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7. 14. 17:18

쌍방 복수 (예레미야 20장 10-13절)

본문 : 예레미야 20장10-13절
제목 : 쌍방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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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강-렘20장10-13(쌍방복수)-jer100714

쌍방 복수

2010년 7월 1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0:10-13

(렘 20:10, 개정)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렘 20:11, 개정)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하지 못하므로 큰 치욕을 당하오리니 그 치욕은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렘 20:12, 개정)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
(렘 20:13, 개정)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 말은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서 불신자들로부터 너무나도  많이 듣는 이야기입니다. 즉 “네가 너를 존중하고 네가 너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처럼 나도 나를 존중하고 나의 의견을 고수한 권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복음 전하는 너희들이 이 권리를 무시하느냐?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상대방들은 예레미야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 잘라 버리고 단지 입이 나불거리면서 외치는 예레미야의 그 육신의 행동만을 가지고 취득해서 자신들의 육신과의 동등됨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쌍방 고소해보자고 나옵니다. 

여기서 예레미야가 말하기를 “나는 옳고 너희들이 틀렸다”고 말해야 할까요?  흔히 교회에 와서 쉽게 구원받고 싶어합니다. 목사가 성경을 대신하고 하나님의 대신해서 교인들에게 쉽게 구원받은 방법을 제시해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막상 직접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무나도 복잡하고 상호 안 맞아 보이는 대목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미술관에 가서 동양화 그림을 보려고 할 때에, 그 미술관에 먼저 도착한 어떤 사람이 작품을 가로막으면서 외치기를, “이 그림 별로야”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그림도 보지 않고 도리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그림이 별로하고 평해도 본인이 직접 그림을 봐야 합니다.

그것처럼 성경을 직접 대해서, 과연 우리 자신이 구원을 쉽게 받겠다는 그 의식 자체가 옳은 생각이냐 하는 것조차 점검받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11:25-26의 말씀인,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는 말씀이 실감나려면, 정말로 우리가 죽을 지경에 놓여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씀을 안다고 여기는 것과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이 믿는 자 맞다고 인정해주는 것 하고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괜히 스스로 최면을 걸 사항이 아닙니다. 믿는다고 우겨도 소용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말씀대로 사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신다는 겁니다.

즉 소녀 신데렐라 발에 맞는 유리 구두는 왕자 쪽에서 미리 준비되어 있어 신데렐라를 기어이 공주 만들어 버리는 식입니다. 발에 신발을 맞추는 식이 아니라 신발이 발에 맞도록 변형되는 식입니다. 창세전에 예정된 자에게만 이런 혜택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예레미야는 ‘아담 안’이라는 원칙에 준해서 아담과 비교해서는 아예 없는 존재입니다. 즉 아담만 있고 자신은 없는 존재라는 것이 말씀에 입각해서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의 적들은 이것을 모릅니다. 여전히 아담 따로 있고 자기 자신은 따로 있습니다. 눈 부릅뜨고 봐도 여전히 자신은 그 자리에 있다고 우길 것입니다. 말씀이 그들을 말씀대로 축복이 주어지는 사람으로 만들어내지를 않고 있는 겁니다. 이들에 있어 자아란 사화가 만드는 겁니다.

자아란 개인과 사회가 만나는 지점에서 수립됩니다. 낯선 타인이 자기에게 다가오면 인간은 반기든지 아니면 거부하든지 할 것입니다. 그 와중에서 본인도 미처 몰랐던 본인의 본 모습 중에 일부를 새롭게 발견하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들이 생각하는 자아란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변에 찾아오는 가족이나 타인들의 관계선상에 발생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통일된 자아성을 쥐게 됩니다.

그런데 선지자의 자아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의 관계 이전에 벌써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세워집니다. 그렇게 되면 선지자는 말씀 세계가 지니고 있는 그 깊숙한 깊이 속에서 자아를 새로 발견하게 됩니다. 그 안에는 예수님이 계시고 인간은 죽은 존재가 됩니다. 갈라디아서 2:20의 말씀이 그러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나님의 계획 잡혀있는 바가 이미 선지자의 해야 할 일로 삽입되어 들어와 있으며 그 일을 근거로 하나님의 앞 일이 전개되게 됩니다. 그러니까 선지자의 자아성을 하나님의 계획 앞에 소용없는 겁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지지 않음을 압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의 억울함을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즉 자아를 타인과의 대결 대상자로 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생각한 나는 여기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어떤 불쌍한 아이가 교회에 와서 목사에다 다음과 같이 항의합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가출했고 나는 굶고 있고. 이럴 경우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도와준 것이 뭐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이럴 때 복음을 아는 목사가 해줄 말은 오직 이것 뿐이다. “너는 지금 없다!”고 말입니다. 사람이 자신이 ‘여기 있다’고고 여기는 것은 주변 사람들과의 마주침에서 발생되는 겁니다. 그 불쌍한 아이에게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교회 목사가 보인 겁니다. 그래서 목사와 자신을 비교해 볼 때, 자신이 형편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서는 목사에게 대드는 겁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하나님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어도 되는 내가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즉 “하나님, 제가 어떤 형편에 있던지 간에 여기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요 감사거리입니다”라는 고백을 내놓아야 합니다. 바로 이런 고백의 차원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쪽으로 책임을 미뤄버립니다.

자신이 그들을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있음을 결코 자기로 인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자신이 그 자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에게 그 어떤 일이 벌어져도 예레미야의 존재 의미는 말씀 선포입니다. 그의 전 일생이 그러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있다’고 여긴다면 악마는 ‘그 있음’을 기점으로 해서 구원해 봐라고 요청할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보쌈당해서 성사될 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말씀대로 존재하게 되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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