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5. 12. 19:10

토기장이와 그릇 (예레미야 18장 1- 4절)

토기장이와 그릇

2010년 5월 12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8:1-4

(렘 18:1, 개정)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이르시되』
(렘 18:2, 개정)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 주리라 하시기로』
(렘 18:3, 개정)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렘 18:4, 개정)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하나님은 참 침착하십니다.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국제 정세나 경제 사정에 어쩔 줄을 모르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한결같이 우리는 그릇으로 보고 계시고 자신을 토기장이로 보십니다. 이런 침착한 말씀이 우리에게 담기지 아니하면 우리는 평생 호들갑 떨다가 볼 일 다봅니다.

특이 오늘 본문은 비유로 되어 있습니다. 토기장이와 그릇의 비유입니다. 사실 성경 전체가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노골적인 비유는 말씀 해석에 있어 근원에 가깝습니다. 표면적 말씀층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점점 비유적입니다. 이런 비유 가운데 가장 난해한 비유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속마음과 속 심정을 본인의 영 이외에는 모르듯이 하나님의 속사정과 속마음은 성령이 아니면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마음을 알아채면 세상 모든 진리를 다 안 바가 됩니다. 하나님의 속마음을 안다는 것이 곧 ‘십자가’를 아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의 의미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깊은 속마음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 말씀도 하나님의 깊은 속마음인 십자가 사건으로 해석이 되어야 제대로 해석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란 그냥 나무 막대기 두 개가 교차된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 사람이 죽었습니다. 개나 소나 돼지가 매달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매달고 그리고 그 사람을 죽이겠다는 것이 십자가에 담긴 의미입니다.

동시에 바로 그 십자가가 세상의 모든 변화를 하나님의 속마음으로 알아채는 비법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모든 인간을 죽이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십자가로 인하여 인간은 사라지게 됩니다. 즉 ‘없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있다고 여기니 자꾸만 신학이 자기에게 퍼붓고자 하는 겁니다.

신론, 계시론, 창조론, 기독론, 인간론, 구원론, 종말론 등등의 신학들을 자기쪽으로 당기려고 하는 것은 그래야 자신이 제대로 살겠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인간이 죽었다면 그런 신학들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인간의 몸은 없습니다. 마치 쥐포를 찢으면서 먹게 되면 그 현장에는 결국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듯이, 인간도 말씀으로 쪽쪽 찢어 분해하면 인간은 사라지고 거기에는 말씀 구조와 관계성들만 남습니다.

결국 인간의 몸이란 마치 드럼 북 위에 물을 붓고 막대기를 맹렬하게 난타하면 그 표면에 물방울이 사정없이 튀듯이 인간의 몸도 끊임없이 말씀이 튀어나오는데 이것 외에 다른 용도는 없습니다. 즉 인간의 몸은 말씀으로 하나하나 분해가 된다는 말입니다. 의학적으로 보면, 근육 따로, 뼈 따로가 되겠지만, 실은 모두 흙뭉치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그 흙을 가지고 그릇을 만들고자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참으로 신기한 것은 “빛이 있으라 해매 빛이 있었더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17:13의 말씀처럼 “여호와를 떠난 자는 흙으로 기록된다”는 말씀도 신기해야 합니다. 즉 우리 자신이 실은 율법의 직조물이라면 우리가 사는 것만이 신기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는 것도 당연히 신기해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은 부활을 능력을 지녔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님은 십자가 죽으신 후, 도마라는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창자국과 못자국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말씀 자체가 이미 부활의 권능을 함유하면서 활동 개시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저 모든 것이 말씀대로 진행될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토기장이와 그릇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토기장이는 요지부동입니다. 흔들림이 없습니다. 토기장이를 하나의 직업인으로 간주한다면 그의 토기 생산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제작될 뿐입니다. 즉 토기장이로서의 자기 정당성입니다. 이는 곧  ‘토기 만들기’ 속에 전지전능하신 신의 행위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도 신을 모방해서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되고 난 뒤에는 스스로 요지부동으로 군림하려고 합니다. 이처럼 모든 죄는 신이 되고 싶어하는데 있습니다. 즉 자신을 요지부동 고집을 피울 수 있는 자격자로 간주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들 세계에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말씀하게 하셨습니다.

토기장이도 여러 계층이 있습니다. 제일 아랫동네 토기장이는 각 개인들입니다. 어릴 때부터 공상에 준한 놀이를 하면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 위의 계층이 국가입니다. 국가란, 여러 소규모 가족들이나 단체들을 통합하고 포섭해서 구성되는 겁니다. 힘을 모으고 비추하기 위해서입니다. 작은 토기장이, 즉 개인적인 가족 단위에 만족할 수 없는 자들의 모여서 국가를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국가라는 토기장이보다 더 높은 토기장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자신이 만드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하위 토기장이들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겁니다. 국가의 흥망성쇠는, 그 하위 단위의 토기장이도 모두 상위에 계신 하나님의 의중에 따라 등장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면에 대해서 인간들의 자존심을 상당히 상해있는 겁니다. 왜 예수님만이 마음대로 되어야 하고 왜 자신들은 안되는가를 놓고 예수님을 살해하여 버립니다. 자신의 신성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신성과 필히 충돌을 야기시키게 됩니다. 즉 깨어져야 할 자리에서 깨어지는 것을 극구 싫어하고 반발하는 겁니다.

로마서 9:19-23에 보면,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는 분이 아니라 아예 죽여버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죽여놓고 그 다음에 말씀에 입각해서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만들어진 그릇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증거할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토기장이인 사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것이 아예 없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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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강-렘18장1-4(토기장이와 그릇)-jer100512

2010-05-13 12:41:41   녹취 : 오용익 조회 : 49  
 

062강-렘18장1-4(토기장이와 그릇)-jer1005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8장 1절부터 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79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18:1-4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하시기로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참 침착합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세상변화에 몸 둘 바를 모르지요. 초조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성경말씀을 보면 한결같아요. ‘나는 토기장이요 너희는 그릇이다.’ 얼마나 침착합니까? 바람이 불어도 우리는 그릇이요 주님은 토기장이요, 4월 달에 눈이 와도 우리는 그릇이요 주님은 토기장이요, 애가 아파도 우리는 그릇이요 주님은 토기장이요, 교회 예배당에 불이 나도 우리는 그릇이요 주님은 토기장이입니다.

내가 늙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늙어도 나는 늙은 그릇이요 주님은 토기장이입니다. 죽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어도 우리는 그릇으로 죽고 하나님은 토기장이로서 우리를 살려내십니다. 얼마나 침착한지 초조, 불안, 근심, 걱정 하나님한테는 전혀 없습니다. 사도들이 그 험한 사정 속에서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바울인데 사도바울은 굉장히 침착했습니다.

로마로 가는 배에서 폭풍이 이는 가운데서도 그리고 베드로는 감옥에 갇혀서도 주무셨습니다. 어떻게 그리도 침착한지. 성경에서는 간단하게 나와 있습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성령을 받으니까 ‘우겨 쌈을 당해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함을 당해도 얽매이지 않’는 아주 침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파도칠 때 파도의 수면위에 튀기는 물방울처럼 촐랑대는 거기에 머물러 있지만 수심 깊은 바다 밑에서는 여전히 평화롭게 미생물들이 헤엄치고 있습니다. 깊숙한 바다에는 흔들림이 없어요.

특히 본문은 비유입니다. ‘목사님, 비유를 어떻게 해석하면 됩니까?’ 비유라는 것은 깊숙이 내려가면 돼요. 사실은 성경전체가 우리가 풀 수 없는 비유형식으로 되어 있어요. 그 가운데서도 노골적으로 비유로 이야기한 곳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자체가 비유인데 더한 비유로 이야기 했다는 것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제일 밑바닥에 놓여 있다고 보면 되는 겁니다.

비유 중에 제일 큰 비유가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래서 성경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세상이 모르게 되어 있다.’(고전 1:21 ; 2:8) 하나님의 사정은 하나님만 알지 그 외에는 모르잖아요. 하나님의 일 더 나아가서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속사정을 아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도달하면 우리는 전부를 알 수 있습니다. 탐나지 않습니까? 세상을 다 해석할 수 있다는 것. 문학박사 아니더라도 세상이 전부 해석된다는 것, 신학박사 아니라도 세상이 다 해석된다는 이것, 보통 탐나는 일이 아니지요?

깊숙하게 하나님의 속사정을 다 아는데 그 하나님의 속사정을 다 안다는 것이 표면에 올라오면 이렇게 됩니다. ‘네가 십자가를 알아?’ 이렇게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속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십자가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속사정을 알면 십자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압니까?’ 성령 받았으면 십자가를 알지요. 십자가가 뭡니까? 십자가라는 것은 그냥 나무막대기를 교차해놓은 것이 아니라 거기에 사람이 달렸습니다. 일전에 서울 하나교회에서 강의하면서 십자가를 이야기할 때 그렇게 했습니다. ‘십자가는 오리나 개나 돼지가 달린 것이 아니라 사람이 달렸다.’고 했습니다.

그냥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 달린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의미가 뭐냐?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하나님의 깊은 뜻이라는 겁니다. 사람을 없애버리는 겁니다. 사람 없다! 사람이 없으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사람이 없으면 신학도 필요 없습니다. 속죄론, 기독론, 구원론, 성화론 다 필요 없습니다.

사람이 없는데 구원할 게 뭐가 있어요. 모든 신학은 사람이 있다고 간주하고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엉터리입니다. 종말론, 신론, 계시론, 기독론, 인간론, 창조론, 구원론 이 전부가 사람이 여기 있다고 전제하고 ‘그 사람을 어떻게 구원할까?’에서 시작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속사정을 몰라서 그래요. 하나님의 심정을 알면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이 없으면 신학도 없고 구원할 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없다는데 지금 우리 손에 만져지는 이 뼈다귀와 근육은 뭐냐? 여러분, 죽은 시체 뼈다귀와 근육을 확인해 보세요. 나중에 흙 됩니다. 결국은 사람은 없고 흙만 남았어요.

그러면 인간은 뭐냐, 흙에다 말씀을 입힌 겁니다. 흙에다 말씀을 입혔으니까 에스겔 37장에 해골, 그것도 바짝 마른 해골, 전자레인지에 두 시간 쯤 돌린 해골, 그 해골에 말씀이 도달하니까 그게 사네요. 그 때 하나님께서 해골을 구경시킬 때 데려가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인자라는 에스겔입니다.

결국 나머지 모든 인간은 해골이고 하나님이 누구와 이야기하느냐, 인자되는 에스겔과 이야기해서 “인자야, 저 뼈들이 살겠느냐?” “말씀대로 하면 삽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인자가 되셔서 우리를 말씀으로 살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관심사는 말씀밖에 없어요. 인간은 있어봐야 죽은 놈이고 곧 죽어야 될 것이고 사라져야 될 것들입니다. 인간은 없는 거예요.

인간은 없어지고 그 말씀의 관계성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만 살아나는 겁니다. 오징어나 쥐포 죽죽 찢으면 어느 순간 아무것도 없지요. 인간을 말씀으로 죽죽 찢으면 그렇게 찢어집니다. 말씀으로 찢어지면 인간은 없고 말씀의 구조와 관계성만 남아요. 인간이 펄럭이면 전부 다 말씀이 펄럭이는 거예요.

예를 들면 ‘빛이 있으라고 하니 빛이 있었다.’ 여러분, 신기하지 않습니까? 본문에 ‘그릇이 깨지더라. 그래서 인간은 깨졌다.’ 얼마나 신기합니까? 진짜 신기한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레미야 17장 13절에 보면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는 저주 받는다. 흙에 불과하다.’ 얼마나 신기합니까? 참 신기하지요.

대구의 지하철 타고 가는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여호와를 아십니까?’ ‘모르지요.’ 그러면 흙입니다. 이 얼마나 신기해요.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더라.’ 이것만 신기해하지 마시고 그 뒤에 이어져 나오는 모든 한 문장 한 문장이 다 신기합니다. ‘주를 버린 자는 흙이 되고 주를 버리지 않는 자는 해같이 빛납니다.’라는 두 가지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어오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된 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쥐포고 오징어포지요. 죽죽 찢으면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됩니다. 자꾸 ‘나’가 있다고 하니까, ‘내가 여기 있다.’고 하니까 그 다음부터 성경말씀 동원해서 내가 안 죽는 방향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렇게 내가 안 죽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미워져요. ‘미워, 미워, 미워, 십자가 미워.’

신약시대에 말씀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어떤 사건을 거치게 되어 있는데 무슨 사건이냐, 십자가를 거치고 난 뒤에 부활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거치고 난 뒤에 부활해서 도마에게 나타나서 뭘 보여줍니까? “도마야, 믿어라.” “못 믿겠습니다.” “자 봐라.” 하고 보여주는데 예수님의 몸에 뭐가 있느냐, 창자국과 손에 못 자국이 있습니다.

저도 어제 청소하다가 손을 베어서 상처자국이 여기 남아 있어요. 이렇게 사건이 새겨지는 겁니다. 신약시대의 모든 말씀은 십자가의 창자국과 못 자국이 새겨진 말씀이에요. 그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무엇도 부활했느냐, 십자가사건을 지닌 모든 신약성경말씀도 부활했어요.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 자체가 부활했어요. 말씀 자체가 살아 있다는 말은 그 부활한 말씀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고 살아 역사해서 우리를 죽죽 찢어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이라 하는 것은, 특히 성도라 하는 것은 뭐냐? 여러분, 북에다 물을 부어놓고 작대기로 그 북을 막 쳐보세요. 그러면 그 북 표면에서 물방울이 탁탁 튀겠지요. 그게 난타 아닙니까? 그렇게 탁탁 튀거든요.

우리를 엎어놓고 주님께서 치면 거기서 말씀이 막 튀는 거예요. 왜 부활했기 때문에, 말씀이 부활했기 때문에. 말씀이 부활해서 말씀이 과연 말씀대로 이루어짐을 우리를 사용해서 튀는 겁니다. 우리는 기름 솥에서 기름이 마구 튀어 오르듯이 우리 속에 말씀이 들어 있어서 말씀이 마구 튀어 오르는 그것이 우리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통해서 말씀이 팍팍 튀는 그것을 보여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씀대로 되면 되지 우리 스스로가 자기 미래에 대해서 또는 자기 인생관에 대해서 고민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지요. 아까 뉴스에 보니까 여자 넷에 남자하나가 모여서 자살했답니다. 그것도 말씀대로입니다. ‘무릇 여호와를 버린 자는 흙으로 돌아간다.’ 얼마나 정확하게 말씀대로 됩니까? 오묘하잖아요. ‘하나님을 버린 자는 흙으로 돌아간다.’

십자가에서 어떤 분이 죽었습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사람 죽이는 데입니다. ‘자기 십자가 지고 오라.’는 것은 살 생각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너는 이제 죽었어.’ 그 말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너를 죽죽 찢을 거야. 쥐포 찢듯이 너를 찢어서 나중에는 툭툭 털어버릴 거야.’ 그것은 ‘십자가와 너와 맞바꿔라.’ 그 말입니다.

그걸 가지고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 맞바꿔야 돼요. 바꾸게 되면 우리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아하, 십자가의 의미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난타하는 북의 표면처럼 탁탁 튀면서 말씀이 튀어 나오는 겁니다.

본문의 말씀이 주어지면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본문은 토기장이와 그릇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토기장이와 그릇의 차이점은 이렇습니다. 본문 내용에 따르면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그릇을 만드’는데 여기에 녹로라고 되어 있지요. 3절에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녹로로 일을 하는데”라고 되어 있지요.

녹로(襤難, a potter’s wheel)라고 하는 것은 옛날에 토기 만들 때 사용하는 기계인데 바퀴가 달려 있습니다. 밑에는 큰 바퀴, 위에는 작은 바퀴가 달려 있어서 큰 바퀴에서 진흙을 밀어 올리면 작은 바퀴에서는 적당하게 진흙을 떼어내는데 사용하는 기계입니다. 그런데 진흙가지고 만들다가 모양새가 안 좋게 나오면 에이, 하고 다시 뭉쳐서 처음부터 새로 하거든요.

토기장이와 그릇의 비유인데 다시 말씀드리면 비유라는 것은 성경해석에 있어서 깊은데서 더 깊이 들어가는 해석을 할 때 비유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항상 비유를 이야기할 때 제자들이 해석해 달라고 하잖아요. 토기장이와 그릇의 비유에서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이 있는데 토기장이와 그릇의 차이점이 뭐냐? 토기장이는 요지부동이에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릇은 항상 모양새가 변해요. 그게 차이점입니다. 우리는 변화무쌍합니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가 아닙니다. 오늘의 내가 내일까지 간다고 우기면 그 사람은 반칙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남을 속이는 것입니다. 내일 되면 또 내일의 상황에 맞추어서 내가 어떻게 달라질지 나도 장담 못해요. 오늘은 점잖았는데 내일까지 점잖을 것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습니다. 지금 모기 한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는데 화를 내고 싶어요.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습니다.

달라져도 토기장이 한 분 든든하면 주님의 뜻대로 그 때 그 때 마다 달라요. 그 때 그 때마다 토기장이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내면 되는 겁니다. 그릇은 토기장이를 떠나면 안돼요. 자칫하면 자살할 수 있습니다. 토기장이 없는 그릇 ‘내가 어디서 나왔으며, 어디로 가며, 나는 이 세상에 왜 태어났으며, 무엇을 하기 위해서 태어났으며, 나는 왜 이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나는 왜 아프리카에서 안 태어나고 한국에서 태어났으며, 왜 나는 미국에서 태어나지는 않았는지, 나는 왜 북한에서 태어나지 않고 여기에서 태어났는지?’ 북한에서 태어났으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성경도 못보고. 이유도 모른 채 그냥 세월 따라 늙어가는 거예요.

그 이유는 변화하는 나를 자꾸 붙잡아서 묻지 마세요. 나를 붙잡아서 자꾸 이유를 물으면 우리는 그 이유를 내 것에서 찾아버려요. 내 것에서 찾아버리면 어떤 오류가 발생하느냐, 내가 바로 토기장이가 돼요. 내가 요지부동이고 나 빼놓고는 남들은 달라져야 되고 다 죽어도 되는데 나는 죽으며 안돼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성경말씀대로 하면 하나님이 토기장이고 우리는 그릇인데 우리가 살짝 기분 나쁘거든요. 내가 누군가에게 만들어졌다는 것,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기분 나쁘고 자존심 상한다는 거거든요. 인간이 얼마나 토기장이인체 하는 그것을 까발리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 앞에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토기장이다. 내가 길이요, 내가 진리다, 내가 생명이다.” 하니까 “에라, 죽어라. 남의 허락도 없이 네 맘대로 길이고, 진리라? 네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 되어 버리면 나는 뭐가 되는데?” “너는 죽음이거든.” “에이, 기분 더러워라.” 하고 예수님을 죽인 거예요.

그래서 현재 이 성경말씀, 하나님을 버린 자들의 특징이 뭐냐, 모두 각자가 토기장이예요. 요지부동입니다. 교회 와서 은혜 받았다 해도 그 말을 몇 퍼센트나 믿어야 할지, 교회 와서 은혜 받았다 해도 자존심 상하는 일 하나 터져버리면 바로 삐져서 교회 안 나옵니다. 완전히 요지부동이에요. 누굴 믿느냐 하면 자기 자신이 요지부동인 것을 믿어요. 얼마나 믿을 것이 없으면.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십자가라 하는 것은 단순히 나무가 아니고 거기에 사람이 달렸습니다. 십자가에는 누구도 죽었느냐, 예수님도 죽었어요. 십자가에 예수님마저 죽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는 말할 것도 없이 죽어야 됩니다. 그런데 죽어야 될 그것이 하나님의 깊은 본심이거든요. 사람에게 들키지 않는, 진짜 성령이 와야 아는 겁니다. ‘아하, 우리는 죽어 마땅하구나.’ 하는 이것이 성령을 통해서만 아는 깊은 하나님의 속사정인데 이런 성령의 뜻을 알면 그 다음부터 나오는 것은 ‘살았다는 이름은 있어도 왜 우리는 죽은 자입니까?’라는 질문을 해대면서 교회 와야 됩니다. 그러니까 죽으려고 교회 와야 됩니다.

그런데 ‘나 요지부동이다.’라는 것을 증명해 달라고 교회 와버리니까 같은 요지부동끼리 싸워서 부딪히니까 둘 다 깨지고 둘 삐지는 사태가 일어나는 겁니다.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만 하나님이 얼마나 요지부동인지 로마서 9장을 보겠습니다. 로마서 9장 19절, 20절에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다시 말해서 ‘그릇주제에 어디서 그릇을 만든 토기장이한테 대드느냐.’ 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대들고 싶어요. 절대로 우리는 ‘하나님, 저를 깨세요. 저는 깨져도 괜찮은 존재예요.’라는 말이 속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 안에 마귀가 들어있어서 그 소리가 나오지를 않아요. 나오지를 않으니까 ‘예수, 네가 깨져라. 하나님, 네가 깨져라. 내 요구하는 대로 당신의 뜻이 변화되어야 되고 나는 요지부동이고 변화되기 싫어.’ 이렇게 우기면서 고집을 부리네요.

결혼해서 애를 낳으면 부모들이 애들에게 질려버립니다. ‘무슨 이런 고집쟁이가 생겨났나.’ 하거든요. 강짜 부리고 성질부리고 자기성질대로 안되면 울어버리고, 전혀 그릇이라는 겸손함이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에 어떤 갓난애가 ‘엄마, 엄마 뜻대로 하세요. 난 엄마 뜻에 따를 거예요.’ 이런 아이는 못 봤어요.

필요할 때는 엄마가 좋으면 자기혼자 웃고 자기 원대로 안 해주면 상황 보지도 않고 울어버리고, 몇 대 맞으면 약간 수그러지지만 그것은 본인이 깨달아서가 아니라 때리는 매가 무서워서 잠시 양보해주는 거지요. 인간은 날 때부터 요지부동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 손에 의해서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죽지 말아야 될 자가 죽었고 죽어야 될 자가 예수님을 죽인 겁니다. 그렇게 일을 성사시킨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의 깊은 본심으로 처리된 일입니다. 그 십자가를 알면 세상도 알고 하나님도 알고 인간도 알고 전부 다를 아는 거예요. 왜? 하나님의 깊은 것이니까. ‘나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 알지 않기를 원한다. 이 십자가를 전함은 사람의 설득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한다.’(고전 1:2-4)

‘제발 네가 그릇인 줄 알아라.’라는 말이지요. 그릇인줄 알면 뒤 따라 오는 것이 뭐냐, ‘그러면 우리는 누가 만들었는데요, 왜 만들었는데요, 무엇 때문에 만들었는데요, 저 사람은 왜 나와 다르게 만들었는데요?’ 라는 질문이 쏟아지겠지요. 거기에 대해서 이렇게 나옵니다.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한이 없겠느냐.”(롬 9:20-21) 라고 하나님께서는 두 종류의 그릇을 만들었다고 하십니다.

하나는 진노받기 위해서 진노가 담긴 그릇과 또 하나는 용서, 사랑받기 위해서 만든 그릇입니다. 그릇이 아니고 토기장이가 된 채 외부에 있는 토기장이한테 ‘나, 이렇게 만들어주세요.’라고 한다면 그 사람한테는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 아무리 봐도 저에게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용서 대신 죽여 버리는 하나님입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일단 죽여 놓고 그래서 죽은 자가 되어서 용서니 사랑이니 하는 말을 할 거리도 없게 만들고, 아예 쥐포나 오징어포 찢듯이 쫙쫙 찢어서 툭툭 털어서 ‘이제 잔소리 할 놈 없지.’ 하고 흩어버리고 다시 성경말씀 가지고 조립해 보니까 그게 용서가 되고 사랑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랑의 그릇이고 자비의 그릇입니다.

십자가가 그런 거예요. 십자가로 죽여 놓고 사랑을 이야기하고 소망을 이야기하고 믿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 그런가, 이 모든 말씀은, 본문도 그렇게 모든 성경 말씀은 그릇이 지키는 것이 아니고 토기장이가 지켜서 그릇이라는 작품을 만드는 용도로 말씀이 주어진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그릇 주제에 토기장이 행세를 한 거예요.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와 함께 되’다는 식으로, 토기장이속에 끼어들었다고 착각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네가 진짜 토기장이 같으면 한 번 만들어봐라.’ 하고 율법을 주니까 하나도 못 지키잖아요. 말씀의 극대화가 십자가예요. 말씀이 끝까지 충만한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십자가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말씀에 대해서 완전히 극력 거부하는 쪽이라는 것이 들통이 났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다 죽은 것이고 그 다음에 사랑의 그릇으로 태어나는 소관은 예수님 소관이지 우리 소관 아닙니다. 바로 이걸 증거 하는 거예요. ‘예수님 소관이지 우리 소관 아닙니다. 우리 행함이 아니고 예수님이 다 하셨습니다.’라는 것을 증거하고 믿는 것, 이게 바로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 겁니다.

아브람은 믿음이 없어요.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어요. 믿음이 있는 사람 만들기 위해서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만들어놓고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의롭게 되었으니까 얼마나 복 받았느냐(롬 4:2),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꼭 죽어야 죽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서 그 때가서도 여전히 하나님 모르면 ‘누가 죽였지? 왜 죽었지? 내가 왜 죽어야 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죽어?’ 이렇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리 당겨서 압시다. 성령이 오게 되면 ‘아, 당연히 흙이고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고 지금 하나님께서 하나의 성전으로 만든 것은 말씀이 사랑 때문에 우리를 구원했고 소망 때문에 구원했고 믿음 때문에 우리를 그릇으로 만들었다.’ 하는 것을 우리가 미리 알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토기장이를 제대로 아는 거듭난 피조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사실은 없어져야 되는데 생겼습니다. 이제는 새로 생긴 그릇에 나의 영광 나의 자존심 담기지 말고 내 뜻도 담기지 말고 주의 뜻만 담기고 주의 믿음 소망 사랑의 은사만 가득 담겨서 예수님이 우리의 토기장이인 것을 증거 하는 증인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