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6. 16. 23:34

역사 밑에서 (예레미야 19장 7-11절)

본문 : 예레미야 19장 7-11절
제목 : 역사 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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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강-렘19장7-11(역사밑에서)-jer100616

역사 밑에서

2010년 6월 1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9:7-11

(렘 19:7, 개정) 『내가 이 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계획을 무너뜨려 그들로 그 대적 앞과 생명을 찾는 자의 손의 칼에 엎드러지게 하고 그 시체를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되게 하며』
(렘 19:8, 개정) 『이 성읍으로 놀람과 조롱 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 모든 재앙으로 말미암아 지나는 자마다 놀라며 조롱할 것이며』
(렘 19:9, 개정) 『그들이 그들의 원수와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에게 둘러싸여 곤경에 빠질 때에 내가 그들이 그들의 아들의 살, 딸의 살을 먹게 하고 또 각기 친구의 살을 먹게 하리라 하셨다 하고』
(렘 19:10, 개정) 『너는 함께 가는 자의 목전에서 그 옹기를 깨뜨리고』
(렘 19:11, 개정)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 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읍을 무너뜨리리니 도벳에 매장할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하리라』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아니하면 기독교가 아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성경을 보지 않고 발언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은 성경을 봐도 자신이 행할 수 있는 것들만 뽑아내어 ‘이것이 성경이다’고 내세웁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끝을 보세요. 옹기가 깨어진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옹기가 깨어진다’는 이 대목에다 우리 자신을 세워둘 수가 있습니까? 즉 “나는 옹기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뿌지직 깨어져야 마땅함”라고 자신을 자부할 수 있습니까? 성경 안에 들어서게 되면 비로소 세상은 악하며 우리 인간들은 죄인이다는 사실이 나옵니다. 이 사실을 수용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지는 무서운 진노와 분노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됩니다.

사람이 어릴적부터 주위로부터 많은 도움과 혜택을 입고 왔다면 인간적으로 그 사람들에게 냉대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막상 성경을 보게 되면 ‘세상은 악하고 인간은 죄인이다’는 사실이 기반이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할려고 하게 되면 그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은혜를 잊을 수 없기에 심한 말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로서 교회 다니는 사람은, 교회 다니지 않는 친척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딜레마를 느끼게 됩니다. 성경의 내용을 전하자니 상대방의 인격과 그들로부터 받은 은혜를 매정하게 무시하는 것이 되어서 인간으로서 도저히 못할 짓을 하는 셈이 되고, 그렇다고 해서 성경 내용이 불신자 친척들 주장들과 일치되지 않으니 참으로 입장 난처해집니다.

그렇다면 이 성경 말씀을 오늘날 성도들이 어떻게 전해야 하는 겁니까? 하나님과 마주친다는 것은 고속도로에서 역주행하다가 차가 차끼리 정면충돌하는 그 이상의 충격을 제공합니다. “그쪽으로 가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가면 망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이해한다고 해서 해석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체험되어져야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 세 친구의 말씀 생활은 성경공부로서 충족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타는 용광로 속에 하나님께서 집어넣으므로서 실감나게 하신 것입니다. 즉 왜 이 세상이 말씀대로 악한 세상이며 왜 우리들 자신이 죄인인가 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찾아온 죽음의 현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체험케 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모조리 다 가짜입니다. 그것은 연극이며 조작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이름으로 살 이유도 없고 살 필요도 없음이 분명해져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종교 생활을 하면서 시도하는 방식이 바로 ‘진리의 영역’에 대한 진입입니다.

즉 인간들이 알고 있는 신이란 진리의 신이라서, 그 신의 진리와 내막과 비밀을 우리도 같이 알고 그 알게 된 진리를 실천에 옮기게 되면 영원힌 진리의 세계에서 하나님과 합류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소위 진, 선, 미를 달성하여 그 달성한 업적따라 자신이 소지하고 있으면 그 소유된 진, 선, 미가 참된 진리와 선함과 아름다운 천국에 넣어준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모르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에 대해서 인간은 애시당초 알지 못할 존재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바로 이 점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달릴 때에 해가 어두워지고 무덤에 있던 시신들도 되살아나 거리를 활보했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직접 상대한 자들은 바로 ‘진리의 영역’을 추구하던 자들, 곧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과 율법사들이었습니다.

이것은 대자연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준비된 재료들이지만 그 핵심은 진리에 대해서 인간들이 죄를 발생시키고 있는 점입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겨냥해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마음으로 간음해도 이미 간음죄가 성립하고, 형제를 보고 미워해도 이미 살인죄가 성립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신 것은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려 오셨다는 겁니다.

이것은 진리의 영역에서 인간을 배제하시는 조치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만들어진 것이고 왜 만드신 인간을 멸하려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진리의 영역이 아니라 ‘의미의 영역’에서 다루기 위함입니다. ‘의미의 영역’의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장터에서 참새 두 마리에 동전 한 닢에 팔립니다.

이 광경을 동영상으로 보든지, 현장에서 직접 보든지, 누구로부터 들었든지 상관없이 거기에는 장사하는 사람들의 소행으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참새가 장터에서 돈받고 팔리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라는 겁니다. 인간들의 ‘진리의 영역’에서 진리 추구로서는 ‘하나님의 허락하심’이라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도출해 낼 수가 없는 겁니다. 하지만 ‘의미의 영역’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내일 장터에서 팔리는 참새라 할지라도 오늘은 마음껏 창공을 난다. 이는 각자 주어진 역할을 하는 것이다. 참새가 독자적으로 자신이 꺼내는 의미는 아니고 하나님께서 배치하신 배치물로서의 의미만 있을 뿐이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도 이 원칙에 따릅니다. 이스라엘의 의미는 이방민족과는 달리 그들이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아놓고서는 철저하게 망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말씀이 있고, 언약이 있다고 해서 인간이 안 망한 자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위하여 이스라엘은 이방인들 보다 먼저 하나님과 마주치게 된 민족입니다. 이로서 알게 된 것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원칙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아는 자가 참된 이스라엘이요 유다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방인 성도에게 이 이스라엘의 멸망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직접 체험되어야 하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대자연까지 동원하시면서 우리 인간을 어떤 식으로 압박을 가해도 우리는 그저 마땅한 조치임으로 받아들여야 정말 말씀의 체험을 받고 있는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아는 것은 바로 우리가 내민 ‘믿음’까지 박살나야 합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피의 효과로 구원됨을 받아들이는 그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이 해 낼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오로지 우리는 ‘의미의 영역’에 속해서 바로 성도가 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나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랑만 알게 하옵소서. 그 사랑으로 인하여 못할 게 없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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