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6. 23. 22:28

고향에 대한 저주 (예레미야 19장13-19절)

본문 : 예레미야 19장13-19절
제목 : 고향에 대한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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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8강-렘19장13-19(고향에대한저주)-jer100623
  
고향에 대한 저주

2010년 6월 2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9:13-15

(렘 19:13, 개정) 『예루살렘 집들과 유다 왕들의 집들이 그 집 위에서 하늘의 만상에 분향하고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더러워졌은즉 도벳 땅처럼 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
(렘 19:14, 개정)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내사 예언하게 하신 도벳에서 돌아와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렘 19:15, 개정)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성읍에 대하여 선언한 모든 재앙을 이 성읍과 그 모든 촌락에 내리리니 이는 그들의 목을 곧게 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함이라 하시니라』


사람은 출생하면서 대자연에 둘러싸여 살고 있습니다. 대자연 말고 달리 상대할 대상은 없습니다. 신이라는 것도 하나님이라는 것도 대자연의 움직임을 한데 뭉쳐놓은 것으로 여깁니다. 대자연의 원칙을 위반하면, 곧 신을 위반하면 벌받는다는 의식도 모두다 대자연이 변화에서 수집한 것들입니다.

이처럼 항상 대자연 속에서 살다보니 인간이 인간으로서 왜 사는지, 사는 목적이 무엇인지, 자신이 사는 이유와 의미가 무엇인지 하는 것도 주변자연과 연관시켜서 파악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모처럼 어릴 적 다니던 고향 초등학교 교정을 방문에서 이것저것 둘러보면서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면서 현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일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나온 시도입니다.

학교 교정 한 구석에서 오랫동안 그늘을 지켜오고 있는 느티나무를 보면서, 어릴 적 술래잡기하면서 놀던 때를 회상할 때에, 근처 사는 한 사내가 다가와서 하는 말이 “이 느티나무는 내 아내가 목매단 나무라오”라고 했다면 같은 느티나무의 추억이 이처럼 사뭇 다릅니다. 문제는 그 느티나무는 이 인간들의 넋두리하고 전혀 상관없이 그냥 나름대로 늙어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참되게 인간의 사는 이유가 뭔지를 알려면 선지자를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스스로 만들어낸 감정을 대자연에게 퍼붓는 것이 아니라 가만 있어도 퍼부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장래를 결정하는 겁니다. 확정된 미래를 미리 안다면 인생에 있어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주저할 이유가 없습니다.

바로 선지자들이 이렇게 산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고향을 다녀옵니다. 그가 외치는 것은 고향사람이나 이곳 예루살렘이나 하나님의 확정된 말씀을 안 듣기는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선지자는 생이란 ‘안되는 일을 되게 하는 일’ 때문에 준비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안되는 일은 안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왜 유대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멸망받아야 할까요?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 말고 다른 신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전하고 있습니다. 이방 신을 섬기는 것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한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방에 나비 한 마리가 들어왔다고 칩시다. 그 나비를 발견하고 도로 밖으로 내치든지 하면 그 방은 전에 나비가 없는 때에 같은 상황이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새로운 신선한 공기가 방 안에 들어왔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이미 방안의 공기와 섞여버린 상항에서 신선한 공기와 전의 공기를 가려낼 재간이 있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을 섬기면서 “나는 여기 있고 신은 저기 있다”는 식으로 섬겼던 것입니다. 마치 방에 나비 하나가 들어와서 하나의 대상으로 다루어져서 “나는 여기 있고 나비는 저기 있다”는 식으로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참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런 대상으로 들어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동행하시는 분이십니다. 동행이 되어버리면, 사람들이 이방신을 섬기듯이 여호와 하나님을 대상으로 삼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보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어디 있는 겁니까? 개개인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입니까? 그렇다면 그 이스라엘의 각 개인을 죽이는 것은 이스라엘을 죽여 없애는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쉬운 예로서 월드컵 축구 응원한답시고 벌건 티를 사서 입고 머리에 도깨비 뿔 머리띠를 하면 ‘붉은 악마’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붉은 악마 자체는 어디 있는 겁니까? 아무리 봐도 붉은 악마는 보이지 않습니다. 붉은 악마를 12번째 선수라고 하지만 실제로 푸른 잔디밭에는 11명의 선수만 뛰고 있을 뿐입니다. 이 때 붉은 악마는 멀리 서울에서 응원만 했을 뿐입니다.

그래놓고 경기에 승리하면 붉은 악마가 같이 뛴 결과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붉은 티 입은 사람이 4명 모이면 붉은 악마입니까? 아니면 다섯 명 이상 보여야 붉은 악마입니까? 어느 것도 단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직접 ‘이름’을 지니시고 이스라엘과 동행하셨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주변 이방나라와 전쟁을 벌리게 되는데, 자기네들 자체가 이스라엘이라고 여기고 자기네들 힘으로 전쟁을 하면 필히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 모임이 곧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없다고 여기고 함께 동행하신 ‘하나님의 이름’에 호소하면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은 이스라엘에 포함되는 겁니까 아니면 이스라엘과 따로 분리되시는 분입니까? 같이 이스라엘 포함되어 버리면, 이스라엘의 패배가 곧 하나님의 패배가 되는 겁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포함되는 분이 아니라면 인간들처럼 친히 ‘이름’을 지니시고 한 이스라엘이 되신 하나님의 낮아지심의 의미가 사라지고 마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이방나라 사람들처럼 신을 대상을 여기고 자신들이 섬기는 식으로 믿어온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 있고 하나님은 저기 계시면서 우리의 섬김을 받으세요”하는 식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사람의 소유가 되고 마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택한 나라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장악해서 자신의 품에 두셔야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 중에서 탈락되는 자들이 발생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능력 부족이나 하나님의 실수한 바가 되어 버립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쉬지않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탈락시켜 오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방식이 곧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식이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장악할 수 있으나 인간은 그 하나님을 장악할 수 없고, 하나님은 인간 속에 들어올 수 있으나 인간은 하나님 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동행할 수도 없는 겁니다. 천국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 ‘예수 안에 우리가 있고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는 방식’이 이 방식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 앞에서 비로소 우리의 미래와 존재와 의미를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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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8강-렘19장13-15(고향에 대한 저주)-jer100623

2010-06-26 09:14:00   녹취 : 오용익
 

068강-렘19장13-15(고향에 대한 저주)-jer1006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9장 13절부터 15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81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19:13-15

“예루살렘 집들과 유다 왕들의 집들 곧 그 집들이 그 집 위에서 하늘의 만상에 분향하고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더러워졌은즉 도벳 땅처럼 되리라 하셨다 하라 예례미야가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내사 예언하게 하신 도벳에서 돌아와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성에 대하여 선언한 모든 재앙을 이 성과 그 모든 촌락에 내리리니 이는 그 목을 곧게 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함이니라 하셨다 하라.”


본문에 사람들이 섬기는 대상을 두 종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는 일월성신, 하늘에 있는 만상, 해와 달, 다른 신들, 자연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신, 대자연을 통해서 신의 변화를 읽어서 그 법칙에 따라서 섬기고자 하는 신이 하나 있는 반면에, 다른 하나는 선지자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자신의 운명과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 이 두 종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말씀이 없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이나 선지자 이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은 당연히 세상 살아가는데 있어서 대자연속에서 의미를 찾고 존재의 가치를 찾으면서 살게 됩니다. 쉬운 예를 들면 옛날 어릴 때의 고향마을에 가보면 그 고향마을의 골목길, 그 고향마을의 정경, 어린 시절 다녔던 학교에서 문득문득 추억이 묻어나겠지요. ‘내가 저 교실에서 공부를 했고 내가 저 철봉에 매달렸고 저 운동장에서 뛰놀던 운동장이구나. 그리고 저 느티나무에서 술래잡기도 했었지.’

그런데 자기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낯선 사람이 와서 ‘이 느티나무는 그런 것이 아니고 내 마누라가 목매 죽은 느티나무다.’ 라는 이야기를 할 때 같은 나무, 같은 자연, 같은 하늘의 별을 보면서 거기서 자기 나름대로의 의미나 가치를 끄집어낸다는 것이 전부 다 헛된 환상에 불과한 겁니다. 과거에 잘나갔다, 과거에 아름다웠다, 하는 식인데 과거에 아름답지 않았던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과거의 자연과 자기와 무슨 상관있습니까? 자기가 일방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일방적으로 가치를 부여하니까 남들 눈에 그럴듯하게 보이지요. 대자연은 우리하고 아무 상관없이 그냥 가는 거예요. 느티나무에 아무리 내 이름을 새겨놓아도 느티나무는 혼자 자기 볼 일 보듯이 커가는 겁니다. 길가의 강아지나 동물원의 원숭이에게 물어봐야 답변도 안 해줍니다. ‘네가 뭔데?’ 합니다.

사람이 내가 누구며 장래에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은 대자연에서 아름다운 것을 골라잡는다고 해서 밝혀지는 것이 아니고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아하, 내 운명이 이렇게 되는구나.’라는 것을 받아주셔야 돼요. 쉽게 말해서 나의 의미는 내가 내 뜻을 투사해서 반사되는 것을 끄집어낸다고 해서 가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말씀을 쏘느냐, 해서 그 말씀에 장악될 때 말씀이 내 가슴에 와 닿을 때 그것이 우리의 미래상입니다.

본문 15절에 보면 예레미야가 고향에 다녀와서 하는 말이 ‘고향마을의 정경이 어떠하며 고향마을에서 내가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향을 다녀왔는데 그 고향이나 여기나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멸망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구나,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고향에 가도 불신이고 예루살렘의 성전 앞에서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안 믿는 것은 또 마찬가지라는 말이지요.

항상 말씀 위주로 세상을 봐야 되지 자기 추억위주로 세상을 보게 되면 나중에 자기가 늙어서 죽게 되면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게 생각됩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죽고 나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런 이야기를 자기 고향사람이나 이 사람들에게 할 때에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낼 때는 아마 환영하기 때문에 보낼 것이다.’라고 생각하거든요.

갓 신학교 졸업한 목회자들의 오해중의 하나가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했고 복음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환영할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환영하도록 하나님이 사람들을 나에게 붙여줄 것이다.’라고 오해하는 경향이 있어요. 도대체 그 사람이 신학교 때 성경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봤는지 모르겠어요.

성경 보게 되면 선지자의 특징은 못 믿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안 되는 일을 하나님이 시키는 거예요. 제가 군에 가서 늘 들었던 이야기가 있는데 참 무모한 이야기입니다. ‘안되거든 되게 하라.’ 그 말에 얼마나 속에서 화가 났는지 모릅니다. 선지자의 말씀은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라, 가 아닙니다. ‘안 되는 것을 안 되게 하라.’라고 하십니다.

‘네가 선지자인데 그 선지자의 아버지가 너의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거든 필히 그 아버지를 지옥 보내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지시입니다. 소름끼치지 않습니까? 무섭지요. 아는 사람이라고 더 봐주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또 자기에게 사기 친 사람이라고 더 냉정하게 대하는 이런 것, 선지자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그러면 선지자가 무슨 재미로 사느냐, 선지자는 고향마을에 가서 자기추억을 긁어모으는 그것이 의미가 아니라 선지자는 자기가 전하는 그 말씀과 나란히 같이 가야 돼요. 같이 가게 되면 이미 미래가 확정되어 있습니다. 미래가 확정되었다는 말은 이제는 거칠 것이 없다는 거예요. 자기 하는 일을 그냥 밀어붙이면 돼요. 주저주저할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산에 올라갔습니다. 평소에는 새벽 5시면 노인들이 많이 올라와요. 그런데 오늘은 노인들이 안 보이는 거예요.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데 ‘잘했어, 참 잘했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조마조마했겠습니까? 나는 집에 와서 느긋하게 봤습니다. 이미 결정 난 거예요. 이미 결정 난 것을 안 상태에서 예레미야는 일가친척 눈치 볼 것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 어머니, 자기아버지 구원 못시켰다고 예레미야 지옥 보내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나의 의미가 아니고 나의 자연물이 아니에요. 예레미야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 확정된 말씀, 해볼까 하는 정도가 아니고 반드시 되고야 마는 말씀 속에서 같이 큰 강물에 휩쓸려서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느긋해야 되고 주저 없이 복음을 전해야 되고 사람들이 안 믿을 동네에서는 안 믿도록 해야 되고 믿고자 작정되어 있고 택정되어 있을 것 같으면 그들만이 믿을 수밖에 없는 복음만을 전해야 되겠지요. 그래서 오늘날 우리 성도들을 가지고 선지자라고 해요. 이 마지막 때에 우리가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라는 뜻은 뭐냐 하면, 거칠 것이 없는, 주저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일 가지고 조마조마하고 마음이 설레고 잠도 못 이루는 것은 뭐냐, 여전히 자기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주변에서 일어나는 세상일과 결부해서 나의 가치를 찾으려 하는데서 오는 것이고 대자연과 더불어서 살려고 하니까 아직도 걱정 반, 우려 반 그렇게 되는 겁니다. 꼭 후라이드 반, 양념 반, 하는 통닭주문과 같고 짜장 반, 짬뽕만, 하는 식의 주문같이.

이게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고, 그러니까 조마조마 한 거예요, 안절부절못하고. 성경말씀이 비행기고 우리를 그 비행기가 모시고 가는 입장이라면 우리는 느긋하게 할 소리 다하고 주저 없이 외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스라엘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선지자가 예언한 그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믿던 하나님을 믿었던 거예요.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믿던 하나님하고 선지자가 믿던 하나님의 그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이것이 어려운데 쉽게 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은 자기 따로 있고 그 외부에 하나님이 따로 있습니다. 그 하나님에게 신경을 쓰면 하나님과 관계 맺어주시고 내 쪽에서 신경을 안 쓰면 하나님과 관계가 이어지지 않는 그런 입장에 있는 겁니다.

그런데 선지자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동행하는 하나님입니다. 방안에 나비가 한 바리 들어왔습니다. 이 나비가 들어왔을 때 나비를 잡고 싶으면 잡고 내보내고 싶으면 쫓아내버리면 그 나비가 나타났더라도 그 나비는 다시없어진 거지요. 이것은 나비가 아니고 나비와 나하고는 하나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옛날 노나라 임금이 새가 한 마리 날아 들어왔는데 그 새가 예뻐서 그 새를 키우는데 그 새 앞에 맛있는 고기주고 음악 틀어주고 무용수까지 동원해서 춤추게 했는데 새가 얼마 안가서 죽어버렸어요. 그것은 새가 살아가는 방식, 새가 즐거워하는 방식하고 인간이 즐거워하는 방식을 몰라서 인간 좋아하는 방식으로 새를 붙잡아서 키우면 그것이 새에게도 좋을 줄 알았던 모양이지요.

새가 죽어버렸다 이 말이죠. 예수님이 오실 때, 선지자가 오실 때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밖에 있는 하나의 대상으로 삼아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 자기가 맛있어 하는 것, 자기가 원하는 것, 자기가 탐내는 것을 가지고 거기에 메시아나 선지자에게 입혀주니 선지자가 그것을 받겠습니까? 지옥 가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과 천국 가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외치는 것은 ‘천국에서 살려면 이런 것들이 구비되어야 합니다.’라고 천국의 삶에 적합한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선지자를 붙들고 메시아를 붙들고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 돈 좋아하면 돈에다가 예수를 입혀야 되고, 선지자를 돈으로 매수하고, 그래서 죽은 선지자도 몇 명 있어요.

돌이 떡이 되게 해야 되고, 인기가 있어야 메시아라고 하고, 세상권력을 쥐어야 네가 복음 전하는데 유리하다고 하는데 그것은 마귀가 마귀사람 만들려고 메시아마저 선지자마저 붙들려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가 성경에 나와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동행은 뭐냐, 방안에 나비 한 마리 있고 새 한 마리 있다고 동행이 아닙니다. 와도 나비나 새라는 그 물체와 우리는 따로따로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방안에 새로운 공기가 들어왔다 합시다. 새로운 산소가 들어왔는데 그 공기와 분리될 수 있습니까? 안되지요. 새로운 공기가 들어오면 그 공기를 마셔야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동행이라 하는 것은 어떤 분류가 안돼요. 어떤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냥 우리와 더불어서, 함께 사는 거예요. 마치 이방사람들이 신을 볼 때에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다.’는 식, 왕의 남자의 대사처럼 그렇게 섬겨버리면 성경해석이 전혀 안돼요. 이방신을 섬기듯이 성경해석이 되면 안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도 같은 개념입니다. 이스라엘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아들이 몇 명입니까? 이스라엘민족을 한 50만이라 합시다. 50만 같으면 아들이 50만 명이라는 말입니까? 아들이면 하나라는 말인지, 아니면 50만 명이 다 아들들인지 이것이 곤란하다는 말이지요.

더 어렵게 해 볼까요? 사람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이라 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사람마다 다 각자 하나님의 형상들입니까, 아니면 형상이라는 하나로 될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그 문제가 그냥 보통 신을 그냥 대상으로 볼 때는 이것이 풀리지를 않아요. 붉은 악마라고 해서 식당종업원이든 은행원이든 전부 다 붉은 티셔츠를 입고 머리에는 밤에도 빛이 나는 빨간 뿔을 달고 다니지요.

붉은 악마가 어디 있습니까? 한 번 보고 싶어요. 붉은 악마가 어디 있습니까? 붉은 악마가 없잖아요. 그냥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의 모임이죠. 개인이 모여서 국가지만 국가가 뭐냐 할 때는 잡히지 않아요. 그러면 국가가 없는 겁니까? 개인이 모여야 국가가 된다면 개인이 안 모이면 국가가 없는 겁니까? 이런 문제가 굉장히 어려워요.

교회가 뭐냐, ‘교회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할 때 그러면 예수 믿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입니까? 그러면 사람이 열 명 모이면 교회가 열군데 됩니까? 그것은 아니지요. 열 명이 모이면 열 개의 교회가 될 텐데 왜 교회는 하나라고 합니까? ‘그것은 하나라고 하는 거야.’ ‘그러면 그것은 하나가 아니지. 열한개지.’ 왜냐,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고 그 모이는 단체를 교회라 하면 그 모인 단체를 그 사람들 옆에 놓아버리면 열 명의 교회와 그 전체를 합해놓은 그것까지 해서 열한개의 교회가 된다고요.

참 어렵지요. 대상을 보게 되면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다.’고 하면 숫자를 셈할 수 있어요.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나 밖에 있는 다섯, 이렇게 되는데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우리 신자 열 명,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명,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예수님 저기 계시다고 할 때 합하면 얼마입니까? 열 한명이 됩니다.

그게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리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면서도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것이 되어버려요. 이걸 제가 하나교회에서 설명하려고 합니다. 교회라고 사람들이 모였는데 그게 교회가 아니래요. 그런데 뭐가 교회인가? 교회인 것을 모독하고 교회를 깨는 그 힘이 바로 교회가 되는 겁니다.

교회가 아닌 곳은 그것을 깨지를 않아요. 그런데 교회 되게 하기 위해서 진짜 교회가 이 지상의 교회에다 ‘너는 교회가 아니야, 그거 박살내버려.’ 하고 박살내는 그 과정을 통해서 교회가 윤곽이 잡히는 겁니다. 이게 뭐냐, 동행이에요. 하나님께서 ‘너 여기 있고 나 여기 있다.’는 이방신처럼 하나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 들어가 버려요.

들어갈 때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하나님은 이름이 없습니다. 이름이 없는데 언제 이름이 생기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 속에 들어올 때 인간들이 갖고 있는 이름처럼 본인도 이름을 하나 가지고 들어와 버립니다. 그때부터 인간의 이름과 우리 속에 있는 이름과 어느 쪽의 이름, 그러니까 다윗이면 다윗, 예레미야면 예레미야, 이근호면 이 근호, 그것을 가지고 악마를 이길 것이냐, 아니면 우리 속에 계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길 것이냐, 를 그 이스라엘에게 계속해서 묻는 거예요.

그 이름을 만일 이스라엘이 열 명이라면 그 열 명 가운데서 따로 뽑아낼 수가 없어요. 뽑아내버리면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다.’ 이렇게 돼버려요. 뽑아낼 수도 없고 또 안 뽑아내고 내가 나서면 이것은 내 이름으로 벌이는 전쟁이 되어서 백전백패, 해봐야 소용없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나이지리아하고 한국하고 축구하는데 제대로 했으면 한 5대2로 깨질 것인데 붉은 악마의 기를 받아서인지 나이지리아 선수가 헛발질을 많이 하고 골 넣을 것도 골 대맞추고 그러더라는 말이죠.

그럴 때 붉은 악마의 응원의 힘으로 이겼다면 그 붉은 악마가 그 열 한명의 선수 가운데 어디 있습니까? 그게 없기 때문에 그들은 뭐라고 하느냐하면, 붉은 악마를 열두 번째 선수라고 하거든요. 선수면 그라운드에서 뛰어야 선수인데 거기에는 없잖아요. 없는데 경기가 잘 풀리면 나중에 붉은 악마 때문에 재수가 좋아서 이겼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붉은 악마는 누군데요? 카메라 들이대고 인터뷰를 해보지요. 인터뷰 할 거면 서울까지 가야 되는데.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고.’ 그래가지고는 이방신을 섬기는 것 밖에는 안돼요. 이것은 해결이 안 됩니다. ‘그러면 목사님, 동행했다는 것은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이 자기백성과 동행할 때 동행은 이렇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있고 이스라엘역사가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역사는 아무리 봐도 여호와하나님이 안보입니다. 기껏 선지자들 몇 명 있고 가짜 선지자들과 제사장들, 엉터리들이어서 돈만 아는 그 인간들, 요새 같으면 목사들의 경우들이 있고 또 그런 교인들이 죽이 맞아서 이방신 섬기자고 하면서 정치적으로 노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일이 안되고 멸망당하고 꼬이고 이방민족이 와서 다 부수어버리고 성전도 불태워버립니다.

그럴 때 다른 민족 같으면 ‘이거 뭐 재수 없네.’ 이정 할 것인데 하나님이 동행하는 민족이 되다 보니 보이지도 않는 분을 향하여 ‘하나님, 우리가 너무 교만 했습니다. 우리가 이방신을 섬겼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제사를 받으소서.’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이방민족들이 ‘아이고, 너희들 지금 뭐하고 있는데? 보이지도 않는 신을 향하여 혼자 중얼대고 있는 그게 뭐냐.’ 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히스기야나 믿음 있는 왕들은 알아요. 그것도 깨지고 난 뒤에 알아요. 꼭 벌 받고 난 뒤에 알아요. 사사기시대에 백성들이 꼭 호되게 혼이 나야 ‘하나님이여, 구원자를 보내소서.’ 한다 이 말이지요. 랍사게라는 앗수르 장군이 와서 히스기야에게 하는 말이 ‘신을 맘껏 불러봐라. 내 앞에서 신 불러보지만 우리 군대에게 안 깨진 나라가 없다. 너희들도 여호와 이름을 실컷 불러봐라. 깨지고 말지.’

아르헨티나 축구국가대표 중에 메시라는 선수가 있는데 그 선수가 뛰면 다 깨지게 되어 있어요. 여호와 이름을 불러도 소용없어요. 다 지게 되어 있어요. 한국 팀은 4대 1로 졌지요. 북한 같으면 20대 1로 졌을 거예요. 랍사게가 와서는 다 깨지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역사상, 경험상, 증거 상, 과학적으로 볼 때, 합리적으로 볼 때 그것이 맞아요.

랍사게의 군대는 수십만이고 이스라엘은 보잘 것도 없어요. 그런데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언제 등장하느냐 하면, 겉으로는 주여, 예수여, 삼위일체가 어쩌고 하지요, 하지만 그것은 그냥 지식으로 아는 것이고 교회 와서 하는 소리지만 평소에 살아가는 것은 내 식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그냥 돈만 챙기면서 살다가 그 모든 것이 헛짓이고 그게 가치와 의미가 아예 없다는 것을 알고 손을 놓을 때 그 때 진짜 믿는 사람한테는 ‘이 모든 일이 주님께서 작당하신 일이다.’ 하는데 그 주님께서 벌였던 일이라는 것은 옆 사람도 몰라요.

며느리도 몰라요. 남편의 믿음을 아내가 모르고 아내의 믿음을 남편이 몰라요. 본인만 알아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소리 하면 남들이 욕할 거예요. ‘21세기 과학시대에 무슨 귀신 씨 나락 까먹은 소리를 하고 있느냐. 예수님이 어디 있나.’ 하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동행? 동행 같은 소리하고 있네. 내 인생 나 혼자 산다, 라는 것을 철석같이 믿으면서 그렇게 살아 왔다. 그러나 너는 모르지. 나는 안다. 주께서 지금까지 동행하셔서 확정된 말씀, ‘너는 이 도착지점, 천국사람으로 땅의 것이 아닌 천국사람으로 하늘의 것을 섬기기 위해서 이 길 이 좁은 길로 가야 돼.’” 라고 확정된 말씀이 그 짧은 순간에 우리에게 밀려오는 거예요.

그 때 비로소 동행의 의미를 아는 겁니다. ‘내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하지만 사실은 주의 이름으로 십자가의 피의 공로로 그냥 주셨습니다.’라는 것을 그냥 알게 하시는 거예요. 물론 돌아서면 또 잊어버리지요. 꼭 사사기 같아요. 돌아서면 또 잊어버려요. 한 윤범 목사님이 하나교회 세미나하면서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어요.

전에 십자가마을에서 논쟁이 벌어졌을 때 자기는 외치고, 외치고 빌고 빌었답니다. 지금까지 내가 배워온 개혁주의신학이 좀 맞고 ‘십자가만’이라는 저것이 틀리도록, 내가 지금까지 배워왔던 것이 개혁주의이고 그 개혁주의의 성화론인데 제발 그 개혁주의가 맞고 성화론이 맞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우리 편 이겨라. 우리 편 이겨라.’ 하는 식으로 그 논쟁을 지켜봤답니다.

결국 그것이 엉터리였다는 겁니다. 십자가피 만으로 다 된 것을 가지고 거기에 자기의 행함을 끼워 넣으려고 하는 이것은 지금까지 공부한 자존심이 있어서 ‘우리 편 이겨라. 우리 편 이겨라.’ 하면서 이것을 다 버린다는 것이 목사의 자존심이 너무 상하기 때문에 버릴 수가 없었는데 결국은 십자가 피로써 확정되고 그것으로 하늘나라로 동행하셔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거칠 것이 없고 주저할 것이 없이 십자가복음만 외친다고 고백하신 거예요.

얼마나 감동이 되었던지, 그처럼 주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의 내용 같은 것들, 대자연을 통해서 어떤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것들, 나 여기 있고 하나님 거기 계시고, 그래서 그 하나님께 비는 식이 아니라 아예 쳐들어와서 나를 장악해버리고 새 공기가 헌공기와 섞이듯이 아예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가 예수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밀착된 동행의 모습으로 우리를 장악하면서, 우리를 자기 것으로 삼으면서 새로운 삶으로 날마다 변화되게 하시는 그 은혜가 주의 말씀대로 비추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세상 사람처럼 살고 싶고 그들이 왠지 부럽고 그들이 왠지 자유로워 보이고 그들이 여유 있게 보일 때가 더욱 많았습니다. 그런데 웬 사랑인지, 웬 사랑인지 십자가 앞에 다시 한 번 우리를 세우고 그게 다 헛되고 헛된 것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모든 세상 만물이 성경말씀대로 착착 이루어지고 있음을 우리가 희열과 감격으로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