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8. 30. 18:15

성전이 아니다 (예레미야 7장 1- 7절)


성전이 아니다

2009년 8월 2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7:1-7

(렘 7:1, 개정)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
(렘 7:2, 개정)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렘 7:3, 개정)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살게 하리라』
(렘 7:4, 개정)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렘 7:5, 개정)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렘 7:6, 개정)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렘 7:7, 개정) 『내가 너희를 이 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


성전이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만든 집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 경배할 의사나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곳이 성전이 아니다”는 선언에 전혀 미동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요?”하고 반문할 것입니다. 즉 “당신은 성전도 아닙니다”라고 불신자에게 이야기하면 불신자는 이렇게 대꾸합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겁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전이 아니다’는 말은 진지하고 심각하게 받아드리는 인간은 오로지 하나님께 경배하는 자만이 인간일 수 있음을 아는 자에게만 해당됩니다. 한국에서 우주선 쏘아올리기에 실패했다는 것은 저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나라의 사람은 전혀 가슴 아파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수 십년 동안 우주선 발사에 공들여온 연구원들은 통곡할 일입니다.

오늘날도 이처럼 ‘하나님을 경배’에 관심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놀라울 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성전이 아니다’는 식으로 사람에게 찾아오시는 것은 진정 하나님을 영원히 경배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가려내는 방식이 됩니다. 성전과 하나님의 경배와 자기 자신을 연관시키는 자와 그렇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영광만을 생각하는 자와의 구별을 이런 식으로 실시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란 항상 인간은 원점으로 돌려버립니다. 성도란 이런 말씀들을 담는 일종의 종지기입니다. 간장을 담는 작은 그릇 같은 것입니다. 말씀을 담아서 온 천하에 하나님의 성전의 의미를 알리고자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용하신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이곳은 성전이 아니다’는 책망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 책망마저 작은 종지기에 담게 되면 그것이 바로 성전의 의의를 드러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곳은 여호와의 전이 아니다’는 것은 정해진 지역을 점유하고 있는 건축물로서의 성전을 뜻합니다. 다윗이 건축물로서의 성전을 지으려고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건물로서의 성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공간’이 맞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즉 특정 공간 점유 상태로 성전을 꾸며놓으면, 과연 어느 정도 커야 하나님 전부를 다 담을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만약 하나님을 다 담을 수 없다면 과연 경계선을 정해서 성전 안과 성전 밖을 확정지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도 생깁니다. 예를 들면, 예배당 문을 기준으로 해서 예배당 안에 들어오게 되면 ‘하나님의 계시는 곳’이 되고 예배당 문 밖으로 나가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왜 구태여 예배당 안과 밖을 구분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왜 하나님은 특정 건축물 안에 하나님을 다 수용할 수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특정 건축 구조물을 성전으로 간주하셨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특정 공간에 지정된 그 어떤 건축물 밖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작용하고 있음을 대비해서 보이기 위해 특정 건축물을 허락하시고 거기에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특정 공간을 차지하는 건축물로서의 성전 속에서는, 공간을 벗어나서 어디든지 작용하는 구원의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 능력의 출처 작용을 하게 됩니다. 성전 속에서는 매일같이 양과 염소와 소가 피를 흘리면서 희생제물로서의 역할을 다 하게됩니다. 이 희생물이 퍼지는 영역은 성전 건물의 벽을 넘어섭니다.

요나 선지자는 비록 먼 바다 깊은 물 속까지 빠졌지만 그곳에서도 성전을 향해 기도하니 요나에게 구원의 능력이 입혀집니다. 공간성을 가뿐하게 넘긴 것입니다. 이런 경우가 삼훈의 소설인 ‘상록수’에 나옵니다. 영신이라는 여대생이 농촌에 가서 한글을 가르치는데 미처 교실에서 다 수용하지 못한 아이들까지 밖에 있는 나무에 올라가서 교실 내에서 가르치는 것에 대해 호응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처럼 성전의 위력이란 건축물로서의 성전 안에서 주의 이름으로 반복하고 있는 희생 제사의 위력을 성전 밖에서는 반응을 나타내면 그곳도 역시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 됨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렇다면 건축물로서의 성전이 되고 아니되고는 그곳에 나와 경배하는 자들이 과연 성전 안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기능에 보조를 맞추고 있는지 여부에 달렸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있어 구원이란 국 떠는 국자같은 기능으로 이루어집니다. 우상이 뭐냐 하면 구원이 없이 독자적으로 그냥 홀로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구원이란 국자로 건더기를 푹 건지듯이 현재 있는 자신들을 포착해서 함유시키고 포함시킨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받은 자들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자같은 하나님의 속성에 둘러싸이게 되고 평생 국자가 펼쳐보이는 긍휼의 위력의 혜택 속에 있는 것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웃 사랑과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말씀과 우상숭배 하지 말하는 말씀은, 자기 홀로 있을 경우에는 실현될 수 없고 오로지 긍휼이라는 환경 속에 이웃과 함께 놓여있을 때나 가능한 일입니다. 즉 어떤 이가 내 것에 다가올 때,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국자 안에 놓여있다면 그 같은 공간 안에서 같은 긍휼에 놓여있는 존재로서 이웃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 이웃과 자신과의 만남이란 같은 성전 속에서의 만남이 됩니다. 만약에 이런 국자 같은 공간 속에 본인이 놓여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기 곁에 다가오는 사람에게 결코 긍휼을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 그들이 구원된 것은 국자같은 주님의 기능 발휘에 의해서 구원된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입장은 홀로 있다고 여기면서 살피는 것이 아니라 국자라는 공통의 영역 속에서 자신을 살피게 됩니다.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주의 기능이 양쪽에 다 적용됨을 같이 바라보는 것이 바로 성전의 확대입니다. 만약 이 기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필시 구원받은 적이 없는 독자적 세계에 그냥 머물러 있는 바가 됩니다.

고린도전서 3:21-23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작은 국자는 더 큰 국자 안에서 놓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특정 개인이나 본인에게만 매여 사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 경배하는 성전의 자세가 아니라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구원의 국자를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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