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8. 16:59

술 취한 백성 (예레미야 13장 12-14절)

술 취한 백성

2010년 1월 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3:12-14

(렘 13:12, 개역) 『그러므로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차리라 하셨다 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찰 줄을 우리가 어찌 알지 못하리요 하리니』
(렘 13:13, 개역) 『너는 다시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땅의 모든 거민과 다윗의 위에 앉은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예루살렘 모든 거민으로 잔뜩 취하게 하고』
(렘 13:14, 개역) 『또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간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관용치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유다 나라는 온통 술 취해 비틀거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에 푹 빠져 있습니다. 이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알려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도리어 이러한 지적이 의외라는 겁니다. 포도주 병 구멍에서 포도주가 넘쳐 난다면 자신들이 모를 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들은 그들이 신봉하는 ‘다윗의 위’가 곧 하나님의 저주로 차 올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다윗의 자리’가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자부심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해하기를 거기에서 ‘축복’이 차고 넘치도록 흘러나오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축복만 나오는 곳이 아닙니다. 저주도 넘쳐나는 곳이 바로 언약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고 자꾸만 괜찮은 수준의 의인요 착한 사람들이라고 간주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할 때는 무심코 ‘축복의 자리’로만 여깁니다.

그리고 그 축복이라는 것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선한 일에 매진하면 제공되는 것인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큰 오류입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는 인간의 착함과 안 착함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힘을 원하느냐’ 아니면 ‘봉사하고 섬기기를 원하느냐’고 판가름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0:28에서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교회에서 아무리 성실히 충성하고 반듯하게 살고, 바르고, 착하고, 말씀대로 살고 봉사를 많이해도 그것이 힘을 모으고자 하는 일이라면 곧 악마의 일입니다. 저주를 받으려고 그동안 고생 많이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를 만났는데, 악마가 예수님에게 제안한 것은 바로 “나와 손 잡고 힘을 모으자”입니다. 바로 이것이 보편적인 인간 세계의 사람 사는 원리입니다. 따라서 그 어느 인간도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란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거룩을 제공하는 곳입니다. 거룩과 더러움의 차이란 바로 ‘섬김’과 ‘힘 모음’의 차이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힘을 원하는 자신의 죄악성을 미처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언약의 자리를 사모하다가 그들은 저주를 듬뿍받는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언약이란 축복만 나오는 자리가 아니라 저주도 야무지게 나오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처럼 남을 위하여 섬기려는 것이 아니라 악마처럼 힘을 모으겠다는 자들에게는 저주가 가득 쏟아지는 자리가 바로 다윗의 자리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착함의 힘과 섬김의 힘, 구제와 봉사의 힘, 십일조의 힘을 믿었던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는데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으로 불리워지기를 원했다가 졸지에 예수님 만나서 저주받은 자들입니다. 반면에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세리는 예수님 만나서 의인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언약에 있어서 축복과 저주란 반드시 다 등장되어야 합니다. 에서가 저주받아야지만 야곱의 축복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이 힘을 포기하고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명이 사적인 힘을 찾는 것보다 항상 더 세게 작용합니다.

사명의 노선에 이끌려들어간 자들은 항상 그 끝을 보고 사는데 그 끝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거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아브라함 품에 들어갔고, 부자는 뜨거운 지옥 불에 들어갔습니다. 바로 사명자는 이 이야기를 배경을 깔고 누구를 만나도 만납니다.

마치 옛날 시골 장터 사진관에 보면, 아름다운 야외 풍경 그림을 뒷 배경으로 설치해놓고서는 그 앞 의자에 앉아서 가족 사진을 찍게 합니다. 그러면 사진을 보면, 마치 경치 좋은 곳에서 온 가족이 놀러가서 기념 사진 찍은 것처럼 보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사명자는 그 누구를 만나도 먼저 뒷 배경부터 둘러칩니다. 그 배경이란 바로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입니다.

거짓 나사로의 경우, 힘을 얻고자 해도 얻을 건덕지도 없었습니다. 몸마저 아팠습니다. 개들이 와서 핥았습니다. 반면에 부자는 세상이 부러워하는 힘을 축적했습니다. 매일같이 파티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그 부자에게는 사명이 이끄는 힘이 없었습니다. 부자는 그렇게 살다가 자신의 뒷배경이 되는 그 지옥불에 실제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 힘을 지향하고 추구한다는 것은 곧 세상이 가져다주는 술에 잔뜩 취해서 정신을 못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거지와 부자의 뒷배경을 깔아놓고 봅시다.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누구든지, 교회에 와서 어떤 자기만의 힘을 원한다면 그 사람은 저주를 자청하는 셈이 됩니다. 마치 ‘다윗의 자리’가 축복주는 자리인 줄 착각한 유대인들과 같습니다.

술취한 대표적인 자는 요한계시록 17:1-3에 나옵니다.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래 여자란, 자신이 섬길 남자를 찾아야 하는데 이 음녀는 자신이 사랑할 남자를 만나지 못해 맨날 술에 취해있습니다. 그래서 이 남자, 저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음행’이며, 그 남자라는 것이 바로 음녀처럼 독자적인 힘을 찾는 세상 권세자들입니다. 바로 이 원리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힘’이라는 음녀의 매력에 빠져서 저주의 술에 잔뜩 먹고 취한 상태가 되는 겁니다. 참된 사명을 받은 자들의 눈에만 힘을 추구하는 이 세상이 음녀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명을 받게 되면 오로지 자신이 섬길 ‘어린양’을 발견하고 세상의 힘이 부럽지 않고 그 어린양에서 주어지는 축복과 저주의 세계를 사모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의 자리가 새삼 힘을 모을 자리가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를 도로 복음을 위하여 드릴 자리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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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6우리교회수요설교녹취(렘 13:12-14/술취한백성)

2010-01-07 21:53:31 녹취 : 오용익

20100106우리교회수요설교/예레미야 13장 12-14절/술취한 백성(이 근호목사)

(기도)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찌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우연히 이 땅에 등장했는지 알았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보니 우리를 지으신 분이 분명히 계시고 특별히 우리를 하나님이 기르시는 양으로서 지정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양답게 양이 무엇인지 양의 갈 길이 무엇인지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알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이 시간 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도 살아 있는 채로 우리 눈에 보입니다. 식물 동물 모든 것들이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지는 것처럼 저희들도 똑같이 식물 동물 못지않게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주님의 것으로만 채워지기를 기도합시다. 나의 것 끼어들지 말고 내 자랑, 내가 잘한 것, 내 멋있는 것 끼어들지 말고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만 계속해서 열차의 객차처럼 계속 은혜로만 이어질 수 있도록, 그것을 알 수 있도록 다 같이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대 자연에 널려 있는 모든 동식물 해와 달과 별도 하나님께서 주관하는 힘으로 하나님께서 움직이는 힘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서 부지되고 있는데 왜 그리 인간들은 어리석은지 하나님의 은혜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지, 하나님, 저희 성도들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의 축복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만 계속해서 이어져 나가고 있음을 과거로부터 미래까지 은혜로 가득 채워져 있음을 저희가 한시도 잊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3장 12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71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13:12-14
“그러므로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차리라 하셨다 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찰 줄을 우리가 어찌 알지 못하리요 하리니 너는 다시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땅의 모든 거민과 다윗의 위에 앉은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예루살렘 모든 거민으로 잔뜩 취하게 하고 또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간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관용치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 집에 포도주 병이 있다는 거예요. 포도주 병이 있는데 그 병이 가득 찼다고 예레미야가 운을 뗐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이 하는 말이 ‘포도주 병에 포도주 찬 것 우리가 두 눈이 있는데 그것을 모를 리가 있느냐, 가득 차면 우리가 다 안다.’ 했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는 이야기를 못 알아들어요. 왜 못 알아듣느냐? 예레미야는 출발점이 ‘너희들은 죄가 있다.’라고 출발하는데 사람들은 ‘나는 건전하다. 나 보다 더 착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나는 너무 너무 평생토록 착하게 살았다. 그동안 훌륭하게 살았고 훌륭하게 산다고 참 애 많이 먹었다.’라고 자기를 훌륭한 존재로 간주하고 출발해요.

예수님은 우리를 보고 ‘너 죄인이야.’ 이래 시작하는데 우리는 항상 ‘예수님 잘 믿으려고 애 썼습니다.’라고 애 쓴 나를 출발점으로 해서 예수님께 접근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 선지자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지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자기는 한평생 착하게 살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는 성경을 잘 아는데 이 성경에 나오는 말씀대로 자기가 다 지켰다는 거예요.

‘거의 하자 없이 지켜 나오고 있는데 어찌 나보고 죄인이라고 다그치느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사람은 성경을 천 번 만 번을 봐도 성경에서 ‘착하다, 안 착하다’라는 식으로 하나님의 거룩과 세속을 구분하지 않는데 그 점을 몰라요. 하나님께서 ‘거룩하다, 거룩하지 않다’라는 것은 구약의 율법 가지고는 모르고 신약의 예수님을 통해서 무엇이 거룩이고 무엇이 더러운 것인가가 판가름됩니다.

뜸들이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처럼 섬기고 봉사하지 않으면 그것은 더러운 거예요. 반면에 예수님께서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내 생명을 바쳐서 섬기는 것, 그 일을 하러 왔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사람들은 아담 이후에 악마로부터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뭐를 모르느냐 하면, 힘이 되는 것, 힘이 나오는 것은 무조건 다 쥐고 있으려고 해요.

심지어 봉사, 직분, 착함, 의로움, 경건성, 깨끗함, 이런 것들을 있는 대로 다 모아서 그런 것들로 남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 된다면 사람이 사족을 못 써요. 예수님께서 광야에 오셨을 때 악마가 제안한 것이 그겁니다. ‘예수여, 나와 손잡고 이 세상을 지배하자.’ 오늘 본문에 ‘다윗의 자리’라는 말이 나와요. 이 다윗의 자리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축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자리입니다.

축복만 나오는 자리가 아니에요. 저주도 함께 나오는 자리에요. 항상 성경이 그렇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언약은 축복만 주는 언약이 아니고 저주도 함께 주는 언약입니다. 언약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저주받게 하는 언약이고 언약을 받아들이면 복 받게 하는 언약이 언약입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이 그렇게 이삭의 언약이 그렇고 야곱의 언약이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저주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오해하고 있는 대목중의 하나가 ‘야곱이 별미를 아버지께 바쳐서 복 받았다.’는 거예요. 거짓말을 했든 아버지를 속였든 어쨌든 간에 에서는 별미를 안 바치고 야곱은 별미를 바쳐서 축복을 받아서 야곱이 잘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야곱이 축복을 받게 되면 반드시 에서는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하늘나라 구조에요. 땅의 구조는 자식이 열이면 열손가락 안 아픈 손가락이 없듯이 다 예쁜 자식이 내 자식입니다. 다 내 배에서 났기 때문에 예쁜 자식이에요. 저는 자식을 둘 이상 안 낳아봐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보통 그렇게 이야기들 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식 사랑한다고 복 주시는 것이 아니고, 열자식이면 열 자식 다 복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신의 축복하심과 자신의 저주하심을 사랑해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자기만 사랑해요. 하나님은 자기의 축복하심과 저주하심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축복을 알려면 반드시 저주의 미움이 있어줘야 축복의 사랑이 사랑답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내 자식 같으면 어느 자식이나 할 것 없이 다 좋아하는 모양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에게 축복이 돌아가면 반드시 에서는 미움 받고 저주 받아줘야 돼요.

그래야 축복은 축복 값을 하고 저주는 저주 값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해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자리에 앉는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서로 싸우고 충돌될 것이라고 하고 있는데 다윗의 자리라 하는 것은 축복과 저주가 같이 나오는 자리입니다.

사람들이 교회 와서 저주의 말을 잘 안 듣고자 하고 들어도 남의 이야기로 듣는 것은 제가 아까 처음 이야기했듯이 자기가 죄인으로서 오는 것이 아니고 교회 나올 정도로 자기는 착하기 그지없는 존재라고 착각을 품고서 교회 오기 때문에 저주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로 들어요. 자기는 해당사항이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자식들이 부모를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그거예요. 부모는 내 자식이기에 무조건 사랑한다, 그래 되는데 아무리 가족이라도 자기 할 일 안하면 미워요. 형제간도 맏이라고 사랑하고 막내라고 미워하고 그런 것이 없습니다. 제 할 일 잘하면 막내라도 사랑하고 제 할 일, 제 밥벌이 못하면 맏이라고 해도 미워, 미워, 미워요.

남편을 사랑한다고요? 남편이 남편 구실을 해야 사랑하고 아내가 아내 구실을 해야 사랑해요. 아내가 비실비실 아프면 미워요. 남편 돈 못 벌어 오면 죽이고 싶어요. 이것은 다 아는 이야기니까 합니다. 형제간에는 피를 나눈 형제이기에 서로 사랑한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에 형제 중에 형이 말썽을 피워서 사고를 일으킨다든지 형이 공부를 못한다든지 엄마를 괴롭히거나 가슴 아프게 하면 어느 동생도 그 형 때려죽이고 싶어요.

때려서 죽이든지 안 그러면 기관차에 받혀서 죽든지 …, 제가 웃는 것은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형이 얼마나 미운지 동생이 하는 말이, 이런 말은 참 안했으면 좋을 말이기는 합니다만, 형의 앞일이 안 풀렸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예요. 제가 그냥 순한 표현을 썼습니다만 그 정도로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이라고 해서 인간이 아닙니다.

제 할 일을 안 하면 인간구실을 안하면 미워, 미워, 정말 미워요. 다윗의 자리를 사람들이 굉장히 선호하고 옹기종기 모입니다. 이스라엘이 다윗이라는 족보에 의해서 세습제, 아버지가 왕이면 자식이 자동으로 왕 자리를 물려받는 제도에 의해서 계속 왕 자리가 전수되니까 사람들은 그걸 힘의 자리, 남을 지배하는 자리로 본 거예요.

그래서 너나없이 왕이든지 왕이 될 사람들의 주변에 모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놓고는 하는 말이 ‘이만큼 출세한 것은 하나님의 은덕이고 사랑이고 축복’이라는 거예요.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 오는 이유가 뭡니까? 봉사하려고 오는 겁니까? 아니면 봉사해서 힘을 얻으려고 오는 겁니까? 광야에서 금식하는 예수님과 마귀와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았던 것은 ‘예수 당신도 이 땅에 힘 얻으려고 왔잖아. 힘이 있어야 일이 되잖아.’라는 악마의 가벼운 제안을 예수님께서는 무겁게 거부한 겁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그 악마의 제안에 굴복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만큼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힘을 원하는 겁니다.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철야하면서 기도할 수 있고 힘을 원해서 교회 다니고 힘을 원해서 봉사하고 헌신하고 헌금하고 목사 되고 충성하는 거예요. 세상에 어느 목사가, 봉사하려고 목사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깨놓고 이야기해서, 인간적으로 이야기해서. 심지어 이 수련회 강사자리도 그게 힘이 있는 자리인줄 알고 ‘왜 너만 하나?’라고 하는 거예요. 그 심보 자체가 ‘나는 열심히 십자가공부하고 복음 공부한다.’ 하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나도 힘 좀 가져보자. 왜!’ 이거예요. ‘나는 나쁜 짓 한적 없다.’ 이 말이 뭐냐 하면 ‘내가 나쁜 짓 한적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힘을 주시더라. 나쁜 짓 한적 없는 나, 이 목사를 건드리면 저주받는다.’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것이 서슴없이 내 것을 주는 쪽이 아니고 착하게 되었다는 것, 경건하다는 것, 성화되었다는 것 그것조차 힘을 끌어 모으는 하나의 수작이 돼요. 꼼수,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겁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네가 취했다.’하는 말입니다. ‘네가 술에 잔뜩 취했다.’ 술에 취했는데 다윗의 자리가 술병 꼭대기에요. 포도주, 술에 취해서 술로 넘치는 거예요.

‘포도주가 넘친다.’는 말은 힘을 준다고 여긴 다윗의 자리가 저주를 주는 자리인줄 그들은 생각도 못한 겁니다. 왜? 자기는 착하다고 생각하니까. 축복을 받아내기 위해서 다윗의 자리, 높은 자리 그것을 지향하고 그것을 내다보면서 자식 교육시키면서 ‘너도 다윗처럼 훌륭하게 되어라. 다윗, 다윗, 힘이 되는 자리, 우리의 욕망이 지향하는 자리’라고 했지 세상에서 맛도 못 본 가장 저주스런 저주가 술병 터지듯이, 술이 쏟아지듯이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지요.

저주가 나오는 구멍, 포도주 구멍이에요. ‘술 취했다’는 거예요. 온 세상이 힘이라는 포도주에 전부 다 취해 있어요. 교회고 교회 밖이고 전부 다. 힘이 없어서 환장했어요. 목사가 사별한지 2년도 안되어서 벌써 새장가 들었다는 소리를 듣고 ‘야, 목사가 힘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목사 아니었으면 그 사람이 2년 만에 새장가를 갈 수 있었겠어요?

그래서 그 힘의 자리를 안 놓으려고 하는 거예요. ‘나 싫거든 다 나가라.’ 그런 소리 나오는 것이 본성 자체가 악마의 본성이기에 그 힘이 축복인 줄 알고, 목사 자리가 축복인줄 알고 그렇게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이 언제 불행하냐 하면 사명이 없을 때 불행해져요. 사명이 없어버리면 힘만 축적하게 되는데 그런데 만약에 거기에 성령이 임해서 사명이 와버리면 그동안 하던 힘 끌어 모으기가 아무 쓸데없는 짓을 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명이 자기보다 힘이 더 세기 때문에 그래요. 사명이 하나의 객차고 그 사명에 실리게 되면, 그 사명의 노선에 올라가게 되면 거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보입니다. 저는 누굴 만날 때도 항상 밑에 배경을 깔고 봐요. 스크린을 깔고 봅니다. 보통 옛날 사진관에 가면 야외에서 찍은 것 같이 연출하기 위해서 풍경그림을 배경에 놓잖아요.

그래서 얼른 보면 스튜디오에서 찍었는데 야외에서 찍은 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저는 사람을 볼 때 배경을 먼저 깔아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배경을 깝니다. 누가복음 16장을 깔아요. 그러면 거지는 아브라함 품의 천국가고 부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서 물 한 방울 없는 뜨거운 곳에 갔지요.

‘안녕하십니까? 감사합니다. 국회의원 되십니까? 변호사 되십니까?’ 누구를 만나더라도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하고 그 뒤에다 부자와 나사로 배경그림을 깔아버려요. 깔고 그 사람을 보자 이 말입니다. 장차 지옥 가서 ‘저 변호삽니다. 의삽니다.’라고 명함 내밀 사람인지, 아니면 천국 가서 주님께 감사할 사람인지 배경을 깔아 볼 때 알아요.

그 배경은 언제 보이느냐 하면 그 배경 안에 본인이 이미 놓여 있을 경우에만 자기만 배경 까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도 같은 배경을 깔아서 그 배경 안에서 함께 만남이 성사되는 겁니다. 만약 어떤 목사가 ‘나는 김 목사입니다.’ 할 때 부자와 나사로 배경을 깔아버려요. ‘교인수가 어쩌고, 한 달 헌금수입이 얼마고, 예배당을 짓는데 ….’ 이러고 나오면 그것은 힘이거든요.

그런데 거지가 힘이 있었습니까? 거지 나사로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힘나올 건더기가 없지요. 몸만 성해도 괜찮지요. 거지에다 아파 있었고 개가 와서 핥고 있어요. 기가 막히죠. 거지 나사로가 자기배경에 천국이 있다면 결국은 현재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은 하나의 묵은 때지요. 양잿물에 담가야 돼요.

내가 만든 것은 평생토록 거지로 살아야 되지만, 내가 행한 것 말고 주께서 평생 동안 나에게 한 것을 양잿물에 담가서 분리 될 때 우리가 기대하고 우리가 감사한 것은 이런 허접스러운 거지같은 나도 주께서 천국에 넣어주었다는 주님의 고귀한 행함만 우리 눈에 보이는 겁니다. 사명자에게 그거 안보이면 사명 감당 못합니다.

항상 세상을 부자와 거지나사로 배경을 깔고 봐야 돼요. 백 프로 장담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힘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교묘하게 구제해 가면서,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해 가면서. 구제하고 금식하고 이 모든 것이 ‘나도 남에게 지지 않는 힘을 축적하겠다.’는 거예요. 목사, 장로, 집사, 권사의 자리가 그렇고요.

그런데 이 예레미야가 볼 때에, 하나님이 볼 때에 그 당시 유다는 그야말로 힘, 힘에 취했어요. 술 푸는 세상이에요. 완전히 힘에 취했어요. 남녀노소 할 것이 없이 전부 다 ‘우리는 다윗의 자손이다.’ 예레미야는 ‘다윗의 자손이니까 저주가 넘치게 흘러나온다.’라고 해석하는데 사람들은 반대로 해석해서 ‘우리는 다윗의 자손이다. 그 다윗의 자리에서 축복이 쏟아질 거다.’

그들이 말한 축복이라는 것은 바로 힘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남을 지배할 수 있는 힘, 남을 통치하고 남을 조종할 수 있는 힘, 남을 가지고 놀 수 있는 힘. 그런 인간 하나 교회에 들어오면 교회 힘듭니다. 목사가 그런 인간 같으면 교인들이 힘들고 장로가 그런 인간 같으면 목사와 교인들이 힘들고. 교인들 중에 그런 인간 있으면 안 힘들어요. 왜? 내보내면 되니까. 본인이 알아서 나가면 되니까.

십자가 알았으면 섬기려고 교회 와야 될 것인데, 십자가를 알았는데 왜 안 알아주나, 해서 십자가를 근거로 해서 힘을 달라고 오니까…, 우리 교회 같은 경우는 그런 포도주 병이 없습니다. 힘이라는 저주를 줄 수가 없지요. ‘힘 여기 있습니다. 힘 많이 쓰세요.’ 이렇게 어떻게 저주를 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악마의 지배를 받아서 술에 잔뜩 취해 있어요. 밤에 유흥가에 보면 잘난 자들, 잘난 놈들이라 해야 되는데, 잘난 놈들이 비틀거리면서 전부 다 나름대로 힘이 있다고 잘났다고 고함질러요. 심지어 지구대 끌려가서도 고함질러요. 남녀노소 관계없이 힘 있다고 힘 과시한다고 그래요. 그런데 그 비틀거리는 밤거리, 비틀거리는 유흥가, 그게 성경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17장에 보면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여자가 등장해요. 1절부터 보면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여자가 따라주는 술에 전부 다 취해버렸어요. 그리고 이 여자도 취해 있습니다. 얼마나 취했던지 그 여자는 전부 다 하나님을 훼방하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대놓고 모욕하는, 그것을 참람이라 하는데, 하나님에 대해서 도전하고 무시하는 그러한 큰 힘을 가지고 짐승을 타고 돌아다니는 여자가 있다는 거예요. 취해서 비틀거리면서.

이걸 포도주에 취했다, 저주에 취했다, 이래 됩니다. 이걸 왜 음행하는 여자라고 했느냐? 원래 창세기 2장에 보면 여자라고 하는 것은 남자를 위하여 있게 되어 있어요. 여자가 이렇게 술 취해서 돌아다닌다는 것은 자기가 섬길 남자를 못 찾았다 그 말입니다. 그게 음행이고 그게 음녀에요. 음녀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남자를 찾고 싶은데 자기가 섬길 남자를 만나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이 남자 저 남자를 집적거리는데 이 남자 저 남자가 바로 세상에 있는 임금들과 왕들과 종교지도자들이에요. 성경에 또 술에 취해서 저주받아서 그날 밤으로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다니엘 5장에 보면 벨사살왕이 있는데 그는 하나님을 모독했지요. 술잔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던 잔을 가지고 술을 마시면서 ‘부어라, 마셔라,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우리가 이겼다!’ 이렇게 하다가 갑자기 벽에 손가락이 글자를 썼는데 그 사람이 그날 밤에 죽었어요.

힘이라는 것은 사람을 취하게 만듭니다. 몽롱하게 만들어요. 취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그 측정저울을 가지고 나는 지금 어느 정도 힘을 축적했는가, 그걸 늘 살펴요. 그러다가 남의 힘을 보면 자기보다 힘이 더 있으면 왠지 부러워지고 시기 나고 그래요. 시기 질투가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자기 것과 남의 것과 차이가 나는데서 오는 거잖아요. 심지어 남자들은 목욕탕에 가서도 그런 짓을 해요. 목욕탕뿐이 아니고 화장실에 가도 그래요.

섬김이라는데 있어서 남자가 여자를 따라갈 수가 없어요. 요한계시록에서 정결한 신부가 나오는데 그 정결한 신부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가 섬길 남자를 찾았어요. 어린양입니다. 어린양을 찾아서 음행한 음녀와 정반대의 모습으로 갑니다. 자기를 위해서 희생한 그분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겁니다.

그게 예수님의 신부에요. 제가 몇 달 전에 그런 설교했지요. ‘우리가 여자가 되는 것은 여자의 후손이 우리를 여자로 만든다.’고. 하나님은 우리가 마땅히 섬겨야 될 우리의 신랑을 이 다윗의 언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원하는 힘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신 분이에요.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용서가, 그분의 용서하는 힘이, 그 깨끗한 힘이, 그 거룩한 힘이, 나밖에 모르는 이 더러운 세속적인 힘을 씻겨줘서 이제는 우리 안에 힘이 있는데 무슨 힘이냐 하면 바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먹고 취하는 포도주를 먹을 필요가 없는 거예요.

받기만 하면 될 수 있는, 쉽게 말해 받는 힘, 그만큼 우리의 공터 빈자리가 점점 넓어지는 것, 어떤 것도 주신 은혜로 깨닫는 힘, 그래서 내 안에 내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아주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고 받은 것이기에 도로 내놓을 수 있는 헌신과 사명을 감당하는 힘, 이것이 예수님의 대속의 힘인 것입니다.

‘서로 섬겨라. 서로 사랑하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힘의 단체를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끝으로 한 말씀 드린다면 이 다윗의 자리는 특정지역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라는 집단 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 안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그 용서의 자리가, 다윗의 자리가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축복의 혜택을 입고 있습니다. 진짜 십자가라는 그 다윗의 자리, 다윗의 자리에 오신 분이 십자가에 죽으신 그 십자가가 있다면 진짜 십자가가 꽂혀 있다면 그 부질없는 힘을 원하려는 생각이 들지를 않습니다. 십자가가 꽂혀 있는 목사라면 절대로 교인들을 자기부하직원 다루듯이 그렇게 하지 않아요.

내 말 안 들으려거든 나가라, 그런 소리를 할 수가 없어요. ‘뭘 도와드릴까요? 어떻게 섬길까요?’ 이것만 생각하지 ‘이것은 내 밥그릇, 저것은 내거, 이것은 내 힘,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 양, 저기서 저기까지는 네 양 ….’ 최 양, 이 양 하면서 다방 영업합니까? 어디서 그런? 네 양, 내 양이 어디 있어요.

수련회를 할 때마다 ‘말씀으로 복음으로 모이자.’ 하는데 그걸 힘의 집결인양 그렇게 비아냥거리고 나도 힘 있다고 우기는 그러한 대결구도, 아, 저는 가슴 아픕니다. 목사 되어서 지옥 가는 사람들. 그렇다면 목사를 버리면? 혹시 모르지요. 천국 갈 수 있을지. 목사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힘 자랑 안했을 거예요. 그냥 말씀만 사랑했을 겁니다.

목사가 되었기 때문에 말씀을 사랑하는 척 해서 그것을 자기의 힘으로 모으려고 한 거예요. ‘나도 말씀 전한다.’ 이 말은 ‘나도 힘 있다.’ 그런 뜻이에요. 거지 나사로의 부자의 배경을 깔아버리면 사명의 끝은 용서와 고마움 그것뿐입니다. 사명의 끝이 십자가용서라면, 그 사명이 미리 와 닿아있다면 우리는 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 힘이 어디서 나왔는가, 그 힘이 십자가에서 나왔다는 것을 안다면 그 십자가를 사랑 안할 수가 없는 겁니다.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저희들이 마귀를 닮았습니까? 여기서 여기까지는 너의 힘, 여기서 여기까지는 나의 힘, 힘으로서 자본주의사회를 통과하고 버티려고 하는 이 본능적인 심보, 이것 때문에 음녀로서 주님을 모독하지는 않았습니까? 십자가를 우습게보지는 않았습니까? 십자가의 가치를 우리가 짓밟지는 않았습니까? 외면하지는 않았습니까? 이제는 우리가 섬기는 힘, 내놓는 힘, 자기를 비우는 힘으로서 주님의 은혜로만 이어져 갈 수 있는 그러한 성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