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7. 28. 23:26

하나님의 단호하심 (예레미야 21장 1-6절)

본문 : 예레미야 21장1-6절
제목 : 하나님의 단호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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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3강-렘21장1-6(하나님의단호하심)-jer100728

하나님의 단호하심

2010년 7월 2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1:1-7

(렘 21:1, 개역) 『시드기야 왕이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를 보내어 예레미야에게 말하기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우리를 치니 청컨대 너는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라 여호와께서 혹시 그 모든 기사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그가 우리를 떠나리라 하던 그 때에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렘 21:3, 개역)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대답하되 너희는 시드기야에게 이같이 말하라』
(렘 21:4, 개역)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너희가 성밖에서 바벨론 왕과 또 너희를 에운 갈대아인과 싸우는 바 너희 손에 가진 병기를 내가 돌이킬 것이요 그들을 이 성 중에 모아 들이리라』
(렘 21:5, 개역) 『내가 든 손과 강한 팔 곧 노와 분과 대노로 친히 너희를 칠 것이며』
(렘 21:6, 개역) 『내가 또 이 성에 거주하는 자를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치리니 그들이 큰 염병에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렘 21:7, 개역)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그 후에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 신하들과 백성과 및 이 성읍에서 염병과 칼과 기근에서 남은 자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그 대적의 손과 그 생명을 찾는 자들의 손에 붙이리니 그가 칼날로 그들을 치되 아끼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이 은혜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저 자신들이 기존에 알고 있던 그 신으로부터 은혜가 주어지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맙습니다”는 투로 예배와 경배는 드리지만 정작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도 아니며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대 나라로부터 은혜를 철수하려고 하시는 겁니다. 은혜와 사랑과 긍휼을 철수하게 되면 비로소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그동안 누렸던 그 은혜가 당연히 자신들에게 오는 은혜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즉 그동안 하나님께서 유대나라에 허락하신 은혜는 그들이 제대로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그들 이스라엘을 통해서 만방에 하나님이 진면목을 알려주기 위한 용도임을 나타내시려고 하기 위함입니다.

그동안 유대나라는 하나님과 동행해왔습니다. 그들을 심판하지도 않고 그들에게 화를 내지도 않기 위해서 동행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의 자손이면서도 왜 그들에게 구태어 율법이 430년 후에 주어져야 했는가를 알려주기 위해 동행하시는 겁니다. 즉 아브라함 언약은, 율법과 무관하게 ‘믿음으로 복을 받는’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이 원리를 적용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만들어내신 그 이스라엘 나라 자체에서도 지속적으로 이 아브라함적 복의 원칙이 계속 적용되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위해 만날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숙이게 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정면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뒤편, 즉 등을 보시게 합니다. 때를 맞추어서 하나님께서 이미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생각해봅시다. 즉 율법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브라함 복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복을 받는다’는 것이 이미 율법을 경과해서 보면, 그러한 고백 속에서도 우리가 조작해놓은 우상적인 하나님관에 의해서 성경 전체를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즉 ‘내가 예수 믿는 것’ 자체가 나의 행함이 되고 나의 공로가 되어서 아브라함 언약의 취지에 부합되지를 못하는 겁니다. 이것은 새삼 주의력이 약해져서가 아니라 인간이 원래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에 대해서 오해하게 됩니다. 이런 점은 막상 율법을 대하면서 발휘되는데, 율법을 통해서 자신이 행한 것 중에서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따로 구분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설정해 놓으시고 제시하는 율법이란 그 율법의 위반을 통해서 처벌을 받는 것으로 그 진실이 드러납니다. 쉽게 말해서 율법에 의해 처벌받는 순간, 은혜라는 것이 자신들의 행동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고 더나아가 아브라함의 복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즉 평소에 율법에 비추어봐서 의로운 일이라고 여긴 그 일조차 율법을 제대로 보면 그것마저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새삼스럽게 죄를 더 지을 필요조차도 없는 겁니다. 추가적으로 죄를 안 짓더라도 스스로 의롭다는 그 일조차도 율법 앞에서는 죄가 되는 겁니다. 로마서 3:4에 보면,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유대 나라를 멸망시키고 심판하시려는 겁니다. 단지 유대 나라라는 이유 때문에 동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지켜준다고 여기는 그 잘못된 안목을 심판하시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시드기야 왕이 흔한 인간들의 오해를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드기야라는 사람은 요시야왕의 아들이며 유다 최후의 왕입니다. 그는 바벨론 왕에 의해 조카 여호야긴을 계승하여 왕이 되었고 11년간을 치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기 고집대로 나라 일을 처리해서 국민들의 원성을 쌓았습니다. 그는 특히 애굽과 맺은 동맹을 끊고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예레미야의 권고를 무시했다가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대로 바벨론에서 죽게 됩니다. 죽을 때 그는 자신의 아들이 보는 앞에서 두 눈이 뽑힌 후 사슬로 결박된 채 바벨론으로 끌려가 거기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평소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하기를 바벨론이 쳐들어 온다고 그토록 이야기했건만 그 때는 무시하다가 막상 바벨론 군대가 들이닥치니 예레미야를 찾습니다. 하지만 그가 선지자를 찾는 것은 일종의 과거의 경우를 흉내내는 짓입니다. 역대하 32:20-21에 보면, “이러므로 히스기야 왕이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로 더불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왕의 영에서 모든 큰 용사와 대장과 장관들을 멸하신지라 앗수르 왕이 얼굴이 뜨뜻하여 그 고국으로 돌아갔더니 그 신의 전에 들어갔을 때에 그 몸에서 난 자들이 거기서 칼로 죽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과거 히스기야 왕 때에 앗수르 랍사게 군대가 18만 5천명의 대군을 이끌고 유대 나라를 침공했을 때, 히스기야는 겸손하게도 이사야 선지자와 더불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하루 아침에 18만 5천명의 군대를 몰살시키고 랍사게는 본국으로 돌아가서 살해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기적의 재현을 노리고 시드기야도 예레미야를 찾는 겁니다. 하지만 유대나라는 심판받는 것이 오히려 복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결코 인간들의 선행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님을 아는 시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종말에는 모든 인간들은 다 율법의 먹구름 아래에 놓여 있습니다. 곧 심판아래 있고 저주 아래 놓여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1-4에 보면,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이러한 말씀 앞에서 행함으로 의로울 자가 전혀 없음을 깨닫고 아브라함의 복을 계승한 십자가 피 앞에서 오로지 예수님의 행함에 근거해서만 구원이 됨을 믿는 믿음을 약속으로 받은 자만이 구원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행함에 더 이상 기대를 걸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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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3강-렘21장1-7(하나님의 단호하심)-jer100728

2010-07-28 23:13:46 조회 : 1        녹취 : 오용익  

 
073강-렘21장1-7(하나님의 단호하심)-jer1007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1장 1절부터 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83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21:1-7

“시드기야 왕이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를 보내어 예레미야에게 말하기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우리를 치니 청컨대 너는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라 여호와께서 혹시 그 모든 기사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그가 우리를 떠나리라 하던 그때에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대답하되 너희는 시드기야에게 이같이 말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너희가 성 밖에서 바벨론 왕과 또 너희를 에운 갈대아 인과 싸우는바 너희 손에 가진 병기를 내가 돌이킬 것이요 그들을 이 성중에 모아들이리라 내가 든 손과 강한 팔 곧 노와 분과 대노로 친히 너희를 칠 것이며 내가 또 이 성에 거주하는 자를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치리니 그들이 큰 염병에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그후에 내가 유다왕 시드기야와 그 신하들과 백성과 및 이 성읍에서 염병과 칼과 기근에서 남은자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그 대적의 손과 그 생명을 찾는 자들의 손에 붙이리니 그가 칼날로 그들을 치되 아끼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서 구원했다는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이방군대의 손에 붙여서 호된 맛을 보게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긍휼이 철거된 상황 속에서 그동안 그들이 약속의 땅에 살았던 것은 자기들이 살만 해서 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바하심과 사랑하심과 불쌍히 여겨주심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약속의 땅에서 산 그동안 많이 봐준 거예요. 그래서 이 긍휼이 철수되게 되면 자기의 본 모습이 보이게 되는 겁니다. 본 모습이 보일 때 우리는 자비가 없고 긍휼이 없고 사랑을 받지 않는 상태, ‘아, 이것이 우리 행함에 대한 결과가 맞구나.’ 하는 것을 수용할 줄 알아야 돼요.

맨 날 사랑, 맨 날 자비, 뭘 했다고 늘 자비이고 늘 사랑이겠습니까? 그런 것이 날아가 버린 상태, 자비도 없고 긍휼도 없는 그런 상태에 도달될 때 ‘아, 이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부합되는 합당한 조치다.’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하나님의 그 긍휼과 자비를 주신 것은 무엇 때문에 주셨는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을 때 그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과 항상 다른 모습으로 같이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 하나님 부르지만 그들이 생각했던 하나님하고 전혀 다른 하나님이 그동안 함께 있었던 겁니다. 혜택을 입으면서도 정작 혜택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는 상태, 그런 상태가 유지되고 있었던 겁니다.

제가 오늘 글을 하나 썼습니다. ‘죄인이 알고 있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가 다르다.’ 그런 이야기를 썼어요. 죄인이 알고 있는 그리스도는 항상 자기입장에서 혜택을 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합당한 것처럼 그렇게 오해를 하거든요. 진짜 하나님의 모습은 그러한 혜택이 없어지고 지워지고 다시 주어질 때 그런 절차와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참 모습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심판이 온다는 것은 사실은 손꼽아 기다려야 될 날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그날(d-day), 그날이 온다고 하지요. 심판의 날이 온다. 그동안 주어지던 모든 하나님의 은혜가 철거되는 날이 온다. 유황불 떨어지는 날이지요. 햇빛과 공기를 무상으로 제공했던 그 시기가 다 사라지고 이제는 인간들이 행한 그대로 저주받는 시기가 오는데 바로 그러한 하나님,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지만 너희들이 잘해서 주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많이 봐주고 배려한 것임을 유일하게 함께 동행해서 알려줬던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그 이스라엘민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겁니다. 5절에 보면 “내가 든 손과 강한 팔 곧 노와 분과 대노로 친히 너희를 칠 것이며”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친히 칠 수 있는 하나님, 사랑한다는 자기 백성을 도리어 역전해서 친히 칠 수 있는, 자기 자녀에게 친히 분노할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인 것을 그동안 이스라엘은 전혀 몰랐던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혜택을 입으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던 거예요. 그러면 그들은 이제 와서 이 점을 알아야 됩니다. 그동안 베풀었던 은혜와 사랑은 결국 우리가 주님을 찾았기 때문에 주신 것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불러서 온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을 보고 ‘저분 봐서 내가 은혜 줄게.’ 라고 어디를 한군데 들러서 오는 은혜인 것을 모르고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그 대가로, 보상으로 은혜가 오는 줄로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수련회에서 강의할 레위기를 공부하면서 무엇을 생각했느냐 하면, 제사법이 그렇게 많이 나와요. 제사법이 많이 나오는데 그 제사법대로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께 속죄를 해 주시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속죄제를 드리면 속죄를 해주시느냐 하는 문제예요. 그게 아니고 속죄제를 드린 것은 드린 것이고 실제로 속죄가 되는 것은 속죄제를 드렸다고 속죄가 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냥 용서하면 속죄가 되는 거예요. 인간이 속죄 제사를 드리는 것과 하나님이 속죄를 하는 것하고 전혀 경로가 달라요. 출처가 달라요.

이스라엘은 그것도 모르고 속죄제를 드렸으니까 속죄를 빨리 내놓으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엄청난 오해인 것입니다.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에도 그날이 나오고 종말이 나오는데 법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여주느냐? 아브라함 언약 이후 430년 후에 율법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게 차이가 나요. 아브라함시절은 행함이 없이 오직 믿음으로 복을 받는 시절이 아브라함시절이라면 그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도 등장한, 그것도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복을 받습니다.

이게 너무나 낯설다는 말이지요. 왜 이런 차이가 납니까? 앞에 주께서 한 약속과 그 뒤에 오는 약속이 달라버려요.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오는 약속,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복음으로 무상으로 구원을 받고 무상으로 영생을 받고 용서를 받는 그것이 또 오거든요. 그러면 무상으로 하려면 중간에 있는 율법을 안주셔도 되는 문제잖아요.

신명기 28장의 율법을 보면 ‘네가 이 법을 지키지 않으면 들어가도 저주받고 나가도 저주받는다.’ 저주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랬다저랬다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차이가 나게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율법을 받은 사람이 누구냐, 모세였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을 정면으로 보지를 못했어요.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수구리’ 해서 푹 숙이게 했습니다. 숙이게 해 놓고 뭐만 허용했느냐하면, 하나님을 정면으로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지나가고 난 뒤에 그 등을 보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앞면이 아니고 하나님의 뒤편이에요. 하나님의 얼굴이 아니고 하나님의 얼굴이 안 보이는 뒤편을 보게 한 겁니다.

그런데 그 뒤쪽 면을 따라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따라가게 되면 나중에 하나님이 정면으로 돌아섰을 때 거기에는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예정하시고 준비해놓으신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과 자비와 사랑과 영생이 주어지는 거예요.

이스라엘백성은 그냥 앉아서 혜택을 받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따라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어떤 식으로 저주받아야 되는가 하는 법의 절차에 의해서만 받아야 하는가, 왜 법의 절차 없이 그 노선에 들어서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자비와 은혜를 알 수 없게 되는가, 왜 법이라는 철로에 들어가야만 알게 하시는가? 그것을 이스라엘백성들은 율법을 통해서 알아가야 되는 겁니다.

말을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법이라는 것은 아브라함 언약에서 하나님의 약속이거든요. 약속이라는 것은 ‘네가 믿으면 복을 받는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는다는 그것도 하나의 율법이 되니까. ‘네가 그냥 복을 받는다.’ 그 다음에 ‘네가 믿음으로.’ 그렇게 되는 거예요. ‘네가 복을 받게 되었구나.’ ‘왜요?’ ‘네가 날 믿거든.’

복이 먼저고 그 복이 온 효력으로 그 결과로 믿음까지 따라온 겁니다. 약속을 믿는 그 믿음까지 복 안에 포함되어 있어요. 그러면 끝나는 문제잖아요. 그걸로 끝났으면 그걸로 이스라엘 열두지파가 다 복 받으면 되는데 왜 그 뒤에 율법을 줘서 그들로 하여금 율법 못 지켰다고 분노하고 저주하고 화내고 징벌하고 멸망당하는 일을 왜 하느냐 그 말입니다.

법 자체가 주어지면 법이 뭔지를 몰라요. 왜 모르냐 하면 하나님의 법이 주어지게 되면 선악과 따먹은 인간이 자기 안에 있는 내장되어 자기 법의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법을 오독, 잘못 해석하는 거예요. 전부 다 해석을 잘못하고 있는 거예요. 율법에 대해서 해석을 잘못하고 있어서 잘못한 해석을 실천하게 되면 거기서 저주와 징벌을 받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징벌을 받아야만 비로소 법이라는 것이 뭔지를 알게 돼요. 참 어렵지요? 법이 필요 없는 사람은 법이 뭔지를 몰라요. 그런데 법이 매일 주어지는 사람한테 비로소 처벌이 주어지고 처벌이 주어질 때 비로소 ‘아, 법이라는 것은 이렇게 매섭고 이렇게 혹독하고 단호하고 냉정하고 싸늘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온몸으로 절감하게 만들어요.

그게 법입니다. 법이라 하는 것은 ‘네가 어겨보라.’는 거예요. 어겨봐야 법을 아는 겁니다. 법을 위반하지 않으면 법을 몰라요. 법을 모르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어느 경로에서 오는가를 모릅니다. 어느 경로에서 오는지를 모르면 어떻게 되는가? 유대인이나 이방인도 마찬가지거든요.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서 주어지는데 인간들은 모든 것을 잘못해석하기 때문에 자기 상상하는 하나님 쪽에서 사랑과 은혜가 온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정화수 떠놓고 빌었더니만 내 아들이 사법고시에 합격되는 은혜를 받았다.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그 신은 율법을 거치지 않고 내 상상력에 의해서 내가 갖고 있는 죄악 된 사고방식에서 나온 하나님이 되고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미국에 있는 목사의 설교를 평해달라고 해서 ‘죄인이 알고 있는 그리스도하고 그리스도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가 다르다.’고 했어요.

그리스도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가 되려면 우리는 철저하게 율법의 위반자가 되어 있어야 돼요. ‘죄를 짓지 맙시다.’가 아니라 ‘죄가 뭔지 압시다.’가 되어야 돼요. ‘죄를 짓지 맙시다, 가 아니라 죄를 본격적으로 지읍시다.’라는 말도 안돼요. 왜냐하면 태어날 때부터 죄를 짓고 있는데 새삼스럽게 무슨 죄를 더 짓습니까?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숫자가 많은 사람이 믿는 것이 진리인가, 숫자가 적은 사람이 믿는 것이 진리인가?’ 우리교회가 몇 명 되지도 않는데 그 몇 되지도 않는 사람이 믿는 것이 어떻게 진리인가, 라고 했을 거예요. 그 사람은 율법에 들어가 보지를 않았기 때문에 자기 생각에 많은 사람이 믿고 있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 속에 들어와 보면 적은 자,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보다 숫자가 적어요.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적게 했어요. 그리고 예수님도 ‘적은자여 두려워하지 말라. 하늘나라가 너희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특히 예수님 십자가 질 때 다 가버렸어요. 예수님 혼자 남았습니다. 기드온에게 군사가 2만 2천명이 왔을 때 하나님께서 만 명도 많다고 했거든요. 300명 가지고도 수십만의 미디안군대를 이겼다 이 말이죠.

이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성경을 오독하고 타고난 인간의 선악과 따먹고 생겨난 양심에 의해서 ‘아마 하나님의 뜻은 이것일거야. 많은 사람이 믿는 것이 진리지.’ 이런 식으로 자기가 갖고 있던 선입감, ‘나는 그래도 예수 믿으니까 복 받지.’ 라는 그 선입감에 의한 예수가 그게 진짜 예수가 아니라니까요.

그게 가짜고 우상이에요. 그분은 저주를 받아봐야 되고 심판을 받아봐야 돼요. 욥처럼 ‘하나님이여,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게 하지 나를 왜 태어나게 했습니까?’라는 그야말로 자기 생일을 저주할 정도로 혹독한 시련을 당해봐야 ‘아, 내가 그동안 삼위일체라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우상을 섬겼다.’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법은 위반하는 가운데서 비로소 우리는 법 앞에서 저주받아 마땅한 것을 압니다. 저주받아 마땅한 것을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뭘 깨닫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내린 모든 저주스러운 조치, 모든 것을 강탈해가는 조치가 너무나 합당한 조치며 그것이 바로 내 자신의 진짜 내 모습을 들추어내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찾아오지 않은 사람은 계속 우상에 둘러싸여서 아직도 환상 속에 내가 꾸며낸 신 속에, 내가 꾸며낸 메시아 속에, 내가 꾸며낸 십자가와 언약 속에서 구원받았다고 착각하며 살게 됩니다. ‘복을 받았는데 뭐, 이제 복을 거저 받았으니까 이제 누리면 되지.’ 아닙니다.

복을 거저 받은 것은 그 받은 복 가지고 율법 앞에 서서 ‘네가 복은 하나님께 받아놓고 그 모든 복을 네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과 체면과 위신을 수립하는데 온갖 투자를 다 하고 있고 너 자신이 우상화 되어서 하나님, 하나님, 하고 입에 발린 소리나 해대면서 그 모든 것을 자기의 바벨탑, 나라고 하는 기념탑, 나라고 하는 신상을 세우는데 모든 것을 소비하고 있다.’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거 불태워야 되겠지요. 하나님의 진노가 찾아오는 겁니다. 본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됩니다. 본문의 시드기야 왕은 요시아왕의 셋째 아들인데 요시아 다음으로 아들인 여호아하스, 여호야긴이 왕이 되었다가 여호야긴의 아들인 여호야김이 왕이 되었다가 다시 그의 삼촌 되는 시드기야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되었는데 이 시드기야가 바벨론이 쳐들어온다고 예레미야가 이야기할 때는 곧이듣지를 않았어요. 곧이듣지를 않다가 막상 바벨론이 쳐들어오니까 무슨 흉내를 내느냐 하면 옛날 왕인 히스기야 왕의 흉내를 내요. 시드기야와 히스기야가 발음이 비슷하지요. 히스기야는 좀 괜찮은 사람이고 시드기야는 아주 엉망인 사람이었습니다.

역대하 32장 20절에 보면 “이러므로 히스기야 왕이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로 더불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왕의 영에서 모든 큰 용사와 대장과 장관들을 멸하신지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 죽여 버렸어요. 산헤립왕 하고 몇 명 살고 18만 5천명이 죽었으니 엄청나게 죽었습니다.

시드기야가 과거 역사가운데서 이걸 봤거든요. 이걸 써먹는 거예요. 흉내를 내면서. 뭐와 같으냐하면 젊을 때 돈 번다고 바쁘다고 교회 안 나오다가 나중에 나이 좀 먹으면 나온다고했다가 나이 많았을 때 나오는 사람들, 그 사람은 남들이 이런 식으로 은혜를 받았으니까 그걸 본 따서 자기도 그런 상황을 만들면 복이 오겠지,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속죄제 드리면 속죄함 받겠지.’ 율법 앞에서 흉내 내고 모방하면 자동적으로 복이 오고 속죄가 된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취지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네가 율법을 그 따위 식으로 해석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너는 복 받고 은혜 받을 자격도 못돼.’라는 뜻이예요.

그런데 인간은 말씀에 대해서 해석하는 것이 그런 해석밖에 할 줄 모릅니다. 죄인이 아는 그리스도와 예수님이 아는 예수님이 다르다고 하는 말을 했다고 해서 자기가 죄인인 그리스도를 버리고 예수님이 아는 예수님으로 바로 갈수가 없어요. 그럴 능력이 우리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성경을 보면서 이것을 율법적으로 다시 말해서 ‘이것은 우리를 저주하기 위한 말씀이다.’라고 받아야 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지키자.’가 아니라 그리고 새삼스럽게 ‘죄짓자’도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말씀이라도 이런 식으로 위반해 왔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성경을 들춰보면 그게 드러나요. 그러니까 성경을 안 보게 되면, 복음을 안 듣게 되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느냐하면, 성경말씀을 자기가 일방적으로 해석해서 ‘이것은 지킨 것, 이것은 안 지킨 것, 이것은 지켰으니까 의로운 것, 이것은 안 지켰으니까 죄악된 것, 앞으로는 죄악된 것도 의롭게 정화시켜야지.’ 이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자기가 의롭다고 한 것을 성경에 비춰보면 전부 다 그게 죄입니다. 의로운 게 없어요. 의로운 것이 없다는 말을 교인들이 들으면 수긍을 하는데 목사들은 여기에 대해서 수긍을 안 해요. 본인이 남보다 성질이 더 못돼서 안 의롭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태어난 것부터가 아예 의로운 것이 없이 태어났어요.

로마서 3장 4절에 나오지요.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거짓된 것을 아시고 은혜를 주셨는데 인간들은 은혜를 받아놓고 하는 말이 ‘내가 제대로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그 대가로 하나님께서 은혜 주신다.’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시는데 그것 자체가 성경 앞에서 죄가 되는 겁니다. 우상이 되는 거예요.

우상이 아니고 진짜 예수님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마지막 때에는 이 장마철에 항상 구름이 끼는 것처럼, 마지막 때에 우리는 율법 앞에서 항상 죄인이며, 특히 그 율법이 모아놓은 그 결정체인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나불나불 할 수가 없으며 항상 입을 다물 수밖에 없으며 그 구원, 용서라는 것은 십자가를 거쳐서 하나님 쪽에서 예수님에게 주신 것이고 우리는 그저 입양아라고 하지요, 아들이 아닌데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은혜로 아들로 삼아준 거예요.

그래서 그 공로가 예수님의 능력으로 일방적인 사랑으로만 우리가 건짐 받고 구원된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먹구름 속에서 햇빛이 비춘다면 그것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가 나름대로의 효과를 드러내어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지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어떤 행동으로 흥정이 맺어져서 그 흥정의 결과로 우리가 구원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줬을 때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약속을 받았다는 그것과 위배되고 모순되는 것이 아니고 서로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430년 후에 율법이 주어진 것은 그 율법을 통해서 우리의 입을 막고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어봐야 그것이 항상 뭘 로 변하느냐, 항상 그것이 죄로 바뀐다는 사실, 항상 우리에게는 죄로 바뀐다는 겁니다.

‘나는 예수 믿었습니다.’ 몇 초 가지도 않아요. 몇 초 가지도 않아서 예수 믿는 나의 행함이 나의 공로가 되고 나의 선행이 돼버려요. 끊임없이 그래요.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지만 디모데후서 3장 1절 같은 경우에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말씀이 나올 때 이걸 지키는 것이 아니고 이런 말씀의 지적에서 평생 동안 어느 한순간도 피할 수가 없어요. ‘감사치 아니하고’ 이것은 나이 80, 90이 되어도 계속 우리에게 적용 되는 겁니다. 이것이 주께서 자기 백성을 이끄시는 절차입니다. 반드시 이런 절차를 통해서 십자가의 은혜가 더 크게 더 넓게 더 고맙게 느껴지게 하는 방법이 성경입니다.

만약에 이런 말씀에 대해서 ‘예수 믿고 나서 내가 지킨다.’가 되어 버리면 그 자체가 자기가 알았던 그 십자가가 우상의 십자가로 이것은 유사복음이고 이것은 전혀 하나님도 아니고 예수도 아닌 자기가 자기 의로움을 기어이 챙기려고 자기욕구에 의해서 조작된 그런 예수가 되는 겁니다.

마지막 때에는 매일같이 먹구름처럼 천둥번개치고 유황불 맞고 늘 매 맞고 늘 꾸지람 당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그 복을 우리가 받습니다. 성령께서 늘 우리의 육을 책망하고 늘 우리의 육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마다 이 율법을 보내신 것은 그 배후의 아브라함의 복이 작용하고 있기에 아브라함의 복이 왜 복인지 알려주기 위해서 자기 백성에게 율법을 줘서 십자가를 줘서 그걸 통해서 ‘아하, 내가 믿을 것은 나한테서는 남아 있어서는 안 되겠구나. 믿을 것을 내가 제조해서는 안 되겠구나. 우리가 믿고 구원받고 영생 얻을 것은 이미 주께서 홀로 다 장만해 놓으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더 이상 내 것을 끄집어낼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냥 꾸중만 받으면 되고 징계만 받으면 되는 겁니다. 징계가 없는 사람은 사생아니까. 매일같이 징계 받고 매일같이 꾸중 듣고, 주식 값 올라가는 징계, 땅값 올라가는 징계, 애 성적 올라가는 징계, 교회 부흥되는 징계, 몸이 아픈 데가 없는 징계, 항상 교만할 수밖에 없고 오만할 수밖에 없고 ‘이만하면 하나님, 이제 제 힘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라고 자립하려는 이 정신머리, 남하고 비교해서 조금 앞장서면 자화자찬하는 이러한 징계, 이것이 바로 주께서 아브라함의 복, 준비된 복이 우리에게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저주받아 마땅한 것을 깨닫는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저희들이 마지막 때에 심판받아야 된다는 사실, 그게 우리의 본래의 모습인 것을 우리는 왜 자꾸 잊어버리는지, 이제부터는 그 심판받고 저주받는 그 경로를 통해서 십자가에 동참함으로서 비로소 주님의 용서가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얼마나 고마운지를 더욱 더 깨달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