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5. 21. 11:44

허무한 광경 (예레미야 18:13-17)

허무한 광경

2010년 5월 19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8:13-17

(렘 18:13, 개정)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누가 이러한 일을 들었는지 여러 나라 가운데 물어보라 처녀 이스라엘이 심히 가증한 일을 행하였도다』
(렘 18:14, 개정)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바위를 떠나겠으며 먼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
(렘 18:15, 개정) 『무릇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하거니와 이러한 것들은 그들로 그들의 길 곧 그 옛길에서 넘어지게 하며 곁길 곧 닦지 아니한 길로 행하게 하여』
(렘 18:16, 개정) 『그들의 땅으로 두려움과 영원한 웃음 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리로 지나는 자마다 놀라서 그의 머리를 흔들리라』
(렘 18:17, 개정) 『내가 그들을 그들의 원수 앞에서 흩어 버리기를 동풍으로 함 같이 할 것이며 그들의 재난의 날에는 내가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


선지자가 있다는 것은 유대 나라가 참으로 복받은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아예 선지자가 없습니다. 선지자가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이요, 선지자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내팽개친 버림받은 나라라는 겁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한통의 편지를 하나님께 받았다고 합시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하나님에게 편지를 다 받아보고 말입니다. 내용이 어쨌든 하나님이 계신다는 그 사실 만으로 존재의 이유가 생겨버린 것입니다. 즉 우리의 생이 허무하지 않을 수 있는 겁니다. 예레미야로부터 하나님의 편지를 접수하게 되면 이는 곧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고, 이는 또한 우리 자신이 이 21세기에 예레미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방 선거를 앞두고서 예레미야로 사는 것이요 월드컵을 한 달 앞두고 예레미야로서 이 시대를 사는 겁니다. TV드라마를 보면서도 예레미야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예레미야를 보내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합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왜 내가 지정해 놓은 하나님의 백성의 기준을 맞추지 않느냐?”입니다.

우리가 교회 올 때는 필히 기준을 알려고 와야 합니다. “목사님, 천국 가려면 어떤 기준이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기준을 묻는 이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자기 편한 대로 살테니 간섭하지 말라는 투입니다. 하지만 교회에 들락거리는 것은 그저 부동산 건물 안에 들락거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천국에서 요구하는 기준과 표준이 따로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 기준에 맞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목사의 심정은 이러합니다. 마치 저녁밥을 지어놓고서는 앞치마 두르고 골목에서 놀고 있는 자녀들에게 “애들아, 저녁밥 다 됐다. 손 씻고 저녁 먹으렴”하고 외치는 엄마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골목에서 놀기 바빠서 저녁 먹을 생각을 하지를 않습니다. “좀 더 놀고요”라고 하면서 장난치고 집 안으로 들어올 기색이 없습니다. 자기네들 끼리 뛰고, 장난치고, 웃고 즐기고 자빠져서 울고 하면서도 그 집 밖에서 노는 생활이 그렇게 즐거운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교회 모여서 놀고 싶어하기는 하지만 천국에 들어갈 기색을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천국에 들어가려면 천국에서 요구하는 기준에 맞추어야 합니다. 그 기준이 바로 ‘속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의 만남에서 그냥 만나주시는 것이 아니라 속죄를 생산하는 장치를 통해서 만나십니다. 속죄받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가 없습니다. 제사를 통해 제물이 죽음에 넘겨지지 아니하면 그 누구도 죄를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흔히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인간적으로 봐서도 정이 많고 사랑이 많으시기 때문에 그냥 말로서도 “애, 내가 너를 용서해주마”라고 하셔도 얼마든지 속죄가 되고 용서가 될 것 같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용서하시는 구조는 오로지 십자가 사건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보내신 하늘의 아드님을 우리 앞에서 처참하게 망가지고 피투성이로 만들어놓으시고 그 근거 위에서 ‘속죄’를 선언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그 어느 누구도 저주스러운 예수님의 죽음에 함께 참여하지 않고서는 속죄가 되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하늘에서 지시한 기준입니다. 이 기준을 하나님은 완화하거나 변개시킬 마음이 추호도 없으십니다. 골목에 놀고 있는 아이들은 자기네들 나름대로의 기준을 따로 있는데 그 기준은 바로 바깥 골목에서 성공했다는 소리 들을 수 있는 기준을 두겹, 세겹 자꾸만 자신을 휘돌아감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육’이라는 겁니다. 육적인 인간은 수치를 드러낼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이방인들로부터 수치를 당하는 민족으로 만들고서는 결국 다 흩어지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육적인 인간의 치부를 하나님을 공개하시겠답니다. 골목에서 노는 아들들은 계속해서 결국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일은 벌써부터 실시해 왔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영과 육은 어떻게 다른가요? 육은 영의 일을 기피합니다. 도망칩니다. 근처 오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영 앞에서 육은 죽은 자로서 죽은 자의 면면을 다 공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영 앞에서 육은 발작을 합니다. 영에 대해서 거부 반응을 나타냅니다. 저항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멸망하려 왔지요”라고 자신의 내심을 유감없이 드러냅니다.

마태복음 8:29에서, 귀신이 가득 들어있는 왠 청년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한 말입니다. 이 말은 모든 악귀들인 사람들의 공통적인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만 하면 그들은 자꾸만 귀를 돌리고 얼굴을 돌립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 만나서 망하기 싫어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망하지 아니하면 예수님과 더불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6:3-5에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는 예수님과 더불어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유일하게 천국가는 길입니다. 그 안에 들어와서 비로소 ‘속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속죄하기 위해서는 골목, 즉 지옥에서 두껍게 우리 자신을 둘러싼 모든 기준들이 하나님 앞에서 저주를 받게 하는 기준인 것을 수용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죽어 마땅한 것입니다. 자살하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참여되어서 늘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생활을 하는 것이 속죄 안에 들어있는 자의 특징입니다. 망해도 상관없는 존재가 우리 자신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용서란 곧 우리 자신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데려가서 죽여버리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양보없는 하나님의 기준을 알아서 우리 기준을 포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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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강-렘18장13-17(허무한 광경)-jer100519

2010-05-20 21:50:03   녹취 : 오용익  
 
 
063강-렘18장13-17(허무한 광경)-jer1005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8장 13절부터 1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80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18:13-17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누가 이러한 일을 들었는가 열방 중에 물어라 처녀 이스라엘이 심히 가증한 일을 행하였도다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반석을 떠나겠으며 원방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 대저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하거니와 이러한 것들은 그들로 그 길 곧 그 옛길에서 넘어지게 하며 곁길 곧 닦지 아니한 길로 행케 하여 그들의 땅으로 놀랍고 영영한 치소가 되게 하리니 그리로 지나는 자마다 놀라서 그 머리를 흔들리라 내가 그들을 그 원수 앞에서 흩기를 동풍으로 함같이 할 것이며 그들의 재난의 날에는 내가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


방금 읽었던 이 내용이 우리에게 등기편지로 배달 왔다면 우리는 그 편지 내용을 읽고 겉봉을 살펴 볼 겁니다. ‘누구야? 누가 나에게 이따위 글을 보냈어? 이 따위 편지를 보낸 자가 대체 누구야?’ 아마 모독감을 느끼게 될 겁니다. 그런데 ‘나 여호와로 말미암아’ 이렇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편지를 줬다면 내용과는 상관없이 여러분은 감격해야 됩니다. ‘아,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졌을 때 그 당시 유대백성들은 그 내용이전에 하나님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활동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그들에게 행운이고 복인 줄 알아야 됩니다. 그 당시 예레미야가 아니면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 주겠습니까? 하늘은 우리한테서 멀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굉장히 거리가 먼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실지 아무도 모른다면 그것은 살아도 산 게 아니지요. 앞날이 캄캄할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사랑하셔서 예레미야를 보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게 하시니 얼마나 푸근함을 느끼겠습니까? ‘아,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았구나.’ 그런데 성경을 봐도 하나님이 우리를 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자꾸 버리고 있어요. 성경말씀 봉독하면 자꾸 귀를 돌리고 얼굴을 돌리고 안 들으려고 하고 말씀이 안 들리는 곳으로 도망치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우주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아무리 우리가 외면하고 거부해도 결국 죽어서는 만납니다.

죽어서는 우리가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기 때문에 죽어서 만날 그분을 미리 당겨서 만나시면 안 되겠습니까? 미리 당겨서 만나서 여기서 이야기한 그대로 죽어서 그대로 이야기하시기 바랍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만나서 이야기할 때 제자들이 놀랐던 것은 모세가 자기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고 엘리야가 엘리야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고 우리 예수님께서 그들을 미리 보내셨다고 하는 그 점이 얼마나 그들에게 감격스러웠겠습니까?

그제야 철이 난다고 할까요? ‘아,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계신 것뿐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이 우리 곁에 왔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이 엄연히 살아계신다.’고 하는 것을 아는 그 감격, 그것이 유대나라와 다른 나라가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큰 축복을 받은 나라예요.

세종대왕이 한글을 발명해도 세종대왕은 선지자가 아닙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발명했어도 세종대왕 입에서 장차 오실 메시아 이야기, 하늘나라 이야기가 나온 것이 아니라 아무리 들어보고 기껏 해 봐야 땅의 이야기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뭘 듣느냐? 거룩한 하나님의 편지를 뜯어서 이렇게 읽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편지를 보기도 전에 그 편지 내용 그대로 그 역사가 만들어지고 진행된다는 것을 미리 우리는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예언으로서 받는 겁니다. 이제 이 말씀이 우리 책에만 박혀 있지 말고 우리 맘속까지 들어와서 우리 맘속의 예레미야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체가 누구냐? 우리 자체가 21세기 예레미야가 됩니다.

선거를 앞두고 있는 예레미야가 되고 월드컵을 앞두고 있는 예레미야, 재미난 연속극 앞에서도 우리는 예레미야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왜 다른 민족이 아니고 왜 예레미야로 하여금 유다민족에게만 이야기를 하느냐? 본문 내용은 사실 간단해요. 14절에 보면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반석을 떠나겠으며……” 하는데 레바논에 가면 수천미터높이의 산이 있어요. 그 산에 눈이 쌓이는데 그 눈이 녹게 되면 그냥 흘러내려가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지하수로 반석의 심층까지 내려갑니다.

내려가서 그것이 마르지 않아요. “……원방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는가.” 눈 내린 찬물이 그대로 돌 밑에 쌓여서 나중에 우물파면 그 찬물이 그대로 올라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야기한 겁니다. 예레미야가 이야기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자기 백성에게 이야기한 겁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높은 산에 눈이 내려서 그것이 찬물 되어서 그 산자체가 그 빙하의 물을 품고 있듯이 너희들도 하나의 산이라면 내가 내려준 말씀을 너희 맘속에 찬물처럼 늘 퍼내지는 관계에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런데 내 백성인 너희들은 왜 나를 잊었느냐?’고 하는 거자요.

15절에 ‘내가 내려준 찬물은 다 어디로 가버리고 왜 허무한 것에 눈길 주고 왜 허무한 곁길로 갔느냐.’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6절에 보면 “그들의 땅으로 놀랍게 영영한 치소가 되게 하”겠다고 해서 ‘치소(嗤笑)’라는 말이 나와요. 얼른 보면 ‘처소(處所)’처럼 보이는데 처소가 아니고 ‘치소’입니다.

‘치소’라는 것은 빈정댄다는 겁니다. 주변나라들이 한마디씩 다 하기를 ‘아이고, 꼴좋다. 여호와 하나님 믿다가 작살났구나.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을 너희들도 부인했으니까 마땅하지.’라고 오히려 ‘여호와 믿게 된 것을 부끄러운 것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을 부끄러운 일로 조롱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더 나아가서 17절에 “내가 그들을 원수 앞에서……”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원수 앞에서 그들이 다 허무하게 부끄럽게 흩어지고 전쟁에서 패배하고 포로 잡혀가고 웃음거리가 되어서 누가 쥐어박아도 쥐어 박히는 아주 천하고도 천한 내 민족, ‘하나님을 믿는 민족을 전 세계의 천한 민족으로 만들어 낼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이방나라한테 하는 것이 아니에요. 필리핀이나 저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의 유다나라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본격적으로 더 알아봅시다. 도대체 유다나라는 어떤 나라이어야 하기에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면 이렇게 처참하게 흩어져버리는 겁니까?

쉽게 말해서 하나님 믿는 백성은 이렇게 되어야 해, 라는 그 표준이 뭐고 기준이 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만났던 그들이 어떤 민족으로 서야 반듯하게 섰다 이야기할 수 있느냐, 그 기준이 뭐냐 하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 교인들이 기준을 잃어버렸어요. ‘목사님, 성도는 어떠한 모습이 되어야 성도입니까?’ 물어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알려고도 하지 않아요. 막말로 ‘그냥 내 꼴리는 대로 살겠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내 편한 대로 교회 나올게요.’ 이런 식이 돼요. ‘성도가 어떠해야 성도입니까, 라는 어떤 표준과 기준 그것이 궁금합니다.’라는 궁금증이 없어요.

‘내 편한 대로 교회 나와 주는 것으로 목사는 고마운 줄 알아라.’ 이런 식이니까, 교회 나오는 것은 그냥 부동산만 밟고 갈 뿐이에요. 문제는 천국을 가야 됩니다. 목사 입장에서 어떤 사람들이 교회만 왔다 갔다 하다가 천국에 못가면 목사로서는 그 마음이 너무너무 아파요. 정말 아파요.

마치 어떤 기분이냐 하면 저녁 6시 반쯤에 엄마가 저녁밥을 다 지어놓았는데 애들이 골목에서 소꿉놀이 하고 술래잡기 하면서 노는 거예요. 옛날에 풍경이 그랬잖아요. 애들이 노는데 정신 팔려 있으면 엄마가 앞치마 두르고 골목까지 나가서 ‘얘들아, 밥 먹으러 오너라.’ 문 열고 문 앞에서 자기애를 부르는 거예요.

‘작은 놈은 어디 갔나? 빨리 불러와라. 밥 먹으라고 해라. 얼른 손 들 씻고.’ 그 때 안 들어오면 엄마 심정이 어떻겠어요? 자꾸 더 놀겠다고 까불면서 밥 먹으러 오지를 않는 거예요. 그만 놀고 들어오라고 해도 안 들어오는 겁니다. 목사가 그 심정이에요. 천국에 가자고 하니까 천국에는 안가고 자꾸 교회에서 노는 거예요. 교회 와서 축구나 하고 놀고, 맨 날 노는 겁니다.

천국에는 들어오지를 않아요. 천국에 들어오라고 하니까 천국까지는 안 들어오고 교회만 왔다 가고 교회만 왔다가 갑니다. 적어도 교회 왔으면 ‘엄마, 오늘 저녁 반찬은 뭔데?’ 물어나 봐야 될 것 아닙니까? 놀기 바빠서 ‘오늘 반찬 뭐지요?’ 하고 묻지도 않아요. ‘목사님, 천국 가려면 어떤 기준으로 규격 잡히고 기준 잡혀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나 봐야 되는데 묻지도 않아요.

결국 세상에서 노는데 정신이 팔려서 죽을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죽어서 천국갈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천국이 놀기 더 좋은데. 교회 나오시라고 하면 ‘애 때문에’라고 합니다. 애하고 같이 지옥에서 노는 거예요. 세상에서 놀기 좋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성경에 의하면 지옥에서 놀기 좋은 기준을 잡아서 인생의 목표를 삼고 노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이 놀기 좋은 거예요.

지옥에서 살기에 멋진 기준을 자기 인생의 포부로 잡고 사시는 겁니다. 세상에서 놀던 그 기준 가지고 천국에 그냥 들어간다면 참 저도 좋겠지요. 그런데 천국 기준이 세상 기준하고 다릅니다. 마치 하나님이 찾아온 유다나라에게 있던 여호와의 기준이 캄보디아나 필리핀이나 저 이방나라를 다루는 기준하고 확연하게 다른 것과 같습니다.

다르니까 지금 유다나라에게만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른 나라, 일본이나 한국한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백성이 왜 이렇게 내 기준에 맞추지 않느냐.’고 자기 백성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말은 천국 가는 기준이 따로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냥 소꿉놀이 하다가 손 씻고 들어오는 데가 아니에요. 기준이 따로 있어요.

그 기준이란 속죄입니다. 죄를 용서받는 거예요. 이쪽 집에서는 천국 가는 기준이 속죄라고 이야기하는데 저쪽, 다른 교회에서는 ‘행함’ 이렇게 나와요. 바쳐서 천국가고 봉사해서 천국 간다는 식으로 나와요. 이쪽에서는 오직 속죄입니다. 속죄만이 천국 가는 기준이에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만날 때 중간에 속죄할 수 있는 장치를 두고 만났습니다. 속죄입니다.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소리입니까? 속죄라는 것. ‘전도합시다, 부흥합시다, 봉사합시다, 충성합시다, 센터를 세웁시다.’라는 그런 기준을 교회에서 많이 듣습니다. 속죄가 천국 가는 기준인데 속죄가 뭐냐, 본인이 해결할 수 없는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심으로 그 죄를 다 씻었다는 이야기가 속죄입니다.

이거요, 여러분, 아시는 것 같지요? 이것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여러분이 다 아신다고 생각이 되겠지요? 왜 이 속죄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만약에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한다고 하면,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권 집사, 권 집사, 하나님께서 당신을 용서합니다.’ 이 말 한마디 하면 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잘 생각해보세요. 내가 하나님이고 여기에 어떤 집사가 있다고 한다면 ‘권 집사, 난 네 죄를 용서한다.’ 말로 용서해도 용서가 되잖아요. 우리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는 그렇잖아요. 말로 해도 될 수 있는 그 용서를 왜 말로 안하시고 처참하게 십자가에, 정육점의 고기를 매달 듯이 왜 매달고 창에 찔리고 피를 흘리고 그렇게 처참하게 망가뜨려서 저주받게 하시는가 그 말입니다.

이걸 모르면 속죄 모르는 사람이에요. ‘나 용서받았다.’고 촐랑거리고 까부는 것은 왜 말로 해도 될 속죄를 자기 아들을 피 흘려서 죽여야만 되느냐 하는 그 질문에 대해서 답변이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니까 용서받고 싶은 사람은 용서해 주십니다.’ 라고 하면 아주 간편한 문제를, 그렇게 사랑이 많다면서 그렇게 용서를 해주시겠다면서 정작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 죄를 없애는 방식은 그냥 순한 말로 한 것이 아니고 푸근함도 아니고 우리가 보기에 차마 눈뜨고 못 보는, 아주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자기 아들을 박살을 내버렸어요.

왜 하나님은 속죄라는 행위를 그토록 처참한 모습으로 하시는가 말이지요. 그 십자가에 달린 자기 메시아를 죽인 것도 하나님이 직접 죽이시는 것이 아니고 사람 손으로 죽게 하시는 그 방법으로 속죄를 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정작 속죄를 받는 사람은 산자 입장에서 속죄 받아서 산자 입장으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일단 죽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냥 자살하면 안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죽음에 합류해서 죽지 아니하면 그 하나님의 위대한 용서도 다 헛방이라는 겁니다. 용서가 안 된다는 거예요. 로마서 6장의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 받지 않으면 같이 살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부활할 때 함께 부활해서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냥 보통의 친구들이나 동창생끼리 “어이, 친구야, 용서해라.” “그래 용서하마.” 이런 인간들의 용서차원이 아니에요. “하나님, 나, 용서해주세요. 용서해주신다고요? 역시 하나님 최고입니다. 멋집니다.” 이렇게 가볍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대하듯이 그렇게 대할 수가 없는 겁니다. 죽이는 거예요. 십자가 앞에서. ‘내 꼬라지는 죽어야 마땅합니다.’라는 고백을 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용서도 없고 속죄도 없고 그 사람은 하늘나라 저녁밥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맨 날 지옥에서 소꿉놀이하고 술래잡기 하면서 뺑뺑 돌다가 그냥 지옥에서 지옥으로 가야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야기를 집중해서 안하고 그것을 피해버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여러분을 용서하십니다. 들어오셔서 이런 용서를 다른 사람들이 많이 누리도록 우리가 전도합시다. 여러분의 공로가 여기서 많으면 하늘나라 공로도 많습니다.’라고 이렇게 십자가를 빼고 이야기하면 얼마든지 교회가 부흥될 수 있어요. 거기에 간증거리 한 500개쯤 집어넣으면 ‘이 땅에서 복 받을 수 있구나.’하고 사람들이 몰려올 수 있어요.

문제는 그런 기준을 천국에서 안 받아 준다는 거예요. 십자가를 이야기 안하면 교회가 아닙니다. 왜 교회가 아닌가, 천국에서 십자가 없는 그런 사람 안받아줍니다. 정말 십자가 있고 속죄를 안다면 결코 세상 재미에 빠지지 않습니다. 둘 중에 하나를 해야 돼요. 세상 재미가 되어 버리면 그 기준이 천국에 합당한 인간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원하는 기준, 지옥에서 원하는 기준으로 자꾸 굳혀져 버려요.

쉽게 말해서 자꾸 천국의 말씀을 안 들어버리면 어느새 두 겹, 세 겹, 삼겹살처럼 계속해서 뭐가 쌓이는가, 세상 살기에 적합한 기준으로 중무장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놓고는 십자가를 안다, 뭘 안다고 하거든요. 십자가를 안다거나 뭔가 안다는 것은 전부 거짓말이고 세상 살기에 합당한 기준 속에 자기가 생생하게 생글생글 웃으면서 살아 있어요.

도대체 속죄의 흔적이 없습니다. ‘나 같은 인간은 죽어도 마땅합니다.’라는 그런 고백의 형식이 없어요. ‘그런 사람에게 목사님이 십자가를 전하면 안 됩니까?’ 십자가만 전하면 무조건 귀를 막고 고개를 틀어버려요. 고개를 숙이고 돌리고 안 듣고 휘휘 둘러보고. 그래서 도대체 왜 그런지, 왜 복음 전하면 안 들으려고 하는지 그 명확한 이유를 제가 몰랐습니다만 설교준비 하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쁜지요.

왜 그런지를 마태복음 8장을 보겠습니다. 29절에 보면 “이에 저희가 소리 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여기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합니다.

악마의 종 귀신들, 여러 마리의 귀신들이 들렸던 청년이 먼저 예수님에게 시비 거는 대화가 이 내용입니다. ‘아하, 그것이었구나.’ 하고 제가 무엇을 알았느냐, ‘예수여, 당신은 우리를 망하게 하려고 왔지요?’라는 것입니다. 아까 제가 뭐가 궁금하다고 했습니까? 왜 사람들은 십자가 이야기를 하면 외면해 버리고 교회 와서 자꾸 놀려고 하고 ‘십자가 이야기는 그만 해라. 난 듣기 싫다.’고 하고 계속 십자가 이야기하면 다른 교회로 가버리는 그 이유가 뭔지를 몰랐었는데 이 본문에서 해답을 찾았어요.

‘예수여, 우리를 망하게 하려고 오셨지요?’ 이게 본인 이야기가 아니고 그 사람 속에 귀신이 들어서 귀신입장하고 똑같은 소리를 해요. 예수 믿다가는 망하겠다는 겁니다. 바로 그거였어요. ‘예수 믿으면 망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안 믿어야 안 망한다.’는 거예요. 교회는 좋아해요. 왜냐하면 교회는 사람들이 안 망하기 위해서 서로 힘을 모으기 위해서 모이는 이익단체기 때문에 참 좋아요. 친목단체로서 참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가 전달되고 속죄가 전달되고 복음이 전달되는 교회는 가기가 싫은 거예요. 가면 이익이 되는 것이 없어요. 이익이 되는 것이 없고 망하는 거예요. 그야말로 마음의 상처가 되는 겁니다. ‘왜 우리 집구석을 망하게 하려고 합니까, 왜 우리 가족을 망하게 하려고 합니까? 우리 부부 깨지는 것을 보고 싶어 환장했습니까?’

이 말을 축약해보면 ‘예수여, 우리를 멸망시키려고 왔지요?’ 이걸 사도바울서신에서 ‘육’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망합니다. 왜? 육이기 때문에. 그래서 육의 특징이 뭐냐, 영과 만나면 필히 도망치기 바빠요. 뭐라고 하면서? ‘예수여, 날 망하게 하려고 왔지요? 따라오지 마세요.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망하게 하려고 왔지요?’

난 그것이 교인들 이야기고 사람들 이야기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마태복음 8장 29절에 보니까 그 사람속의 귀신이야기라 하는 것을, 전에도 약간 알았지만 이제야 그 심정을 알았어요. ‘아하, 귀신들렸구나.’ ‘예수여, 우리를 망하게 하려고 왔지요?’ 다른 교회들 보면 설교시간에 예수 믿고 복 받았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합니다. 설교시간마다 축복받은 이야기를 서너 개씩 계속적으로 ‘이렇게 예수 믿으면 잘됩니다, 성공합니다, 취직했습니다, 서울대 갑니다.’ 했는데 왜 십자가 속죄 이야기만 해대느냐, 그 말입니다.

‘왜 천국 가는 기준만 이야기하느냐? 천국 안 간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준다. 하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은 잘 먹고 잘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이목사야, 왜 당신은 나에게 상처를 주느냐. 좀 맘 편히 살자.’ 그거예요. 난 전에는 사람 이야기로 들었어요. 그것이 바로 마귀의 이야기고 귀신의 이야기였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용서한다, 이렇게 말로 해도 되는 문제를 왜 용서한다고 하면서 들이닥치는 것은 처참하게 찢어진, 피 흘리고 있는 십자가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왜 우리 눈앞에 그것도 생생한 현실로 들이대는 겁니까? ‘너를 용서하기 위하여 너를 속죄하기 위해서 대신 죽으신 분이다.’ 그것이 크게 보이라는 겁니다. 그게 천국의 기준입니다.

‘죽는 자만 산다.’는 하나님의 이 기준을 지금도 양보한 적이 없어요. 하나님은 그 기준을 완화하거나 누그러뜨리거나 대충 변개하거나 바꾸거나 하는 적이 없어요. 십자가 전해서 망한 교회가 한두 교회가 아닙니다. 손님이 안 들어서 장사가 안돼요. 그래서 십자가복음 안전하고 다른 것으로 다 바꾸는 거예요.

한 광수 목사님께 목요세미나를 여는데 그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어요. 한 광수 목사님도 참 답답했던 모양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죽이시는 분입니다.’ 했는데 교인들이 잘 못 알아들으니까 선풍기가 빙빙 돌아가니까 그 선풍기 전기코드를 쏙 뽑아버렸어요. 실제로 그렇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전기코드 뽑으면 선풍기가 바로 멈춥니까, 휭휭 돌다가 멈춥니까? 뽑아도 즉시는 안 멈추고 어느 정도는 돌지요. 약간은 더 돌다가 멈추잖아요. 한 광수 목사님이 하는 말이 ‘저렇게 전기코드를 뽑았는데 뽑아도 약간 더 돌아가는 그것이 우리 인생이다.’ 한 거예요. 전기코드 뽑힌 상태에서, 이미 전기가 끊긴 상태에서 남들 보기에는 잘 돌아가는 것 같지만 얼마 안가 그 팬이 멈추는 것처럼 인생이라 하는 것은 그저 지옥에서 까불고 ‘이번 선거에 나를 찍어주세요. ○○○당의 ○○○입니다.’ 하는데 제가 눈도 안 마주쳤어요. 백날 그렇게 해도 그냥 휭휭 몇 바퀴 돌다가 멈출 수밖에 없는, 이미 코드 빠진 선풍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그런 겁니다. 이미 코드가 빠졌어요. 천국에서 차려진 저녁도 못 먹고 저희들끼리 골목에서 신나게 노는 거예요. 땅이 단단하니까 그 땅이 불바다 될 땅인지도 모르고 노는 거예요. 거기서 성공했느니, 취직했느니, 아들 낳았느니, 딸 낳았느니 하지만 그렇게 두 겹 세 겹 그것을 사는 기준으로 삼다 보니까 이 십자가속죄 이야기는 귀에 들려오지를 않는 거예요.

교회 말아먹어야지요. 문 닫아야지요. 할 수 없어요. ‘목사님, 좀 양보하면 안 됩니까?’ 저야 양보하면 되는데 천국에 계신 주님께서 안 넣어준다니까요. 제가 양보하면 밥은 벌어먹고 사는데 문제는 천국에 계신 분의 기준, 그 유월절 기준, 유대인들에게만 준 하나님의 제사를 통해서 만난다는 기준, 십자가에서 만나는 것, 주님께서 정한 그 기준이 완화된 것도 없고 활동하기 때문에 십자가 지지도 않은 제가 일방적으로 사기 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어제 라디오를 듣는데 사기당한 사람의 사연이 죽 나오는 것을 들었어요. 거기서 사회자가 ‘네다바이’ 이야기를 했어요. 얼마나 오랜만에 듣는 소리인지, 일본말로 사기 치는 일에서 바람잡이를 뜻하는 말이지요. 사기 좋아요. 외판원사기든 뭐든 다 좋은데 제발 천국 가지도 못하면서 천국 간다고 사기는 치지 맙시다.

십자가에 죽지 않고 가는 천국은 없습니다. 제발 그것만큼은 여러분이 양보 없이 전달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자기백성을 왜 한결같이 그 기준을 놔두고 곁길로 가느냐고 따져 묻는 대목을 봤습니다. 이 편지가 우리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십자가 속죄인데 우리는 세상 즐기고 세상에서 튀고 잘난 존재되려고 엉뚱한 기준을 도입했습니다. 이제 그 기준 다 깨어지고 피 흘리고 처참하게 망가진 주님에 함께 합세해서 십자가를 앞장세우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