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4. 22. 23:37

사람을 믿지 말라 (예레미야 17:5-11)

사람을 믿지 말라

2010년 4월 2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7:5-11

(렘 17:5, 개정)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렘 17:6, 개정)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렘 17:7, 개정)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렘 17:8, 개정)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렘 17:9, 개정)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렘 17:10, 개정)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렘 17:11, 개정)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하나님의 구원이란 인간 개인과의 관계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원래의 인간을 원하십니다. 원래의 인간은 환경없이 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이라는 환경 속에서의 인간이었습니다. 그 환경 속에서는 인간은 “선악과 열매를 따먹으면 죽는다”는 규정 앞에서 선 존재입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가 이 선악과 열매를 먹고 난 뒤부터는 이 ‘죽음’이라는 환경이 그들의 환경이 되었습니다. 즉 인간이라는 존재는 ‘죽음’이라는 환경 속에서의 존재로 볼 때만 제대로 된 인간입니다. 이 환경 속에서는 인간은 ‘저주받아야 마땅한 자’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 점을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생존하는데 있어 불편하고 힘들고 고생스럽게 되어야 될 이유도 알지 못하기에 인간들이 생각하는 신이란 기껏 ‘좋은 환경으로 바꾸어 주시는 좋은 신’이기를 소원하고 있는 겁니다. 즉 환경과 분리된 채 자기 자신의 역량으로 좋은 환경이 되기를 소망하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처음 에덴 동산에 인간을 두신 하나님의 취지가 무색해집니다. 하나님에게 있어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법과 말씀의 엄중함과 진실됨을 드러내기 위한 피조물로서 만드신 것입니다. 이점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사막길로 통과해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광야 사막 길이라는 환경은 인간으로 하여금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알게 하고 마음을 낮추게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즉 인간이 자력으로 자기를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게 하시는 겁니다. 도리어 그 반대로, 인간이란 이런 저주스러운 환경에서 죽어 마땅할 정도로 저주스러운 존재임을 자인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이 내리신 ‘죽음의 속성’을 제대로 보여주어야 될 책임을 진 자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이란 단순히 “헉!”하고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아담과 하와는 무수한 후손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죽고 죽고 또 죽어야 하고 심판받고 심판 받고 또 받아 마땅한 자들임을 통해서 ‘죽음과 죄의 왕노릇’을 드러내게 됩니다.

사막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해보면, 축복이란 사막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해고 저주란 사막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의 본색이란 사막 가운데서 진정 누구를 의지하고 있는가가 드러납니다. 인간들이 혈육적으로 믿고자 하는 신은 단지 삶의 환경 개선을 노리고 믿는 하나님입니다.

즉 “나는 이런 독한 저주스러운 환경에 있는 자가 아니니 속히 빼내주세요”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면 이런 인간이 비록 살기 편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린다고 할지라도 그 자는 원래 아담과 하와가 보여주어야 할 참 인간상이 아닌 것입니다. 참되고 복받을 자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밟아가고 있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바른 인간이요 아담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2-13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시는데 그 능력은 결코 인간이 갖고 있는 혈육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이 하나님의 권세는 그 인간만이 상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 때처럼 적절한 환경과 더불어 그 속에서 자신의 사람을 친히 생산해 내십니다.

고린도후서 4:7-10에 보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란 자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만드시는데 그냥 사도 바울에게 호소하는 식이 아니라 환경까지 조성해주십니다. 즉 답답하고, 우겨쌈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환경을 통해서 진정 사도 바울의 성도됨은 결코 자신의 능력이 있지 않음을 알게 하시는 겁니다.

즉 자신의 기도발이나 자신의 찬양발이나 자신의 헌신 능력이나 희생 능력으로 자신이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혈육을 믿고 사람을 의지해서 그것으로 권력으로 여기는 자들은, 항상 자신의 능력으로 활용하려고 합니다. 능력이 자기에게 있다고 우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란 이런 식으로 자신이 자기에게 능력을 가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9:28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오른편 보좌에 주님으로서 앉게 됩니다. 이 자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일하시는 자리입니다. 결코 자신의 능력으로 일하시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하기에 이 자리에서만 진정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할 수 있는 자리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인간으로서 그 어느 누구도 이 자리에 앉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경과했던 그 능력을 그대로 성도에게 임하게 하사 그들로 하여금 그 길 속에서도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깨달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 즉 “나같은 인간은 진작 하나님께서 포기하시고 버려도 될 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절망적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아들되게 하신 능력에 감사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이로서 성도에게는 더 이상 자기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은 필요치 않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축복받은 자격도 못되는 자에게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이 현실이 우리를 위한 현실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하심의 현실인 것을 저희들이 믿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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