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5. 1. 00:21

말씀과 함께 (예레미야 17:12-18)

말씀과 함께

2010년 4월 2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7:12-18

(렘 17:12, 개역) 『영화로우신 보좌여 원시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렘 17:13, 개역)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렘 17:14, 개역)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렘 17:15, 개역) 『그들이 내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뇨 이제 임하게 할지어다 하나이다』
(렘 17:16, 개역) 『나는 목자의 직분에서 물러가지 아니하고 주를 좇았사오며 재앙의 날도 내가 원치 아니하였음을 주께서 아시는 바라 내 입술에서 나온 것이 주의 목전에 있나이다』
(렘 17:17, 개역)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
(렘 17:18, 개역) 『나를 박해하는 자로 수욕을 당케 하시고 나로 수욕을 당케 마옵소서 그들로 놀라게 하시고 나로 놀라게 마시옵소서 재앙의 날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시며 배나 되는 멸망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예레미야가 전하는 말씀에 대해서 사람들은 특이하게 보았습니다. 그냥 평범하게 살지 왜 그리 힘들게 사느냐는 식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평범하지 않게 살게 하시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 지켜서 구원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만약에 말씀이 아예 그 사람을 덮쳤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과 말씀이 와서 덮친 사람의 차이를 제가 묻는 겁니다. 말씀이 덮친 예레미야 입에서는 재앙과 종말에 관한 이야기가 거침없이 나옵니다. 하지만 말씀을 지켜나가는 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자들은 형편 따라 그 말씀을 중도 포기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영화로우신 보좌여 시작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성도라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구조를 말합니다. 그 구조가 예레미야에게 덮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레미야는 이미 끝을 안 자가 됩니다. 끝을 아는 자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자입니다.

따라서 개인적인 포부보다 재앙이 어떤 구조에 의해서 주어지게 되느냐를 보여주는 자가 됩니다. 남탕에 가보면 몸에 문신을 한 사람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란 몸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져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대로 움직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예레미야나 성도는 이 땅에서 움직이는 성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만의 꿈들을 펼치는 무대로 이 땅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꿈이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성소가 그에게 덮쳤으니 하나님의 재앙이 어떤 식으로 펼쳐지는지를 말할 수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오늘 본문은 선지자의 고난에 관한 내용입니다.

흔히들 고난이라고 하면, 찡그리고 어둡고 부정적인 태도로서 버텨야 된다고 여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서 자신을 움츠리는 식으로 변신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금식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마태복음 6:16-17) 고 하셨습니다.

이는 흔히 고난을 자력으로 이겨내기 위해서 인내하고 결심하고 각오하고 다짐하는 식으로 이겨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고난 극복은 얼마 안가서 핑계대로 그 고난에 굴복하게 됩니다. 즉 “나름대로 열심히 버텨내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제대로 도와주지 않아서 결국 포기했습니다.”는 식입니다.

이런 식의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덮쳐지지 않고 맨 몸으로, 자기 의지로 말씀을 성취하려고 했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성전이 임하여 말씀에 덮쳐진 사람은 고난 속에서도 여유만만하게 통과합니다. 세상 것에 대해서 부러워하지도 않고 세상의 기세에 눌리지도 않습니다. 도대체 어떤 변화가 있었기에 그 어떤 고난에도 이렇게 대처할 수 있는 겁니까?

한 예를 들겠습니다. 옛날 학교 다닐 때, 소위 ‘문화교실’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좋은 영화를 접할 수 없는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문교부에서 단체로 시내 영화관에 입장에서 헐값에 영화 감상하는 것으로 수업을 대체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학생들이 그 문화교실 행사가 있는 날이면 그 전날부터 들뜨게 됩니다.

일단 같은 친구들과 같이 영화를 본다는 게 신나고, 헐값에 보니 좋고, 공부시간을 대체해서 재미나는 영화를 대하는 것이 희열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화교실 가기를 손꼽아 기다린 오후 시간에 갑자기 담임선생님께서 두 학생은 남아라고 했습니다. 물론 다른 학생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문화교실을 가서 학교가 조용해져 있습니다.

그 두 학생은 문화교실 가지도 못하고 학급 청소를 강제로 하게 됩니다. 얼마나 화가 나고  짜증나겠습니까. 하지만 선생님의 엄명이나 항의도 못하고 속을 삭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화교실에 갔던 친구들이 그만 영화관이 불이 나서 다 죽었다고 칩시다. 그 소식을 나중에 듣게 된 그 학생이 하나님보고 뭐라고 고백하겠습니까? “하나님 왜 하필이면 저희를 살려두셨습니까?”라고 감격해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남은 자만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때, 이처럼 일방적이고 강제로 구원받을 자를 따로 떼어놓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구원되게 하십니다. 아무런 행함도 없이 구원되게 하십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남게 하셨다는 그 사실만으로 구원되게 하시는 겁니다.

이런 고백이 디모데 1:9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뜻대로 구원되어야 될 자는 필히 하나님께서 따로 남겨 두십니다.

이런 사람의 남은 인생은 더 이상 하나님에게 불평할 건덕지가 없는 인생입니다. 자기에게 어떤 사태나 어떤 불상사가 들이닥친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조차 자신이 따질 것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됩니다. 바로 고난이란 이런 신앙 자세를 가지고 통과하는 자가 참된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덮치게 되면 이 사람은 더 이상 타인의 기세에 눌리지 않는 인생이 됩니다.

세상에 대해서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단지 영원 전부터 일방적으로 ‘남은 자’되게 하시는 그 은혜를 두고두고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교회에서 그 어떤 일들이 일어나도 전혀 문제될 것도 없습니다. 바로 이런 자의 몸에 하나님의 재앙과 멸망과 관한 말씀이 새겨지게 되면 불신자들은 이 성도를 비난하게 되고 비웃게 됩니다.

“네가 주장한대로 말씀대로 세상이 안 돌아가고 있잖아”라고 놀리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소란 바로 이런 재앙과 종말을 유도하기 위해서 성도를 남은 자 되게 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쪽에서 그들을 성전되지 못하게 하는 방식이 곧 그들이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고 비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기 몸을 주장하는 것이 말씀이요 거룩한 성전인 것을 염두에 두고 그런 존재가 되기 위해 남겨진 사람이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행함대로 구원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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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강-렘17장12-18(말씀과 함께)-jer100428

2010-04-29 10:37:09   이름 : 오용익
 
 
060강-렘17장12-18(말씀과 함께)-jer1004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7장 12절부터 18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78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17:12-18

“영화로우신 보좌여 원시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그들이 내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뇨 이제 임하게 할찌어다 하나이다 나는 목자의 직분에서 물러가지 아니하고 주를 좇았사오며 재앙의 날도 내가 원치 아니하였음을 주께서 아시는 바라 내 입술에서 나온 것이 주의 목전에 있나이다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 나를 박해하는 자로 수욕을 당케 하시고 나로 수욕을 당케 마옵소서 그들로 놀라게 하시고 나로 놀라게 마시옵소서 재앙의 날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시며 배나 되는 멸망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예레미야가 지금 사람이죠. 목욕탕에서 어떤 젊은 사람 보면 문신이 새겨져 있습니다. 독수리문신도 있고 또 팔뚝에 ‘해병대’ 이런 것을 써 놓았는데 자기는 영원히 해병대라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이 선지자에게 문신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적혔다고 한다면 그 선지자는 평생 동안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모르는 사람, 말씀이 전혀 없는 사람은 선지자의 몸에 있는 말씀의 문신을 보고 상당히 특이하게 느낄 겁니다. ‘당신은 무슨 팔자가 되어서 말씀을 몸에다가 새기느냐.’하고 걱정할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에게 그들의 인생을 만들어 가시면서 무엇을 거기다 새기느냐, 그 등짝에다 멸망, 재앙 이런 것을 새기는 식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 번 만져보세요. ‘재앙’, ‘멸망’이 쓰여 있는지를.

끝을 아는 자가 전부를 아는 자입니다. 끝을 알게 되면 과정 때문에 좌절하지 않습니다. 중간의 과정 때문에 남에게 겁을 내거나 기죽거나 할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몸 자체가, 자기의 등짝에 새겨진 문신이 재앙이고 멸망이고 종말이 적혀 있다면 자기의 몸 자체가 하나님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는 도구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들은 예레미야보고 상당히 특이하다고 느껴질 겁니다. 그런데 도리어 예레미야는 그런 사람들 보고 ‘인간들 참 안되었다. 왜 저렇게 살지?’ 이런‘식으로 오히려 측은하게 보는 겁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예레미야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들, 그들과 예레미야가 섞이지 않는 두 부류의 사람이 나오는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제 3의 위치에, 우리가 제 3의 관찰자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들에게 속하면 그들에게 속하든지 아니면 예레미야에게 속하면 예레미야에게 속하든지 둘 중의 하나에 속하는 거예요. 전에도 이야기했지요.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그 오른편이 주의 자리라는 말은 항상 왼쪽을 염두에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오른쪽이 아니면 그냥 왼쪽이고 왼쪽에 있는 자는 오른편에 설 수가 없는 겁니다. 양과 염소가 나눠질 때 그렇습니다.

따라서 예레미야를 보낸 것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종말’ 이런 식으로 그 몸체가 움직인다면 그 예레미야쪽에 서지 않는 사람은 본문의 ‘그들’에 해당되고 그 사람에게는 무시무시한 재앙이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런가? 왜 하나님께서는 특이한 예레미야를 보내서 예레미야의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에게 재앙이 주어지게 하는가? 그 해답이 본문 12절에 나옵니다. “영화로우신 보좌여 원시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얼른 들으면 이해 될 것 같지요. 상당히 쉬운 단어니까 ‘아하, 하나님이 성전에 계시는구나.’ 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걸 약간 어렵게 깊이 있게 다루면 하나님의 성소는 구조입니다. 시스템, 체계에요.

그런데 예레미야는 하나의 인간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의 구조가 개인에게 흠뻑 뒤집어 씌워졌다,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하늘의 구조가 땅에서 움직이는 몸체로서 이 땅에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겁니다. 하늘의 구조가 개인에게 덮친 거예요.

만일 지금 하늘의 구조가 우리 자신들에게 덮쳤다면, 그렇게 덮쳐야 구원받는데요, 덮쳤다면 누가 반발하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굉장히 반발할겁니다. 평생토록 반발할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희망이 있고 내가 주체자로서 나만의 인생을 따로 꾸리고 싶은 거예요. 그러데 새잡을 때 새 조롱이 갑자기 내려오는 것처럼 위에서 철컥 하고 새장 같은 구조가 아예 나의 모든 사방을 포착해서 갇히게 하듯이 내려와 버리면 우리는 그 구조 앞에 나만의 인생, 나만의 희망, 나만의 행복 이런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 구조가 주는 그 그림자, 종말의 그림자 재앙의 그림자가 우리 등짝에 ‘종말, 이 종말, 김 종말, 종말’ 우리 몸 전체가 종말을 보여주는 구조 안에 놓여 있는 하나의 몸체로서 움직이게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 몸이 성소다 그 말입니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위에서 쿵 하고 떨어져서 우리를 삼켜버리고 덮쳐버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움직이는 성전이 되어버리는데 그러한 하늘의 성전에 갇힌바 되지 못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저 사람은 같은 21세기에 살면서 왜 세상을 저렇게 보고 저렇게 살지?’하고 상당히 기이하게 여기는 거예요.

그리고 뭐라고 구시렁거리느냐 하면, 15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내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뇨 이제 임하게 할찌어다.” 쉽게 말하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고 말씀대로 됩니다. 성경말씀대로 세상은 착착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 성경말씀을 무시하고 안 듣게 되면 여러분들은 지금 다른 길로 가고 있는 겁니다. 꼭 반드시 세상은 성경말씀대로 끝장납니다.’ 라고 하나님의 구조에 갇힌 사람은 계속해서 누굴 만나도 하나님의 말씀에 준해서 이야기를 해대니까 하나님의 구조가 덮치지 않은 사람은 화가 나는 거예요. 그것이 굉장히 자기에게 모독감으로 느껴지는 겁니다.

사람이 모독감이 느껴지면 반발하기 마련이잖아요. 그래서 뭐라고 놀리느냐,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세상이 심판된다며? 그런데 왜 조용하지? 네가 성경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졌다, 그렇게 우기는데 왜 세상은 우리가 보기에 아무런 변화도 없고 성경말씀 한절도 모르고 하나님 안 믿어도 이렇게 행복하고 자식들 시집장가 잘 가고 잘 먹고 잘 살고 이렇게 여유 있는데 네가 이야기하는 그 말씀은 언제쯤 이루어지지?’라고 계속해서 놀리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주제는 한마디로 ‘고난’입니다. 그런데 이 고난이 왔을 때, 제가 누누이 걱정이 되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고난이 왔을 때 그 고난을 인내하면서 억지로 참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면 안 됩니다. 그것은 성경말씀 자체를 오해하신 거예요. 참아서 고난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자기 오기를 측정하고 시험하는 것 밖에 안 됩니다.

그렇게 할 때 나중에 남는 것은 버티다, 버티다 결국은 가룟유다처럼 예수님 팔아먹고 주님 앞에서 돌아서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 모든 말씀을 자기 힘으로 자기 의와 결심으로 지키면서 예수님 떠나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애썼습니까? 그런데 마지막 남은 제자까지 결국 예수님을 세 번씩 저주하고 떠났잖아요.

이 말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주어질 때 우리가 흔히 상식적으로 ‘말씀이 주어졌으니 이 말씀을 내가 지키겠다. 이렇게 나오시기 쉬운데요, 그것은 기본이 잘못된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지키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어떻게 지키는가, 제가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보통 고난이라고 하면 일단 찡그려지고 슬프고 어두움이 좌우하고 인생이 부정적이고, 그렇게 느껴지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성령이 임해서 온 고난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괜히 바리새인처럼 금식할 때 찡그리고 구제한다고 폼 내는 식으로 되기 십상인데 주님께서는 오히려 ‘금식할 때는 포마드 바르라.’고 했잖아요. ‘금식할 때는 머리에 기름 바르고 구제할 때는 오른손이 왼손 모르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고난에 직면했을 때 우리 인간자체가 제대로 성도인 사람과 성도 아닌 사람이 판명이 나요. 어렵게 할 것이 아니라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예를 들 테니까 여러분이 한 번 느껴보세요. 50대 이상 되신 분들은 다 아는데 옛날에 문화교실이라는 것이 있었어요. 학생들 단체관람으로 영화 보여주는 겁니다. 오전 수업 하고 오후시간 5, 6교시 할애해서 단체로 영화관에 간적이 있습니다.

문화교실이라 해서 단체관람으로 영화관에 가면 일단 싸게 영화를 볼 수 있고 단체로 친구들과 같이 가기 때문에 영화가 재미있어요. 그런데 문화교실을 가려고 막 나서는데 선생님이 ‘야, 38번, 22번, 두 사람은 남아. 너희 둘은 가지 말고 남아.’ 자기는 문화교실 간다고 좋아서 기대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강제로 남아서 청소를 하게 했습니다. 결국 못 간 거죠.

애들은 ‘야, 안됐다.’ 하면서 극장에 다 몰려갔어요. 이건 실제가 아니고 예를 드는 겁니다. 학생들이 다 극장으로 몰려가서 영화를 보는데 그 극장에 불이 나서 영화 보던 애들이 다 죽었다 합시다. 다 죽었을 때 둘이 남은 애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왜 하나님께서는 저를 거기에 안 데려가셨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저를 왜 구원하셨습니까?’ 극장이 낡아서 누전되어 불이 날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청소를 해도 고소하게 청소를 했을 거예요.

그런데 막 속이 타는 거예요. ‘내가 가야되는데, 그 영화 보려고 내가 얼마나 기대하면서 기다렸는데.’ 짜증은 짜증대로 다 나고 선생님한테 대들고 하나님 믿는 사람 같으면 ‘하나님, 너무합니다. 나는 하나님 믿는데 왜 안 보내줍니까?’ 이렇게 하다가 막상 불이 나 버리니까 그 다음부터 생각이 바뀌어서 ‘하나님, 왜 나를 구원하십니까?’라고 할 거라 이 말이죠.

그게 기본이에요. 그게 예정론입니다. 구원하는 데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너는 남아라, 그겁니다. 그게 ‘남은 자’ 거든요. 하나님의 성소가 우리에게 덮치는 것은 우리보고 성전대로 살고 말씀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너는 남아 있어. 너는 거기에 합세하지 말고 따로 나와 있어.’라는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그러면 그 두 학생은 그 남은 인생, 열일곱 살 이후에 평생토록 계속 생각하는 것은 뭐냐? 하나님이여 왜 저를 그 때 안 죽이고 살게 했습니까? 하나님이여, 무슨 은혜가 이런 큰 은혜를 받았는지요? 내가 지금 사는 것은 덤으로 사는 것이고 나는 진즉에 죽어야 되고 애들은 다 죽었는데 나도 갔으면 같이 죽었는데 덤으로 사는 겁니다.

사는 것이 내 인생이 아니고 주께서 은혜로 살려줬다는 것, 주께서 예정하사 남은 자가 되게 하셔서 구원되었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이런 인생을 어른이 된 지금까지 보내고 있습니다. 그걸 한시도 잊을 리가 없다 이 말이지요.

그렇다면 그 사람이 나중에 어른이 되고 교회에서 권사 투표 떨어지고 교인들과 싸우고 목사는 돈 떼먹고 도망갔다고 하고, 그러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무엇을 잊어버리지 않느냐, 심지어 교회에서 엉망진창이 된다 할 찌라도 그것이 나를 예정하사 구원해주신 그 은혜를 잊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 은혜를, 그 고마움과 감사를.

그것 때문에 그 은혜가 손상 보는 일은 없다는 말이지요. 그럴 때마다 허허, 웃으면서 ‘살려준 것이 어디인데! 사람들끼리 이런 일들이 있는 이것이 뭐가 그렇게 문제가 되고 짜증날 일인지. 그 때 극장에 갔으면 완전히 불에 탄 시체가 되었을 것인데, 그걸 생각하면 교회에서 다투고 질타 받는 것이 뭐가 문제인가? 세상사에 다 그런 일이 있지.’라고 여유 있게 사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예정하사 뜻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너는 남아 있어.’라는 식으로 이유도 없이, 자기한테 아무 이유도 없는데 ‘그냥 남으라.’ 해서 남은 거예요. 이유 없이 ‘남아라’ 해서 구원되었다 이 말이죠. 그런 식으로 우릴 구원하십니다. 그런 식으로 구원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구원된 사람에게 있어서 진짜 이 사람이 하나님께 남은 사람인지를 알기 위해서 그렇게 남은 사람에게 인간적으로 견딜 수 없는 모욕과 핍박을 계속해서 그 사람에게 쏟아져 오게 하지요.

성도는 그럴 때 마다 싱글싱글 웃지요. 어떤 시련과 고난이 온다 할지라도 ‘그 때 문화교실 안가서 살아난 것 생각하면 지금의 이런 수모 같은 것들은 내게 주신 은혜를 절대로 손상시키거나 빼앗을 수 없다.’ 고 오히려 더 감사하게 되는 거예요.

방금 한 이야기가 디모데후서 1장 9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부르심’ 그러니까 이게 문화교실 안가고 청소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바로 이점입니다.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문화교실 안가고 청소를 힘들게 했다고 해서 살려준 것이 아니고, 청소 하든 안하든 상관없어요, ‘너는 남아 있어.’ 그걸로 그 두 학생은 영원히 사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이렇게 예정되어서 살았다는 것을 자꾸 놓쳐버리고 신앙생활하면서 자꾸 자기행한 것을 정리를 하려 해요. 행한 것을 자꾸 뽑아서 ‘이만큼 열심히 했는데 하나님이 왜 내 뜻대로 안 해줍니까?’ 자꾸 따지는 거예요. 이것은 자기 행한 대로 하는 거예요. ‘이렇게 열심히 행했으니까 구원 내놔라.’하는 식이 되어버려요.

이럴 경우에 예레미야같이 고난이 와버리면 그들은 단번에 하나님에 대해서 돌아서게 됩니다. ‘나는 더 이상 하나님 안 믿는다.’ 옛날에 샌드위치맨이라 해서 앞뒤로 광고가 적혀 있는 광고판을 목에 걸고서 극장 같은 사람번잡한 곳에 서서 동동구루무 파는 사람이 있었어요. 예레미야가 그처럼 앞에 달고 뒤에 달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뒤에 무엇이 있는지 누가복음 21장 34절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생활의 염려로 말미암아 마음이 둔하여졌을 때 이 온 천지가 사라지는 불 심판이 주어진다.’라는 뜻이 바로 재앙입니다.

그러므로 36절에 보면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있으라.”라고 합니다. 이것이 샌드위치맨처럼 예레미야 뒤에 붙어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있는 성소가 이 지상에 와락 내려와서 예레미야를 폭 하고 덮어 씌웠습니다. 그 순간부터 예레미야는 앞뒤로 하나님의 재앙의 말씀, 멸망의 말씀이 여기에 작용합니다.

멸망의 말씀을 전하니까 그 당시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네가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 되는데?’ 이젠 지쳤다는 거지요. 처음에는 그런가 싶었는데 이제는 안 속는다는 겁니다. 예레미야가 당시에 그랬어요. ‘바벨론에 잡힌다. 멸망한다.’ 숱하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도 이야기하니까 이제는 이력이 나서 안 먹어주는 거예요. 아예 먹혀주지를 않아요.

신학교 졸업해서 목사 되고 난 뒤에 처음에 목회지 부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신학교 졸업한지 얼마 안 되기 때문에 말씀대로 전한다고 열심히 합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젊은 목사가 말씀대로 하는구나.’ 한 6개월 먹혀들어갑니다. 한 1년 하면 ‘친구야, 마이 무으따. 고마해라.’ 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들으려고 온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목사가 샌드위치맨이 되었다가 갑자기 ‘아하, 교인들이 말씀을 안 좋아하는구나.’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포기를 해버려요. 하나님의 말씀을 훌떡 벗어 던져버리고 ‘여러분들이 원하는 긍정적인 사고방식, 살림살이 나아지는 것’을 이야기해요. 특히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런 말씀 그리고 하나님의 예정하심 그리고 마지막에 재앙의 날이 온다는 것, 이런 것을 이야기하지 않아요.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진짜 하나님의 성소가 임한 사람과 성소가 임하지 않은 사람 사이가 그러한 환경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렇게 말씀을 버린 목사가 뭐라고 핑계 대느냐 하면 ‘말씀대로 하려고 하는데 교인들이 그 다음부터 교회를 안 나와서 그 때부터 고난이 되어서 그 고난을 내가 이기려고, 이기려고 했는데 제가 믿음이 부족하고 의지가 약해서 그만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습니다.’라고 나옵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고난이라 하는 것은 본인이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이 지키는 것이 아니고 본인 스스로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어야 돼요. ‘웬 떡인가, 아무것도 할 줄도 모르는 인간을 이렇게 구원하시다니. 너는 남아 있어, 라고 해서 이유 없이 구원하시다니.’

이것이 가면 갈수록 그 목회자가 기뻐지고 뿌듯해지고 고마워지고 ‘창세전에 예정된 대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불러주셨습니다.’라는 것을 본인부터 이 말씀을 통해서 보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말씀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드느냐, 바로 본문의 말씀입니다. 본문에 보면 예레미야의 말이 전혀 먹히지 않는 것이 보입니다.

‘와, 예레미야의 말이 전혀 먹히지가 않는구나. 그런데 희한하게 우리교회 교인들도 전혀 안 먹히네. 세상에 이렇게 기쁠 수가!’ 이렇게 되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자기 말에 안 먹힌다고 해서 짜증을 낼 것이 아니라 예레미야 17장의 말씀을 보고 ‘아, 세상이 내 말이 먹혀 들어갈 세상이 아니었지. 말씀 좋아한다고 해서 처음에는 좀 사귀는데 계속 말씀 전하니까 그 다음에 삐지는 것을 보니, 그렇지,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참 정확하게 일하시는 분이지. 스스로 노력해서 구원받을 사람들은 절대로 하나님께서 넣어주지를 않는 것이 확실하군요.’라고 되는 겁니다.

끝으로 중요한 것 하나를 더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성소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13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인 여호와를 버림이라.” 이게 무슨 뜻일까요? ‘무릇 여호와를 버린 자는 흙에 기록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라.’

흙에 글씨 써 놓으면 바람 불으면 다 흩어져 버립니다.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쉽게 하겠습니다. 이 땅의 특정 사람이 하나님의 성소가 되려면 마네킹은 좀 나가줘야 됩니다. 제가 어릴 때 저희 집이 양품점을 했거든요. 마네킹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어릴 때 보면 그것들이 굉장히 신기했어요. 사람같이 생기기는 했는데 말도 못하고 바보같이 하루 종일 쇼윈도에 서 있어요.

하나님의 성소가 주어지게 되면 마네킹 같은 사람들은 사라져야 됩니다. 마지막 때에 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 성서가 될 그 구역에서도 사라져야 되고 제발 나가줘야 되는 거예요. 제가 어렵다고 한 것이 뭐냐, 그들이 나갈 때 그냥 나가지 않고 꼭 구시렁거리면서 나가게 되는 겁니다. ‘나, 하나님 말씀 이제 안 봐. 나 하나님 말씀 싫어. 세상살이 바쁘기 때문에 말씀 보는 일에 신경 못써.’

쉽게 해서 여호와를 버린 자는 마네킹 같은 존재가 되어서 절대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올 수 없는 겁니다. 제가 방금 성소에서 내쫓는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보면 성소에서 내쫓은 것이 아니고 본인이 성소 되기를 거부하는 양상으로 자진해서 나가주는 식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걸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반발이라는 요소를 자꾸 유발시키면서 성소 될 자와 성소밖에 있는 자를 구분시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를 버린 자’라는 말씀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를 만들어 내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는 자 ‘하나님의 말씀대로 남게 해줘서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예정되어서 구원받았지 저는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습니다.’라는 말씀을 믿는 자를 만들어서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이 그걸 보고 욕을 해대면서 ‘너는 무슨 빽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냐? 나는 헌금하고 기도 많이 해서 구원받았는데, 나는 교회 충성해서 구원받았는데 너는 그냥 구원되었다는 것이 말이 돼?’라고 욕을 하게 만들어요.

욕을 하게 만들어서 주님이 그들을 내쫓는 식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성소 된 사람들하고 상종을 하지 않겠다고 단체로 갈라지는 식으로 그들은 나가게 되어 있어요. 왜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런 말씀을 하느냐, 마네킹이 성경말씀 알아듣습니까, 이처럼 이 세상전부가 마네킹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성소인 사람과 성소밖에 있는 사람을 갈라놓기 위한 하나님의 전략인 것을, 그렇게 말씀대로 되는 것을 우리가 기뻐하라는 겁니다.

마태복음 10장 19절에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예수님께서 열두제자 보내시면서 성령 임해서 말하게 하실 때 주위 사람들이 얼마나, ‘네가 참 특이하다. 네가 미쳤다. 어떻게 너만 하나님을 아냐.’라고 얼마나 욕설을 해댔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곧 마네킹 같은 존재들이에요. 아무리 그들을 붙잡고 ‘주께서 마지막 때에 임하십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나도 옛날에 많이 들었습니다.’하고 자진해서 떠날 때 그걸 고난이라고 느낄 때 그걸 보고 섭섭하거나 서러워하지 마시고 오히려 기뻐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나도 떠나고 싶었는데 나는 왜 안 떠났을까?’ ‘너는 남아서 청소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남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하나님의 종말과 재앙의 말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전도하다가 한두 번 낙심한 것이 아닙니다. 목회하다가 설교하다가 얼마나 좌절하는지, 세상은 꼭 죽은 자요 마네킹 같습니다. 아무리 외치고 외쳐도 그들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에 서러워하지 말고 그래서 이유 없이 남은 자 된 것을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