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0.24 10:46

땅과 하늘의 관계 , 사무엘하 22장 5-10절

본문 : 사무엘하 22장5-10절
제목 : 땅과 하늘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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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강-삼하22장5-10땅과하늘의관계-2sa101024

땅과 하늘의 관계

2010년 10월 24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22:5-10

(삼하 22:5, 개역)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삼하 22:6, 개역)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삼하 22:7, 개역)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삼하 22:8, 개역) 『이에 땅이 진동하고 떨며 하늘 기초가 요동하고 흔들렸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
(삼하 22:9, 개역)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삼하 22:10, 개역)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니 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구원이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끼어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마치 샌드위치처럼 하늘과 땅 사이에서 주고받는 계시 공간 안에서 자아를 생각하는 것이 바로 구원받은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의 형편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이런 상황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늘의 것을 날아가버리고 그저 눈에 보이는 지상의 인간들의 움직임만 파악하고 거기에 발맞추어서 살아가면 그것은 곧 산다는 것의 전부라고 알 고 있습니다. 드라마나 TV에 나오는 모든 내용들이 바로 이런 겁니다. 하늘의 계시가 전혀 작용하지 않는 것처럼 역사가 오직 인간들의 몸부림으로만 전진한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하늘의 계시를 고려하지 않고 인간들 나름대로의 진리라는 것을 어떤 식으로 구축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왜 하나님께서는 과격한 방식으로 하늘의 계시를 주어지는지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 땅의 세계란 하늘의 세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연극 무대와 같습니다. 마치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면 그 그림자가 그대로 대지 위에 그려지는 원리와 같습니다.

이 원리에 준해서 하늘에서 계시가 떨어지면 요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노아의 물 홍수도 그러하고 마지막 불심판도 그러합니다. 이러한 요동의 진앙지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 진앙지는 곧 하늘의 영원한 뜻과 직통하는 계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땅의 흔들임의 원인도 모르는채 인간들은 부지런히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나름대로 요령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적응하기’입니다. 쉽게 말해서 흔들리는 변화에 따라서 몸에서 적응성을 축적하는 식으로 후손을 대대로 남기겠다는 본성을 드러냅니다. 여기에 필요한 생각들이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타납니다. 우선 칸트철학부터 생각해봅시다. 세상이란 우리들의 각자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따라 구성해서 결정된다는 것인데 이것을 ‘구성주의’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같은 공간, 같은 시대를 살아도 내가 보는 세상관과 옆 사람이 보는 세상관이 다릅니다. 나는 현사태를 좋게 보는데 반해 옆사람은 현 상태를 절망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그동안 살아오면서 누적된 경험들이 지금의 주관성을 갖추어놓았기 때문입니다. 비단 다른 사람과의 세상관 뿐만 아니라 한 개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20대에 생각했던 세상관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그 때 그 당시 노래를 들어보면 어렴풋이 기억되곤 합니다.

그 당시에 그립다는 정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 나는 세상을 어떤 식으로 이해했는지 그 이해의 틀까지 생각나게 됩니다. 20대에는, 자신의 성실함과 부지런함과 착함과 정직함으로 직장생활을 하게 되면 주변에서 인정해주면서도 본인의 생계에는 안정성을 얻게 될 것이고 이를 통해 원하는 배우자도 얻을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막상 사회에 나가보면, 내가 뭘 하겠다는 나의 생각은 초반박살 나버리고 이미 구조적으로 짜여전 틀 안에서만 움직이어야 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세상을 내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 수가 없고, 세상이 원하는 세상으로 맞쳐 나가지 아니하면 이 세상에서 추방당한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이것을 철학에서 구조주의라고 합니다.

즉 세상에서 모든 것은 구조로서 짜여져 있다는 겁니다. 그 안에서 나라는 주체는 하나의 바늘코처럼 한 고리만을 점유하고 있을 뿐입니다. 나를 통과하는 각자지 정보들의 흐름에 내가 방해물이 된다면 나를 둘러싼 구조는 나보다 그 자리를 내놓아라고 독촉하게 됩니다. 이로서 구조가 나보다 더 힘이 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구조주의적 사회에서 나만의 신앙세계라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구조 자체가 새로운 나의 종교로 받아들릴 것을 강요합니다. 또한 그 강요에 고개숙일 때만 나는 나로서 조금이나라 나의 생존의 자리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즉 “나는 이것을 원합니다”를 외칠 세계는 없고,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합니까?”라고 물음만 허용되는 세계가 이 세계라는 겁니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세상은 곧 해체주의라는 겁니다. 해체주의란 세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구조적 세계에서 존재라는 나는 내부적으로 끊임없이 자립하고 싶은 반항기를 주체할 수 없어, 이 걷잡을 수 없는 욕망으로 인해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아 해체가 일어나는 겁니다.

이는 곧, 나는 매사를 이성적으로 처리하고 싶지만 이유없이 이 이성보다 더 센 힘이 나 내부에서 작용해서 욕망의 지배를 받아서 원치않는 욕심에 끌려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피곤한 인생을 두고 말합니다. 마치 가인이 아벨을 죽일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나의 이성보다 더 센 감정에 이끌리어 맨날 후회만 남기는 식으로 생을 마감해야 한다는 것이 이 세상이라는 겁니다.

결국 하늘의 계시가 끊어버리고 지상에 있는 인간들 사이의 움직임만으로 진리를 알아내려고 애쓰면 나오는 결론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르겠다”입니다. 그러면서 언젠가 진리를 알 날이 오리라는 희망을 없애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계시의 입장에서 보면, 이 지상의 삶이란 사람들이 숨어있는 식이라는 겁니다.

아담의 구원의 시작은 하나님부터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했을 때 이 숨어있는 아담을 자신의 계시 앞에서 노출시키시는 작업이 이미 구원의 시작입니다. 그래야 땅과 하늘 사이에서 아담은 샌드위치 꼴로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숨어있는 아담 내외는 하나님의 개입으로 그대로 노출되었습니다.

이 노출의 힘의 원천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비롯됩니다. 마태복음 27:50-53에 보면, “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소동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지 아니하면 일어날 수 없는 소동입니다.

이 십자가 사건이 중심이 되어 말씀이 성도에게 찾아듭니다. 히브리서 4:12-13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원칙에 준해서 결국 세상은 마지막날 예수님의 재림이나 심판 때, 대소동이 일어납니다. 요한계시록 6:12-16에 보면,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미리 이 상황을 지금의 샌드위치 상황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교회 있으나 교회 밖에 있으나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땅에서 숨는 식으로 살지 말고 늘 말씀 앞에서 벌거벗은 채도 노출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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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강-삼하22장5-10(땅과하늘의관계)-2sa101024-(이 근호 목사)

2010-10-26 18:36:18 녹취 : 이한례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하 22장 5절에서10까지입니다.  구약성경 502페이지입니다.

사무엘하 22:5-10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이에 땅이 진동하고 떨며 하늘 기초가 요동하고 흔들렸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니 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아멘


‘구원’이라는 문제가 보통 구원을 소유한다고 이야기하잖아요? 구원은 소유한다는 것이 아니고, 구원이라는 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 끼어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늘 있고 땅이 있는데, 그 사이에 우리가 끼어 있는 상태를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은 구원이 없다는 말은 뭐가 날아가 버렸냐 하면, 하늘부분, 하늘에서 하는 일이 그들에게는 전혀 귀에는 안 들어오고, 보이지도 않고 그런 겁니다.

하늘이 뚝 잘라져서 날아가 버리고 눈에 보이는 것은 땅밖에 보이지 않을 때, 그 때를 구원이 없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은 일종의 샌드위치라 할 수 있어요. 두 개 빵 사이에 안에 쨈이 들어있는 상태, 거기에 안에 고기 다진 것들이 들어있는 상태, 양쪽으로 끼어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아담이 죄 지은 것 여러분 다 아시죠? 아담의 구원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죄 지은 본인이 살아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위에서 샌드위치처럼 누르죠. “아담아, 니가 어디 있느냐?” 출발이 위에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모습이나 이런 것, 그리고 TV, 방송에서 나오는 것을 보면, 뭐가 없느냐 하면, 드라마도 그렇고 항상 윗부분이 날아가고 없어요. 윗부분을 없고 아랫부분만 어울려서 울고불고 삐지고 질투하고 복수할거야, 이래 나오고, 저들끼리 난리예요. 윗부분이 없다 말이죠.

하나님의 위쪽에서 내리는 계시가 없어요. 끼어있는 상태가 아닌 겁니다. 위의 신의,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지게 되면 사람들은 귀찮게 여깁니다. 그걸 벗어나서 우리들끼리, 위의 계시가 없는 곳, 하늘의 쏟아지는 계시가 없는 자리에서 “우리들끼리만 서로 좋은 사람끼리 모이고 이렇게 하자“ 그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방식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방금 읽었던 본문은 다윗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대목입니다. 위의 것이 내려오죠. 위의 것이 내려오면, 그것을 뭐라고 하냐 하면, 신약에서 이야기하기를, 그걸 진리라고 이야기 합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설교를.

구원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이웃집 사람이나 돈을 버는 나 같은 사람이나 사람 중에 서는 것이 아니고, 진리 앞에 섰을 때, 진리 앞에 끼어있을 때, 그것을 알게 될 때, 내가 진리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를 가지고 구원 받은 상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 받아놓고, “구원 받았어” 라고 진리가 없는 쪽으로 도망치는 것이 아니고, 그러면 안 되고, 그건 샌드위치가 안 되잖아요? 또 사람들끼리 어울려 다니잖아요? “나는 구원 받았습니다.” 하면 샌드위치 같은 그런 상태를 계속 가져가는 겁니다.

회사 가나, 가정에 있으나, 교회 오나, 심지어 야구 보러 축구장에 가나 어디를 가도 항상 샌드위치를 보여주는 거죠. 보여주는데 거기서 하늘의 계시를 보여주면 그럼 화를 내게 되는 겁니다. 박주영이가 한 골 넣고, 엎드려서 쫙 미끄러져서 기도 팍 하면 거기서 관중들이 화가 나는 거예요. “도대체 지가 쳐 넣어 놓고 왜 기도 하느냐, 우리가 응원했는데 눈에 보이는 우리한테, 붉은 악마한테 호응을 해야지, 왜, 쟤는 누구한테 기도하는 거야?” 여기서 굉장히 속이 상합니다. 그래서 박 주영 씨가 구원을 받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구원파인지  그런 것은 모르겠고 구원받은 뜻은 아니고...

다윗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난 뒤에는 이런 점에서 차이가 난다는 걸 말씀드리는 거예요. 어떤 점이 차이가 나느냐 하면, 하늘의 계시에 눌린 상태에서 살아가는 그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말이죠. 어디가도 사람들끼리가 아니고. 그렇다면 거기에 대해서 궁금한 게 뭐냐 하면, 두 가지가 궁금해요. 하늘의 계시가 오기 전에, 하나님의 계시가 없을 때 인간들끼리는 뭘 가지고 진리가 하고 뭘 가지고 선이라 하느냐 우선 그걸 우리가 알아야 되겠어요.

그것을 저는 관찰이라 합니다. 설교할 때나 성경 볼 때에 항상 세심하게 관찰해야 하는데, 사람은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거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일이 있습니다마는 칸트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세상이라는 것은 내가 구성하기 나름이다. 이유가 뭐냐 하면, 네가 보는 세상하고 내가 보는 세상하고 서로 다르니까, 내가 생각했던 것 가지고 세상을 이렇게 구성하고 그래서 지가 생각한 세상이 전부가 생각하고, 내가 생각한 세상은 이렇다고 생각하고 옳다고 우기는 거예요. 이런 예는 우리가 틀렸다고 말을 못 하는 게 어떤 경우냐 하면, 20살 때 세상을 보는 거하고 30살 때 세상을 보는 거하고 이게 달라요.

가끔 가다가 7080에서 옛날에 젊었을 때 기타치고 노래 불렀던 7080의 팝송을 보면, 그 때 생각이 하나씩 떠올라요. 그 때 이 노래 좋아했던 긴 머리 소녀, 목요일 밤에, 길가에 앉아서, 기타치고 노래 부르면 뭐가 생각나느냐 하면 옛날 일이 생각난다 하는데 구체적으로 관찰해 보는 거예요. 지금 내가 50대에 있으면서  20대에 그 노래 들으면 그 때 일이 생각날 때, 그 때 일이 생각 나, 여기에 그치지 말고 그 때는 세상을 어떤 식으로 봤나를 생각해 봐야 돼요. 그 때 세상을 보니까 그 때는 세상을 보니까, 세상은 모든 것이 할 일은 많고, 세상은 넓은 식으로 세상을 본 거예요.

내가 나중에 이 학교만 졸업하면, 서로 회사에서 오라고 할 거고, 나는 골라잡아 취직을 할 거고, 그러면 취직만 되면 여자? 아이고, 골라잡아 갈 거고, 내가 좋아하는 임 예진 이상 이것은 기본이고, 그때 감정을 잠시 돌아볼 수 있는 거예요. 그 때 구상된 나의 세계, 고거는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을 줏어서 조립한 구상입니다. 그걸 구상중이라 이야기해요.  인간세상이란 것은 자기가 그동안 경험한 것을 가지고 그것이 전부인양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더 나아가서 고등학교 때로 가보면,  내가 만약 의사가 된다면, 내가 만약 사법고시 합격만 된다면, 주위의 일가친척들이 나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겠느냐, 그것이 내가 공부하는 동기부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 ‘Boys, be ambitious: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라는 말이 헛꿈이라도 꿔야 목표를 가지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구성주의라고 하는 겁니다. 칸트가 주장했던 구성주의, 세상이란 것은 내가 보는 대로 하기 때문에 자기한테는 진리인지는 모르지만 옆 사람한테는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 했죠.

그렇게 하고 난 뒤에 그게 맞는 것 같은데 나중에 그게 안 맞다는 걸 알게 됐어요.
좀더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 나이가 50되니까, 어, 내가 되고 싶은 것은 뭔가 재벌2세가 되고 싶은데, 그래서 내가 떼돈 벌기 위해서 주식투자를 한다든지 투자했는데, 갑자기 미국에서 모게지가 어떠니 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에 고만 주식이 폭락하여 있는 돈을 다 까먹은 뒤에, 그때, ‘누구야? 나의 소박한 꿈마저도 짓밟은 놈이 누구야? 누가 이따위로 나의 꿈을 짓밟는 거야? 내가 욕심을 내지도 않고, 내가 작은 거 했는데, 도대체 이 작은 거를 깨니 누가 이렇게 했어? 라고 보니까, 그것은 세상이라는 것이 내가 구상한다고 내 욕망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 이미 구조화로 짜여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겁니다. 그것이 구조주의라고 하는 겁니다.

세상은 나보다 훨씬 더 크고 어느 계열이나 어느 사회에 들어가도 내가 할 수 있는 능력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거기 다 배치돼 있어요. 이만하면 나도 한 행세한다고 싶어서 가보면, 거기에 도사들이 있어요. 나는 닭 튀기는 도사라고 생각하고 가보면, 닭 튀기는 도사들, 달인들이 수백 명이 있어요.ㅎ 그렇다면 빼도 박도 못 해요. 짜여진 구조에서 나는 그들이 길들여지지 아니하면 그들과 함께 밥 먹고 살기 힘들다는 것을 발견하게 돼요. 그걸 구조적이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뭐가 깨지는가? ‘세상은 내 맘대로 안 된다.’

그럼 살 길은 뭐냐? 고개 숙이고 굴복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해 주는 거예요. 그동안 나의 신, 나의 신앙생활은 내가 만들었는데, 상대방이 나에게 요구하는 대로 내가 주체를 변경시켜야 되는 거예요. 그들 입맛에 맞춰주지 않으면, 나한테 돈이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걸 가지고 식언 났다, 철들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이제 니가 세상맛을 쬐매 아는구나. ㅎ 세상 일이  너 원하는 대로 하고 싶어도 안 되고, 폭싹 망해봐야 야!! 세상은 이렇게 맵구나. 이 세상은 너 혼자 만들어가는 세상이 아니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에, 눈치코치 봐야 살아간다는 겁니다. 참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그저 그런 세상이죠.

그런데 그게 전부고 굴복하면 될 것 같은데, 거기서 더 나갑니다. 세상 앞에 나가보니까 그렇게 굴복하고 싶지 않은 나와 그래도 언제 이 회사 때려 치고 내 혼자 내 맘대로 내 개인회사 차려서 내 맘대로 해야지, 하는 욕망과 이제는 세상문제가 아니고, 세상을 어떻게 굴복해도 굴복 안 되는 내 욕심은 어쩔 수 없다는 게 나와요. 그게 바로 ‘해체주의’ 라고 하는 겁니다. 내 맘은 내가 어쩔 수 없는데, 내가 뭔가 하고 싶어도, 로또 안사고 싶어도 그 날만 되면 더 사고 싶어.

이거는 나라는 인간도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굴복하고 싶어도 굴복이 안 되고, 친절하려 해도 친절이 안 되고, 인사할 때 드러나는 거예요. 베풀고 사랑을 베풀고 희생해야 되고 말씀대로 실천해야 되고 사도바울의 명령대로 해야 되지만, 그걸 방해하는 어떤 세력이 있다는 것, 그래서 이 주체라 하는 것은 항상 이게 ‘나’ 다 싶으면 찢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게 해체주의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결국은 뭐냐 하면, ‘모르겠다.‘ 가 정답입니다.  ’나도 모르겠고 왜 세상은 이렇고 나는 이런데 감당할 수 없는 내 욕망은 왜 내 말 안 듣는 거야? 왜 내 욕심은 내 말 안 들어?’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 걸 알지만, 이성보다 더 나대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내 느낌, 내 감정이란 말이죠. ‘싫은 데 어떻게 좋아해?’ 어떤 사람은 보기만 해도, 오욱, 올라오는데... 어떻게 이뻐라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따져서 공부하고 이건 옳고 그르다고 생각하는 그보다 더 센 힘이 뭐냐 하면, 바로 이유도 모르고 무조건 싫고 무조건 밉다는 그 욕망, 죽이고 싶다는...(주일학교 설교 했거든요) 본의 아니게 동생을 죽여야 된다는 그 욕망, 그게 정체가 무언지 모르겠다. 그래서 현대철학은 정답은 뭐냐? 모르겠다. 예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근데 모르겠다하면 되는데 모르겠다는 식으로 계속 가는 겁니다.

여기에서 하늘이 드디어 옛날부터 주어지는 겁니다. 하늘이 주어지게 되면, 땅의 인간들이 내린 결론은 뭐냐, 모르겠다. 입니다. 모르겠다. 인데, 하늘이 주어지게 되면, 너희는 갇혀있다. 가 됩니다. 어디에서? 땅은 너희들이 마음대로 땅을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너희들은 거기서 어쩔 수 없이 고생해야 되고, 땀을 흘려야 되는 규격화된 법칙에 의해서 옴팍 뒤집어 쓴 곳이 땅인 겁니다.

그러면 땅에서 인간이 해대는 것은 숨어들어가는 거죠.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아내가 밥상을 차렸는데, 개미가 올라왔어요. 근데 우리가 대자 대비한 마음으로 타 생물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개미야 너도 먹고 살아야지, 그래, 먹어, 먹어, 먹어,” 이러는 주부 봤습니까? 개미 킬로 가지고 죽여 버리잖아요. ‘어떻게 나를 위한 밥상을 니가 건방지게 거기다가 니 밥상인줄 알고 덤벼드느냐 말이죠.


땅이라 하는 것은 하늘에 구름이 있으면, 그 구름이 땅에 비치잖아요. 땅이라는 것은 하늘의 법칙을 비치는 그림자를 만드는 바탕입니다. 이걸 광주강의에서는 연극무대 라고 했습니다. 연극무대기 때문에 하늘이 법칙에 따라서 땅이 같이 요동하게 돼 있습니다.

그 계시가 오늘 읽었던 사무엘하에 읽었던 다윗이 받은 계시가 그 계시예요. 하늘이 떴다 하면, 땅은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근데 땅이 흔들려버리면, 인간은 개미와 같아서 1차원적 존재(하늘이 안 보이니까)로 하늘을 의식 못하니까, “오오호, 이 땅이 왜 흔들리지? 왜 흔들리지? 아, 적응해야지, 적응해야지,” 기껏 하는 것이 적응 하는 것 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어요. 적응이 뭐냐? 성경은 말합니다. 땅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모르는 사람의 적응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숨는 것이다. 그럼 정의해 봅시다.

땅은 뭐라고요? 인간이 자기의 정체와 본색을 숨는 장소가 땅이라는 겁니다. 뭐 새삼스럽게 위대한 발견 했다고 이러는 게 아니고요. 이미 창세기 3장에 나와 있는 겁니다. “아담아 니가 어디 있느냐?” 하니까 아담은 벌써 밀림 속에 숨어 있어요. 땅은 숨어 있는 기능을 하는 겁니다. 자기의 본색을 숨기는 기능을 하는 겁니다.

큰 교회, 작은 교회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가 이걸 놓치기 때문에 그래요. 근데 큰 교회는 누가 왔는지 안 갔는지 뭐 뒷자락 왔다 갔는지 헌금 냈는지 안냈는지 분간도 안 되고 왔다가 그냥 가버리는 겁니다. 그걸 감사해서 큰 교회에서는 뭐냐, 구역 예배라든지 평신도를 양성해서 그 일을 잘하는 사람이 저 사랑의 교회, 옥 한흠 목사가 하는 다락방이라는 게 있어요. 다락방 훈련이라고 쉽게 말해서 평신도 감시단, 그걸 자경단이라고 하죠.

자경단이 뭔지 압니까? 이태리의 자경단이 마피아 된 거예요. 국가 경찰이 아니고 우리 동네 우리가 알아서 자율 치안하는 거, 자율 치안 감시, 점조직, 공산주의 점조직, 요거 만드는 겁니다. 평신도. 니 구역 내의 교인은 니가 감시하란 말입니다. 감시하란 말은 그들은 안 쓰죠. 그걸 3자로 ‘돌본다.’ 고  하는 거예요. 누가 어느 구역에서 빠졌는가를 돌본다는 거예요. 누가 신천지로 빠졌는지 돌보라는 겁니다. 감시하는 겁니다. 숨어 자꾸 기어들어가니까....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런 식으로 감시하는 걸 돌본다고 하지 않습니다. 일부러 흔들어요. 흔들어서 숨어들어가는 사람을 흔들면, 진짜 성도는 숨다가, 숨다가 이게 숨을 문제가 아닌 걸 깨닫고, 나중에는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나와 버려요.’ 그것이 히브리서 4장에 나옵니다. 히브리서 4장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와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상관한다, 관여한다, 개입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개입하는 거예요. 개입하게 되면 모든 것이 벌거벗고 노출이 돼 버리죠. 노출이 되면 비로소 그 사람은 구원받은 상태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생동체가 했죠? 눈에 보이는 나 같은 인간들이 어떻게 같이 사느냐? 그런 인간들은 같은 인간들 모이면, 숨는 방법을 우리한테 이야기해요. ‘너 술 먹어 봤지? 술 먹으러 가자,’ 맨 날 뭔가 잊어버리고 숨는 거, ‘니가 일이 잘 안 되지?’ 일이 안 될 때는 우리 여행가자든지...

땅은 하늘에 의해서 흔들리는데 어디서 흔들리는 걸 모르고, 흔들리는 것에 대해서 그 나름대로 살기 위해서 방법을 터득하는 거예요. 그저 숨는 방법을 터득하는 겁니다. 사기를 당해봐야 남을 사기 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사기를 안 당해 본 사람은 사기 치는 법을 몰라요. 왜 그 착한 사람을 사기를 쳐, 내가 나쁜 사람이 되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했던 어느 날, 그렇게 착한 나에게 큰 사기를 당하게 되면, 오냐, 니 죽고 내 죽자 해가지고 자기한테 사기당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또 사기를 치는 거예요.

참, 10대에 있었던 낭만적인 거, 세상은 아름답고 어른들은 착하고 나는 순진하고....이런 아름다운 20대 구성주의가 군에 가면 다 깨집니다. 군이라 하는 것은 뭘 가르치느냐 하면, 군에서 가르치는 것은 인간이 기계가 되어 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곳이 군대예요. 여자들은 군에 가지 않으니까 식언이 없는 거예요. 군에서 군화나 찬합을 주게 되면, 이걸 훔쳐가요. 훔쳐 가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다른 걸 훔쳐서 채워야 되는 거예요. ‘누가 훔쳐갔습니다.’ 가 소용없는 거예요.

이것은 하나의 그야말로 모든 작업의 기계가 되는 겁니다. 그 훈련을 3년 동안 받는 거예요. 제대로 인간 만드는 거예요. 착함이고 거룩하고 고상한 것이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 제대로 인간이 되는 겁니다. 거기다가 인사계들은 밥 퍼 가지고 진짜 돼지 키우는 데 다 갖다 바치고, 인사계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사관들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하사관들은 퍼주고, 장교들은 장교들끼리 놀고, 그야말로 군대는 개판이죠. 개판이 될 때 저쪽 개판을 이길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숨는 방법 잘 해 놓고 안 들키면 되는 겁니다. 숨는 방법의 요령이 터득되면, 남의 것을 뺏을 수 있다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렇게 하다가, 말씀의 운동력이 있어서 껍데기를 확 벗겨버리면, 그야말로 ‘아담아, 니 지금 어느 위치에 있지? 물으시는 하나님의 물으시는 질문이 먼저 오게 되면, 그 질문 자체가 구원입니다. 거기에 뭐 답변하지 마세요. ㅎ 답변 안 해도 뻔히 아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껍데기를 확 벌거벗기기 위해서 찾아 왔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한테 개입하시는 자체가 구원의 능력입니다. 아! 숨을 곳이 없겠구나. 를 아는 겁니다. 그게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마지막 날에 우리가 벌거벗은 채로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 등장합니다. 그걸 앞 당겨서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죽고 난 후가 아니고 지금부터 우리에게 임하게 되는 겁니다.

목회자들에게 제일 필요한 게 이런 점입니다. 이번에 8개월 전에 개혁주의에 대해서 했지만, 신학자들이 어디에 숨느냐 하면, 자기 신학 박사 뒤에 숨어요. 그걸 쓰레기하고 벗기려니까 ‘왜 이러십니까?’ 안 벗기려고 잡고 버팁니다. 신학적인 양식이 많니, 안 많니, 논문 약식이 맞니, 안 맞니, 계속 담요를 쥐는 거예요. 나는 벗길라 하고 그들은 ‘이거, 벌거벗으면 안 돼,’ 하고 쥐려 하는 거예요. 내가 벗기려 말고 다 같이 벗겨 질 때 다 벗고서 “나 쓰레깁니다.” 하면 될 텐데.... 쓰레기로 죽는다는 게 영광인데, 거기서 우락부락 난리 났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는데, 살아서 운동하도록 하셔야 하는데 우리가 붙잡아서 이걸 고체화 시키고 딴딴하게 만들어서 조각품을 만들어 버려요. 요 말씀 이건 잔인데, 은혜 받은 말씀, 어디 집에다가 가구 둘 일 있습니까? 딱딱 정돈 해 가지고 나는 신학을 이만큼 알고, 나는 성경 말씀 이 만큼 알고, 설교하는 목사도 그렇고 강의 하는 목사도 그게 시험거리예요. 나는 이만큼 알고 이거 알고 저거 알고....

그때 그 순간에 주시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운동력을, 그것마저도 이게 다 목사가 숨기 위한 방식이라는 거, 숨어서 돈 받아 챙기겠다는 그 정당성을 유지하는 자기의 숨기는 방법이 그래서 또 숨는 거예요. 목사라는 걸 가지고 숨는 거예요. 그걸 이렇게 들춰 버렸어요. 그렇다면 그 능력이 어디서 오는가? 그럼 그냥 벗기면 되느냐? 이런 이야기는 불교 십이지에도 그런 이야기 할 수 있거든요. 근데 그게 아니라는 거죠.

바로 마태복음에 해답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27장 51절에 보면, “성소가 위에서 찢어지고(십자가 달린 사건이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이래 돼 있어요.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냐 하면, 제가 설교 처음에 할 때 마찬가지입니다.

구약 상태는 하늘에서 어떤 법칙이 떨어지면 그 법이 땅을 움직이게 되는 그 상태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을 구원이라 했죠? 이렇게 모든 것이 노출되고 떨어질 때, 이것이 어디서 나오는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던 사건의 효력이 이 지상을 움직이는 유일한 법칙이 되는 겁니다. 구원 받고 안 받고 가.

그것이 요한계시록 6장에 보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하나님과 어린양의 진노에서 가리울 것이냐?” 하면서 하는 말이, 예수님이 등장하니까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고 과실이 떨어지는 것처럼 땅에 떨어지고, 하늘은 종이축이 말리는 것같이 말려 떠나가 버리고, 산과 섬이 제 자리를 옮기고,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자주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이거는 뭐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든 인간은 다 어린양이 뜨니까, 숨어서 굴 과 산 바위틈에 숨어서 하는 말이 산과 바위에게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렇게 호소할 정도로 평소에 얼마나 살아가는 모습이 숨는 거, 큰 재벌 되면 재벌 뒤에 숨고, 박사 따면 박사 뒤에 숨고, 뭐든지, 뭐든지 열심히 애쓰는데, 하나님과의 어린양의 진노로부터 숨기위한 방편으로서의 꼬무작, 꼬무작 쌓아놓고 업적을 쌓아놓고, 돈 모아놓고, 땅 사놓고, 전부 다 숨는 방식 이예요. 숨는 방식, 도망치는 방식.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용감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은 하늘과 땅이 다 깨지는 원칙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새 언약. 십자가 사건으로 더 이상 죽은 사람도 무덤이 깨질 정도 같으면, 우리가 어디 가 숨으려 해도 숨을 데가 없어요. 심지어 죽은 사람도 깨지는데, 죽은 무덤도 다 깨지는데, 뭐 공원묘지필요 없습니다. 다 깨지는데...

죽은 사람도 다 깨지는 것이 십자가 능력이라면, 그 십자가 능력이 직접 우리에게 지금 주어진다면, 우리는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 생각 하지 마시고, 주여, 죽고 난 뒤의 제 모습은 어때요?‘ 라고 지금부터 우리는 말씀 앞에서, 이미 죽었다고 치고, “나 한 평생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라고 물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간단해요. 늘 말씀 앞에서 노출되어라. 그러면, 십자가가 크게 보일 것이고, 그 십자가의 덕분으로 니는 니 스스로 가질 것이 없다 할지라도 십자가 앞에서, 모든 것이 너는 강처럼 용납된 상태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소식이 매일같이 우리에게 들려와야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인간이 숨고자 애썼지만, 남 앞에 으시대고 싶은 것을 만들었지만, 주님 말씀 앞에 하나님 나타나시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차라리 다 노출해 버리고, ‘주여, 저 죄인입니다.’ ‘말씀 앞에서 죄인입니다.’ 벌거벗은 채로 주님의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의 은혜를 받는 그런 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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