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6. 12. 01:34

우상의 세계 (예레미야 19: 1- 6)

본문 : 예레미야 19장 1- 6절
제목 : 우상의 세계
듣기 :
음성 , 보기 : 동영상
문서 : 한글 , 인쇄 :
PDF


066강-렘19장1-6(우상의세계)-jer100609

우상의 세계

2010년 6월 9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9:1-6

(렘 19:1, 개정)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가서 토기장이의 옹기를 사고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과』
(렘 19:2, 개정) 『하시드 문 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거기에서 내가 네게 이른 말을 선포하여』
(렘 19:3, 개정) 『말하기를 너희 유다 왕들과 예루살렘 주민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 그것을 듣는 모든 자의 귀가 떨리니』
(렘 19:4, 개정)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이 곳을 불결하게 하며 이 곳에서 자기와 자기 조상들과 유다 왕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무죄한 자의 피로 이 곳에 채웠음이며』
(렘 19:5, 개정) 『또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산당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라 드렸나니 이는 내가 명령하거나 말하거나 뜻한 바가 아니니라』
(렘 19:6, 개정) 『그러므로 보라 다시는 이 곳을 도벳이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죽임의 골짜기라 부르는 날이 이를 것이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땅에 우리가 보기에는 평범한 땅이라고 여겨지겠지만 막상 땅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르는 땅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왜 거짓이 아니라 실제적인 말씀인가를 보여주는 식으로 살아있는 땅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의 진면목을 발췌해 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약속의 의미를 발굴해 낼 수가 있고 조성할 수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약속의 의미를 찾아내는 식으로 움직여주셔야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약속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다 백성은 약속의 땅 위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예레미야를 통해서 특별한 장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십니다.

그 지명이 바로 ‘힌놈의 아들 골짜기’라는 곳입니다. 이 장소는 전에 유다 백성들이 이방종교에 물들어서 자신들의 아들들을 자진해서 이방신에게 제물로 바쳤던 그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장소를 통해서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의 진수를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즉 유다 백성들이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 자진해서 아들을 바쳤던 그 자리를 이제는 하나님에 의해서 바벨론 제국을 통한 침공으로 무참하게 자녀들이 학살을 당하는 장소로 삼아버리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의 진수를 보여주는데 있는 유다 백성을 배제하시는 것이 아님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쪽에서 발굴하는 식으로 성사됩니다. 마치 고고학자들이 과거 유물을 발굴하듯이 말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보면 아무렇게나 취급당할 그런 기와 조각도 고고학 전문가의 안목으로 보면 과거의 역사가 거기에 중첩되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창세 전부터 감추어져 있는 겁니다. 그 감추인 뜻은 인간의 손과 지혜나 마음으로 찾아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배제한 채 진행되지도 않습니다. 에베소서 1:4-7에 보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 쪽에서 손을 쓸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 성도가 믿을려면 바로 이런 약속을 믿어야 하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 자신의 행한 행위를 믿으면 안됩니다. 잘했니 못했니 하는 것은 도리어 창세 전에 있었던 그 계획을 모독하는 바가 됩니다.

우리의 행함이 이런 계획을 취소시키거나 무효화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바로 이런 계획에 대해서 자기 능력으로 믿고자 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조상이 이미 고장 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죄의 삯은 사망이다’는 로마서 6:23의 말씀에 대해서 사람들은 전혀 그 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될 수 있는대로 죽음과는 멀리 떨어지려는 노력을 부단히 시도해오고 있습니다. 백미보다 현미밥을 선호하고 탄산음료를 멀리하고, 아침마다 운동하고 과식하지 않고, 스트레스는 그때그때 풀고, 정기적으로 건강검진 하고, 차타면서 안전벨트하고, 이런 식으로 안 죽고 오래 사는 노력을 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될수록 점점 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이 말씀이 비현실적인 구호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어느날 성령이 임해서 자신이 죽어 마땅한 존재인 것을 알게 되면 비로소 자신이 그동안 자신을 살려내려고 시도한 모든 노력들이 다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로마서 6:23의 말씀만이 실제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에베소서 1:4-7의 말씀도 실제적인 하나님의 확정 계획으로 받아들여지게 딥니다. 그렇게 되면 참으로 믿을 수 있는 바는 하나님의 말씀 뿐이며 그동안 자신이 자기를 위하여 시도했던 모든 시도는 결코 믿을만한 것이 되지를 못함도 아울러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처럼 죄라든지, 지옥이라든지 하는 그런 개념들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 속에 사건을 유발시켜서 깨닫게 합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을 자진해서 알 수 없는 것일까요? 아담 부부가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하지 말라’라는 규정 자체를 철거시킨 바가 딥니다.

즉 ‘따먹지 말라’라는 규정 자체를 따먹게 되면 아담과 하와 앞에서는 더 이상 자신의 행위를 규제할 그 어떤 법도 남아있지를 않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 때부터 인간들은 뭐든지 해도 무방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자신이 죽는 것이나 자신이 벌 받는 것도 어디까지나 자신이 뭐든지 할 수 있기에 자신의 방법으로 대비하고 피하고 방비하는 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다보니, 애초부터 ‘∼하지 말라’를 고수하신 그 참 하나님과는 다른 하나님을 찾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즉 뭐든지 해도 무방한 신만을 납득을 하고 이해하고 호감을 갖고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옥을 보내는 것은 오직 단 하나, ‘다른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뭘해도 다른 신을 섬길 수밖에 없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내면적으로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존재임’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던, 성령을 믿던, 성령을 믿던, 여호와를 믿던 그 모든 근거는 “나는 뭐든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할 수 있을 자유가 있음”을 기반으로 움직이니 이 모든 것이 곧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되는 겁니다.

이들은 지옥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장 서서 우리 손을 이끄시면서 자신이 지옥의 저주받은 그 현장으로 데려가십니다. 그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게 하십니다. 저주받는 자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에서가 아니라 ‘죽은 자들’ 가운데 살아나셔서 그 부활의 영이신 성령을 자신이 창세 전에 미리 점찍은 자에게 제공하시므로서 비로소 성도는 오직 예수님이  피 공로만 구원의 능력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영원히 믿을만한 것을 믿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자신이 자신의 행동에 유념하다가 정말 믿을 것에서 눈 돌리는 일이 없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66강-렘19장1-6(우상의세계)-jer100609.mp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66강-렘19장1-6(우상의세계)-jer100609.avi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66강-렘19장1-6(우상의세계)-jer100609.hwp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66강-렘19장1-6(우상의세계)-jer100609.pdf

 

 

-----------------------

 


066강-렘19장1-6(우상의 세계)-jer100609

2010-06-10 18:58:59   녹취 : 오용익
 
 
066강-렘19장1-6(우상의 세계)-jer1006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9장 1절부터 6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80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19: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가서 토기장이의 오지병을 사고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을 데리고 하시드 문 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거기서 내가 네게 이른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너희 유다왕들과 예루살렘 거민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리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 무릇 그것을 듣는 자의 귀가 진동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이곳을 불결케 하며 이곳에서 자기와 자기열조와 유다 왕들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무죄한 자의 피로 이곳에 채웠음이며 또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산당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라 드렸나니 이는 내가 명하거나 말하거나 뜻한 바가 아니니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다시는 이곳을 도벳이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칭하지 아니하고 살육의 골짜기라 칭하는 날이 이를 것이라.”


보통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세상 어느 곳이든 원하는 사람들이 가서 눌러 살 듯 어느 누구도 원하기만 하면 이 유다나라 땅에서 살 권한이 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이스라엘에게 이 약속의 땅이라 하는 것은 그 땅의 지명에 다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무엇인가를 드러낼 때 하나님은 그냥 사람들만 상대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땅의 지명, 그 땅에서 일어나는 사건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땅이 살아 있는 땅입니다. 땅이 그냥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에 준해서 살아 있는 땅, 그 땅에 약속의 백성이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백성 같은 경우는 우리와 같은 보통 인간이니까 ‘우리가 사는 이 땅, 이 공간,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 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중요하지 이 흙무더기가 뭐가 중요하냐.’ 하고 의미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을 땅을 통해서 보여줄 때 하나님이 찾아내는 식으로 그 약속의 의미를 발굴합니다. ‘발굴’ 하니까 고고학이 생각나지요. 보통사람들이 가면 아무것도 없는데 고고학자들이 가면 거기서 뭔가 하나 과거사가 펼쳐집니다. 보통 사람들 눈에 보기에는 그냥 기왓장 하나인데 그것을 가지고 과거를 그대로 재현해 내는 것, 사람들에게 감추어진 것인데 그 안에 감추어진 역사가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고고학전문가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안목으로 땅을 보지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자기 백성을 결합을 시켜 놓을 때는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찾아내지 못하는 그 하나님의 약속을 발굴해 내는 식으로 그 의미를 다 드러내게 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교회라는 것이 사람들이 모여서 그 모인 집합이 있으면 교회 되는 줄 알지만 성도라 하는 것은 우리가 사람 끌어 모은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나라에서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친히 사건을 일으켜서 한 사람 한 사람 발굴해내요. 수 백년동안 흙 속에 묻혀 있는 도자기하나 보물하나 발굴하듯이 주님께서 ‘여기에 숨어 있었구나.’ 라고 끄집어내는 겁니다.

끄집어내는 그 약속에 대해서는, 우리가 여러 번 이 말씀을 들었습니다만, 에베소서 1장 3절부터보면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이러한 시나리오가 마련되어 있는 거예요. 이 점을 안다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자신의 문제 때문에 슬퍼하거나 걱정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당신 그동안 뭘 믿었어요?’라고 따지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에베소서 1장 4절부터 보면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흠이 없도록 이미 창세전에 다 굳혀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모르지요.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만들어주시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 위에 덮쳐지는 하나님의 뜻은 창세전에 확정된 그 뜻만이 우리에게 주어지기에 그 외에 뜻은 우리가 아예 기대하지도 맙시다. 기대한다는 것이 잘못이죠. 창세전에 흠이 없도록 해 준다면 흠이 없는 겁니다. 우리가 하고 안하고가 문제가 아니에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어떻게 안하면 됩니까?’ 그런 것을 걱정한다는 자체가 ‘흠이 없게 하신다.’는 것 자체에 대한 모독이죠. 죄라는 것은 뭐냐, 자기가 뭘 하고 안하고에 신경 쓰는 그것이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확정해 놓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해서 흠이 없게’ 하시는데 그 흠이 없게 하시는 것은 ‘그(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게 한다.’는 이 원칙이 고스란히 우리에게 주어지도록 그냥 하나님은 빈 그릇만 하나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 그릇도 우리가 만든 것은 아닙니다.

설렁탕을 그냥 그릇에 담아오면 식는다고 주방에서 주전자에 담아 와서 빈 그릇을 놓고 펄펄 끓는 설렁탕을 죽 부으면 그득히 설렁탕 되는 겁니다. 이미 주방장의 주전자에 ‘우리를 복주시되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 앞에 영화롭게 했다.’는 그 설렁탕 내용이 주전자에 담겨서 쿨렁쿨렁 빈 그릇에 채워지는데 우리가 거기서 ‘이러지 마세요.’ 하고 반항도 안돼요.

반항도 안 되고 반발도 안 되고 외면도 안 되고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생겨먹은 그 자체가 주님의 뜻을 담기 위한 그릇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 그것을 반발할 수가 없어요. 이 복음을 믿는 겁니다. 이 복음을 믿게 되면 우리는 이것 외에 이 세상에서 전혀 다른 것은 믿을 가치가 없다는 뜻이 되고 그것을 믿을 가치가 없다는 말은 이 성경말씀, 약속 외의 문제를 가지고 우리 가슴이 털렁 내려앉는다든지 근심한다든지 고민에 빠진다는 것은 그것은 성도에게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가슴이 왜 내려앉습니까? 우리가 그동안 뭘 믿었는데? 믿어야 될 것을 안 믿고 엉뚱한 것을 믿고 있으니까 주께서 의도적으로 가슴이 덜렁 내려앉게 만든 거예요.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서는 찾아낼 수 없는 이 창세전의 뜻을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일을 일으켜서 우리로 하여금 그 뜻을 비로소 알게 하는 겁니다.

알게 하는데 그 알게 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오늘은 ‘힌놈의 아들 골짜기’라는 겁니다. 이름도 아주 희한해요. 2절에 보면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 어른들 몇 데리고 가서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가서 거기서 내 말을 선포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가 뭐하는 곳인가 보니까 4절, 5절에 ‘전에 바알과 이방신들의 제단이 있던 곳’입니다.

그러면 그 제단이 있던 곳에서 왜 선포해야 되는가? 그 제단이 무슨 제단이냐 하면, 사람을 몰록 같은 신에게 자기 아들들을 제물로 바쳐서 신의 노여움을 풀고 신의 복을 따내는 이방제사를 드리던 제단이 있던 장소가 힌놈의 아들 골짜기였어요. 하나님께서 예례미야에게 그 자리에 가서 하라고 시킨 것이 뭐냐 하면, ‘너희들이 하나님께서 지시하지 않은 다른 신의 방법으로 제사를 드렸고 너희가 범죄를 했기 때문에 너희가 자진해서 아들을 바쳤던 그 제단이 있던 현장에서 이 유다백성이 바벨론제국에 몰살당하는, 너희 자녀들을 내가 몰살시키는 장으로 만들겠다.’ 하는 겁니다.

복 받아 보겠다고, 여호와께서 시키지도 않은 이방신들이 좋아하는 방법으로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쳐서 큰 횡재해보겠다고 한 그 행위에 대해서 주께서는 놓치지 않았던 겁니다. 그 행위를 주시하면서 ‘어이구, 잘 논다. 그렇게도 네 아들을 바치고 싶었어요. 그러면 내가 아예 알아서 네 아들을 바치게 해줄게.’ 해서 수만, 수십만 명을 집단으로 바벨론 제국을 통해서 그 자리에 몰살을 시킵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힌놈의 아들 골짜기’가 뭐냐, 게헨나, 지옥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천국도 모르지만 뭘 모르느냐 하면 지옥도 뭔지 몰라요. 지옥이라는 의미는 하나님이 발굴해 줘야 비로소 지옥이라는 의미가 나오는데 그 발굴할 때 동원되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들이 동원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지옥 만들기를 하는 거예요.

자진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저주스럽게 자기 아들을 비롯해서 가족들이 몰살당하는 그 현장에서 그들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예언된 예언의 말씀과 자기들이 평소에 했던 행세와의 만남이 이루어지지요. ‘아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죄를 지적하기 위해서 사전에 이미 주어진 적이 있었구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이것이 농담 같고 장난 같고 우리 보기에는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함이 없이 되돌아오는 일은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를 끝장내고 돌아오는 법입니다. 마치 부메랑 같아요. 애들 같고 노는 부메랑이 있는데 결국 휙휙 돌아서 던진 애한테 도로 돌아오듯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그냥 성취 없이 돌아오는 법이 없습니다. 그 성취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아하, 지옥이란 것이 바로 인간의 죄와 결부된 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에게 다가오는구나.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가 평소에 행동했던 이 모든 것이 지옥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쉬운 예로 로마서 6장 끝에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고 했거든요. 우리는 평소에 죄를 하루 12번도 더 짓지만 그게 우리한테는 사망을 야기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망을 방지하기 위해서 아침마다 조깅하고 백미 안 먹고 잡곡밥 먹으면 될 수 있는 대로 사망을 피해보려고 몸을 무리하지 않고 몸에 기름기 쌓이는 음식 피하고 탄산음료 안마시고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 안가고 버스 타는 대신 기차타고 안전벨트를 꼭 하는 식으로 사망을 피해가는 식으로 살기 때문에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지요.

우리는 내가 사는데 급급해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을 우리의 일생, 우리의 자취와 행적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에 소홀해져버리는 겁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이 마치 우리와는 상관없는 불신자이야기인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우리가 죽게 된다면 그동안 우리가 건강하려고 애썼던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날아가는 식이 됩니다.

그렇다면 내가 실수해서 죽는 것도 아니고 내가 착하게 덜 살아서 죽는 것이 아니고 말씀에 의해서 죄인은 죽게 되어 있다는 것이 다가올 때 그 말씀이 기쁘게 다가오면서 그 말씀만 기쁜 것이 아니고 아까 이야기한 에베소서 1장 4절에서 7절, ‘창세전에 택함 받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흠이 없다.’는 그 말씀도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그 말씀과 더불어서 다 같이 실제적인 것으로 다가오는 기쁨을 누리는 겁니다.

‘아, 그렇구나. 내가 믿을 것은 말씀밖에 없구나.’ 내 행동의 철저함을 내가 믿을 것이 아니라 내 행위보다 주님의 말씀이 더 철저하다는 사실이 기쁨으로 다가오면 우리가 믿었던 그것이 더욱더 든든하게 다가오면서 우리는 이 땅에서, 심지어 목숨이 달아나는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기쁨으로 주님을 반길 수 있는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예레미야같은 선지자나 사도바울 같은 선지자는 여러 군데 나오는데 ‘우리는 만물의 찌꺼기고 쓰레기다.’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던 것은 창세전의 말씀이 자기를 걸고 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건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만약 우리 가슴에 작대기 같은 것이 턱 걸쳐 있다면 주님께서 갈고리를 휙휙 돌리다가 던지면 탁 이고리에 걸려서 잡아당기면 우리는 꼼짝없이 죽죽 딸려가겠지요.

그런 고리 같은 것, 그것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간단하게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 믿음은 말씀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그 믿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걸려서 우리를 끌고 말씀의 세계로 가게 되어 있어요. 그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것이지요. 하나님의 주신 것이 있느냐, 그 말은 하나님께서 나를 걸어서 천국으로 당길 때 내가 만들어낸 것 말고 주께서 심어준 그 걸개, 옷걸이 같은 것이 있느냐를 살펴야 돼요.

하나님이 주신 것에 하나님의 것이 걸려서 우리가 하나님 쪽으로 가게 되는 겁니다. 열심내고 빈다고 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주신 것이 있을 때, 주님이 주신 선물로서의 믿음이 있을 때 거기에 딱 걸려서 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것이 이 땅에서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다만 주님께서 말씀이 우리한테 얼마나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백성 같으면 아예 지옥에 대해서 몰라도 되는데 왜 지옥가지도 않을 백성에게 왜 지옥에 대해서, 하나님의 저주의 골짜기에 대해서 왜 그렇게 알려주시는가? 그것은 그냥 불신자에게나 알려주고 말지 왜 우리에게 알려주려고 하시는가, 하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애초부터 천국 갈만한 사람이 없어요. 창세전에 하나님의 계획된 것이 있지만 인간으로서 육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의인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의 조상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었거든요. 이것은 어려운 대목이니 천천히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사실을 마귀(뱀)가 와서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줬어요.

‘따먹지 말라고 했다.’는 것을 마귀가 와서 강조를 한 거예요. 뱀이 와서 여러 가지 나무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선악과를 주목해서 ‘따먹지 말라고 했지?’라고 확인시켜줬습니다. 그 때부터 마귀가 ‘따먹지 말라는 것을 따먹게 되면 더 이상 너는 그 따먹지 말라는 규정에 안 얽매이게 된다.’고 한 겁니다. 마귀가 노리는 것은 ‘따먹지 말라, 는 것을 네가 따먹게 되면 더 이상 네 눈앞에는 따먹지 말라, 라는 제한이 완전히 사라진다.’ 그 말이거든요.

‘그걸 네 눈앞에서 달성할 수 있는데 왜 주저하고 머뭇거리느냐?’ 한 겁니다. ‘따먹지 말라, 그래, 따먹지 말라고 했어, 따먹지 말라고 했어.’ 이렇게 벌벌 떨 것이 아니라 ‘누구야, 나보고 따먹지 말라고 한 게. 따먹지 말라고? 에라 따먹어 버릴까!’ 그것마저 따먹어버리면 더 이상 따먹지 말라는 그 법자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니까, 더 이상 따먹지 말라는 것이 없으니까 그것이 바로 신이 아니고 뭐냐, 뭐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는데 원래 우리 상식에서는 신은 둘도 셋도 아니고 하나뿐입니다. 신이 둘 셋 되어버리면 신 값을 못하지요. 그래서 신은 하나인데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다는 말이죠.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미 인간은 ‘내가 따먹고 싶으면 뭐든지 다 따먹는다.’ 하는 것이 내 안에서 이미 만들어졌어요.

이미 만들어진 상황에서 그 다음부터 그런 인간이 ‘나한테는 이제 따먹지 말라는 그런 것은 없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섬기는 신들은 전부 다 다른 신이 되는 겁니다. 아무리 신을 이야기해도 그것은 인간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 나는 자유의지가 있어. 그래서 뭐든지 할 수 있는 거야.’라고 마음먹은 상태에서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는 신은 전부 다 원래 ‘따먹지 말라.’하는 그것이 그대로 있었던 진짜 하나님하고 다른 신이 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그러니 진짜 하나님은 인간으로서는 납득이 안 되고 전혀 이해가 안 되는 신이고 우리가 섬길 수 있는 신은 전부 다 엉터리 신만 고르고 골라서 다 섬기게 되는 겁니다. 왜? 우리가 선택한 신은 내가 뭐든지 따먹어도 된다는 것을 옹호해주고 정당화시켜주는 신들이기 때문에 그런 신만을 우리가 골라서 믿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인간의 힘으로 참된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도 섬길 수가 없어요. 왜? 우리가 이미 고장이 났기 때문에. 마귀가 노린 것은 그겁니다. ‘네가 선악과 따먹은 채로 백날 하나님께 가까이 가 봐라. 하나님이 널 반겨 주는가.’ 실제로 하나님은 선악과 따먹었다는 이유 때문에 생명나무는 이미 치워버렸어요. 이미 그 가는 길을 차단시켰습니다.

그러니 생명나무 안 따먹어도 죽고 따먹어도 죽고, 따먹지도 못할뿐더러 따먹지 못하게 해서도 죽고 못 따먹어서도 죽고,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그러면서도 인간은 자기가 왜 죽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창세전에 택한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로 구원한다는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먼저 인간은 왜 죄로 죽어야 되는지를 알려줘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면서 찾아옴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미 어떤 신을 섬겨도 그것은 하나님이 진짜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의 뜻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항상 다른 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죄를 더 풍성하게 만들어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무엇을 거쳐야 되는가? 지옥을 거쳐야 돼요. 지옥을 경험해야 됩니다. 그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알아야 돼요. 지옥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지옥에 가야 되는지 그 이유를 아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다른 신을 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또 묻습니다. 왜 우리는 참된 신이 나타나도 다른 신을 섬길 수밖에 없는가? 왜 참된 신마저 다른 신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가? 이미 우리 조상이 선악과를 따먹은 상태이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은 상태에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가 늘 무엇으로 규정되느냐 하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신도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여건 하에 신을 선택하겠다.’라는 전제하에서 여호와도 예수도 성령도 삼위일체도 다 섬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예수가 다른 예수요 그 성령이 다른 성령이요 그 복음이 다른 복음이 되고 그 여호와 하나님은 다른 여호와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그런 예수를 믿고 그런 성령을 믿었으니까 ‘하나님, 저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최선을 다 했습니다. 나도 말씀 지킬 수 있습니다.’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네가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그것이 병이 들어서 도대체 지옥이 뭔지 죄가 뭔지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구원이 뭔지, 율법이 뭔지, 천국이 뭔지, 약속이 뭔지, 언약이 뭔지, 예수님이 누군지 아무것도 몰라요. 이미 다른 신이 장착되었고 다른 신이 나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문자로 이야기하면 그 문자를 가지고 다시 내가 죄지었던 그 나로 인하여 새롭게 규정된 엉터리 같은 신학으로 완전 무장되어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하는 것은,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 소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죄밖에 모르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느냐,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데려갑니다. 게헨나, 지옥으로 데려가지요. 지옥가게 되면 못 빠져나옵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앞장서서 우리를 지옥으로 데려가셔서 견학시켜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우리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신의 십자가, 아버지께 저주받은 현장으로 우리의 손을 잡고 성령으로 인도해서 ‘너 때문에 아버지께 내가 이렇게 저주받았다.’는 현장으로 데려갑니다.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주님께서는 음부에 내려가셨습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갈 필요도 없는 분인데.

우리를 데려가시는데 먼저 사흘 만에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어요. 사도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죽음 가운데서 살아난 게 아니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 들 가운데서 자신이 택하고 원하는 백성을 부활시킬 수 있는 영, 성령을 받아서 우리에게 ‘너는 살았어.’라는 증거물로 주십니다.

성령,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영이 우리 안에 있으면 죽을 우리 몸도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로마서 8장 10절, 11절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말씀대로 성취가 되는 거예요.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끝은 바로 에베소서 1장 4절에 ‘하나님이 창세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사 흠이 없’도록 하는데 ‘예수님의 피로 흠이 없게 한다.’는 원래 있던 그 시나리오, 원래 있던 그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히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나 자신의 행동함과 안함’ 그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약속, 성경말씀의 복음의 약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복음의 영광이 남은 생애동안 우리 몸에서 발산되도록, 향기가 되어서 퍼져 나오도록 그렇게 조치하시는 겁니다. 그것마저 주께서 우리에게 일관성 있게 해나가는 작업입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지옥이라는 것은 우리와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잘못된 사고방식, 잘못된 신관에 의해서 자기 아들을 바쳤던 그 죄지은 현장에 주님도 합세하고 죄지은 우리도 들어가서, 우리가 살려고 이방신을 섬겼던 우리를 살리기는커녕 도리어 우리를 죽임으로 말미암아 그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얼마나 엄중하고 빈틈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런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지는 것이 바로 창세전의 준비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행함과 행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지만 다 이것이 부질없는 짓이고 정작 우리가 의지하고 믿을 것은 우리 목숨이 달아난다 할지라도 일관성 있는 하나님의 약속뿐인 줄 압니다. 그 약속을 우리의 희망과 사랑으로 삼고 죽을 때까지 외부에 증거 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