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5. 8. 11:25

안식일 거룩 (예레미야 17:24-27)

안식일 거룩

2010년 5월 5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7:24-27

(렘 17:24, 개정)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만일 삼가 나를 순종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하여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아니하면』
(렘 17:25, 개정) 『다윗의 왕위에 앉아 있는 왕들과 고관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되 그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함께 그리할 것이요 이 성은 영원히 있을 것이며』
(렘 17:26, 개정) 『사람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에 둘린 곳들과 베냐민 땅과 평지와 산지와 네겝으로부터 와서 번제와 희생과 소제와 유향과 감사제물을 여호와의 성전에 가져오려니와』
(렘 17:27, 개정) 『그러나 만일 너희가 나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되게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하시니라』


안식일은 단순한 일반적인 날이 아닙니다. 안 지키면 하나님이 그 인간을 죽이겠다는 날입니다. 사람이 죽고 살고, 예루살렘이란 건축물이 불에 타고 안타고가 여기 적혀 있는 글자나 문자에 근거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죽는 것은 자기 몸을 자신이 관리 여부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건축물에 불나고 안 나고는 사전에 불씨를 주변에서 아예 없애는데 달려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안식일과 관련 있다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이유는, 안식일이 인간이 휴식하기 위한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기 위해 지정된 날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특정 시간대를 거룩하게 지키지 아니하면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뜻으로 알려주신 것이 안식일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적인 안식일의 거룩이 공간적인 거룩으로 이동해서 만나게 됩니다. 시간과 공간의 이 만남 중심에 거룩한 백성이 등장하게 됩니다. 시간적 거룩이 공간적 거룩으로 이어지는 그 이유를 모르는 자는 죽어 마땅한 자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아니라는 겁니다.  

시간적 거룩이 공간적 거룩으로 전환되는 사연을 모르게 되는 자라면 아무런 생각없이 안식일날 짐을 들고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고, 그 자는 하나님의 법에 의해 죽어야 합니다. 안식날이라는 시간적 요소가 공간적 요소로서 전이되는 경우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행진 시절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6:26에서, 안식일에는 만나를 얻을 수 없다고 나와 있습니다. 평일에는 만나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평일날 만나를 내리시는 것은 안식날을 고대하라고 내려주는 겁니다. 평일과 안식일의 차이를 만나 주님과 아니 주심으로 구분 짓는 겁니다. 여호수아 5:12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는 만나가 더 이상 주어지지 않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봐서 만나란 안식의 공간을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위해 마련했고, 그 마련된 안식의 공간으로 이끄는 매개물이 바로 하나님 쪽에서 제공된 만나였습니다. 즉 만나가 끊어진 날이 안식일이요 만나가 끊어진 공간이 안식의 땅, 곧 약속의 땅입니다. 그런데 이 만나를 신명기 8:3에서는 양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를 정리해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일같이 주어진 만나는 양식차원이 아니라 말씀차원이며 그 말씀은 미래를 위하여 자기 백성을 현재 인도해주고 있음을 깨닫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사람들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보기 전에 이미 자신들 나름대로의 시간과 공간 구조 안에 휩싸여져 삽니다.

이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현재 자신이 이만큼이라도 사는 이유는 과거에 자신의 노동의 댓가로 얻어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서 제시하는 시간관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미래를 위해 현재가 미리 와있는 겁니다. 미래에 준비된 바를 위해 현재에 미래에서 날라 온 선물이, 그리고 소식이 매일같이 편지가 되어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을 해석할 때는 필히 인간의 노동과 공로로 내가 산다는 의식을 철폐시켜야 합니다. 그 대신 아무런 공로없으나 예수님의 공로로 미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식으로 말씀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광야 시절에는 안식일날에 만나가 아예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안식일의 완성됨에 있어 인간의 노동에 전혀 필요치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간관과 공간관은 모조리 자기 자신을 섬기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천국이란 곳은 자기를 섬기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만을 섬기는 곳입니다. 따라서 지금 천국갈 사람인지 아닌 사람인지를 판가름하는 것은, 자신을 섬기며 사느냐 아니면 예수님을 섬기며 사느냐가 기준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누구를 이용할 생각이 우선입니다. 이는 곧 자신을 자기가 섬기기 위해 주변에 있는 것들을 살핀다는 말입니다. 교회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교회마저도 자신을 섬기기 위한 용도로 다니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미래의 천국은 예배당도 필요치 않습니다. 돈도 필요치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함임을 인정하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는 복음 안에서 섬겨야 제대로 섬깁니다. 이는 미래의 말씀 성취가 결코 자신의 행함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고백하는 바가 됩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은 안식일날 무슨 일에 주목해야 하는가요?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무슨 일을 하라고 명하셨던가요? 바로 성소를 공경하라는 겁니다.

레위기 26:2에 보면, “너희는 내 안식일을 지키며 내 성소를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28:9-10에 보면, 안식일날 올릴 제사의 규례가 나와있습니다. “안식일에는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 두 마리와 고운 가루 십분의 이에 기름 섞은 소제와 그 전제를 드릴 것이니 이는 상번제와 그 전제 외에 매 안식일의 번제니라”

이로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 거룩’을 지정된 성소에서의 거룩한 제사를 두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제사란 오늘 본문 26절에 의하면 감사의 제사입니다. “사람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에 둘린 곳들과 베냐민 땅과 평지와 산지와 네겝으로부터 와서 번제와 희생과 소제와 유향과 감사제물을 여호와의 성전에 가져오려니와”

‘감사’라는 말은 구원을 미리 확보해주셨다는 사실에 대한 고백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공로와 은혜가 어떤 작업에 근거에서 주어졌느냐 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안식일 제사법을 통해서 알게 되었음도 더불어 고백하는 시간입니다. 만약에 안식일에 갓태어난 아이가 있어 그 아이가 말을 금방했다면, 아마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엄마, 안식일에 우리가 먹을 양식은 어딨어?”

이 때 부모는 이렇게 답변할 것입니다. “아가야, 이날은 우리 살 궁리하는 날이 아니라 우리가 죽어도 영원히 안식할 공간을 주신 그 하나님의 희생과 애씀에 대해서 고백하고 감사하는데 주력해야 돼”라고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섬기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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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강-렘17장24-27(안식일거룩)-jer100505

2010-05-06 11:13:47   녹취 : 오용익
 

061강-렘17장24-27(안식일거룩)-jer10050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7장 24절부터 2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79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17:24-2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만일 삼가 나를 청종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하여 아무 일이든지 하지 아니하면 다윗의 위에 앉는 왕들과 방백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되 그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거민들이 함께 그리할 것이요 이 성은 영영히 있을 것이며 사람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에 둘린 곳들과 베냐민 땅과 평지와 산지와 남방에서 이르러서 번제와 희생과 소제와 유향과 감사의 희생을 가지고 여호와의 집으로 오려니와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케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할찌니라.”


성경을 성도가 봐야 되는 이유는 성도가 평생 편하게 지내라고 성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섬겨야 되는 이유 때문에 성도가 된 겁니다. 이 땅에서만 섬기는 것이라면 죽으면 그 섬기는 일도 안하게 되지만 실제로 섬기는 것이 이 땅에서만 아니고 사후세계 천국에 가서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겁니다.

천국 가서 하나님 섬기는 것을 이 땅에서부터 미리 당겨서 성도가 되는 시점부터 시작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천국 갈 사람과 안 갈 사람의 차이는 자기 자신만 섬기면 굉장히 수상한 사람입니다. 섬길 대상이 없는 거예요. 이용할 가치 있는 사람들, 이용할 사람들은 많아요. 예수님도 이용하고 하나님도 이용하고 성령님도 이용하고 교회도 이용하고.

교회가 이용가치가 있다는 것은 자기 생계에 보탬이 되는 경우에 열심히 교회 활동도 하지요. 특히 교회가 크고 중직에 있을 경우에, 그 교회에서 알아줄 때 그것은 단골을 쉽게 확보할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그러면 그 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입에 발렸지요. 그것은 나를 섬기기 위해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천국가면 천국에서 자기 섬긴다는 것이 있을 수가 없어요. 면류관도 반납하는데 거기에 어디 자기섬기는 것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천국 가서 잘하면 되지.’라고 하는데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새듯이 여기서부터 섬길 분이 없고 섬길 자가 자기밖에 없는데 아예 천국에 안 넣어주지요. ‘천국에 가서 잘하지.’가 아니라 천국 문에서 발길질 당합니다. ‘꺼져.’ 하고 차버립니다.

요즘 교인들이 말씀을 안 보는데요, 안보는 이유가 평소에 내가 나를 섬기는 것도 바쁜데 성경 볼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이 무슨 이용 가치가 있다면 모르지요. 예를 들어서 취직하는데 ‘성경 몇 번 봤습니까?’ ‘열 번 봤습니다.’ ‘합격!’ ‘성경 몇 번 봤는데요?’ ‘한 번도 안 봤습니다.’ ‘불합격!’ 이처럼 자기 생계에 보탬이 되면 성경 보지만 자기섬기기 바쁜데 언제 성경 봅니까?

그래서 성경을 관심 있게 본다는 것은 ‘주여, 제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싶습니다. 섬기고 싶은데 어떻게 섬길지를 몰라서 제가 성경을 보니 하나님의 뜻이 나와 있기에 이 뜻대로 하나님 섬기겠습니다.’ 벌써 그 마음 자체가 ‘더 이상 나를 섬기는 것은 안하겠습니다.’하는 뜻입니다. 자기 고백이지요.

‘내가 날 위해서 산다는 것, 이것은 내 성격상 안 맞습니다. 나는 하나님 섬기겠습니다.’ 하는 그런 태도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 섬기려면 말씀을 알아야 되는데 오늘처럼 이렇게 말씀을 펼쳤습니다. 자,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가? ‘안식일에 짐을 가지고 예루살렘 문에 들어오지 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데 ‘안식일에 짐을 가지고 예루살렘 문에 들어오지 마라.’ 이렇게 되어 있으니까 하나님을 섬기려면 뭘 알아야 됩니까? 안식일을 알아야 되고, ‘짐을 지고 간다.’는 것은 장사하러 가는 거지요, 이것은 알고, 그 다음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마라.’에서 예루살렘이 뭐하는 동네인지 그걸 알아야 되고, 이렇게 몇 가지를 알아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을 섬길 마음이 있는 사람은 그것이 뭐냐고 묻기도 하고 그것에 마음이 당기게 되어 있어요. 어떤 분은 ‘이것 몰라도 그냥 예수 믿으면 되지 않습니까?’ 하는데 예수님의 모든 피부내부에 그 몸의 모든 내부에 이 말씀이 차 있어요. 예레미야 17장의 말씀이 차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냥 예수님이 아니고 말씀이 뭉쳐져서 예수님이 된 거예요.

마치 원자, 분자의 세포, DNA가 모여서 인간의 몸이 되는 것처럼 예수님 자체가 말씀 덩어리에요. ‘그래서 온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를 어기게 되면 모든 것을 어긴 것이 된다.’ 그 말이지요. 말씀 자체가 주님의 덩어리를 이루기 때문에 주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말씀에서 어긋나는 일이 없어요. 주님께서 뭐 하나 했다 하면 다 말씀대로예요.

심지어 기침 한 번을 해도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냐, 할 때 예레미야를 통해서도 다시 한 번 예수님을 알 수 있지요. 예수님은 예루살렘도 되고 안식일도 되고 다 되는 겁니다. ‘짐 지고 오지 마라.’ 하는 그 명령도 되고 다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안식일이라 하는 것은 시간에 관계되어 있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다른 날들인 여섯 번째까지의 날들과 구분해서 일곱 번째 날이 하나님의 거룩한 날이다, 시간적인 구분을 해서 특정 하루를 거룩한 날로 지정한 것 그것이 안식일입니다.

그게 안식일인데 본문에서는 그 거룩한 시간이 거룩한 공간으로 바뀝니다. ‘시간 지켜라.’에서 ‘공간 지켜라.’로 나오는 겁니다. ‘거룩한 시간을 지켜라.’에서 ‘거룩한 공간을 지켜라.’로 이것이 변하는데 변하면서 뭐가 바뀌느냐, 27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고 안식일에 거룩케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시간적거룩이 공간적거룩으로 바뀌면서 뭐까지 첨가되느냐, ‘내가 사람을 불로 태워서 죽인다.’는 겁니다. 민수기에 보면 실제로 안식일에 나무하다 죽은 사람이 있어요. 안식일에 나무꾼이 나무하다가 죽었습니다. ‘일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일했느냐.’ 해서 죽여 버립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이 성경책에 있는 글자가 우리를 죽일 수 있다는 문제에요.

이 책은 펄프로 되어 있습니다. 종이, 이것은 물질입니다. 그런데 이 물질하고 나하게 거리를 떼어두면 여기서 불이 나오지는 않아요. 내 몸은 따로 있는 물질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살아서 떨어져 있는 나를 죽이고 죽일 뿐만 아니라 남은 모든 운명과 팔자도 저주하고 심판할 수 있는 접촉점을 제공하는데 바로 안식일이 그 접촉점을 제공하고 있는 겁니다.

‘안식일에 짐 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면 죽인다.’ 이 말은 ‘사람의 운명이란 자기가 열심히 일 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그 운명은 영원히 저주받느냐, 영원히 살 것인가가 판정된다.’는 겁니다.

교회 아랫집에 보면 곱창집이 있어요. 그 곱창 집에서 곱창을 굽는데 그 곱창을 먹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천국가고 지옥 가는 것이 결정 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위층에 있는 이 교회에서는 말씀을 펴놓고 있습니다. 우리 지금 곱창 안 굽습니다. 냄새 하나도 안 납니다. 그런데 이 펼쳐놓은 말씀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거예요.

교회 안다니는 불신자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갓 바위에 대고 빌면 되지 않느냐 하는데 말도 못하는 돌멩이에 빌어봐야 그 돌멩이 또는 금속이라는 물질이고 몸은 단백질덩어리인 세포로 되어 있는데 돌이라는 물질에서 어떤 능력이 나와서 내 몸을 좌우하거나 결정짓지는 못한다는 거예요.

성경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나무로 만들고 돌로 만든 그런 것들이 어떻게 너의 운명을 결정하느냐. 너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거예요.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면 너는 죽어.’ 이렇게 되는 겁니다.

결국 거룩이라는 것, 이 안식일과 예루살렘, 이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몸의 운명과 결부되어 있어요. 그 이유가 거룩 때문에 그렇습니다. 안식일이 거룩한 시간이고 예루살렘은 거룩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공간과 거룩한 시간이 우리를 판정하게 되면 우리는 더럽고 속된 사람으로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뭘 이야기하느냐, 세상을 볼 때에 내 힘줄 내 신경 내 머리카락, 이런 내 몸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안목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구조, 그 시간과 공간구조를 이제는 철거하라는 말이지요. 그 구조를 철거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시간과 공간이라는 안경을 쓰시든지 안 그러면 여기에 칩을 집어넣든지 해서 이제는 그 관점과 안목을 하나님이 제공하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세상을 다시 한 번 보게 되면 ‘아, 나는 살았구나.’ 혹은 ‘아, 나는 죽었구나.’ 이것이 판정이 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시간을 가지고 우리를 보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만약에 내가 가지고 있는 시간가지고 나를 보게 되면 ‘나는 미래에 대해서 모른다. 다만 과거에 내가 열심히 산 그것이 쌓여서 현재의 나를 이렇게 세웠다. 곧 과거가 잘 되어서 오늘날 내가 이렇게 되었다.’라는 시간관 밖에 모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성경적 시간관을 받아들이면 미래 때문에 현재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새로운 시간관을 이스라엘 역사에 집어넣은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출애굽기 16장인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내리십니다.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만나가 하얗게 대지에 깔립니다. 이 만나가 안식일, 일곱째 날만 되면 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섯째 날에 만나의 양을 두 배로 줘서 일곱째 날에 만나가 내리지 않더라도 굶지 않도록 조치를 하는 겁니다. 만나라는 것이 음식인데 그 이름도 몰라서 ‘이것이 무엇이냐?’ 하는 그런 음식을 주시는 거예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시는데 그 만나가 언제 끊기느냐, 여호수아 5장 12절에 약속의 땅에서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날에 만나가 끊겨버립니다.

그렇다면 첫째 날, 둘째 날, 여섯째 날까지 만나를 내려주는 것은 일곱째 날을 기억하라고 한 겁니다. 그러므로 과거나 현재는 항상 미래를 위하여 존재하는 거예요. 일곱째 날을 생각하라고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만나를 줬고 광야 생활에서 만나가 주어진 것은 만나가 끊어지는 날, 그러니까 약속을 땅을 생각하라고, 광야에서는 아직까지 약속의 땅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증거로서 만나가 계속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신명기 8장에 보면 이 만나를 그냥 만나로 보지 말고 말씀으로 보라는 말씀이 나와요. 이 말이 무슨 뜻이냐,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면 우리는 기존의 사고방식처럼 ‘과거가 날 살렸다.’가 아니라 ‘미래에 날 살리시는 분이 나를 이렇게 살렸다.’는 표시로서 계속해서 말씀이 믿어지는 역사가 내 안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이 나를 구원했다는 나는 미래를 보장하는 이 말씀 때문에 과거에 내가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을 날마다 잊어버리면서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만나가 내리는 그 일곱째 날에는 어떤 노동도 필요 없어요. 정리해보면 나의 노동이 필요 없어도 미래에 구원받을 수 있다는 소식이 미래에서 현재로 택배처럼 미리 도착이 된 겁니다.

편지가 매일같이 오는 거예요. ‘너의 노동 없이 구원받는다. 네 공로 없이 구원받는다.’ 이런 편지가 계속해서 날아오는 겁니다. 무엇의 이름으로?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그래서 목사님들이나 교인들이 말씀을 볼 때 항상 근거가 뭐냐, ‘내 노동 없이 내 행함 없이 구원받는다.’는 그 내용을 깔고 말씀을 해석해야 되고 말씀을 봐야 돼요.

‘이것 하면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이것 하지 않더라도 이미 구원이 확보되어 있다.’는 소식 차원에서 미래에서 지금으로 매일같이 편지가 날아오는 거예요. 날아와도 안보면 어쩔 수 없지만 그 말씀을 펼쳐 볼 때마다 ‘아, 우리의 행함, 우리의 공로, 우리의 노력이 아니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식으로 말씀이 나온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미래에 예배당이 있습니까? 없잖아요. 천국에서 예배당 몇 평짜리 지을까요? 천국에서 예배당 짓고 주차장 짓고 교육관 지어야 됩니까? 필요 없지요. 그러면 성경말씀 가지고 ‘예배당 지읍시다.’라는 말 자체가 사기에요. 완전히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성경말씀이라는 것은 이것저것 없어도 구원받았음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 말씀의 핵심은 예수그리스도가 진짜 성전이고 예수님이 예배당이고 교회고 그리스도 몸이고 머리라는 그분이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물론 예배당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산 쓰고 예배드릴 수는 없는 것이고요, 너무 비좁아서 밥 먹을 공간이 너무 비좁으면 식당 넓힌다는 것은 인정되는데 성전이라고 지어 놓고 그것을 천국이랍시고 지어놓고 거기에 교인들은 돈 만원씩 내는 그것, 진짜 성전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성전에 그런 이야기가 왜 없을까요? 주님께서 구원하시는 방법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안 나오기 때문에 그 방법을 쓰면 안 된다 그 말이죠. 주님의 구원방법은 이미 구원될 자의 리스트가 마련되어 있고 그 리스트 보고 주님이 찾아가는 방식으로 건져내는 방식인데 찾아갈 때 어떻게 찾아가느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만 찾아가는 겁니다.

‘사람의 지혜로는 어리석게 보이는 그 십자가의 보혈로 너를 구원했다.’는 그 소식으로 우리를 찾아와서 그것이 당최 믿어진다는 것은, 그것은 기적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기적이냐, 아니면 노력이냐를 판정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강의하고 설교하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전부 다 껍질 벗기듯이 벗겨내는 거예요.

벗겨내니까 삐져서 교회 안 나오고 벗기니까 화를 내고. 저는 뭘 찾느냐, 목사의 임무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기만 섬기는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복음 안에서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기 때문에,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니고 예수님 십자가 안에서만 섬겨야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 때문에, 복음 전해서 ‘복음 안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됩니다.’ 라고 그분들을 향하여 섬기는 것이 목사의 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꼭 속으로 묻고 싶은 질문이 그거예요. ‘목사님, 만약에 한명도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섬기고 싶지도 않고 그것도 자기 행함으로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 십자가의 공로로 감사해서 섬기고 싶은 사람이 한명도 없다면 어떻게 합니까?’ 한명도 없다면 섬기는 사람이 없으니까 거기서는 목사직을 그만 하면 되지요. 그런데 그게 목사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낮에 글을 하나 썼지요. ‘헬레니즘 철학’이라는 글을 썼는데 그게 안 되기 때문에 오늘날 목사들이 원하는 것이 뭐냐, 인생철학을 원하거든요. 그래서 ‘인생철학을 가르쳐 줄 테니 잘 배워서 인생 멋지게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용기 있고 절제가 있고 덕이 있고 지혜롭고 훌륭한 사람, 여러분은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만들어줄 테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해보겠습니까?’라고 해 놓고 성경 구절 다 들춰가면서 성경공부하면서 성경을 가지고 ‘여러분은 성경을 행해서 이렇게 훌륭한 사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구원 되었습니다.’ 라고 이것을 이야기하는데 집중해서 그저 고객의 발목을 잡는 거예요.

그렇게 가르쳐놓고 돈 내라고 하거든요. 교육비는 받아야 되니까. 그러면 그 인간은 훌륭한 자기 자신을 섬기게 돼요. 물론 복음은 날아가 버리고 복음 바깥에서 자기를 섬기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주특기였습니다.

여기서 조금 어려워집니다. 27절을 다시 봅니다.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케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광야에서 안식일 날 만나가 내리지 않았다, 만약에 안식일 그날 처음 태어난 아이 같으면 그 애가 태어나자마자 말을 한다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엄마, 오늘 치 양식 어디 있는데?’ 하고 물을 거예요. 그러면 엄마가 하는 말이 ‘얘야, 오늘 양식 걱정하는 날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미래의 안식의 땅을 바라보면서 안식의 땅인 천국에서 해야 될 일을 오늘 먼저 해야 되는데 그것이 급선무지 네 양식 찾지 마라.’고 분명히 이야기했을 거란 이야기죠.

쉽게 가 봅시다. 안식일 날 양식을 안주는 것은 안식일에 할 일이 따로 있는 겁니다. 그게 레위기 26장 2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의 성소를 공경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소를 공경하는 방법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17장 26절 “사람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과 둘린 곳들과 베냐민 땅과 평지와 산지와 남방에서 이르러서 번제와 희생과 소제와 유향과 감사의 희생을 가지고 여호와의 집으로 오려니와.”

여기에서 제사를 빼버리면 남는 것은 하나밖에 업습니다. ‘감사’입니다. 아니, 뭘 받았다고 감사합니까?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희한한 게, 물론 믿음이 좋아야 희한하지만, 아무것도 받은 것도 없으면서 감사하고 있는 거예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마 이방인들이 보면 놀릴 거예요. ‘뭐! 뭔데 감사하는데?’

안식의 땅, 요새 말로 하면 천국이죠. “천국에 우리를 넣어주겠대. 우리가 천국백성이래. 그래서 이 편지가 날아왔대. 감사합니다!” “감사면 감사한다고 하면 되지 왜 제사는 드리는데?” 신명기나 레위기나 안식일 날의 제사법이 나와요. 그런데 그 제사법이 특별합니다. 보통날 하는 제사법과 달라요. 무엇에 치중하느냐, 하나님의 제물에 대해서 양이 많아집니다.

다른 노동은 못하고 집중적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제사에 매진하라고 제사의 양이 많아져요. 제사가 많아진다는 것이 뭐냐, 천국, 약속의 땅에 도저히 갈 수 없는 조건을 주님께서 미리 앞당겨서 우리가운데 동행시켜서 동행되고 우리 속에 삽입된 그것으로 인하여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삽입된 하나님의 법의 능력에 의해서 그 법이 처음부터 주어진 그 최초의 원천지로 데려가는 식으로 데려가니까 ‘감사합니다!’ 이 말입니다. 끌려가니까 ‘감사합니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내용, 우리가 받은 계시 곧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이러한 조건과 원리는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하고 내놓는 것이 제사가 되는 겁니다. 주일날 교회 왔습니다. 예배드립니다. 예배드리는 태도가 어떠해야 됩니까? 이방인들은 산에 가지요. 놀러갑니다. 등산 갈 수도 있어요. 두 다리 멀쩡하니까, 등산복도 멋있는 것 샀고 도시락은 24시 김밥 집에서 사면되니까 갈수 있어요.

우리도 그런 자유의지 있고 그런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도 있습니다. 왜? 우리가 개도 아니고 고양이도 아니고 인간이니까 갈수 있어요. 그런데 왜 안가지요? 첫째, 벌 받을까 싶어서. 하나님께 벌 받아서 산에서 떨어지면 나만 손해니까. 이것은 바로 철학입니다. 그것 때문에 제가 ‘헬레니즘철학’이라는 글을 쓴 거예요.

철학의 특징은 자기를 섬기는 거예요. 어렵게 이신론(理神論)이라고 하는데 신을 인정하되 구원은 신과 내가 합동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한 가지 예를 들면 드럼통이 있는데 그 드럼통을 굴려가려면 조건 하나, 하나님이 이 드럼통을 밀어줘야 되고 두 번째, 드럼통이 네모지면 안 되고 동그랗게 되어서 잘 굴러가니까 ‘하나님 쪽에서 구원해주시되 구원받는 쪽인 내가 노력을 해줘야 주의 노력과 내 노력이 합세해야 구원된다.’는 이것이 바로 스토아학파, 쉽게 말해 철학입니다.

아주 칸트가 좋아했어요. 캘빈이 미칠 만큼 좋아했습니다. 오늘날 캘빈의 후예인 개혁주의자들이 아주 좋아서 미칩니다. 목사들이 그것을 멋지다고 봅니다. 사실은 복음도 아니고 철학입니다.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인간들은 왜 그리 좋아하느냐, 성령이 찾아오지 않으면 인간의 본색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죄악 된 본색인데 교회 와서 예배드릴 때 예배 안 드리면 죽어서 좋은데 못갈까 싶어서 지옥 갈 까 싶어서 그런 관점으로 예배를 드리면 예배는 드리는데 감사가 안 나와요. 감사가 안 나오고 옆 사람과 비교하고 경쟁을 해요. ‘예배드리는 태도 봐라.’ 또 할머니들 보면서 ‘저 할머니는 찬송가 가락도 다 틀리고.’ 기도하는 사람들 보면서 ‘기도하는 게 10초도 안하고 저게 무슨 기도인가.’ 합니다. 전부 다 경합을 하면서 감사가 안 되고 우쭐댐이 나오게 되겠지요.

그런데 안식일에 하는 일이 뭐냐, 왜 우리가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이 미래에서 편지가 날아왔고 그 편지 뜯어보면 공짜로 구원받고 그 공짜로 구원받게 된 그 이유를 보니까 우리 대신 어린양이 희생했기에 그렇게 되었고 그래서 그 희생양이 하신 이런 이유로 인해서 우리는 감사합니다, 라는 뜻으로 그 안식일에는 일하지 않고 이미 확정지어진 하나님의 천국에 대해서 고마워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얘야, 너 오늘 태어났지? 오늘은 양식 이야기하지 마라. 오늘 죽으면 곧장 천국에 가는데 그 양식이 지금 문제가 아니야. 주께서 주실 거야.’ 그날에는 만나가 끊기는 날입니다. 그것은 그 만나가 끊기는 땅, 안식의 땅, 약속의 땅 주님과 함께 영원히 감사하면서 살아갈 땅이 우리에게 남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건성으로 예배 참석하지 않고 오늘도 미래에서 날아온 하나님의 편지의 내용이 어떠한가를 다시 들추어 보았습니다. 그저 고맙고 감사합니다. 우리도 예수 안 믿어도 되는데 교회 안 나와도 되는데 하나님께서 편지를 주셔서 믿게 하셨으니 천국백성 만들었사오니 천국 가서 할 감사를 지금부터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