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7.22 13:40

생일 저주 (예레미야 20장 14-18절)

본문 : 예레미야 20장14-18절
제목 : 생일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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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강-렘20장14-18(생일저주)-jer100721

생일 저주

2010년 7월 2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0:14-18

(렘 20:14, 개역)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렘 20:15, 개역) 『나의 아비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네가 생남하였다 하여 아비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렘 20:16, 개역)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훼파하시고 후회치 아니하신 성읍 같이 되었더면, 그로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
(렘 20:17, 개역)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미로 내 무덤이 되게 하지 아니하셨으며 그 배로 항상 부르게 하지 아니하신 연고로다』
(렘 20:18, 개역)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수욕으로 보내는고』


위의 말씀에 감히 “아멘”이라고 동의하기가 난처하지요. 왜냐하면 자칫하면 신앙 전반에 걸쳐 의심이나 반발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고백이 예레미야에게만 해당되는 특수한 것이라고 간주할 수도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말 걸고 있습니다. 기껏 세상 사람들 앞에서 자신 신세 타령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지하게 하나님께 묻고 있는 겁니다.

자신의 인생을 이토록 힘들게 하신 분이 결코 세상이나 가족이 아니라 하나님시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문제는 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자신을 힘들게 하는지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차라리 진작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엄마 뱃속이 곧 나의 무덤이었으면 지금보다 더 행복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이와같은 고백에 우리가 동참하지 못하는 자가 되면 곤란합니다. 결국 성도가 가야하는 길에는 이런 과정이 필히 거쳐야 하는 겁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세월을 보내면서 겹겹이 자신을 가리는 것들이 쌓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의 오심은 바로 그런 위장층들을 걷어내시는 분으로 오십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 차라리 저를 태어나지 않도록 조치했으면 좋았겠습니다”라고 할 지경에 이르게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노출은 원래 하나님께서 시도하려는 구원 계획입니다. 평소에 우리가 이런 예레미야의 고백을 하지 못하는 것은 맨날 아침에 거울을 마주보면서 자신을 꾸미는데 진력을 다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는 너무 오랜 세월동안 꾸미다보니 진짜 자신의 근원은 잊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게 되면 그 겹겹이 쌓인 껍질을 홀라당 벗겨지고 부끄럽고 더러운 자아상이 노출됩니다. 너무나 그 아픔이 크기에 자칫 하나님께서 나 자신이 합당치 않은 조치를 내리고 있지는 않은지 오해하게 됩니다.

창세기 3장에서의 아담부부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바로 인간의 근원에 시선을 두고 찾아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인간들이 꾸며놓은 껍데기에 주눅드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인간은 자신을 속일 수 있지만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마저 속일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왜 이런 탄식을 하나님 앞에서 하게 됩니까?

그것은 인간들은 평생토록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살면서 왜 꼭 이 일을 해야하는지, 왜 자신은 이 세상에 태어나야 하는지 그 이유도 의미도 모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즉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소에 하는 일이란 사실 본인의 육신이 나타내는 성향대로 움직이다보니 그 쪽에 매진하게 되는 직업들입니다.

인간이란 일종의 크레용입니다. 자기만의 크레용을 들고 열심히 시공간으로 색깔을 칠해갑니다. 문제는 왜 나는 이런 색깔을 좋아하고 다른 색깔에는 영 흥미가 없는지, 왜 나는 이 색깔에 매료되어 평생을 이 일에 매진하는지를 모릅니다. 그저 자신이 그려나가는 데까지, 힘이 닿는데까지 그려나갈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세상 전체를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레미야의 고백은 이미 욥이 먼저 토해놓은 적이 있습니다. 욥기 3장에 보면, 욥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합니다. 하지만 욥기 40:1-5에 보면,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변박하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욥은 투정이나 부를 수 있는 대상으로 하나님이 성립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실수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상대로 투정부를 수 있는 입장이나 처지가 못됩니다. 기껏 자기 입이나 막을 존재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신체적으로 고통받고 시달려도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항의한다는 것은 잘못된 하나님을 고른 셈이 됩니다. 진짜 하나님은 그런 고통 여부의 의미를 따지기 위해서 인생들과 토론에 나서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예레미야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생일을 저주하고 싶어합니까? 그것은 바로 그런 모습이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예레미야는 세상을 넓게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가랴 6:1-5에 보면, “내가 또 눈을 들어본즉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왔는데 그 산은 놋 산이더라

첫째 병거는 홍마들이, 둘째 병거는 흑마들이, 셋째 벙거는 백마들이, 넷째 병거는 어룽지고 건장한 말들이 메었는지라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 보면 천사가 나옵니다. 이 4 천사는 세상 구석구석까지 날아가서 자신의 일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의 눈도 이 세상 구석구석까지 실시되고 있는 하나님의 일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즉 자기 자신의 일에 머물러 있어서는 아니된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 뿐만 아니라 요나나 엘리야도 자살을 시도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시대의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과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애통과 아픔이란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겪어야 될 아픔을 미리 참여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란 실은 그 시대에 오직 선지자들을 통해서만 발현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엉뚱한 하나님, 상상한 하나님만 섬기고 있는 와중에서 참된 하나님은 자신의 메시아의 속성을 가지고서는 선지자를 통해서 그 시대에 드러내신 것입니다. 넓은 세상 구석구석 이런 하나님의 모습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부여하시면서 이런 모습의 하나님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목에 걸린 닭 뼈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문제에만 몰두해서 그것 가지고 상상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 자신이 자기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모르고 난관에 부딪칠 때, 바로 그런 난관에 부딪힌 모습을 통해서 참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에게 사명을 주셔서 세상을 넓게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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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십자가마을 2010.07.23 20:08 address edit & del reply

    072강-렘20장14-18(생일저주)-jer100721

    2010-07-23 12:14:42 녹취 : 오용익


    072-렘20장14-18(생일저주)-jer1007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0장 14절부터 18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82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20:14-18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나의 아비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네가 생남하였다 하여 아비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훼파하시고 후회치 아니하신 성읍같이 되었더면, 그로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미로 내 무덤이 되게 하지 아니하셨으며 그 배로 항상 부르게 하지 아니하신 연고로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수욕으로 보내는고.”


    이게 지금 아멘 할 상황이 아니지요. ‘우리 엄마가 나의 최후 무덤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 이야기입니다. ‘엄마 배에서 아예 태어나기도 전에 그냥 엄마 뱃속에서 죽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예레미야가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에 아멘 한다는 것은 자기가 태어난 것을 후회한다는 뜻인데 태어난 것을 후회한다는 자체가 말에 어폐가 있지요.

    우리가 태어날 때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잖아요. ‘이쯤 되어서 태어날까? 후회는 안하겠지. 지금쯤 태어나면 후회 안 할 거야. 지금쯤 태어나면 내 인생 필거야.’라고 자기가 스스로 결정했습니다. 결정 안했지요. 밀고 당기고 해서 태어났잖아요. 그래서 이런 고백을 평소에 안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뭔가 평소에 자기 기분에 대해서 숨기면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3장부터 하나님과 마주쳤던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것도 숨길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어떤 것도 숨기지 못하게 만드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겁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꾸미고 또 꾸미고, 덧붙이고 또 덧붙이고 너무 덮여서, 겹겹이 가식과 위선으로 덧칠되어서 아예 나의 진면목, 내가 진정 누군지를 모르고 살아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찾아오실 때 어떻게 오신다고요? 내가 미처 몰랐던 나의 본모습을 들추어내는 식으로 찾아오신다는 말은 겹겹이 쌓여 있는 그 층을 한 꺼풀 두 꺼풀, 찾아오실 때마다 그것이 거두어진다는 겁니다. 시체에 덮어놓은 가마니가 열장이 있다면 천사 보내서 한 꺼풀, 주의 종 보내서 또 한 꺼풀, 그 열장의 가마니를 다 들추어내지요.

    예수님께서는 겹겹이 자기의 본래의 모습을 감추고 있는 바리새인 보고 이런 소리를 했습니다. ‘너희들은 평토장한 무덤 같다.’ 요새 같으면 예수님은 MRI촬영 기계가 있어서 그 두꺼운 시멘트벽을 뚫고 들어가서 ‘너는 그냥 해골로서 돌아다니는 거다. 위대하니, 고상하니, 착하니, 명예롭게 사니, 남에게 해코지 않고 살았다고 그렇게 으스대지만 내가 보니 너는 뼈다귀, 해골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예수님한테 이런 소리 들은 것을 복 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병원에 안 가려고 할 것이 아니라 병원에 가서 가끔 건강검진 받아보면 내 속에 나도 몰랐던, 들어도 이름도 생소한 헬리코박터인가 그런 균이 위속에 있어서 위암을 키울 수 있기 때문에 약을 먹어야 된다고 진단 나옵니다. 병원에서 일부러 약 먹이려고 그러는가 싶은 의심이 들 정도로 생소합니다.

    그 정도로, 내가 아침마다 거울 보는 것 말고 다르게 보는, 내가 나 보는 기준을 전혀 따지지 않고 의사가 나름대로 보는 기준을 가지고 나를 보니까 거기는 목사도 없고 이근호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그냥 늙어 죽어가는 하나의 해골에 불과한 겁니다. 이런 고백이 우리가 성경에 꼭 나와 있으니까 ‘아하, 예레미야가 이런 고백을 했다는 것은 결국 이 과정도 우리가 거쳐야 된다.’는 사실, 그래야 이것이 제대로 구원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 확인 받게 되는 겁니다.

    개교기념일 날 요새는 그냥 놀지만 옛날에는 마라톤 대회 했어요. 마라톤 대회하는데 꼭 이런 인간들 있어요. 5킬로미터를 뛰는 대회면 그대로 5킬로미터를 뛰어야 되는데 2킬로만 뛰고 중간에 빵집에 있다가 반환점도 안돌고 버스타고 그냥 들어오는 애들입니다. 그 애들은 중간 반환점에서 찍는 도장이 팔목에 없어요.

    과정을 다 밟지를 않았어요. 주님께서 도장을 찍고 그 다음에 천국을 보내줍니다. 이런 예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7월에 해수욕장 개장하기 전인 6월이나 5월 바닷가에 가보면 바다에서 밀려온 쓰레기들이 해변에 널러져 있잖아요. 인간들이 살고 있는 그 지점을 하나의 바닷가로 보자 이 말입니다. 그 바닷가에 평생 살면서 몰려온 온갖 쓰레기가 바닷가에 다 적채되어 있어요.

    오래 살면 살수록 그 쓰레기가 더 많이 쌓이지요. 이 쓰레기가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니까 이제 아예 포기 먹었어요. 도장을 찍어야 돼요. 그 쓰레기를 보면서 우리는 예레미야처럼 해야 됩니다. ‘하나님, 저를 왜 낳았습니까? 이런 지저분한 것 보라고 이런 똥 덩어리 보려고 지금까지 평생 살면서 결국 이렇게 늙어 죽을 것을, 내가 봐도 끔찍한 이 고생을 왜 해야 됩니까?’라고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대들 듯이 묻습니다.

    14절에 보면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예레미야 20장 14절의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을 아는 사람은 ‘생일 축하합니다.’ 이런 노래를 부를 수가 없어요. ‘생일 저주 합니다.’ 이래야 이것이 예레미야에게 합당한 거예요. 미쳤지요. 자기 생일을 안 챙겨준다고 얼마나 가장들이 닦달을 냅니까? 어떤 부인은 장난삼아 생일을 모르는 척 했다가, 얼마나 성질을 내면서 화를 내는지 한 번 보려고 하지요.

    생일 안 챙겨주면 난리 납니다. 평생 고생한 것을 생일잔치로 보상받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레미야는 지금 사람 앞에서 자기생일을 닦달 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왜 제 생일을 저주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그러니까 평소에 우리는 이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우리가 목사님이나 장로님이나 이런 사람 붙들고 자기 인생 푸념하지 마시고, 정말 일평생에 한 번이라도 주님 앞에서, 다른 사람들은 다 가라고 해요, 자식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요, 단독자로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여, 왜 저를 만들어 놓았습니까? 왜 저를 만들었는데요. 무슨 낙을 보겠다고. 내가 성경을 보니 모든 것은 주로부터 말미암고 주를 통해서 주께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주님이 혼자 잘나서 혼자 다 한다고 되어 있는데 나 하나 없어도 되잖아요. 나 하나 없어도 그만이고 있어도 전혀 보탬이 안 되는 나를 왜 만들었습니까?’라는 그 과정.

    혼자의 독백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참다 참 못해서 끄집어 내어놓고 물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불신자들은 이런 것 안 묻습니다. 불신자는 자기가 자기한테 그냥 독백하다가 ‘에라, 세상 내 맘대로 안 되니까 더 이상 나도 견디기 힘들다. 나도 이쯤해서 차라리 나를 선택하지 천국을 포기해버린다. 나는 교회도 포기하고 주님도 포기하고 다 포기해버리고 나는 끝까지 나와 더불어 나와 함께 하겠다.’ 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가룟 유다 아닙니까? ‘내가 더러워서 양심껏 산다.’ 양심껏 산다는 것이 더러워서 양심껏 사는 거예요. 더러워서 양심껏 살다가 더러워서 자살할 사람입니다. 끝까지 나는 나를 포기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런 지저분한 것까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한번이라도 물을 수 있어야 됩니다.

    예레미야의 고백처럼 ‘하나님, 차라리 저를 죽이지, 내가 봐도 내가 쓸모없는데, 지금 나 때문에 신경 쓰는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니고 피해보는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닌데, 이처럼 살면 살수록 나로 인해 피해보는 사람이 늘어날 것인데 아무 쓸모가 없는 헛짓하는 나를 왜 만들었습니까?’리고 묻는 거예요.

    왜 만들었는가? 정답을 말씀드릴게요. 예레미야가 지금 엉뚱한 하나님한테 질문하고 있는 거예요. 예레미야는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한테 질문하고 있는 거예요. 이 질문은 욥도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웃음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구원받은 사람의 경로가 유사하냐 하는 겁니다.

    욥이 고난당할 때 똑같은 고백을 하나님한테 합니다. 욥기 3장에서 그러다가 욥기 40장에는 ‘제가 뭐라고 주둥이를 놀리겠습니까? 저는 그저 입 막고 재나 뒤집어쓰겠습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나불나불, 왜 나를 만들었습니까?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도통 나 같은 쓸모가 없는 인간이 살아가야 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라고 묻는 그 자체가 제대로 하나님을 몰랐을 때의 질문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그 질문이 통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 질문이 성립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욥기 40장에서 진짜 하나님과 독대해보니까, 청와대 대통령과의 독대가 아닙니다, 하나님하고 직접 독대할 때 비로소 욥은 자기가 왜 태어난 줄 알지요. ‘주님 앞에서 입을 막고’ 입을 막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입을 막아도 아무소리 못하는 최초의 사람 되라고 만든 거예요.

    그 뒤에 있는 사람도 동일하게 그 경로를 밟고 있는 겁니다. 바로 40장 안 들어갑니다. 3장 거쳐서 40장 도달됩니다. 욥기 3장에서 욥은 ‘하나님이여, 재산 다 날리고 자식 다 죽고 자기도 못 고치고 친구도 다 떠나고 하루하루 1초 1초 안 아픈 구석이 없습니까?’ 약간이라도 쉬엄쉬엄 띄엄띄엄 아프면 참을 만하지요.

    ‘이것은 갈마들여 치면서 오는 말이다.’라고 했습니다. “주께서 자주자주 증거 하는 자를 갈마들여 나를 치시며 나를 향하여 진노를 더하시니 군대가 갈마들어 치는 것 같으니이다.”(욥 10:17) 이것은 아예 짓밟겠다고 작심하고 노리는 그 말의 떼처럼 한 번 지나가면 작심하고 또 덮치고 또 덮치고, 마치 천식환자 기침하는 것 같아요.

    한번 그쳤다 싶으면 또 억 하고 기침하고 또 그쳤다 싶으면 또 기침하면서 끝날 기약도 없이 밤새도록, 그칠 소망도 없어요. 이것은 욥의 입에서 ‘차라리 죽여주옵소서. 이렇게 괴롭히는 것이 주님의 취미입니까? 이렇게 괴롭히는 것이 주님의 오락이에요? 제가 뭘 잘못했기에 이렇게 괴롭힙니까?’라는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 고뇌에 대해서 모든 인류의 대변자로서 성도의 대변자로서 우리보다 앞장서서 그런 회의와 깊은 의심의 골짜기를 욥은 통과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러한 난데없는 시련과 고난을 겪게 하시는가?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그것은 인간이라 하는 것은 막상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다른 사람들 사는 것을 보게 되면 너도 하나의 개체고 나도 하나의 개체고 너는 내식대로 살고 나는 내식대로 삽니다. 인생이란 마치 크레용 같아서 만약에 노란크레용을 쥐면 자기는 평생 노란색을 칠해야 되고 빨강 크레용을 쥐고 있으면 빨강크레용을 칠해야 돼요.

    무슨 말이냐 하면 만주 개장사 하는 사람은 평생 개장사를 해야 되고, 제주도의 감귤 농사하는 것이 좋으면 평생 그걸로 사는 거예요. 각자각자 자기 색깔이 있어서 그 크레용대로 휘갈기듯이 살아가는데 문제는 어느 넓이만큼, 얼마나 길게 만주 개장사는 개장사 계속하고 동해안의 어부는 어부 일을 계속 해야 되고, 그걸 모르는 거예요.

    계속해서 해 나가는 겁니다. 제가 전에 있던 교회에서 12년 동안 있으면서 누누이 느낀 겁니다. 촌에 있는 사람들이 왜 농사를 짓는가? 제가 거기서 지혜를 배웠어요. 다른 것이 할 게 없어서 농사를 지어요. ‘너는 왜 의사 해?’ 다른 것이 할 게 없어서 의사를 한 거예요. ‘너는 왜 변호사 해?’ 다른 것이 할 게 없어서 변호사 하는 거예요.

    ‘공부가 제일 쉬워서.’ 이러는데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나는 사법시험 준비하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어.’ 하는데 다른 것이 할 것이 뭐 있겠어요. 사법고시 합격해서 변호사 해야지요. 어떤 사람은 의대 다니다가도 튀어나오는 사람 많아요. 하기가 싫다는 이유로. 어떤 사람은 치과 하다가 그만두고 김밥 집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치과전문서적은 내도 치과는 하기 싫어요. 자기는 김밥이 그렇게 말고 싶다는 거예요.

    그 사람이 치과 그만두고 김밥 마는 직업으로 바꾼 것은 좋아요. 그런데 그 김밥을 얼마나 길게 말아야 하는지, 그러니까 그 김밥을 마는 목적과 이유와 의미를 자기는 모른다니까요. 인생은 그것을 모르게 되어 있어요. 왜 모르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든 목적은 인간이 아무리 애쓰고 수고하고 평생 노력해도 ‘나는 치과가 재밌어, 나는 뭐가 재밌어.’ 해도 결국은 그것이 전도서 1장 1절의 말씀처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헛된 짓거리를 하면서 평생을 다 보내고 세월을 다 보내게 되어 있어요. 제가 아는 사람은 한시도 한 자리에 있는 법이 없어요. 그 사람은 뭐하느냐, 전국의 장서는 곳이 표시된 지도를 해놓고 화물차에 물건 싣고 시골의 장서는 곳마다 다 찾아다니는 거예요. 그야말로 떠돌이 장사를 하는 거예요. 주위에서 ‘안정된 직장을 좀 찾아보시면 좋겠다.’고 얘기하면 ‘안정된 직장에 있으면 좀이 쑤셔서 못 있습니다.’ 하는 거예요.

    뭔가 떠나야 돼요. 물론 그 사람은 결혼도 할 수가 없지요. 떠돌아다니면 결혼 자체가 안 되니까. 그 사람은 거기에 미쳤어요. 전국을 떠돌아다닙니다. 다니다가 자기하고 똑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을 만나요. 전라도와 경상도가 화개장터에서 만나는 것처럼 만나서 ‘너는 며칠 돌아다녔나’ 이야기합니다. 전라도에서 경상도 장터 다니고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 장터 돌아다니고 강원도 사람이 또 충청도 장터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끼리 만나면 통해요.

    그래서? 그래가지고 사는 의미가 뭔데? 몰라요. 같은 장돌뱅이들을 만나면 모르는데 그 사람이 누구를 만났을 때? 하나님을 만났을 때는 묻는 거예요. ‘하나님, 평생 장돌뱅이나 하는 이 쓸모없는 인간, 어디에 쓸모 있다고 태어나게 했습니까? 내가 사는 존재의 의의를 모른다면 차라리 태어나게 하지를 말아야지요. 더 살아봐야 하나님께 소용없고 일찍 죽어도 하나님 하는 일에 전혀 변동이 없다면 지금 죽여주시면 어떻습니까?’라는 요청을 하는 겁니다.

    제가 아직 왜 예레미야는 이런 발언을 하는지, 왜 예레미야는 태어나야 했는지 여기에 대해서 해답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열왕기상 19장 4절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가 나타납니다. 거기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가 도망을 칩니다. 이세벨이라는 아합의 부인이 화가 충천해서 지명수배령을 내리니까 엘리야가 광야로 하룻길을 도망쳐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라고 되어 있어요. 선지자가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입니다. 이 자살시도 장면은 요나에도 있습니다. ‘이런 꼴을 볼 것 같았으면 뭐하려고 저를 이런 먼 곳까지 보냈습니까? 차라리 저를 일찍 죽이시죠.’라고 자살을 시도하는 대목이 나와요.

    그리고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엘리야가 하는 말이 ‘이제는 나만 남았습니다. 전부 다 바알선지자에게 넘어가고 이제는 나만 남았는데 이제 그만 저를 죽이시지요.’라고 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예레미야도 그렇고 욥도 그렇고 여기 엘리야도 요나도 그렇고, 결국 이 사람들의 크레용, 이 사람들의 하는 일들, 이것은 선지자의 공통점이 되어버렸는데, 이 선지자가 어디로 통하느냐 하면 그런 질문을 하는 가운데서 ‘네가 그런 질문을 하는 자격이 못된다.’ 하는 것을 그런 질문 속에서 진짜 하나님을 아는 기회, 계기가 되는 겁니다.

    이런 턱을 넘어가면 진짜 하나님을 만나는 게 되는데 진짜 하나님이 누구냐, 아주 급진적으로 말해서 바로 그렇게 말하는 본인이 하나님이 되어버렸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본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 그것이 정답이고요, 아주 급진적으로 이야기하면 예레미야가 그렇게 탄식하는 그 모습이 장차 오실 메시야가 해야 될 임무와 업무 중의 하나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렇게 볼 때 이 예레미야나 에스겔이나 욥이나 요나 같은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의 영이 그 사람 속에 있어서, 쉽게 말하면 장차 오실 예수님의 마음이, 영이 먼저 그 사람 속에 있어서 그들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그 시대의 백성들이 아는 가짜 하나님 말고, 진짜 하나님이 지금 누구와 함께 탄식하고 있고 누구와 함께 가슴앓이하고 있는가를 백성들 한복판에 보이게 한 거예요.

    그것을 예레미야 본인도 이 말 할 때는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자기를 몰아세우는 겁니다. 예레미야가 진짜 모르는 가운데서 진짜 예수님을 알 때 어떤 경로를 밟아야 되느냐 하면 ‘왜 저의 생일을 저주하지 않았습니까? 왜 저를 저주하지 않았습니까?’ 할 때 항상 나오는 것이 ‘저는, 나는, 나는……’ 이거든요.

    그런데 이 스가랴 6장 1절에서 4절에 보면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왔는데 그 산은 놋 산이더라 첫째 병거는 홍마들이, 둘째 병마는 흑마들이, 셋째 병거는 백마들이, 넷째 병거는 어룽지고 건장한 말들이 메었는지라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이 환상의 계시를 받았는데 이 계시는 네 천사입니다. 이 네 천사가 네 마리인가, 동서남북 세상 땅 끝까지 깊숙하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임무를 띠고 가기 위해서 네 마리가 등장하는 겁니다. 동서남북 전체를 다 포함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는 뭐냐 하면, ‘내 생일을’ 할 때에 그 생일 앞에 ‘내, 내’가 있거든요.

    그렇다면 신자 아닌 사람이 신자 될 때의 특징이 뭐냐, 이 과정을 겪게 되는데 신자가 아닐 때의 특징은 항상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의 문제로 와서 하나님 앞에 맞닥뜨립니다. 심지어 십자가 앞에 갈 때에도 나를 포기하지 않아요. ‘주님이여, 왜 나를, 왜 나 때문에 돌아가셨습니까? 주님은 왜 저주받았는데요?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여전히 ‘나’가 유지가 됩니다.

    그런데 스가랴 6장에 보면 나는 없고 천사는 땅 끝까지 전부 다 퍼져서 주님의 사명을 감당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의 할 일은 ‘나’라는 것이 하나의 목에 걸린 닭 뼈처럼 그것을 꿀떡 하고 삼켜야 천사와 같은 사명, ‘아하, 하나님은 나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를 상대하기 위해서 나에게 이런 시련과 아픔을 주었구나.’

    ‘전 세계를 상대하기 위해서, 나만 붙들고 상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장차오실 메시야의 고난당함을 보라고 먼저 나에게 고난을 주셨구나.’라는 이러한 사실이 천사가 가는 범위 전체영역에 다 확산되고 확산되기 위해서 나에게 이런 대변자로 이런 고난을 받은 겁니다.

    성도가 살면서 이런 고백에서 해답을 얻지 않으면 안돼요. 해답 없이 그냥 지나가면 안돼요. ‘하나님이여, 왜 쓸모없는 나를 만들었습니까? 해답이 없어요? 그러면 나 이제는 하나님과 안녕입니다.’ 이러지 마시고 ‘나, 나’ 라는 것, 아까 욥처럼 ‘재산 날아가고 아내도 날 버리고 왜 이렇습니까?’ 하다가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전체를 관장한다는 것을 알 때, 입을 막습니다.

    주님께서는 전체를 관장하십니다. 빨강색크레용 하고만 멱살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 아니고 빨주노초파남보 그 수천 수 만 가지 크레파스를 다 하나님께서 다루시는데 그 중에 나 하나가 끼어서 내가 반짝반짝 주님을 증거 하게 되면 저쪽도 반짝반짝 주님을 증거 하는 겁니다. 온 전체가 주님의 손에 놓여있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온 우주에 편만한, 편재하신 하나님의 모습으로 빈틈없이 꾸준히 차질 없이 일이 진행되는 겁니다. 눈을 나를 향하여 보지 말고 멀리 봐 버리면 순간 ‘나’라는 사실이 없어지잖아요. 나라는 생각은 없어지더라도 나는 있잖아요. 그렇다면 나는 전체 중의 하나지요. 전체중의 하나라면 자꾸 하나님한테 ‘저는요, 저는요’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자꾸 내 것으로 당기지 말고 ‘하나님, 나에게 당하는 이 일이 저쪽 편에는 어떤 쓸모가 있겠습니까? 저쪽 편에는 현재 내게 일어나는 일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에게 쓰일 겁니까?’

    전체 일에 우리가 의미를 두고 살아가야 됩니다. 그것을 가지고 간단하게 ‘내가 복음에 빚진 자로다.’ 합니다. ‘이제는 내가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옵니다.’ 로마로 가라면 로마에 가서 전해야 되고 이방인에게도 전해야 되고. 왜? 이미 천사가 가 있으니까 다 끝났어요.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옛날 버릇대로 술이나 마시면서 ‘왜, 나는, 나는’ 하고 탄식이나 하고 그저 나로부터 출발해서 ‘에라, 하나님이 응답 안 해주면 나도 하나님하고 안 사귄다.’ 라는 식으로 자기로부터 해서 자기로 끝나는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시선을 가라앉지 말고 높이 떠서 저쪽에도 천사가 일하고 이쪽에도 성령께서 일하고 세상 구석구석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지 않는 곳이 없음을 깨달아서 이제는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가 다시 사신 주님을 위해서 사는 성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