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7. 25. 10:14

울지 말라 (누가복음 7장 11-17절)

본문 : 누가복음 7장11-17절
제목 : 울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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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강-눅7장11-17(울지말라)-luk100725

울지 말라

2010년 7월 25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7:11-17

(눅 7:11, 개역)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눅 7:12, 개역)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눅 7:13, 개역)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눅 7:14, 개역)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눅 7:15, 개역)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눅 7:16, 개역)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 보셨다 하더라』
(눅 7:17, 개역)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예수님 일행과 어떤 장례행렬의 우연한 만남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사람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장례 행렬을 멈추게 했습니다. 죽은 자의 어머니는 과부였는데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잃어서 울고 있습니다. 이것이 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요 예상한 바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예상 못한 일을 하십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하나님 믿고 난 뒤 기대하고 있는 ‘새로운 사람 되기’와 전혀 상관없는 조치로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사람들이 예상하는 ‘새 사람되기’란 단군 신화에 나와있는 파와 마늘을 100일 동안 먹고 사람되는 식입니다.

즉 사람이 성사 시킬 수 있는 방식을 통해서 인간들은 새 사람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되면 열심과 지극 정성이 묘책이 될 것입니다. 참고 견디면 곰도 인간 되듯이 언젠가는 인간도 신이 될 수 있으리고 믿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진정 만들어내시는 새사람은 이런 식이 아닙니다.

도리어 현재 새 사람되려고 애쓰는 그 인간을 저주와 심판과 지옥과 연결시켜버립니다. 즉 인간이 세상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 입장에서 지극히 당연하고 추호도 하자나 잘못이 없는 합당한 조치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단지 ‘살기 힘들고, 외롭고, 욕망을 다 충족되지 않는다 세상’이라는 이유로 신의 사랑에 비해서 비정상적 상황이라고 간주하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힘들어 하면서 우는 것은 자기 행실과 행위와 본성에 맞추어볼 때 너무나도 합당한 대우입니다. 사실 더 가혹해야 합니다. 더 처참하게 망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지독한 형벌이 인간에게 주어져도 인간은 거기에 대해서 항변할 근거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있을 만해서 살아있다고 여깁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신을 그려냅니다. 당연히 가짜입니다. 사람은 늘 무너져야하고 늘 울어야 합니다. 운다고해서 그것을 근거로 구원해 줄 필요성을 하나님은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울고 또 울고 영원히 울어야 될 자를 울게 했을 뿐입니다.

그 어떤 동정이나 연민의 이유로 작동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신을 삶의 동반자로 여기며 삽니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신의 보호 속에서 온갖 저주나 발상사를 사전에 미리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죽게 되면 그런 것들이 한이 되고 통곡으로 방출됩니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잃었다고 우는 이 과부는 자신의 소망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곧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무너져내린 것입니다. 만약에 이 여인을 신을 믿고 있었다면 자신이 믿는 신도 함께 무너져내린 바가 됩니다. 그 여인이 예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날아가버린 것입니다. 자존심이 날아갔다는 말은 더 이상 자신의 옳음을 증명해 줄 그 어떠한 떤 법도 자기에게 일체 남아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하면 꼭 법을 염두에 두고 생각합니다. 즉 신의 존재함은 신이 내려준 법의 존재함을 통해서 접근 가능하다고 보는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법해석은 기껏 자신의 자존심의 발로일 뿐입니다. 자신이 죽게 되면 그 하나님도 같이 사장되어버립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신과 더불어 있는 자기만의 삶의 환경을 꾸미고 살아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죽는 마당은 그 신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참된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것은 말씀과 언약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이 기대한 하나님과 충돌과 대립이 생기게 됩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울지 않기 위해서 신을 믿지만 신의 등장은 인간들로 하여금 도리어 울게 만들고 잃게 만들고 심지어는 죽게 만드는 힘으로 나타나십니다.

희망 걸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새 사람 되겠다’는 의식 자체가 죽어 마땅한 자들의 상투적인 종교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산 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인간들의 몸은 실은 하나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하나님 것인 몸뚱아리를 근거로 거기서 ‘자아’를 조성해놓고 그 자아를 위해 충성을 하면서 평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허점을 지적하기 위해 하나님은 죽음을 가지고 사람을 만나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혀서 그것으로 자신을 계속 살게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오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 의해 지켜지는 글씨가 아니라 사라져야 될 글씨입니다. 골로새서 2:14-15에 보면,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잠시 우리에게 보여주고서 사라지는 이유는, 우리가 그 말씀을 배우고 익히기 이전부터 이미 온 세계는 그 말씀대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139:2-7에 보면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을 때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믿기 이전부터 이미 우리와 함께 있어 저주라는 합당한 조치를 취하고 계셨고 결국에는 우리를 죽여버리십니다. 말씀은 사람의 손을 떠나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모든 능력한 한 지점으로 달려와서 완성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입니다. 즉 십자가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하고 놀라운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은 새 사람을 만드시는 겁니다. 그 방법은 법이 아니라 긍휼입니다. 백성 아닌 자를 백성으로 불러주시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 자에게 불쑥 나타나시는 식으로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 근거는 오직 십자가의 피입니다. 그래서 이 피를 가리는 것들이 모두 이단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여기가 곧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지점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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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강-눅7장11-17(울지 말라)-luk100725

2010-07-26 17:20:32   녹취 : 오용익 조회 : 1   
 

037강-눅7장11-17(울지 말라)-luk100725-(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7장 11절에서 17절까지입니다.

누가복음 7:11-17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쌔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 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예수님과 일단의 무리가 만났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함께 가는데 맞은편에서 누가 오느냐하면, 외동아들을 둔 한 어머니가 그 죽은 아들을 관에 메고 오는 장례행렬을 만났습니다. 아들이 죽었으니 당연히 울지요. 예수님께서 울면서 오는 그 장례행렬을 멈추게 했습니다. 멈추고 난 뒤에 여자보고 ‘울지 말라.’ 하십니다.

이 여자가 지금 우는 것이 취미라서 우는 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뿐인 외동아들이 죽었으니 당연히 우는 거지요. 여기까지는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장례 치르고 있는데 ‘그만 우세요.’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누구보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관에다가 손을 대고 이미 죽어버린 자, 죽은 자를 보고 이야기해요.

예수님의 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주위에 아무도 없습니다. 관속에 누워 있는 사람에게만 이것이 통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은 안 통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왜 예수님 말을 못 알아듣느냐 하면 그 사람들은 상식적인 세계 속에 그들이 예상한 세계 속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살아 있다고 여겼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한테는 예수님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번 가야산에서 십자가마을 수련회 하는데 거기서 레위기를 이야기해도 자기가 살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레위기강의 아홉 번, 열 번 해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어 있는 자에게만 들리게 되어 있어요. 요한복음 5장에 보면 ‘그 날이 오면’, 예수 믿든 안 믿든, 절에 다니든 안다니든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다 죽고 난 뒤에 죽은 자가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한 것이고 그 뒤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다.’(히 9:27) 죽어야만 들을 수 있는 말씀을, 이 문자로 된 성경책을 우리는 오늘 아침에 듣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가 살아 있다고 여기고 ‘나 여기 있어. 나 여기 생생하게 살아 있어. 나 아직 안 죽었어. 이 살아 있는 내가 뭔가 할 수 있단 말이야.’라고 자기 자신에게 아직도 미련을 갖고 계신다면 그 사람한테는 이 성경말씀이 귀에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주여, 평생 동안 상식대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끝은 우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내 자존심이 한계의 벽에 부딪혔습니다.’ 왜 웁니까? 내가 타넘고 타넘으면 울지를 않아요. 하지만 아무리 시도해도 타넘을 수 없는, 이쪽 세계에서 저쪽으로 건너갈 수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절감할 때, ‘울게 하소서.’

‘울게 하소서.’ 이것이 유명한 노래인데, 그냥 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게 없습니다. 주님께서 관속에 있는 사람하고 대화한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예상 밖의 사태가 벌어진 겁니다. 사실은 그 전부터 다 예상 밖의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는 그 해석을 엉터리로 해서 ‘예상되는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것이다.’라고 자꾸 생각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하도 못 알아먹으니까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어라.’ 이런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 귀 있어? 그럼 너는 못 들어.’ 이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저는 귀가 양쪽 다 있습니다.’ ‘그러면 안 돼. 그러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지.’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예상할 수 없는 예상 밖의 인물에 해당되는 그 정도에 머무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도 우리 인간들이 도저히 납득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는 인물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는 그 사람도, 예수 믿는 본인도 본인이 이해가 안돼야 되요. 이것은 미쳤어요. 만약에 우리가 큰 가문의 장손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일 년에 열두 번 제사 드린다고 해봅시다. ‘너는 장손이다. 너는 우리 가문을 어찌되었든지 살려야 돼.’ 하고 있는데 ‘아버지, 이제부터는 교회 가렵니다.’ 이것은 미친 거예요.

‘누가 꾀었어? 어느 목사가 꾀었어?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이고 네가 이 집안의 며느리가 되어서 교회를 가? 언제부터 그런 꼬임에 넘어간 거야?’ 그러면 그 며느리나 아들이 하는 말이 ‘저도 제가 왜 이렇게 된 줄 모르겠어요. 지금의 저는 예상 밖의 나입니다. 저도 제가 이렇게 달라질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제가 예수님 피를 믿고 복음을 믿는 이것은 제가 교회를 다니면서도 예상을 못했던 일입니다.’

주님께서 새롭게 만들어내는 피조물이 이런 피조물이에요.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납득이 안 돼.’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주님께서 만들어내는 모든 인물들도 그 주변 사람들한테 ‘나는 도저히 네가 납득이 안 돼. 너는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 돼.’라는 사람이 되어야 예수님의 나라에 합세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 갈 수 있어요. 그 외에는 불가능 합니다.

단군신화에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곰이 쑥과 마늘을 먹어야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단군신화를 다 들었는데 애들한테 이 이야기를 하면 픽 웃을 거예요. 이 과학시대에, IT시대에, 입체 TV가 나오는 이 시대에 ‘쑥과 마늘을 먹으면 곰이 사람 된다.’는 이게 무슨 의미를 줄 수 있느냐, 하고 피식 웃었을 겁니다.

그러니 피식 웃은 그 인간, 그 어린애들 나이 80되고 90되어서 정말 쑥과 마늘 먹어서 영생 얻는다면 빈말이라도 그것을 먹겠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사람이 얼마나 새사람이 되고 싶어 했으면, 얼마나 새사람 되는 것이 한이 맺혔으면 기껏 끄집어낸 아이디어가 ‘쑥과 마늘을 먹으면 곰도 새사람 된다.’는 겁니까?

어쨌든 새사람이 된다면, 내가 죽어서도 영생을 얻을 수 있다면 내가 무슨 일도 다 하겠다. 인간이 어릴 때는 몰랐는데 이런 욕망, 도저히 안 되는 일이지만 이런 욕망이 살아 있다는 거예요. 무슨 욕망이든지 이것이 이루어지면 이것이 괜찮은 욕망인데 욕망만 있을 뿐이지 그것에 대한 대책은 없는 욕망, 이게 진짜 대책 없는 인간입니다.

전에 그런 설교 한 적 있지요. ‘내가 이웃을 몇 번 용서해야 됩니까?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 라고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일곱 번의 일흔 번을 용서, 그러니까 490번을 용서해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490번을 용서했으면 용서가 될까요? 베드로가 ‘490번 용서 했는데요.’라고 나온다면 예수님은 ‘490번의 490번을 해라.’ 이렇게 나올 겁니다.

완전히 약 올리는 거예요. 그러면 490번의 490번이 몇 번입니까? 7십 6만 8천 2백 4십 여섯, 이것은 틀린 답인데 제가 맘대로 불러 봤습니다, 7십 6만 8천 2백 4십 여섯, 그러면 그 다음에 용서가 될까요?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옛 사람이 용서를 해도 그것은 네가 납득이 되는, 살아 있는 네가 납득이 되는 그런 용서는 애초부터 용서가 아니었느니라.’ 그 말입니다.

자꾸 양적으로 자기를 때리고 자기를 굴복시키고 애를 쓴다고 해서, 그야말로 ‘쑥과 마늘을 먹어서 새사람이 된다면 쑥을 몇 단 먹어야 됩니까? 육 쪽 마늘을 몇 개를 먹어야 되는 겁니까? 아예 의성에 가서 살까요? 다 먹어도 새사람 안 되면 어떻게 합니까? 전 영록이라는 가수가 불렀던 가요에 이런 가사내용이 있어요.

종이학을 접는데 ‘천 번을 접어야만 학이 되는 사연을 네가 아느냐.’ 하거든요. 그래서 그 노래를 듣고는 오기로 천 번을 접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사랑을 얻었습니까? 새사람이 되었습니까? 종이학 천 마리 접어서 살림살이가 나아졌습니까? 교회에서 오기를 부린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은 새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교회에서 열심 내서 새사람 되겠다는 그 사람은 아직도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아마 교회에서 평생 살아도 지옥 갈 거예요. 자기가 예상하고 납득이 되는 것, 그것은 결코 새사람 될 수 없습니다. 왜? 그만큼 오기를 부리고 열성을 내게 되면 그 자존심은 안 죽고 그 자존심은 오히려 더 커지기만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이 아들 죽은 과부는 다행스럽게도 자기 자존심의 벽, 자기가 할 수 있는 대로 다 했지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절망의 통곡, 그냥 통곡하는 그것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는 겁니다. 그것이 자기의 마지막 끝에 온 겁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자기의 유일한 희망인 아들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손 터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평생 힘들게 살아도 그동안 살아오면서 키운 소망이 뭐냐, 내 자식은 잘 될 거라는 그것에 희망을 걸고 살아왔는데 그 자식이 내가 눈감기 전에 먼저 죽어버렸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물청소가 되어버렸어요. 완전히 다 없어졌어요.

그 애 죽고 나서는 완전히 없는 거예요. 남아 있는 것은 그동안 맺히고 맺힌 한이 통곡으로 터져 나온 그것뿐인 것입니다. 운다는 그것이 마지막 자존심입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고 술 먹어 본적이 저는 없기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회식자리에서 파장하고 일어서는데 어떤 사람이 술을 더 먹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평소에 술을 안 마시는 사람이 그랬어요. ‘저기 저 자리에 술잔이 그대로 있는데 그걸 마시세요.’ 하니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와, 하고 파안대소했답니다. 왜 여기 저기 술잔에 남아 있는 그 술을 마시면 안 되는가? 이게 술꾼들의 법칙인 모양입니다. 자기술잔에 담긴 술은 자기가 마시되 못 마시면 그대로 남겨두고 다른 사람의 술잔에 손대는 것이 아니라는 그것이 법칙인 모양이에요.

여러분의 표정이 ‘지금 뭔 소린가?’ 하시는데 다들 술을 마셔봐야 할지 알 수가 없겠지요. 그런데 술자리에서는 그런 법칙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듣고 ‘왜 그런 법을 만들었는가, 대체 법이 뭔가?’ 알고 보니 법이 뭐냐, 자존심이에요. 법은 그렇게 만들라고 누가 지시한 사람이 없고 자기 자존심이 하나의 뭉치로 나오면 그것이 법이 돼요.

어떤 아버지는 ‘내가 아무리 늦게 오더라도 내가 늦게 오기 전에 자식들이고 아내고 잠들지 말라.’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아버지가 오시기 전에 왜 자면 안 되는데?’ ‘법이다!’ 그러거든요. ‘무슨 그런 법이 있습니까?’ ‘왜, 내 자존심이다.’ 자존심이에요. 저는 유교적인, 제가 공부해보니까 그것은 유교도 아닌데 순 사기성 짙은 유교인데, 저는 그런 유교적인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 거기서 법이 뭐냐, ‘절대로 문지방을 밟지 말라.’는 거예요.

어릴 때 부모님은 어디 가시고 주로 할아버지하고 살았는데 항상 할아버지 말에 대해서 두 가지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첫째는 그 법을 완전히 지킴으로서 할아버지가 볼 때 부끄럽 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법을 제조한 사람이 ‘나는 너에게 할 소리가 없다. 네가 법을 완벽하게 지키니까.’ 할 정도로 법을 완전히 지킴으로서 법 위에 서고 싶은 욕망,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다 해줌으로 말미암아 법을 제조한 사람으로 하여금 내 앞에서 할 말을 잊어서 할아버지 자존심을 꺾고자 하는 욕망이 그 첫 번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제 방식이고 우리 삼촌방식은 뭐냐, 아버지가 시키는 것은 시키는 족족 다 어김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가 하는 말은 법도 아닙니다.’ 하고 완전히 무시하는 방법, 결국 우리 집안에는 그 두 가지 종류의 대처법이 생겨났어요. 이 두 가지 종류의 대처법이 나중에 공부를 해보니까 전 세계의 모든 아담에게서 나오는 두 가지 성향이었습니다.

그것이 축소되고 간추려져서 우리 집안, 경주이씨 산수공파라는 한 집안에 뚝 떨어진 것이고 간추려진 겁니다. 그러니까 제 성장과정에 있었던 어른들의 법과 거기에 대처하는 태도가 나중에 집집마다 심방을 가서 보니까 우리 집안만 그런 줄 알았더니 아니었더라고요. 보편적으로 모든 집안이 다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무조건 법인데 그 법에 대처하는 그 부인되는 쪽은 겉으로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유교적 집안에 조신하고 착하고 훌륭한 부인인 것을 외부적으로는 드러내면서 내부적으로는 남편을 어떻게 두 가지 방법으로 조져버릴까, ‘저 인간을 지켜서 조질까, 아니면 완전히 무시해서 조질까?’ 그 두 가지 방법밖에 없었어요.

결국 인간이 ‘나는 교회도 안가고 절에도 안가고 내 맘 대로다.’ 하고 외치지만 사람은 뭔가 근본적으로 법을 요청하고 있어요. 법을 요청해서 내가 지킬 수 있는 법을 내가 지켜줌으로 말미암아 그런 자유인이 되려는 심보, 그 심보를 사람들은 교회 다니면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이것이 바로 납득이 되고 예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와서 목사에게 욕하는 것은 ‘주세요, 법을. 오늘 성경에서 무슨 법을 주시렵니까? 내가 그 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목사라도 내 앞에서는 아무소리 못하게 만들겠다.’ 안 그러면 ‘비록 내가 교회 왔지만 우리교회 설교 들으면서 나는 복음을 알기에 법을 아예 무시함으로써, 개판 쳐도 천당 간다, 그런 식으로 함으로써 주일성수고 십일조고 다 깡그리 무시하는데서 나 복음 아는 사람이다.’ 라고 행세하고 싶은 욕망, 그 두가지의 욕망을 다 보여줍니다.

둘 다 문제에요. 문제가 뭐냐 하면, 우리가 예상하는 것은 하나님이 법을 주셔서 법 안에서 우리가 만난다,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예수님과 우리의 만남은 그렇게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은 죽음이고 심판이고 저주였던 겁니다. 이 세상에 방탕하고 타락한 사람의 특징을 조사해보면 공통점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주님의 심판과 저주를 안 믿어요. 심지어 자기 죽음도 안 믿어요. 오토바이 타고 철도 없이 ‘빠라바라, 빠라바라’ 하고 돌아다니는 그 인간들, 그 인간들 붙들고 ‘주께서 심판하십니다.’ 하면 픽 웃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강의 마치고 10시 40분차 타고 심야버스 타고 돌아오는 길에 제 좌석번호가 3번이었고 제 앞자리 1번과 2번에는 군에서 휴가 나온 군인 둘이 앉았어요.

늦은 시간이니까 승객들은 다 자고 있어요. 28명되는 사람이 다 자고 있는데 둘만 떠들고 있어요. ‘조용히 가자.’ 했어요. ‘아저씨는 안 피곤한 모양이다. 그냥 자소.’ 그러는 거예요. 술 먹었다고 오기를 부리는 거예요. 제가 참았지요. 성령에 의해서 참는 게 아닙니다. 아내가 평소에 ‘당신 제발 어디 가서 나대지 좀 마세요.’ 하기에 아내의 음성 못잊어 제가 참습니다.

벌써 11시 40분 지나서 12시가 다 되어가요. ‘그만 하고 자자 응?’ 기사가 그것을 이야기해 줘야 되는데 기사가 그 이야기를 안 해주는 거예요. 왜 안 해주는가, 기사가 차 몰면서 휴대폰을 하기에 제가 한소리 했거든요. ‘기사양반, 운전 중에 휴대폰 하지 마세요.’ 했기 때문에 나한테 삐져 있었어요. 그래서 내편이 안 돼주는 거예요.

‘이렇게 하는 것이 예의잖아, 예의.’ 하니까 그때서야 자기 시작해서 차가 터미널에 도착했는데도 자고 있었는데, 제가 무슨 말 하려고 하느냐하면 그런 애들 붙잡고 ‘내가 목사인데 사람은 죽고 나면 심판이 있다.’고 하면 픽 웃습니다. 사람은 자존심으로 사는 것이고 그 자존심을 잃고자 해서가 아니라 자존심을 더욱더 콘크리트 만들기 위해서 법을 동원시켜요.

‘나도 차표 냈기에 할 말 있습니다. 나도 표 끊느라고 돈 2만원 넘게 냈습니다. 그러니까 나도 이야기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게 뭐냐, 이게 법인데 그 각자가 만든 법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자존심이라는 게 있어요. 어느 교회 목사가 교회 건축한다고 하다가 한 200억을 부도내고 도망가면서 도망가는 주제에 퇴직금을 8억 받았다는 거예요.

자기가 일 저질러서 점포 부도나게 만들고 도망가면서 어떻게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 8억을 내놓으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광주에 있는 어떤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지난 금요일에 광주에 가니까 또 그런 이야기도 해요. 교회에 돈이 한 푼도 없는데 목사가 돈 내놓으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목사가 돈을 좋아하느냐, 물론 기본 돈 좋아하지요.

그 교회 장로들이 ‘교회가 모아놓은 돈이 없는데 무슨 돈을 달라고 하느냐.’ 하면 그 쪽에서 하는 말이 ‘이게 법이다.’ 하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뭐냐, ‘내가 돈이 좋아서 돈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8억이라도 내 놓으라.’ 한 그 순간에 목사로서의 자존심을 유지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목사 참 잘못이다.’ 하겠지요. 목사 잘못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런 목사 말고요 예수님처럼 자기를 비워주는 목사가 왔으면 그 다음에 장로 중에 누군가가 그 짓하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장로가 그 짓을 못하고 있는 것은 목사가 워낙 세게 나오기에 그 짓을 못하는 거예요. 그것이 알고 싶다, 이제 알려 주마, 이제 알려주는 거예요.

교회 그런 겁니다. 누가 대장질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자기 존재가 법이에요. 이게 좋은 말입니다. 적어 놓으세요. ‘자기존재가 법이다.’ 그런데 그 아들밖에 없는 과부가 죽었다 그 말이지요. 이것은 자기 법이고 뭐가 다 죽은 거예요. 마지막 우는 것으로 자기자존심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 율법, 율법 하지만 율법의 진짜 해석은 모르고 ‘나는 살아 있다. 따라서 나는 자존심 있다. 따라서 내가 해석한 이것이 곧 나의 법이다.’라는 최루가스 같은 가스가 온 세계에 가득 차 있는 그런 세계에 예수님께서는 전혀 예상 못한 인물로 오신 거예요.

그들이 예상 못할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멈춰라.’ 하고 관속에 대고 이야기합니다. ‘청년아, 이제 그만 자라. 일어날 때가 되지 않았니? 이제 그만 일어나라.’ 주께서 일으키실 때에 그것을 본문에서 ‘긍휼히 여기신다.’고 되어 있어요. ‘긍휼히 여기신다.’ 이 긍휼히 여기신다는 말……, 아까 온 세상이 최루가스 같은 것으로 가득 찬 세상이라 했는데 그것을 어렵게 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신을 믿는다는 것은 삶의 환경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신과 더불어서 함께 있는 것이 삶의 환경이에요. 시편 139편을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 139:1-10)

이 이야기를 유대인들이 다 알고 있지요. 어릴 때부터 시편을 외우니까 다 알고 있다 이 말이지요. 이것이 교독문에 나온 내용입니다. 여러분이 이 시편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듭니까? 내 주변에 누가 계시다? ‘하나님이 계셔서 내가 어디 가더라도 하나님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렇게 돼버리면 그것이 자존심이 되는 거예요.

이것을 알았다고 해서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멋진 말 아닙니까? ‘어디 가더라도 거기 계시다.’ 그 시편 139편 자체가 틀린 말씀이 아니에요. 문제는 살아 있는 내가 더욱더 나를 살려내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도용한다는 것이 문제에요. 그 말씀에 해당되는 인간은 이 땅에 없는 겁니다. 주님께서 선악과 따먹은 인간을 저주할 때 그 다음부터 나타나는 것은 전부 다 저주스러운 환경을 만들어줬어요.

그러니까 이 저주스러운 인생을 산다는 것이 우리 보기에는 답답한 일이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아주 합당한 조치고 명쾌한 조치며 하나님 보시기에 하자 없는 조치에요. 너무나 정당한 하나님의 행위인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산다는 것이 힘들기에 내 환경이 뭔가 잘못된 줄 알고 있어요. 잘못된 것은 우리 자신이 잘못되었는데.

저주받을 짓을 해서 저주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우리는 조상하나 잘못 만나서 그 안에서 태어나다 보니까 그냥 저주가 본래 우리 모습이고 죽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말이지요. 시편 139편의 말씀을 보면서 그 말씀을 내가 사는 쪽으로 바꾸는 식으로 생각이 간다는 그 자체가 주의 말씀 앞에서는 저주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해석이라는 말이지요. 이 말씀 외운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것 아니거든요. 그래서 모든 말씀이라 하는 것은 내 자존심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나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있는 말씀이 아니고 아예 나라는 자리가 없는 거예요. 더 나가서 내가 없는 겁니다. 이 몸에서 ‘나’라는 것이 나왔는데 사실은 이 몸이 주님께서 말씀이 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 만들어낸 주님의 자기 장난감이고 자기 도구인데 여기서 ‘나’라는 것을 자꾸 뽑아내다 보니까 ‘내 몸은 내 것이다.’라는 그런 공식이 성립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런 하나의 방정식이 생겨서 그것이 하나의 법이 되고 자존심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내 삶의 환경속의 하나님, 나 여기 있고 하나님 저기 있다, 이런 것은 종이 꾸기듯이 다 꾸겨서 뭉개버려야 돼요. 이것은 없는 거예요. 허구, 내가 만들어낸 우상에 불과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있다고 여기는 곳은 하나님이 없으시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나타나시는가, 율법과 지시와 명령으로 비로소 하나님께서 얼굴을 쏙 내밀지요.

율법과 지시와 명령으로. 그런데 그 율법과 지시와 명령으로 오게 되면 우리는 그 앞에서 저주받은 자 맞고요, 죽는 자 맞고요, 심판받는 자 맞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마주침은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마주치는 거예요. 죽음 외에는 어떤 것도 마주칠 수가 없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레위기를 강의할 때 하기 위해서 이것을 준비하고 있는데, ‘자, 목사님, 레위기를 설명해 보세요. 맞는지 안 맞는지 성경을 저도 볼 테니까 한 번 설명해 보세요.’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레위기는 그런 식이 아니고 레위기는 율법이기 때문에, 우리의 예상 밖에서 하나님이 오기 때문에 제가 들고 있는 이주보가 레위기라고 한다면 중국산 라이터를 하나 준비해서 이 레위기를 죽 내리면서 ‘자, 봤지요?’ 하고는 그 순간 밑에서 라이터를 켜서 이 레위기를 태워 없애버려야 돼요.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좀, 오래 들고 있어야지 아직 내용파악을 못했습니다. 너무 빠릅니다. 좀 천천히 내려야지요.’ 다시 한 번 보여드립니다. 레위기입니다. 봤지요? 그리고는 라이터 불 붙여서 질러버립니다. 없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레위기를 봐야 순종하고 지키든지 말든지 하지요. 왜 그리 빨리 태워버립니까?’

주님은 뜻은 이겁니다. ‘당신들이 레위기를 보겠다는 그 자체가 잘못됐고 그걸 지키겠다는 그 자체가 당신들이 주제파악이 안된 상태에서 나오는 발언’이라는 거예요. 원래 이 성경말씀은 주님만 보고 불에 태워버려야 돼요. 왜, 지금 그 레위기가 우리를 만들었고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환경이 레위기 천지고 레위기로 전부 다 움직여 가기 때문입니다.

잠언으로 움직이고, 전도서로 움직이고, 레위기로 움직이고, 요한복음으로 움직이고, 요한계시록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 말이지요. 그걸 문자로 축소한다고 해서 우리가 알아먹습니까? 못 알아먹잖아요. ‘온 우주는 이런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봤지요?’ ‘뭔지 보게 좀 천천히 좀 보여주소.’

천천히 가면 문제가 돼 버려요. 왜냐하면 레위기를 지켰다고 우기기 때문에. ‘자, 레위기대로 심판합니다.’ 그리고 놔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심판 안 받기 위해서, 우리는 좀 더 살기 위해서 ‘문제지 좀 천천히 보여주세요. 레위기 좀 잘 지키게. 레위기의 말씀대로 순종 좀 하게. 왜 그리 빨리 내립니까?’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성경은 우리 보고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순종해서 살라는 것이 아니고 ‘당신들은 처음부터 죽도록 되어 있고 저주 받도록 되어 있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레위기에 의하면 합당한 조치입니다.’ 이거예요. 그게 골로새서 2장 14절에 나와 있어요.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 이 문자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아까 중국산 라이터로 태운다고 했지요, “……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처음부터 레위기는 불 싸질러 버려야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십자가가 그걸 대신하니까. 이게 골로새서 2장 14절 15절 말씀이에요. 그러면 목사님 성경은 왜 줬습니까? 성경을 봐야 하나님은 내가 상상한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말씀을 주시면서 자기 쪽으로 회수해 나가면서 이미 그런 식으로 세상을 이끌어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인 것을 알기 때문에 그래요.

‘봤지?’ 하고 찢어버리는 거예요. 우리는 찢는 것이 아까워 죽겠어요. 왜냐하면 이 말씀이 그대로 있어야 이 말씀을 지켜야 구원받는데 하나님 쪽에서 그걸 찢으면 우리는 뭘 지켜서 구원받으라는 말입니까? 그 따위 식으로 생각하는 그 자체가 이미 본인이 잘못된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는 그 자체가 ‘바다 끝에 갈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있음’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바다 끝에 가서 ‘하나님이 여기도 함께 계십니다.’라는 말을 한다고 해서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그 말을 하나 안하나 예수 믿으나 안 믿으나 주께서 모든 사람들 가운데 함께 있습니다. 지금 경포대 바닷가에 함께 있어요. 바다 끝에 포항 해돋이 보기 위해서 있는 그 사람들 가운데 지금도 함께 있어요. 바다 속에도 있어요. 바다 속에 있는 플랑크톤에도 하나님이 함께 있어요.

그걸 새삼스럽게, 성경에서 그려놓은 이 우주를 새삼스럽게 그게 이해가 된다는 말입니까? 이해가 되면 그게 죄지은 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죄 속에서 태어나기에 이해라는 것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항상 왜곡된 것이고 악마의 사고방식이고 예수님의 피로 승리했다는 것을 가리기 위한 하나의 유혹거리예요.

그 다음 남은 문제는 그러면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이사야 65장 1절에 보니까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유비쿼터스라 합니다. 돌발적인 것, 갑자기 등장해버려요.

어디든지 언제든지 계신 분께서 갑자기 등장하는 거예요. 찾지도 않았는데 나타나고 믿고 싶지도 않았는데 믿어지는 것, 이것이 긍휼로 이어지는데 로마서 9장 25절에 보면 “호세아 글에도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나를 사랑하지도 않은 사람을 내가 사랑으로 불러내리라.’ 이것이 본문에서 장례행렬의 관을 멈춰 세우고 ‘긍휼히 여기리라.’ 한 그 긍휼의 법칙입니다.

주님께서는 긍휼을 보여주기 위해서 긍휼의 법칙으로만 구원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말씀으로 율법으로 순종치 아니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을 주께서 겸하여 하셨던 겁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사랑과 긍휼로만 나타나요. 그 전에 우리는 울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뭘, 자기 인생에 대해서 실망해야 되고, 교회에 대해서 실망해야 되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 실망해야 되고, 내가 믿는 예수에 대해서 낙담을 해야 돼요.

예수한테 실망하고 낙담을 해 봐야 비로소 그동안 내가 알았던 예수는 내가 조작한 예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짜 예수님은 우리보고 설치라는 것도 아닙니다. 촐랑거리라는 것도 아니에요. 교회에서 까불라는 것도 아닙니다. 설치고 까불고 자기 혼자 ‘주여, 죄인입니다.’ 한다고 해서 주께서 긍휼히 여기는 것도 아니고 ‘나, 이제 예수 안 믿는다.’ 하고 삐져도 주께서 아무소리 안하고 어떤 곳에 있더라도 어디에 가더라도 주께서는 피 묻은 손으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실 때는 그 증거가 뭐냐, 오직 십자가의 피 밖에 없어요. 피에요. 피로서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일방적으로 죄인 되게 하시고 일방적으로 건지는 것도 하나님 아버지하고 아들만 의논해서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일방적으로 십자가 피를 흘려놓고 그 피로 말미암아 레위기든 출애굽기든 다 찢어버리고, 도말해버리고 십자가로서 승리했느니라.

‘지금 우리보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입니까?’ 하는데 믿든 안 믿든 간에 성경책에서 모든 율법을 도말, 찢어버리시고 십자가로 승리했다는 이 예상 밖의 구원방식, 전혀 우리의 자존심하고 무관해요. 내가 지킬 수 있는 법하고도 무관해요. 율법과 무관하고 나의 성경해석과도 무관하게 예수님의 피로만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전에는 죽은 자였고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예수님의 부활의 영이 스며들어오게 되면 그 자체가 우리에게 생명이 되어서 우리에게 산자가 되는 겁니다. ‘청년아, 그만 일어나라, 일어나!’ ‘왜요?’ ‘긍휼히 여겨 주니까.’ 엄마도 긍휼, 애도 긍휼, 주님의 긍휼이 우리의 모든 예상했던 우는 것도, 운다는 그 마지막 자존심도 그 앞에서는 무색해 지는 겁니다.

그야말로 ‘내가 참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하는 겁니다. 욥이 자기 인생이 괴로울 때 막 따졌어요. 따지고 항의하면서 진짜 하나님을 만나면 발길질할 정도로 ‘내 인생을 이렇게 망가지게 합니까?’ 하면서 얼마나 원망했는지요? 그런데 욥기 40장 마지막에 가니까, 하나님이 짠, 하고 나타나니까 입을 가로막고 ‘제가 부질없는 소리를 나불거렸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니까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

여러분, 죄가 뭐냐 하면 농땡이 부리는 것이 죄가 아니고, 타락하고 간통하고 음란한 이것이 죄가 아니라 주님의 희생의 피, 그것을 외면하는 것이 죄입니다. 교회 나오나 안 나오나 그것도 죄가 아니고 어디가도 주님의 희생덕분에, 그 피 때문에 내 대신 죽으셨다는 그 사실, 주님의 그 고통과 아픔, 그것이 바로 내 자존심 속에만 살아가는 나를, 그 죽은 나를 다른 노선으로 살려낸다는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놓칠 때 그게 바로 죄입니다. 그게 바로 이단입니다.

제가 지금 책을 하나 준비하고 있는데 제목을 ‘개혁주의자들의 공모’라고 할까, 아니면 ‘이단의 발생’이라고 할까, 생각중인데 한국교회 200년 역사 전체가 이단이라는 사실을 고발하려고 합니다. 법, 기독교라는 자존심, 교회라는 자존심, 이것이 법이 되어서 그 법에 순종하라고 교인들에게 얽매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하는 그 긍휼을 가로막고 주님의 희생을 가로막고 피를 가로막는 문화단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공하세요, ……하세요, 하지만 젊은 애들은 이 과부의 눈물을 몰라요. 성공, 성공신화, ‘이러면 이깁니다, 이러면 돈 법니다.’ 이것 밖에 모르지 하나밖에 없는 마지막 최후의 자존심마저 꺾어버리는 주님의 찾아오심,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으로 찾아오시는 그 찾아오심을 젊은 사람들은 몰라요. ‘복주면 제가 하나님을 찾아가겠습니다.’ 이 따위 보상관계, 거래관계밖에 몰라요.

이것은 한국교회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교회 가면 젊은 애들이 자기 치는 작업을 해요. ‘주여, 이렇게 희생 하겠나이다, 아프리카 선교 가겠나이다.’ 이게 뭐냐 하면, 자기가 자기를 낮춘 그 보상차원에서 좀 살려달라는 거예요. 이것은 자기가 예상한 하나님, 예상한 예수, 자기가 예상한 복음이기에 이것은 복음도 아니에요.

우리는 복음 앞에서 주님이 그냥 불쌍히 여겨줘서 백성도 아닌 자를, 사랑하지도 않은 자를 사랑한다고 불러내시는 방법으로만 구원한다는 사실, 그 증거는 오직 십자가 피입니다. 그 피안에 모든 하나님의 지시와 율법과 명령과 레위기는 그 안에 다 들어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우리 자신이 자존심도 살리고 천국도 가고 주님도 만나는 이러한 이중 플레이를 했지만 다 이것이 거짓이었습니다. 그것이 또 하나의 우리의 오기였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남은 소망이었습니다. 이것조차 뭉개지게 해주시고 피, 긍휼, 사랑의 이름으로 찾아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저주받아 마땅한 자였음을 다시 한 번 십자가를 통해서 깨닫고 십자가 피의 능력과 공로와 놀라운 구원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