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5. 26. 18:39

선지자에 대한 공격 (예레미야 18:18-20)

선지자에 대한 공격

2010년 5월 2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8:18-20

(렘 18:18, 개정)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책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하지 말자 하나이다』
(렘 18:19, 개정) 『여호와여 나를 돌아보사 나와 더불어 다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 보옵소서』
(렘 18:20, 개정) 『어찌 악으로 선을 갚으리이까마는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구덩이를 팠나이다 내가 주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려 하고 주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유익한 말을 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선지자가 파견될 때에는 기존의 세계관은 이미 시효가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바꾸기 위함으로 선지자를 보내지만 지상의 인간들은 자신들의 세계관을 바꿀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현재 자신들이 구축한 인생관으로도 충분하다고 보고 있는 겁니다. 만약에 선지자가 자신들에게 주어진다면 이는 기존의 지식에다 더 보태기 위해 주신 줄로 압니다.

전면 교체라는 생각은 감히 하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상의 인간들은 새로 추가된 하나님의 뜻과 기존에 자신들이 붙잡고 있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는지 여부를 따져보는 겁니다. 그런데 안맞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마찰과 충돌을 일으킬 요소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처단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생각은 이러합니다. 현재 자기들 동네에서 제사장이나 지혜자나 선지자로서도 충분하다는 겁니다. 새삼스럽게 새로운 선지자가 추가적으로 더 올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새로 추가되는 선지자는 기존 인간들이 내세우는 하나님의 뜻이 실은 전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고발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보내신다는 겁니다.

물론 이 사실조차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전달했습니다. 하지만 이 선지자의 말씀을 전면 거부하고 나섭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선지자의 말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옳다고 여긴 모든 사상을 자진해서 죄악된 것이라고 고백해야 함을 전제로 하는 결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들의 공격에 대해서 참된 선지자인 예레미야는 특별히 자기 방어를 위한 대책이 없습니다. 당하면 그냥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자신을 지켜줄 위인들이 주변에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참된 선지자를 이토록 방치하시는 걸까요? 마태복음 11:7-9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세상을 보내시는 형식이 ‘본다’에 중점을 두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즉 선지자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엄연히 보이는 양상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선지자를 볼 때에, 기존에 자신들이 보아오고 들어오고 알고 있는 바와 얼마든지 견주어 볼 수 있는 대상체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즉 “저 인간을 이단으로 간주하여 처단해? 아니면 말어?”라는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료거리가 되는 겁니다. 처분의 대상으로 충분히 검토할 거리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선지자 본인은 어떠합니까? 자신은 남들로부터 ‘보이는 대상’으로 존재하지만 막상 선지자는 마음의 결정을 나름대로 내릴 그 어떤 재료거리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을 둘러싸고 유대인들이 다음과 같이 비난합니다.  “누구냐, 너를 선지자로 보낸 작자가?”라고 할 때에 세례요한은 기껏 하는 말이, “내 뒤에 오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같은 경우라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든 선지자 입장에서 자신의 신분을 확실하게 증명해줄 그 어떤 눈에 보이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말씀이 그에게 임한 것 뿐입니다. 그러니까 남들 보기에 선지자는 그냥 혼자말로 중얼거릴 뿐입니다. 과대망상가로 취급받기 적당합니다. 즉 자기 자신의 발언 이외는 자신을 도와줄 그 어떤 세상적인 인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상당히 불쌍하다고 여기십니까? 실은 오늘날 참된 교회가 이런 형편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7교회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는 이 일곱교회마다 저마다의 도시에 저들을 위하여 이동되지 않는 눈에 보이는 교회를 세웠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보시기에는 교회라고 생각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얼마든지, 혹은 언제든지 이동되고 제거될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동 가능한 교회와 이동 불가능한 교회는 인간들의 눈에 보이는 형식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사람들은 자기네들 동네에서 자기들이 구원을 위하여 자신들이 세웠다고 간주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뜻만이 확고하다면 이동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이 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문제가 있으면 그 자리를 고수하면서, 달리 말해서 그 현지민들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교회란 사람들, 혹은 사람들의 집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참된 교회란 기존 사람들의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면 얼마든지 옮길 필요없는 합당한 교회라고 장담할 만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오산이었습니다. 교회됨이란 사람들의 결심이나 마음가짐에 의해서 확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으로 결정되어지는 겁니다. 7교회의 편지마다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기는 자’는 후렴입니다. 도대체 누구와 싸운다는 말입니까? 뭘 이겨야 된다는 말입니까? 쳐들어오는 적들도 없는데 누구를 상대로 한단 말입니까?

교회는 교회를 이겨야 합니다. 교회의 적은 교회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회의 적은 인간들의 눈에 보이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이동이 있을 수 없는 교회상을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의 자유로움이 교회가 아니라 자신들이 주인공되어 있는 그런 교회상을 고집한 겁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자신을 파견한 교회가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교회란 예수님에 의해서 파견된 교회입니다. 이 두 교회의 차이점은 교회에 대한 집착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지신 뜻과 관련된 말씀 전달에 있습니다. 즉 보이지 않는 말씀 자체를 위한 교회가 참된 교회이며,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교회는 예수님이 파견한 교회가 아니라 인간들 자신들이 파견한 교회일 뿐입니다. 이런 교회는 그 지역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소위 촛대가 옮겨지는 겁니다. 비록 여전히 교회가 운영되어 교인들이 움집하더라도 말입니다.

이처럼 오늘날 교회는 참 선지자적 기능을 하게 됩니다. 오로지 말씀만이 전달해야 하기에 어제의 교회가 자동적으로 오늘의 교회가 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발생적으로 살아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매일같이 말씀 때문에 존재하고 발생하고 살아있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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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강-렘18장18-20(선지자에 대한 공격)-jer100526

2010-05-29 11:34:16 이름 : 오용익


064강-렘18장18-20(선지자에 대한 공격)-jer1005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8장 18절부터 20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80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18:18-20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모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아무 말에도 주의치 말자 하나이다 여호와여 나를 돌아보사 나로 더불어 다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옵소서 어찌 악으로 선을 갚으리이까마는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구덩이를 팠나이다 내가 주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려 하고 주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선한 말씀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냈거든요. 선지자를 보내니까 그들이 필요 없다고 나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 가운데 누가 있느냐, 제사장이 있어서 율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걸로 충분해요. 그 다음에 지혜로운 자가 있어서 모략을 계속해서 백성들에게 들춰내 주었습니다. 아쉬운 것이 없어요. 그 다음에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했어요. 계속해서 설교가 나오고 그야말로 그들 말로 복음이 계속 나오고 있으니까 ‘도대체 추가적으로 이 유대백성에게 선지자를 보내야 되는 하등의 이유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예레미야는 제사장도 아닐뿐더러 지혜자도 아닐뿐더러 선지자도 아니라는 겁니다. ‘뭐야? 너, 네가 뭐야? 왜 왔는데? 왜 외치는데?’ 예레미야의 말이 필요치 않다는 것은 기존에 구축되어 있는 세계관과 예례미야가 추가적으로 이야기한 것과 서로 맞지를 않아요. 튕겨나가게 되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예례미야가 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이여, 제 목소리를 좀 들어주소서.’라고 하면서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치려고 구덩이를 팠다.’고 하는데 ‘그들이 갖고 있던 선지자, 제사장, 율법이 소용없고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된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라고 하는 겁니다.

현재 갖고 있는 지혜자, 선지자, 제사장 그 전체무더기하고 지금 하나님이 새로 주신 예레미야 선지자하고 비교해 볼 때 한쪽이 튕겨나가고 튕겨나간 그 빈자리를 예례미야가 차지해야 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원칙 하나 발견합니다. 선지자가 하나 추가될 때는 기존의 모든 제사장이나 선지자의 시효가 이제 끝났다는 겁니다.

마치 무엇으로 들리냐,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게 되면 그 위대한 세례요한도 이제 자기 갈 길을 가야 합니다. 릴레이 할 때 하는 바통 터치라는 것이 있지요. ‘한 바퀴 도느라고 수고했어. 이제는 내가 돌게.’ 이런 식으로 바통 터치를 하게 되면 세례요한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은 세례요한에게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나는 쇠해야 되고 내 뒤에 오시는 분은 흥해야 된다.’는 바통터치가 세례요한과 예수님만 터치되면 안돼요. 그것이 그 밑에 있는 백성들에게 이전돼야 되는 겁니다. 이것은 세례요한을 붙잡고 있던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로 이전할 수 있는 세계관을 세례요한 당시에서도 감을 잡아야 된다는 그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왜 예례미야 선지자가 등장해야 하는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11장 8절, 9절에 보면 세례요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왔더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어려운데요, 지금 그 당시 백성들, 세례요한과 예레미야 당시의 백성들은 뭘 보고 있느냐, 예례미야 당시에는 예례미야를 보고 있고 세례요한 당시에는 세례요한을 보고 있습니다. 뭔가 보입니다. 보이니까 기존의 제사장과 선지자들과 비교가 되지요. 그런데 하나 물어볼게요. 그러면 예례미야는 뭘 보고 있습니까? 아무 볼게 없어요.

예례미야는 사람들에게 지금 보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두 패를 보고 ‘아, 예례미야를 추가적으로 보낼 필요가 없는데 더 이상 우리는 선지자 필요 없어. 저리 꺼져.’하는 것을 보면서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집니다. 세례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나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선지자의 특징은 사람들에게 비교해 보라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선지자 본인들은 아무것도 볼게 없는 거예요. 볼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선지자로서는 인간의 능력 밖의 능력이 아니면 이 선지자 노릇을 못하게 되어 있어요. 비교 대상이 있으면 파악이 되는데 선지자는 그냥 마냥 당하기만 하는 거예요. 만약 선지자가 기도를 한다든지 뭘 하게 되면 주위에서 하는 말이 ‘혼자 말로 중얼중얼 하는구먼.’ 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목사님, 선지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네요.’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러나 신약시절에 오면 교회가 선지자노릇을 해야 됩니다. 쉽게 말해서 세상 사람들은 비교할 것이 있지만 오늘날 신약시대의 교회는 아무 비교할 것이 없고 그냥 혼자말로 중얼중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되먹임 해야 될 난처한 지경에 빠져요.

참 외로운 지경에 빠지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 시대에 선지자 노릇을 한다는 것은 그 전의 선지자들, 세례요한이나 예레미야가 자기 시대에 얼마나 난처한 지경에 빠졌는가를……, 이것은 설득을 해도 소용이 없지요. ‘예례미야 당신은 뭘 보고 그렇게 중얼거려?’ 하면 뭘 내놓을 것이 없어요. 그들에게는 선지자가 보이지만 선지자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안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동쪽 25킬로미터 지점에 계셔.’라는 식으로 지시할 내용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맹탕이에요. 답답한 거예요. 세례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이, 세례요한, 당신은 누구야?’ 하니까 내놓을 것이 없어요. 그냥 ‘내 뒤에 오시는 분, 내 뒤에 오시는 분.’ ‘내 뒤에 오시는 분? 누구 말인데? 네 뒤에 누가 있는데?’ 없어요. 누가 툭 치면 그냥 넘어질 뿐이에요. 여자애가 장난쳐서 목 베임을 당할 것 같으면 그냥 당할 뿐이에요. 주님이 안도와줍니다. 세례요한의 목은 그냥 날라 가야 돼요.

참, 선지자가 불쌍하고 안타깝지요. 허전해 보이지요. 그런데 그 허전하고 불쌍한 팔자를 오늘날 똑같이 신약시대의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겁니다. 세상은 자꾸 교회보고 보이라고 합니다. ‘어이, 너희 교회 다녀서 병 몇 명 나았느냐, 너희 교회 3년 만에 몇 명 부흥되었는데?’ 자꾸 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외에 보여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허접스럽습니다. 아주 허접스러워요. 주위에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참, 착각하고 있네. 혼자 상상하고 있네.’ 다음 주 목요일(2010, 6, 3)에 하나교회에서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를 하게 될 것인데, 일곱 교회를 살펴보면서 일곱 교회의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한교회당 꼭 하나씩 들어가는 것이 뭐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을지어다.” 해놓고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하늘나라 생명나무 과실을 먹게 하리라.”(계 2:7) 그 다음에 “이기는 자에게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한다.”(계 2:11) 그 다음에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힌 돌을 줄” 것이다. 그 다음에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이렇게 ‘이기는 자는’ 이것이 한 교회당 하나씩 붙어서 일곱 번이나 ‘이기는 자에게는’ 라고 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제가 이걸 보면서 교회는 그냥 다니면 안 됩니까? 이기기는 뭘 이기느냐 말이지요. ‘이기는’이라는 하는 이 일곱 교회의 특징이 적이 없어요. 외부와의 어떤 싸움이 없어요. 내부문제입니다. 감이 잘 안 옵니까?

이긴다고 할 때는 ‘야, 게 섰거라.’ 하고 달려드는 것이 있어야 이기는 것이 있어요. 싸울 때 마귀가 오든지 유령이 오든지 뭔가 나타나야 칼싸움도 하고 몽둥이를 휘두르든지 하지요. 야구를 하든지 축구를 하든지 뭔가 상대가 있어야 이기는 게 있는데 일곱 교회한테 ‘이기는’ 이라고 해놓고는 내용을 보면 싸울 상대가 없습니다. 아주 신기해요.

이것을 파악하려면 바로 예례미야나 세례요한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보지도 않으면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남들 보기에 허접스러운 외톨박이 신세와 그 자태를 가지고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겁니다. 적이 없는데 이긴다는 거예요. 도대체 적이 없는데 왜 이긴다고 하느냐를 살펴보니까 앞에 붙는 것이 있어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는 이야기를 들어봐라.’고 했어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라.’고 해놓고는 ‘이기는 자는’이라고 나온다고요. 그러면 성령이 뭐냐, 성령 앞에서 이미 교회는 이길 수 없는 하나님의 적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교회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이 세사에서 그 자체로서 싸움하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이미 패배되어 있는 겁니다.

그 패배의 자국을 죽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디서 패배했는가? 교회는 바로 보이는 것을 위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포기해버린 그런 교회들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뭐냐,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는 받았는데 이게 영 히마리가 없어요. 실적으로 눈에 띄지를 않는 거예요. ‘하나님, 언제 우리에게 말씀 줬습니까? 말씀 줬습니까?’ 세 번 네 번 이야기해도 아무 소식이 없어요. ‘아, 말씀은 그냥 잔소리구나. 이거 뭐 말씀은 있으나 마나구나.’ 하고 교회가 말씀을 버리니까 그 다음부터 물밀 듯 밀려오는 것이 뭐냐?

교회라는 것이 뭐냐, 사람 아닙니까? 그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 뭐가 오느냐, 세상과 교회가 차이남이 없이 울타리가 무너져 버렸어요. 울타리라는 것이 성립이 안 돼는 거예요. 세상인지 교회인지 분간이 안돼요. 와르르 세상적인 것이 다 밀려오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게 부흥이 되니까. 말씀을 몰라도 대 환영이고 예수님을 안 믿어도 세례 줘버리고, 하나님 말씀에 신경 안 써도 집사, 권사, 장로, 목사 다 되어버리고, 교회의 행사나 그 모든 것이 말씀의 근거는 전혀 찾을 것이 없어요.

말씀의 근거가 되게 되면 부담된다고 해서 말씀의 근거를 다 치워버리고 ‘어떻게 하면 사람 하나 더 확보할 수 있느냐.’ 보험회사에서 한 구좌 더 챙기듯이 어떻게 하면 사람 하나 더 붙잡아서 내 사람 만들 수 있느냐, 거기에 울타리가 없이 와르르 몰려오니까 이것은 교회는 싸우는 것이 아니고 교회는 그냥 모여드는 사람들을 붙잡아두는 장소가 되었어요.

그런데 여기에 누가 등장했는가, 성령이 등장한 거예요. 성령이 뒤에 무엇을 몰고 오는가 하면 말씀을 몰고 옵니다. 성령이 등장하니까 말씀을 몰고 와서 ‘예수 그리스도가 파견한 교회임을 너희가 잊어버렸도다.’ 교회가 교회 자체적으로 묶어서 단합대회하고 공동체하면 교회되는 줄 알았어요. 더 쉽게 말해서 교회는 파견된 것이 아니고 자체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그런 단체로 변해가기 시작한 겁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교회는 교회 자체로서 존립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고 톡 톡 끊어져버린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서 교회를 위한 교회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말씀과 속성과 본질을 보여주는 교회일 경우에만 그게 교회라는 겁니다.

약간 상세하게 말씀드릴까요? 촛대가 일곱 개가 있는데 일곱 촛대가 하나로 묶여 있다는 거예요. 이게 성전에 있는 촛대의 특징입니다. 촛대가 하나하나 켜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바깥세상 교회는 교회가 하나하나 서 있습니다. 밑에 있는 수정교회하고 우리교회하고 파이프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전부 다 교회가 하나하나 따로따로 되어 있다고 보는 거예요.

저쪽 교회가 부흥되나 우리교회가 부흥되나 지금 시합 나서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이겼다느니 졌다느니 판정을 내리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으로부터 파견된 교회 같으면 ‘교회가 일곱 개 되더라도 실은 다 하나에서 동일한 속성이 번진 것이라는 것을 알고 다시 그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모을 수 있는 그러한 싸움을 너희가 싸울 수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것은 교회가 교회를 상대로 싸워서 이기면 교회되고, 이기지 못하면 촛대를 옮긴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촛대를 옮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기존의 일곱 교회 공통점, 타락된 교회의 특징이 뭐냐, 이 자리에서 교회가 있지 교회가 유동하는, 흘러가는 교회라고 하는 것은 생각도 못한 거예요.

내가 사는 이 마을에 있는 이 마을에 있는 교회, 우리가 세운 교회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주님의 몸으로 이동해버리면 ‘내가 이 교회 세웠다.’ 하는 그 자체가 거짓말로 들통 나는 겁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교회를 세우려고 하는가? 그것은 바로 교회가 보이지 않는 말씀에 의해서 존립해야 될 것을 보이는 교회로서 존립을 시도했기에 그러합니다.

안 보이는 주님을 보여야 되는데 남들에게 다 보이는 그런 교회이기를 원했던 겁니다. 100군데 교회가 있다면 101군데 교회가 되려고 애를 쓴 거예요. ‘기존의 100군데의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라고 할 때만 그게 진정한 교회인데 ‘좀 끼어듭시다. 교회가 지금 100군데 있어요? 그러면 101번째 교회로 넣어주세요.’라는 식의 교회이고 싶어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대중들이 그 당시 사람들이 100군데의 교회에서 101군데의 교회 될 때 비로소 그것을 교회라고 추가하는 것을 용납을 해줘요. 그런데 예레미야는 끼어들어가니까 넣어주지를 않는 겁니다. 색깔이 달라요. ‘네가 말하는 것은 기존의 선지자나 제사장과 지혜자 하고는 사고가 안 맞는다는 겁니다. 틀려먹었다는 거예요.

오늘 제가 병원에 심방을 다녀왔는데 거기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어요. 심방하는 중에 그 병자를 간호하시는 분이 제게 이런 질문을 했어요. ‘목사님, 기도할 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아주 진지하게 물어요. 그런 질문 받으면 감격합니다. 그 답변을 하는데 거의 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평소에 네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헛방이었다.’는 것을 고발하는 차원에서 일부러 하나님께서 네 이름대신 예수님의 이름을 집어넣은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행동은 내 이름을 위해서 움직이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집어넣었다는 말은 더 깊이 들어가면 ‘평소에 내가 납득이 되는 하나님이 있었는데 그 하나님에 비해서 진짜 하나님은 우리가 추적하면 찾아지는 그런 하나님이 애초에 아니올시다.’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 이름으로 시작하는 하나님을 철폐시키고 예수 이름을 앞장세우는 그 이름으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그분이 “좀 이해가 됩니다.” 했는데 “잠깐, 더 중요한 것이 남아 있습니다.” 했어요. 제가 지난 오후 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한 적 있지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원료를 다 집어넣어서 천당 가는 제품을 만들려고 하는데 그 제품이 하나님에게서 보이콧 당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안 받는 겁니다. 원료는 제대로 된 것을 넣었다 싶은데 영 천국에 못가는 제품이 나왔을 때 하자가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지요.

그것은 우리가 출발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은 뭐냐, 우리한테 포착이 안 되는 식으로 한다면 우리가 예상 못할 자리, 그것이 감추어진 자리인데요, 우리가 예상 못할 어떤 사건들을 일으키면서 우리가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거예요. 추가적으로 더 말씀드리면 나는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고 예상했는데 내가 예상한 그 범위 바깥에서 자꾸 사건이 터져요.

그러면 나는 비교합니다. ‘어, 이것은 예상 못한 것인데?’ 하고 예상 못한 사건이 터지니까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범주는 무용지물이에요. 거기서부터 교체가 일어나야 돼요. 내가 알고 있던 예수 이름마저 새롭게 주님이 일으키는 그 사건 앞에서는 이것도 구닥다리가 되고 이것도 포기해야 됩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그분이 알아들었어요. 역시 머리가 좋아요. ‘그러면 매일같이 갈아치워야 되겠네요.’ 바로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겁니다. 매일 같이 갈아치우는 거예요. 왜? 동행해야 되기 때문에. 어제의 주님을 오늘까지 써먹을 수가 없어요. 지난해의 주님을 올해까지 계속 우려먹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곱 교회의 특징이란 5월 20일 날 일곱 교회가 일곱 교회가 아니에요. 5월 25일자 일곱 교회가 또 주어지는 겁니다. 어떻게? 성령께서 말씀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기존에 ‘하나님, 이만하면 되었습니다.’라는 것도 결국은 내 이름의 영광이니까 주의 이름으로 바뀌어져야 돼요.

그럴 경우에는 내가 포착하고 내가 장악하는 주님이 아니라 항상 주님에 의해서 장악당할 때 우리는 매일같이 파견 근무하는, 매일같이 내가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는 교회가 아니고 주께서 그때그때 새롭게 이 현장에 교회로서 역할 하도록 사명감을 갖도록 파견근무를 시키는 겁니다.

그게 발생론적 교회론 이지요. 없는데 생기더라는 겁니다. 몇 년 전인가 발생론적 성령론을 이야기했더니 그 현장에서 대번에 반박이 들어왔어요. 뭐라고 반박이 들어왔느냐 하면, ‘발생론적 성령론 같으면 교회가 없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라는 반박이 들어왔어요. ‘교회가 발생한다면 지금까지 교회가 무효가 될 수 있겠네. 지금 안 세워주면 지금 교회 없는 거네.’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주님이 계시다면 교회는 매일같이 세워진다.’ 내일 되면 교회가 없어질 수 있다는 불신앙 때문에 지금의 교회를 내일까지 이어보려고 애를 쓰는데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것은 내 자리에 영원히 촛대가 옮겨지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는 내가 세운, ‘내가 세웠기에 이 촛대는 옮기면 안 돼.’라고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리는 나의 소유의 교회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주시면 그 말씀은 과거의 나를 갈아치우는 새로운 교회라고 등장할 때 그 때 남들 보기에는 ‘너는 선지자도 아니고 너는 제사장도 아니고 너는 율법도 모르는 인간이다. 왜 추가적으로 너 예례미야를 우리에게 파견했는지 납득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18절에서 뭐라고 하느냐하면,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아무 말에도 주의치 말자.” 합니다.

18절 앞부분에 보면 “우리가 꾀를 내어 예례미야를 치자.”라는 것이 있거든요. 설교 초반의 것을 다시 한 번 요약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 거짓선지자와 백성들은 예례미야가 눈에 보인다는 겁니다. 보인다는 것은 ‘그 사람을 어떻게 처리할까.’ 꾀를 낼 수 있는 대상이 돼요.

‘저걸 어떻게 칠까, 우리가 단체로 등 돌릴까? 아니면 아예 잡아서 죽여 버릴까?’ 이렇게 처리 가능한 것이 돼요. 그런데 예례미야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자기가 자기한테 어떤 조치를 취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말씀으로 인하여 자기가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 저 안하겠습니다.’ 이럴 수가 없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어이, 예례미야! 내일 오후 2시에 너 잡아 죽이러 간다. 알아서 도망치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라.’라고 하면 예례미야가 그 소리를 듣고는 ‘뭐라? 2시에 잡으러 온다고?’ 그런데 예례미야는 할 수 없는 것이, 자기가 자기를 다룰 수 있으면 ‘하나님, 미안합니다. 한 이틀만 숨겠습니다.’ 이것이 되겠는데 사람들은 나를 다룰 수 있어도 주의 말씀이 임한 이상은 자기가 주의 말씀을 걷어치울 수가 없는 거예요.

탁탁 털어내면서 ‘주님, 내가 못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럴 수가 없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쟁반에 목이 잘려도 세례요한은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오늘날 진짜 교회의 형편입니다. 교회가 교회를 어떻게 다룰 수가 없어요. 왜? 성령께서 말씀을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면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이기는 자는.’ ‘너 자신의 교회인 것으로부터 벗어나라.’ 그 말입니다. ‘이것은 네가 만들어낸 교회가 아니고 주께서 파견한 교회라는 그 점에 대해서 너는 패배해서는 안 된다.’ 하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사명감이라고 보고 싶어요. 사명감.

제가 십자가마을에 ‘자아란 무엇인가’라는 글을 하나 썼는데 현대인들은 종잡을 수 없어요. 이 정보사회에서 출세를 하려 하니까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될지 몰라요. 온 몸이 분열된 자아 찢어진 자아예요. 유리판 떨어뜨리면 다 깨지잖아요. 조각조각 깨진 이 분열된 자아를 세상은 깨뜨리고 자기는 조립하려 드니까 본드가 모자라요.

한 두 세 개는 조립했는데 나머지 흩어진 이 몇 개는 조립이 안돼요. 가족이 한 다섯 명이 있으면 첫째는 교회 나오는데 둘째는 안 나오고 셋째는 나왔다가 안 나왔다 하고, 그걸 보고 가장으로서는 마음이 찢어집니다. 도대체 이 사회가 어찌되려고 뭐하나가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없어요. 내 맘대로 안 되다 보니까 자아가 산산조각 다 나고 있는 겁니다.

목사는 목사대로 이 집사 붙들면 저 집사 삐지고 이 장로 붙들면 저 장로 삐지고, 목회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남는 것은 자살이죠.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힘들어서 못살겠습니다.’ 제가 그 글을 쓰면서 마지막에 이렇게 해 놓았지요. ‘네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너를 택하여 세웠나니 열매를 맺게 하신다.’(요 15:16)

어떤 열매? ‘너는 파견된 것이다. 네가 만든 것이 아니고 파견된 교회다.’라는 것을 증거 하는 것 자체가 ‘우리 배후에 나도 거역할 수 없는 주님이 엄연히 계시다.’라는 증거물이 하나의 열매로서 얼마나 맺어지느냐 하는 겁니다. ‘내 인생은 내 자아를 조립하기 위한 인생이 아니고 분열이 되든지 유리창처럼 깨지든지 뭘 하든지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신경 쓸 필요 없고 배후에 주님이 계시고 주님의 말씀대로 삽니다.’ 하는 것을 우리 자신의 형편을 보지 말고 증거 해서 세상과 섞이지 아니하는 부각된, 독특하고 특징 있는 다른 차원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성도로서 살아가야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선지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잘도 비교하고 잘도 견주면서 너 아니거든, 너 가짜거든, 조롱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우리 편은 한 명도 없습니다. 외롭습니다. 따돌림 받았습니다. 하지만 말씀이 사실이고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파견된 사람으로서 당당하게 외칠 것은 외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