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8. 19. 18:53

자비 없음 (예레미야 6장 22-26절)


자비 없음

2009년 8월 19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6:22-26

(렘 6:22, 개정)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한 민족이 북방에서 오며 큰 나라가 땅 끝에서부터 떨쳐 일어나나니』
(렘 6:23, 개정) 『그들은 활과 창을 잡았고 잔인하여 사랑이 없으며 그 목소리는 바다처럼 포효하는 소리라 그들이 말을 타고 전사 같이 다 대열을 벌이고 시온의 딸인 너를 치려 하느니라 하시도다』
(렘 6:24, 개정) 『우리가 그 소문을 들었으므로 손이 약하여졌고 고통이 우리를 잡았으므로 그 아픔이 해산하는 여인 같도다』
(렘 6:25, 개정) 『너희는 밭에도 나가지 말라 길로도 다니지 말라 원수의 칼이 있고 사방에 두려움이 있음이라』
(렘 6:26, 개정) 『딸 내 백성이 굵은 베를 두르고 재에서 구르며 독자를 잃음 같이 슬퍼하며 통곡할지어다 멸망시킬 자가 갑자기 우리에게 올 것임이라』
(렘 6:27, 개정) 『내가 이미 너를 내 백성 중에 망대와 요새로 삼아 그들의 길을 알고 살피게 하였노라』
(렘 6:28, 개정) 『그들은 다 심히 반역한 자며 비방하며 돌아다니는 자며 그들은 놋과 철이며 다 사악한 자라』
(렘 6:29, 개정) 『풀무불을 맹렬히 불면 그 불에 납이 살라져서 단련하는 자의 일이 헛되게 되느니라 이와 같이 악한 자가 제거되지 아니하나니』
(렘 6:30, 개정) 『사람들이 그들을 내버린 은이라 부르게 될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버렸음이라』


‘무자비’적인 이방 제국의 공격, 막상 우리가 그 현실 한 가운데 있다면 그 이방나라의 잔인성에 대해서 비난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계속적으로 유다 나라의 멸망에 대해서 언급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 기껏 유대나라가 대처한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헌물을 더 바치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제사나 헌물을 안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남는 것은 고스라이 망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망하게 하시고 그것은 무자비하게 이방나라에 짓밟히게 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도리어 자비를 깨우치기 위한 방도였습니다.

모든 말씀 배후에는 하나님의 세계관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말씀 뒤에 있는 하나님의 세계관은 싹둑 잘라버리고 말씀을 달랑 끊어버리고서는 그 말씀을 자신의 실력으로 지킬 수 있노라고 내세우게 됩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모든 죄에 대해서 무자비하신 분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이스라엘도 예외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내부에는 은혜가 퐁퐁 솟아나오는 원천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소요 성전입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의 차이점이라면 바로 이점입니다. 은혜가 솟아나오는 원래 샘물이 유무에 달려 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만든 나라입니다.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이라서 거룩되지 못한 자들에게는 가차없는 무자비가 퍼부어집니다. 이러한 이방민족에 대한 무자비는 도리어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의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더 감사하게끔 합니다. 하지만 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입성하고 부터는 서서히 자력으로 그 영역을 지켜내리라는 교만함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왕 주어진 것, 이제부터는 자신의 열심있는 행함으로 나라를 키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은혜의 샘물은 잊게 되고 인간의 능력만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막혀 있는 은혜의 샘터를 터게 하기 위하여 주변에 포진되어 있는 이방민족들을 동원시켜 이스라엘을 치게 합니다. 처음에 이스라엘은 자력으로 온갖 수완을 부리고 그것도 안되면 더 힘센 나라에 조공을 바쳐가면서까지 외교술로 사태를 모면해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에게도 돌아와서 “살려주세요”라고 부르짖는데 이런 지경이 될 때만 비로소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내부에 은혜와 용서이 샘물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구원방식이 약속의 땅을 넘어서서 전 지구적으로 확대되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각국에 흩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이란 모든 일을 자기 결심과 판단력에 의해서 진행한다고 생각하지만, 한 예를 들어보면 이 생각이 잘못된 생각인 것을 압니다. 석재사의 석공들이 불상을 만들고 트럭에 실을 따까지 사람들은 그 불상에게 절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막상 절 마당이나 산 위에 심어놓으면 그 때부터 사람들은 두 손 모아 절도 하고 돈도 바칩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까? 공장에 있을 때나 산 위에 있을 때나 같은 불상인데도 말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은 자신이 스스로 큰 감동을 받을 환경을 스스로 미리 짐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러이러한 환경이 될 경우에만 은혜받겠다고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다룸은 각자 자신들의 결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외부의 환경에 의해서 조성되어지고 구성되어 지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대제국 바벨론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이 껍데기를 홀라당 벗겨버리고 그들이 잊어버린 은혜의 샘물을 바라보게 하는 겁니다.

로마서 11:31-32에 보면,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란 성경 말씀, 어느 한 구절도 지키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예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감금하기 위해서 절대로 인간들이 믿을 수 있거나 혹은 지킬 수 있는 성경 말씀은 단 한 구절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어지고 지켜지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인데 이 은혜가 작동하므로서 기존의 자신의 행함은 인정사정 볼 것없이 무자비하게 깨어져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아내된 자는 남편에서 복종하기를 교회가 주께 하듯하라”는 말씀을 놓고서 결혼을 앞둔 여성들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즉 어지간한 것은 순종을 하겠지만 어느 선까지 양보하면서 순종해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발상 자체가 은혜의 샘터를 모르고 하는 발상입니다.

만약에 남편의 자는 모습을 보고서, 왠지 귀엽고, 사랑스럽고 자랑스럽게 느껴진다면 그 아내는 그 어떤 경우라도 남편에게 순종안 할 경우가 없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아무리 남편 말에 시녀처럼 고분고분 다 들어서 실천에 옮겨도 남편에 대한 애정과 존경이 결여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모든 말씀 배후에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있는 겁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하나님 말씀 뒤에 있는 긍휼하심, 즉 불쌍히 여겨주심을 빼먹었기 때문에 말씀을 지킬수록 항상 자기 변명과 자기 의만 쌓았을 뿐입니다. 이렇듯 인간들의 교만은 자신의 의지로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강제적인 환경에 의해서 껍데기가 벗겨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긍휼하심만 부각되도록 하시는 겁니다. 마치 이빨을 뽑을 때 뿌리까지 뽑히는 것처럼 참된 성도라면 겉으로 드러난 지시와 명령으로서의 말씀이 아니라 그 뿌리에 해당되는 긍휼하심까지 받아들이면서 오직 자신의 불순종밖에 못하는 죄인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바로 이를 경우에만 진정한 남은 자로서의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항상 은혜로만 인도받고 있음을 항상 잊지 말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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