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2. 18:59

기도하지 말라 (예레미야 7장 16-20절)


기도하지 말라

2009년 9월 2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7:16-20

(렘 7:16, 개정) 『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내게 간구하지 말라 내가 네게서 듣지 아니하리라』
(렘 7:17, 개정) 『너는 그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행하는 일을 보지 못하느냐』
(렘 7:18, 개정) 『자식들은 나무를 줍고 아버지들은 불을 피우며 부녀들은 가루를 반죽하여 하늘의 여왕을 위하여 과자를 만들며 그들이 또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나의 노를 일으키느니라』
(렘 7:19, 개정)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나를 격노하게 함이냐 자기 얼굴에 부끄러움을 자취함이 아니냐』
(렘 7:20, 개정)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나의 진노와 분노를 이 곳과 사람과 짐승과 들나무와 땅의 소산에 부으리니 불 같이 살라지고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우상을 만드는 자들에게는 자신의 신이라고 우기겠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없는 신’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땅에 진노를 퍼부어신다고 되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신으로 인정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우상을 만드는 사람은 단순히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나름대로 자기 입맛에 맞는 신을 자기가 제조하는 자들이 됩니다.

이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말씀과 계시를 거부하고 따로 자신을 위한 신의 계시를 따로 모으고 있는 바가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우상숭배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주신 것만을 도로 내놓기 위해서 자기 백성에게 기도를 시키기 때문입니다.

미리 결론삼아 신약의 예를 들겠습니다. 신약의 십자가는 용서의 표시입니다. 즉 십자가를 참 계시로 보는 이들은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나에게 주어진 용서가 그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능력이다”고 하면서 늘 감격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신약 때,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신 것은 자기 백성들의 기도와 모습을 통해서 “저는 이러이러해서 용서받았습니다”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고백을 되돌려 받기 위함입니다. 또 그런 차원에서 십자가 지셨습니다.

잠언 28:9에 보면,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율법 정신이 어떤 것이냐를 먼저 알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 안에 하나님의 계명을 삽입시키는데 그 방법이 바로 기도합니다.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심으시는 계명을 하나님께서 회수하시는 겁니다.

잠언 15:8에 보아도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직한 자의 기도는 어떠한 기도입니까? 누가복음 18장에서 보면 두 사람의 기도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죄 많은 세리요 다른 한 사람은 참으로 경건해 보이는 바리새인입니다.

그 현장에 예수님이 안 계셨더라면 누가봐도 바리새인의 기도는 응답이 되고 세리의 기도를 거부당할 것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고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현장에 나타났을 때, 상황은 반전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참 하나님 되시는 여호와께서 진정 원하시는 기도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된 뜻이 삽입 여부가 결정적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역시 두 종류의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는 이방인의 기도요 다른 하나는 성도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식으로 기도하지 말하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이방인들의 기도는 자기 욕구와 기대치와 자기 생존과 야망을 위하여 기도하지만 성도의 기도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는 식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이것을 통해서 보면, 성도란 하나님의 뜻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이방인들의 기도는 반대로 자신의 뜻이 되레 하늘까지 뻗히기를 간구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9:16-17에 보면,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옛 부대에다 새 포도주를 담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부대마저 새부대 되게 하시고 거기에 담길 포도주도 옛 포도주가 아니라 새포도주 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고 기도도 받으십니다. 새 포도주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새 계명, 곧 사랑입니다. 사랑 안에서는 모든 두려움이 없고 심판도 없고 오직 용서 뿐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기도 응답은 자신의 몸이 만들어내는 계시로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참 하나님의 계시인 용서로 가득차서 이미 용서받은 입장에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식으로 가득차야 합니다. 응답이란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성도는 기존의 몸을 수리, 보선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포도주로 새로 만들어질 몸이요 새로 창조될 몸입니다. 즉 구원이란 새 창조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을 하나님 홀로 다 하시는데 왜 우리가 구태여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우상숭배자가 다름아닌 우리 자신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 낡은 계시, 엉터리 계시, 악마가 심어준 계시, 이런 것들로 가득차서 정작 하나님의 뜻이 들어올 여지를 만들지 않고 세상 것으로 꽉꽉 채운 것을 다 털어놓게 하십니다.

그래야지만 ‘용서’의 의미로 새롭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즉 용서받았으면 우리가 받을 기도 응답은 다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용서가 세상 사람들에게 큰 밉상과 핍박을 자아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도로 하여금 고난 가운데 기도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야지만 세상에 대한 심판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8:3-7에 보면,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준비하더라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 버리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 버리고 각종 푸른 풀도 타 버렸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세상 심판하는 작업에 성도의 기도가 필히 관여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도로 하여금 이런 기도가 우러나려면 그만큼 성도는 세상적인 엉터리 기도소리에 마음이 상해야 하고 핍박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어야 하는 겁니다. 이 가운데서도 ‘여유만만’할 수 있는 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 뜻을 하늘까지 뻗힐 생각말고 우리 빈 마음에 다 이루어신 하늘의 뜻만 담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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