어떤 관련이냐 하면, 우리의 생명이 이 땅에 없고, 하늘에 보관돼 있어요.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같이 하나님의 계시가 떨어지는데, 그 계시가 뭐냐면, ‘세상은 어떤 일이 있더라고 기대하지 말라’ 라는 식의 변화들이다.

대통령이 바뀌고, 북한의 적들이 어떻게 되고, 주식 값이 올라가고 내려가고..., 거기에 대해서 우리의 생명하고는 관련이 전혀 없음을 깨닫는 겁니다. 고런 식이에요. “하나님, 비만 내리면 다 돈벌어가지고 하나님께 헌금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옛날 구닥다리 식으로 놀지 마라 말예요. 지금은 돈 버나 안 버나 이미 우리의 생명은 안전하게 보장돼 있어요. 아주 100% 보장돼 있습니다. 이 구닥다리 버리고 빨리 제대하면 그만이에요. 그런 식으로 이 세상은 자연변화가 주어지죠. 우리는 자연변화를 일련해서 유익이 있다. 그 당시에는 해석이 안 되니까 서로 해석을 해나가야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내용이 다윗이 어떻게 몸을 처리하느냐? 우선 기브온 사람들이 다윗에게 요청한 요청이 과연 하나님 법에 정당하냐가 우선이겠죠. 터무니없는 것을 요구하면 다윗이 그걸 들어주질 않는데, 삼년동안 기근이 졌고 때를 맞춰서, 이건 기브온 사람들이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기근을 줬고, 다윗이 직감적으로 무슨 뜻이나 문제 있다고 생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여, 왜 삼년동안 비가오지 않습니까?” 라고 물으니까, 하나님께서  여기에, “사울의 흘린 피가 그 집을 인함이니....,” 라고 해서, “아하, 이것은 바로 기브온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던 한이 맺혔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광주 때에 광주의 시민군이 이백 명이 죽었으면, 광주부터 경상도 지방에 십오 년 동안 비가 안 와야 돼요. 88올림픽이고 뭐고 다 실패로 끝나야 됩니다. 그럴 때 광주 사람이, “봐라, 억울한 정의로운 피를 흘렸기에 벌 받는다.” 이래야 되는데, 전혀 그런 낌새가 없고, 전두환 대통령 때 아주 경제성장 확확 확장했습니다. 그게 노태우 때까지..., 김대중, 노무현 때는 약간 경제성장  더디 된지 모르겠어요... 이상하죠. 이번에 전라도 사람 공소됐는데 모르죠, 또.

기브온 사람들의 요구조건이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해결해 줘, 라고 나온 겁니다. 그럼 해결해 줬는데, 뭐가 문제였느냐 물으니까, 억울했다는 겁니다. 왜 억울한데?  "너희들 이방민족이야." "이방민족 아닙니다." "왜 아닌데? "여호수아 9장에 보니까, 그들 아모리 사람, 이방 민족이 맞는데, 특별 조치법이 시행돼가지고 기브온 사람들만큼은 치지 말고 그들의 경작한 땅을 하나님의 축복된 땅이라고 인정해 주라는 ‘기브온 경작 조치 법’이 발효가 됐어요. 그래가지고 절대로 그 땅, 하나님의 기업과 같은 땅으로 취급되어야 된다는 것이 여호수아 9장에 이미 맹세가 되어 있습니다. 있는데.

사울이라는 왕이 등장해가지고, 뭐를 무시했느냐 하면, 옛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여호수아와 기브온 사람과 맺은 그 맹세를 사울 왕이 자기 권세욕이 너무 대단해가지고, “과거에 맹세한 것 다 무효” 다 무효로 돌려버렸습니다. 다 죽이고 쫓아내고 이리한 거예요. 그래서 그 한이 맺힌 거예요. 기브온 사람이. 약자죠.

그 기브온 사람들이 약자지만,  약자 기브온 사람들의 배후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 맹세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람 사이에 맹세를 믿고 약속의 땅에서 자기의 땅이라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라 여기고 했는데, 같은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우기는 그 사울이 하나님과의 맹세를 아주 우습게 여기고 아주 그것을 모독하고 그걸 공격하고 들어오니까, 어쩔 수 없죠. 권력이 빼앗고 하니 자기는 권력이 없는데... 누가 나섰나 하면, 배후에 계신 맹세를 인정하신 하나님께서 나서서 신호를 보낸 겁니다.

"아, 다윗아, 다윗아, 네 문제  있다. 문제 있다. 약속의 땅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그런 억울한 일이 벌어졌다"는 신호로서, 삼년동안 비가 안온 겁니다. 아마 일 년쯤 비 안와도 다윗은 기도 할 마음 없어요. 이년쯤 안와도 그랬는데, 삼 년째 되니까 도저히 못 견뎌서 기도한 모양 이예요. 그래서 하니까, “아하, 하나님의 맹세가 여전히 살아있는 땅에서 그 맹세를 하찮게 여겼던 일이 있었구나.“ 그런 겁니다.

자,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내가 은혜로 구원 받았어” 이건 복음이 아니라 했죠? 뭐냐 하면, 내가 은혜를 받게 된 근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맺은 맹세 때문에 그렇습니다. 맹센데, 이 맹세를 누가 우습게 여기고 비웃느냐하면, 세상에서 좀 더 잘살고 멋있고 세상 사람들이 뭐냐 하면, 우리 성도가 철석같이 믿는 하나님의 맹세를 그들은 무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누가 무시하느냐 하면, 놀랍게도, 놀랍게도( 이거 줄쳐 놓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가 구원 받은 첫 사랑을 잊어버립니다. 뭐 처음에 은혜로울 때는 찬송가에, ‘천부여 손들고 옵니다.’ 하며 눈물이 줄줄 흐르고....,

저는 권투 선수들 우승할 때, 눈물 흐르고, 축구 선수도 우승하면 눈물 흘리고 그러는데, 그거 몇 달 안갑니다. 그 담부터는 게을러서 연습도 안하고, 우승도 못하고 나중에 예선 탈락합니다. 사람이 좋을 때 감격해서 눈물 나는 것은 자연적인 본성인데 그게 오래가지 않아요. 인간의 몸이 오래가질 않습니다. 사람이 한번 은혜 받았잖아요? 은혜 받으면, 우리가 몰랑몰랑해지는데, 은혜 받았다는 고것이 훈장이 돼가지고, 나중에 찔러보면 철판이 돼 있어요. 여러분 철판구이 알죠? 철판 돼 있어요. “ 나 은혜 받았다. 나 6.25 때 포탄 속에서 살아남았다.” 맨 날 철판이 돼 있어요. 첫 사랑을 잊어버렸어요. 얼마나 교만하고 자만이 들었는지 말도 못해요.

지난 주일날 오후에 말씀드렸잖아요. ‘제발 젖먹이 아이처럼 돼라.’ ‘제발 높아지지 말고 젖먹이 아이처럼 돼라.’ 사람이 하나님의 맹세를, 안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지만, 우리 자신도 ‘예수님의 피’를 시답지 않게 우습게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우습게 여기면 그담 현상이 뭐냐면, 왜 우리에게는 돈을? 왜 우리에게는 교회부흥을? 왜 우리에게는 재산을 주지 않으십니까? 왜 우리 애 성적은 어떻고.......????? 고만 세상 적으로 쭉 나가요.

제가 광주에서 강의할 때 이랬습니다. 물에서 구원할 때, “Help me! 살려 주세요!” 하죠. 그 “살려 주세요“ 말 안에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살려만 주신다면, 내 보따리 내 놓으라 소리 하지 않겠습니다. 의 살려주심이 있고, ‘살려주기만 해봐라’ 내가 보따리 찾을 거야. 라는 두 종류의 살려주심이 있는데, 고 두 종류 중에 뒤의 것은 생략을 해요. 

”살려 주세요.“ 하면 어느 쪽의 살려주심인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일단 살려놓고 난 뒤에 진짜 살려준 것이 고마운 사람은, ”아이고, 목숨 산 거만해도 감사하지,“ 이래 나올 거고, "살려 주세요” 하면서도 뭔가 은근히 “살기만 해봐라, 내 보따리 내 놓고, 살려 줘놓고 저 인간이 내 한테 돈 얼마 달라 하겠노, 아이, 귀찮아 죽겠네. 괜히 하나님이 사건을 일으켜서.... 요런 것도 있을 거요. 두 증인은 어느 쪽이 옳으냐하는 것은 일단 살려서 끄집어 내보면  개 거품 물고 나오고, 그 담에 물 빼고 나오고 정신 차리고 나오면 알겠죠. 근데 ”내 보따리는요?“ ”주여 구원해 주소서“ 마찬가지로 두 종류 중 어느 종류인지 모르겠어요. 주께서는 살려냅니다. 좋은 고기 나쁜 고기 살려내고.....ㅎ 한 쪽은 지옥 보내고...주의 사랑을 모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근을 삼년동안 내린 것은, 단순히 기브온 사람들의 복수(억울함)을 푸는 것이 아니고, 그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뭔가 자만해서 안 되고, 저 사람보다 더 못한, 저 사람들은 맹세라도 쥐고 있는데,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미 맹세 잊어버린 지 너무 오래되지 않았는가? 그걸 다시 회복시키는 거예요. 그 회복시키는 방법이 뭐냐 하면, 첫 번째 있던 맹세, 그러니까 여호수아 9장에서 기브온 사람과의 맹세를 뒤쪽에 나오는 맹세, 다윗이 한 맹세가 있습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7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다윗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 사이에 서로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한 것이 있으므로 왕이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아끼고”

그러니까 처벌해야 될, 공개적으로 목 베어 사형시킬 그 명단에서 뭐를 빼주는 맹세를 집어넣느냐 하면, 누구 빽으로? 다윗 본인의 맹세했던 빽으로 요나단과 했던 맹세를 한 요나단의 집안사람 ‘므비보셋’을 빼줍니다. 빼줘요. 이방인들은 다 처벌해야 돼요. 언약은 뭡니까?  다 치지만 여리고 성에 있던 라합은 맹세를 했기 때문에, 거기서 특별 조처를 해서 빼줍니다.

첫 번째 맹세는 옛 언약이면, 새로운 맹세 새 언약이 들어가서 반드시 우리는 멸망당해야 되고 저주 받아 마땅한데, 두 번째 들어가는 ‘예수님과 맺은 새 언약의 피’가, ‘피’가 저주 받을 우리를 저주에서 빼줍니다. 피를 보고 넘어가게 해줘요. 이것이 다윗의 고유 권한입니다.

그 다윗의 자리에서 오신 분이 누구냐?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다윗의 자손이 오셔서 멘토로 오신 게 아니에요. 나 다윗의 자손이다, 말만 하신 게 아닙니다. 뭔가 조치를, 어떤 저주마저 이길 수 있는, 죄마저 이길 수 있는 조치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실지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기브온 사람 같아요. 우리는 유대인도 아닙니다. 이방인입니다. 개 같은 이방인들이예요.

우리가 단지 천국 갈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아들과 한 맹세는 하나님마저 취소하거나 어길 수 없다는 그 사실을 확신하기 때문에, 우리는 비록 죄만 짓고, 못나고 맨 날 어설프고 돌아서면 첫 번째 잘 잊어버리고 돌아서면 또 보이지 않는 죄가 우리를 섬긴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피가 우리 몸에 들어오면, 우리는 므비보셋처럼 우리를 대표해서 하나님과 협상에 들어갔던 우리의 구주되신 예수그리스도의 협상력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맹세가 이층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세상 살면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안다는 우리가 항시 주님을 모독하는 식으로 세상에 미련을 두고 성공과 출세에 연연합니다. 주여,  날마다 우리에게 기근 같은 세상으로부터 실망할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나게 해 주시고, 그런 가운데서도 주님의 맹세가 확연히 눈에 더 크게 다가오는 그런 기회들이 저희들에게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