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0. 24. 10:41

울지 말라 , 누가복음 8장 49-56절

본문 : 누가복음 8장49-56절
제목 : 울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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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강-눅8장49-56울지말라-luk101024

울지 말라

2010년 10월 24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8:49-56

(눅 8:49, 개역)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하거늘』
(눅 8:50, 개역)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눅 8:51, 개역)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및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하지 아니하시니라』
(눅 8:52, 개역)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눅 8:53, 개역) 『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눅 8:54, 개역)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눅 8:55, 개역)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눅 8:56, 개역)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죽었습니다!” 이것으로 더 이상의 진전의 기대는 접고서 그 자리에서 되돌아와야 합니다. 산 사람으로서는 넘어갈 수 없는 경계선 저편으로 사라진 것입니다. 인간이 다룰 수 있고 처분할 수 있는 영역 밖으로 벗어나 버린 겁니다. 하지만 그 죽음이란 경계선 저편에서 이 인간 세계를 어떤 식으로 보고 있는지 그 평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등을 보이고 돌아서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사람들이 산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남아 있는 시기를 넘어서 버립니다. 그래서 더 이상 사람으로서는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상황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사람들에게 다가섭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냐 하며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살았다’는 개념이 잘못된 개념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는 절망하는 유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에게 있는 ‘믿는다’는 말은 태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속성입니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주변의 있는 힘을 이용하려들지 결코 자기를 포기하고 상대방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오직 자기 자신만을 믿게 되어 있습니다. 남에게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는 말은 전적으로 믿는다는 말이 아니라 이용할 여지가 남아 있기에 이용해 먹을대로 이용해 먹다가 순식적으로 도로 나에게 돌아설 용의가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버릇이 그래서 교회에서 하나님에게도 써먹게 됩니다.

교회에서 떠도는 간증거리에 듣고서는 자신도 잘만 하면 하나님을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됩니다. 소위 교회 내에서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는 말이 수상하게 들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참으로 예수님을 성령을 통해서 믿는 자는 구원받고 난 뒤에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하면서도 믿기 전에 자기를 위해 살던 그 행위가 쭉 이어져가고 있다면 이것은 보통 엉터리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보다 “내 딸 살려주세요”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행함에 속합니다. 이런 요청을 했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님께서 홀로 다 하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즉 자신의 요청으로 예수님께서 구원의 일에 나서게 되었다는 사실을 갖고 있는 것은 전혀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자기 구원에 이용하려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을 나서기 전에 이런저런 모든 인간의 행함을 다 차단시켜 버립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일부러 보내신 분입니다. 그분의 행함과 인간의 행함이 어떤 차이가 나는지를 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12살 먹은 소녀를 죽이시는 것은 ‘산다’에 대해서 세상 사람과 예수님의 생각이 전혀 같지 않고 차이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산다’는 현재 자신들이 살아있는 식으로 쭉 사는 것을 말합니다.

즉 산 사람이 죽음 사람보고 낯설어 하는 것이 큰 오류입니다. 왜냐하면 그 죽은 사람도 한 때는 그들처럼 엄연히 이 세상에서 ‘산 사람’으로 행세했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죽음 사건은 소위 살아있다고 여기는 그 산 사람이라는 자들을 자기 세계로 끌어당기며 한통속을 이루는 기능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그 죽었던 사람이 한 때 살아있을 때 가졌던 그 세계관과 지금 살아있다고 여기는 사람의 세계관이 동일하다면 소위 살아있다는 여기는 사람도 이미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죽은 자’로 분류될 것뿐입니다. 이런 사람은 천국에 못들어갑니다.

천국이란 그냥 살아있는 자들의 집합이 아닙니다. ‘옳게 산 자들’의 집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사람들은 ‘옳게 사는 일’은 항상 ‘당장 생존이 가능함’의 욕구 때문에 뒷전으로 밀리기 일 수 있습니다. 밥도 못먹는 입장에서 교회에는 왜 나오느냐는 식입니다. 여기서 인간들은 ‘옳게 산다’는 의미가 오류임이 드러납니다.

‘옳게 산다’는 것은 선악과적인 지식을 발휘해서 계속 버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나무 과실을 먹으면서 사는 것을 가지고 ‘옳게 산다’입니다. 그러나 아담 내외를 비롯해서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생명나무 과실을 먹은 사람이 없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모든 인간은 ‘옳게 사지 않는 자’가 됩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로마서 5:20에 보면,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지금도 그저 살기에 급급한 우리로 하여금 왜 우리가 사는 것보다는 죽어 마땅한 인간인가를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고 우리 속의 죽음을 살려내려 하십니다. 마치 의사가 우리 속에 있는 거대한 암세포를 적출해내듯이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우리를 지배했던 죽음을 끄집어내기 위해 우리를 죽이지 않을 수 밖에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옳게 살음, 즉 하나님의 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겁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남을 죽이는 것을 “살인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죄라고 규정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언약을 가지고 우리 인간을 죽이는 것을 죄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러 ‘의’라고 하십니다. 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행하시는 의를 드러내 보이는 자가 ‘옳게 사는 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언약으로 깨어주지 않는 한 그 인간은 살아있다고 우기지만 실은 반-언약 의 지배 속에서는 영원히 죽음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형편에 놓여 있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실정 안에서 우리는 나름대로 선악적 관점에서 ‘건전하고 착실한 자아상’을 구축하려고 시도합니다.

바로 이런 자아를 저주하고 죽여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행하심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밀치고 하나님은 받아들이는 이유는, 예수님 앞에서 자아 구축의 가치가 공격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예수님을 죽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날마다 이런 죄된 껍데기를 죽음에 넘기우고 예수님의 공로로 산 자되게 하십니다. 그 와중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 수가 없에 예수님을 위해 살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예수님의 언약이 작렬하는 공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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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강-눅8장49-56(울지 말라)-luk101024-(이 근호목사)

2010-10-27 14:33:45 녹취 : 오용익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8장 40절에서 48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05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8:49-56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하거늘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및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하지 아니하시니라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본문 보게 되면 주변에 선 사람들은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그 모든 행위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이 혼자 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홀로 다 하신 것에 대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당부하기를 ‘네가 좀 설치대지 말고 내가 하는 것을 믿기만 해라.’라고 나온 겁니다.

‘믿기만 해라.’라는 이것이 믿는 사람에게는 정말 기쁨의 말씀, 즐거움의 말씀인데 평소의 인간들에게 믿는다는 것은 짜증나는 이야기입니다. 가끔 저는 이런 생각을 해요. 제가 설교를 하거나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하게 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짜증을 낼까, 그걸 생각해요. 왜냐하면 인간은 날 때부터 이단이거든요.

날 때부터 누구를 안 믿습니다. 태생자체가 누군가를 믿는 태생이 아니에요. 자기 외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내가 행한 것, 내가 일구어놓은 것, 내가 평생 해놓은 업적과 실적을 들추어보면서 홀로 즐거워하고 행복해 합니다. 세상에 남의 자식 잘되는 것을 즐거워하는 부모는 없어요.

남의 자식이 잘 되는 것을 보게 되면 약이 오르지요. 쉽게 말해서 짜증납니다. 남의 자식 잘되면 자기 자식을 쥐어박아요. ‘너는 그동안 뭐했니? 평소에 껄렁한 애들하고만 놀지 말고 공부 잘하는 애들하고 좀 친구하라고 했잖아.’ 그렇게 쥐어박다가 집에 불나는 수가 있어요. 인간이 남을 믿는다는 것이 인간의 생리상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믿는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이용한다는 뜻이지요. 남을 이용은 해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믿을 만 하다는 말은 이용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용가치 떨어지면 아무 소용없지만 아직은 저 사람에게서 받을 도움이 있다고 할 그 때는 ‘나는 믿습니다.’ 하고 달려들지요. 그 더러운 행세를 교회 가서도 해요.

‘주님, 믿습니다.’ 하는 말은, 소위 간증집회에서 예수 덕분에 뭐가 좀 되었다 하니까 한 번 믿어 보는 거예요. 그런데 근본적으로 ‘믿기만 하라.’는 말은 우리 태생에 안 맞습니다. 우리의 타고난 본성에는 전혀 이것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차라리 행하라고 이야기하세요. 이것도 행하라, 그렇게 행하라고 하면 잘해요. 그런데 ‘믿기만 하세요.’ 이것은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9년 만에 교회 대청소를 한다고 할 때 제가 만약에 “여러분이 참석해주세요. 참석해 보면 비로소 자기 죄를 아는데 왜 그 기회를 놓칩니까? 청소하기만 하면 없던 죄가 막 나옵니다. ‘나는 참석했는데 자기는 안 나오고 앞으로 두고 보자.’라는 것이 마구 나옵니다. 그런 자기 죄를 아는 기회를 왜 놓쳐버립니까? 믿기만 하세요.”라고 하면 절대 안 믿습니다.

‘쉽게 이야기를 하세요.’라고 하는 것 같은데 지금 쉽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람은 자기 행함을 근거로 해서 남을 판정하기 때문에 절대로 ‘여러분이 교회봉사, 헌금, 기타 여러 노력을 하시면 비로소 없던 죄가 발생됩니다. 믿으세요.’라고 하면 절대로 안 믿어요. 뭔가를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나는 이렇게 헌신하는데 저것은 만 날 팽팽 놀면서 천당 가다니 아, 정말 밉다, 미워.’ 이런 생각이 들지요.

‘믿기만 하라’고 하신 주님의 의도는 ‘자신의 행위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아예 안 믿는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믿으시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으니까 하나님처럼 나를 믿으라.’ 그 말이에요. 지난주일 오후에 그런 이야기 했지요. ‘하나님, 제가 무슨 행동을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할 때 ‘네가 뭘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요 6:29)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나님은 지금 누구만 주목하느냐 하면, 다른 인간 다 제쳐놓고 오직 특수임무를 가지고 이 땅에 파견되신 예수님 일만 주목하는데 자꾸 인간들은 교회 와서 ‘하나님, 저를 주목하세요. 저는 이렇게 훌륭합니다.’ 자꾸 자기 주목하라는 거예요. 태생이 자기 자신만 믿기 때문에 ‘이렇게 제가 살아왔습니다. 저 어때요?’라고 자기만 주목하라는 겁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입을 콱 틀어막고 ‘너는 제발 좀 가만있어. 좀 촐랑대지 말고 설치지 말고.’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너무 가만히만 있고 믿는 사람은 없다는데 있어요. 뭐가 되겠지, 교회 알아서 돌아가겠지, 라면서 가만히 있는 것은 되는데 정작 주님은 안 바라봐요. 가만히 있으면서 보라는 주님은 안보고 자기만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지금 관심가지고 계신 분은 예수님인데 예수 바라보는데 누가 방해가 되느냐 하면 스스로 설치는 것이 태생적인 우리가 방해가 되기에 우리가 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제켜버립니다. 제킬 때 그냥 제키는 것이 아니고 ‘네가 하는 것은 죄거든.’라고 하면서 제켜버리지요. 그러면 우리는 또 반발하지요. ‘뭘 해도 죄가 된다면 그러면 안 하렵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주님 하신 것을 바라볼 때 우리의 모든, 일상에서 죽을 때까지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혜택을 입고 천국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지지요. 사실은 매일같이 그렇게 느껴져야 됩니다. 나의 행함이라는 먹구름이 매일같이 덮칩니다. 아침에 눈만 뜨면 ‘오늘도 뭘 해서 밥 먹고 살지.’ 이런 우리의 행함의 먹구름이 매일같이 덮치니까 주님께서는 그 먹구름을 제치고 ‘믿기만 하라. 주님께서 오늘도 어떤 일을 맡기는지.’ 소위 사명을 발견하라는 겁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그러면 아무것도 안하지.’ 그러면 사명 자체가 없어지잖아요. 주님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걷어냄으로 말미암아 주님 주신 사명에 똑바로 확실하게 나에게 다가와서 이제는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주를 위해 살아가는 그 모습이 돼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믿기만 하라.’ 해놓고 하신 일은 뭐냐, 본문의 내용 그대로입니다. 산 사람을 일부러 죽도록 내버려둡니다. 죽으려고 할 그 때에 일부러 가지를 않았어요. 죽으려고 할 그 때는 예수님이 엉뚱한 일을 하셨어요. 12년 동안 하혈한 여인을 고치러 갔지 곧바로 가지를 않았습니다. 죽을락 말락 할 때 안가요.

소녀가 죽고 난 뒤에 그 때 주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소위 살았다는 사람을 주님께서 죽여 놓고 인간의 행함으로서는 더 이상 손댈 수 없는 지경에서 ‘끝났네. 아주 끝났어.’ 하고 인간의 행함이 철수할 그 시점을 노려서 그 때 주님께서 ‘가만히 있거라. 내가 나설게.’ 하고 살려내는 겁니다.

여기에 두 가지 삶이 나와요. 첫 번째는 죽어가는 애를 보며 애를 태우며 ‘죽으면 안 되는데, 죽으면 안 되는데’ 했을 그 때의 인간들이 생각하는 살아 있다는 그 개념, 그 개념은 오류라는 겁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그것을 염두에 두고 내가 강제로 예수님의 팔을 잡아당겨서 ‘내가 살려고 하는 것이 이렇게 힘듭니다. 살려주세요.’라고 해버리면 그것은 잘못된 개념의 ‘살아 있다’는 것에 억지로 당기는 것이 돼요.

그것은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는 관점은 현재 인간이 살아 있다고 여기는 그 자체가 오해입니다. 잘못된 개념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이라는 말을 사람들이 자꾸 오해를 해요. 지금 우리에게 있는 것을 연장한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지엄하신, 완벽한, 거룩한, 냉혹하고 비정한, 일말의 죄도 사정없이 저주하시는 그 세계에서 거뜬하게 살아 있을 때 그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살아 있다고 한다는 것을 창세기 3장에서는 ‘생명나무’라는 용어를 가지고 슬쩍 운을 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나무를 설명하면서 아담부터 이 세상 모든 인간은 어떤 인간도 생명나무 과실을 먹은 인간은 없다고 단정을 해버렸습니다.

‘생명나무 과실을 먹지 않고서 선악과 따먹은 상태에서 계속 사는 것은, 계속 살고 있으니까 마치 살아 있는 것 인 양 생각이 들어도 그것은 오산이다. 선악과 입장에서 계속 살아 있다는 그것은 죄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계속 존재하기에 그것은 진정 산다고 볼 수 없다. 진짜 사는 것은 생명나무 과실을 먹는 그것이 진짜 생명이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무도 따먹어 본적이 없지요. 없으니까 선악과 따먹은 그것으로 그냥 버티려고 애를 쓰는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생명나무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생명의 떡’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이질적이지요. 저는 주보내용 그대로는 설교하지 않습니다. 이 내용은 기본적으로 읽어 오시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기본이고 설교시간에는 더 나아가는 겁니다.

주보에 보면 이 내용이 있습니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보고 낯설어 하는 것은 큰 오류입니다. 왜냐하면 그 죽은 사람도 한때는 그들처럼 엄연히 이 세상에서 산 사람으로 행세했기에 그러합니다. 만약에 죽은 그 사람의 세계관이 살아 있는 사람의 세계관과 동일하다면 현재 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과 똑같이 죽어 있는 사람입니다.” 좀 어렵게 써 놓았지요.

이런 뜻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지금 돌아가셨습니다.’ 또는 ‘운명하셨습니다.’라는 말은 ‘조금 전까지 숨을 쉬는 것으로 파악되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습니다. 낯설고 참 생소합니다. 저분이 그렇게 돌아가실 줄 몰랐습니다. 저 사람은 우리와 다른 세계로 간 것 같습니다.’라고 하는데 그것이 오류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조금 전까지 그 사람은 우리와 같이 산 사람인데 결국 그 죽은 자의 사고방식이 우리와 같은 사고방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숨이 멈춰서 죽어버리면 사고방식이 동일하니까 현재 그 죽은 사람만 죽은 사람이 아니고 그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우리도 결국 죽으니까 살아 있다는 말을 우리가 못하고 곧 죽을 우리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죽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 뜻으로 써놓은 거예요. 늦게들 오시니 이 주보를 읽어볼 시간여유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사고방식 자체가 바뀌어야 됩니다. 현재 어떤 사람이 아무리 죽는다고 해도 그것을 낯설어 할 것이 아니고 죽음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우리 안에 원래 있었던 진짜 암세포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죽이고 우리 안에 있는 죽음을 살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죽음을 살게 하는 거예요.

의사가 수술해서 암세포를 적출해서 끄집어내듯이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늙어가면서 치매 걸리고 죽어가게 하는 이유는 이 껍데기를 빨리 말라비틀어지게 만들어야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를 좌지우지하고 주관했던 죽음이라는 그 적출물 그 세력을 꺼내서 보여주는 겁니다. ‘살아 있다고 여기면서 거울보고 봤던 그 모습이 네 모습이 아니고 네 속에는 이런 괴물이 들어 있었다.’ 하고 괴물을 끄집어내서 보이는 거예요.

‘이것이 해결되지 않았기에 너는 살아서도 구원 못되고 죽어서도 구원 못 받는다.’는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적출입니다. 그 작업을 우리가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만 날 화장발만 생각하고 껍데기를 꾸밀 생각이나 하지 어떻게 우리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 낼 수가 있습니까?

본문에서 남의 딸 같으면 그렇게 애타지도 않습니다. 자기 딸 때문에 그렇게 애탈 때에 “선생님, 빨리 오셔야 됩니다. 지금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어서 오셔서 ‘운명했습니다.’ 라는 우리가 손댈 수 없는 경계선이 쳐지기 전에 먼저 와서 고쳐주세요.”라고 주님을 요청하는 거예요. 그러한 주님에 대한 요청을 뭐라고 하느냐, 그것을 ‘행함’이라고 합니다. ‘주여, 도와주소서.’가 행함입니다. 그렇게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입 다물어라, 그 말입니다. ‘주여, 도우소서.’하는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의 본성이고 이것을 말릴 수가 없습니다. 아픈 것은 그냥 아픈 것이고 터져 나오는 것이니까 그것을 ‘행함이니까 잠잠 하라.’고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아프지만 그런 좌절과 실망과 발악과 낙담이 결국은 행함이라는 범주에 해당되는 겁니다.

주님을 찾았다고 해서 구원받지를 않습니다. 선악과 따먹고 주님을 백날 찾아봤자 그것은 선악과 속에서 나오는 함성, 침이에요. 촛불 집회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잖아요. 자살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하나의 발악이고 아픔일 뿐입니다.

제가 지난 금요일 광주강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사람들이 예수 믿는다는 말을 ‘나는 바다건너 미국이라는 나라가 있음을 믿는다……, 서울에는 청와대가 있고 거기 대통령이 살고 있는 것을 믿는다.’ 이런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에서 믿음이란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이런 예를 들었어요.

“여자 친구가 화장실에 가 있는 동안 남자가 그 여자의 가방을 들고 강아지처럼 기다리면서 서 있는 것, ‘자기야, 멀었나?’하면서 애 닳아하는 것,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주님의 얼굴을 빨리 보고 싶어서 애 닳아 하는 모습.” 이 회당 장은 예수님 때문에 애 닳아하는 것이 아니고 죽어가는 자기 딸 때문에 애가 닳아서 예수님 붙들고 살려내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믿음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에요. 그냥 자기 행함입니다. ‘이렇게 열심 으로 내가 주님을 필요로 했잖아요. 그러니까 날 괄시하지 말란 말입니다. 내 열성을 무시하지 말란 말입니다.’ 하는 자기 몸부림에 지나지 않아요.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육적인 발악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걸 두자로 종교라 하지요. 종교단체에서는 그걸 신앙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주인공인 예수님이 내 인생을 휘젓는 것이 느껴져야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평소에 나는 혼자살고 싶었는데 정말 내가 한눈에 반한 여자 친구가 나타나서 그 애인 때문에 인생이 달라져서 그 여자 친구가 화장실에 가면서 ‘자기야, 내 가방 좀 들어줘. 화장실에 좀 다녀올게.’ 할 때 그 가방을 들고 있는 이런 새로운 인생의 변화, 그 때부터는 화장실에 간 그 여자가 주인공이 되면서 우세스럽다, 부끄럽다, 누가 날 놀린다는 이런 것은 개의치 않아요.

그냥 보고 싶은 사람만 볼 뿐이에요. 그 가방을 가지고 저는 성령이라 했어요. 왜, 가방은 내 것이 아니고 그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있는 그 여자의 것이니까. 성령을 주셔서 다시 오실 분을 만나보고 싶어서 애 닳아 하는 겁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초대교회 인사였습니다. ‘주님이 속히 오실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의 행함을, 그 입을 틀어막는 어떤 과정이 있어야 될 텐데, 우리는 속이 터지는데도 불구하고 주께서 오지를 않아요. 죽고 난 뒤에 오십니다. 죽고 난 뒤에 오셔서 산자를 죽음으로 넘겨서 ‘네 행함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 죽음을 이 예수는 어떻게 해결하는가를, 네가 나대거나 설치지 말고 예수님이 행하는 것을 조용히 보라.’고 하는 겁니다.

개념부터가 바뀝니다. 사람들은 울고불고 난리 났어요. ‘이제 와서 뭘 하겠다고, 이미 죽었는데, 다 끝난 일이고 안 되는 일을 왜 하시는가? 쓸데없이 그냥 위로나 하려고 오셨겠지.’ 할 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개념자체를 바꿉니다. ‘죽은 것이 아니고 잔다.’고 했습니다. 죽은 것과 잠의 차이는, 죽음의 주체는 죽은 것이지만 잠의주체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은 깨우면 되살아나는 그 다음 순서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깨우면 살아나는 거예요. 죽은 사람은 잠자는 것이 아니니 깨워도 그냥 죽어 있지요. 그래서 잔다고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생각과 너희들의 생각이 이렇게 차이난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얄팍한 노림수가 또 있지요. “이목사 당신 말대로 사람을 죽여 놓고 살려내는 그것이 주님의 일이라면, 그리고 당신 말대로 우리가 살아 있어도 이미 죽은 자라면 사도바울이나 열두제자 이런 사람들 필요 없이 예수님이 돌아다니면서 ‘소녀야, 일어나야지.’라고 다 깨우는 식으로 하면 구원받을 것인데 사도바울의 편지나 이 복잡한 신학적인 내용들, 율법이 어쩌고저쩌고 이런 복잡한 내용들은 왜 이렇게 나오는가?” 할 겁니다.

그 이유는, 지금 소녀처럼 죽어 있을 때는 깨우면 되지만 아직 살아 있다고 우기면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한테는 ‘왜 너는 네 속에 있는 죽음의 세력을 이길 수 없는지의 이유를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이 이유를 모르게 되면 ‘나 살려주세요.’만 남지 ‘누가 나를 살려주셨지? 나는 왜 존재해야 되지? 나는 앞으로 천국에 가서 누구에게 영광을 돌리지?’라는 새로운 목적과 사명과 의무를 생각 안하게 되는 겁니다.

살려주세요, 라고 했을 때 살아났으면 그 다음부터는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자기를 살려준 분을 위해서 살아나야 제대로 살아난 것인데 살아났다고 우기면서 자기 자존심과 명예를 위해서 산다면 그것은 살아난 게 아니에요. 제가 오래도록 글을 써왔지만 제일 예리하게 불꽃 튀는 장면이 그 장면이에요. ‘우리도 복음을 아는데 왜 자꾸 이목사 당신은 일반교회 목사들은 복음을 모른다고 하느냐.’라고 자꾸 우기는 겁니다.

그럼 내가 하는 이야기는 ‘정말 복음을 알고 살아났다면 그 다음부터는 자기자존심과 명예를 위해서 사는 모습으로 복음이 증거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목사치고 자기교회 부흥성장을 좋아 안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목사치고 다른 목사가 크게 되는 것을 가지고 시기 안하는 목사가 누가 있습니까? 다 시기내지요.

교인들치고 다른 집안 애들이 다 좋은 대학에 합격할 때 자기애들이 3수, 4수하면 기분 좋을 사람 누가 있습니까? 이것은 바로 말로는 믿습니다, 살아났습니다, 구원 받았습니다, 해 놓고 살아났다는 그 행색, 모습이 여전히 죽어 있을 때의 그 행색, 오직 나만을 위하여,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만 살아가고 있으니까 제가 볼 때 수상하다 그 말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대목에 비추어볼 때 수상한 거예요. 그것 때문에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로마서가 쫙 깔려 있는 겁니다. ‘살아났나?’ ‘살아났습니다.’ ‘그러면 한 번 대조해보자.’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왜, 인간은 종교적인 욕구, 죽어서 좋은데 가려는 욕구가 다 있으니까. 문제는 성경에 나오는 모습을 보여주면 성령을 받은 사람인지 아닌지가 구분이 된다 그 말이지요.

인간은 산다는데 치중을 하는 거예요. 우리가 감동 깊게 읽었습니다만 마태복음 6장에 이런 것이 있어요. 31절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두 글자로 줄이면 ‘생존’입니다.

이방인이나 성도나 상관없이 똑같이 생존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산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생존차원에서 살기만 하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네가 옳게 살았느냐.’를 묻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살아 있다고 보지 않고 옳게 사는 것을 살아 있다고 보는 겁니다. 바르게 사는 것.

그런데 하나님께서 죽인다는 말은, 우리 속에도 죽음이 있다는 말은 그 죽음의 세력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우리는 옳게 살지 못하고 옳지 않는 방법으로 살면서 우리는 그렇게 사는 것을 너무 가볍게 여기면서 살려만 달라는 거예요. 옳지 않게 살면서 살려만 달라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의 뒷부분에 보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옳지 않는 것뿐만 아니고 우리를 둘러싼 이 세상 전체가 옳지 않아요.

이런 것이 말하기가 매우 어려운데요, 보통 도를 닦을 때 ‘나는 부족하다, 나는 옳지 않다, 나는 죄를 지었다.’ 항상 이렇게 자기를 치잖아요. 그래서 ‘나는 반성한다, 나는 새 사람 되었다.’ 그렇게 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또 오염된 가스 다 뒤집어씁니다. 성경은 백날 네가 옳은 체 해도 세상 자체가 시커멓고 그 시커먼 세상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돌아서면 마찬가지로 시커멓다는 겁니다.

그래서 너는 예수님의 말씀을 대하고 난 뒤에 ‘나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태어난 이 세상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겁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늘나라에 비해서 이 세상은 이미 옳지 않은 세계에서 우리가 태어났기에 새삼스럽게 너 자신에 대해서 이런 것이 죄라고 규정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점점 미궁에 빠집니다. 쓸데없이 죄의식을 갖지 말라 그 말이에요. 죄의식을 갖는다는 말은 이런 행동을 안했으면 죄를 안 지었을 것을, 라는 것을 전제로 깔고 하는 짓이거든요. 그것이 바로 세상을 잘못보고 있는 거예요. 세상이 죄 아닌 것이 없고 그 죄 아닌 것이 없는 이 세상에서 네가 태어난 이상은 네가 따로 ‘아, 이것은 잘못한 것이다.’라고 무릎을 칠 그런 권한이 우리한테 없어요.

그래 봐야 자기 무릎만 아파요. 태어나고 보니 더러운 곳에서 태어났고, 더러운 부모로부터 더러운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는데 거기서 새삼스럽게 뭐가 좋은 것 나쁜 것이라고 골라잡아서 핀셋으로 골라냅니까? 골라잡을 수가 없어요. 새삼스럽게 이것은 잘못이라고 깨닫는 그것에 스스로 집착한다는 것은 아주 수상해요. 그런 짓을 안했으면 아주 훌륭한 사람 되겠네요.

세상 자체가 더러운데. 세상 자체가 더럽다는 말은 마태복음 6장의 말씀처럼 인간이 살고자 하는 그 자체가 무엇을 뒤로 제켜버리고 앞장세운 것이냐 하면, ‘내가 어떤 질이든, 어떤 속성이든 그것은 신경 쓰지 않겠다. 내 목숨만 살고 내 심장만 뛰면 그만이다.’라는 욕심이 앞장섰기 때문에 옳고 그른 것은 뒷전, 두 번째 선으로 밀려버린 거예요.

사람이 일단 밥 먹고 살아야 교회 오든지 말든지 하지요. 주일날 주문받아야 되는데 언제 교회 올 시간이 있습니까? 옳게 산다는 것은 일단 배부르고 여유 있게 산다 싶을 때 그때 하는 이야기고 그 때 교회도 오는 거지요. 그래서 교회 오는 부류는 강제로 일요일에 노는 직장, 은행, 교사, 목사, 이미 직장 퇴직하신 장로님들입니다.

요즘 대기업, 중소기업직장인들 심지어 요즘엔 공직자들도 교회 잘 못나옵니다. 그러니 그 가운데서 우리가 바르게 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성립이 안 되는 것을 성경에서 분명히 이야기해 줬음에도 불구하고 악마가 얼마나 못 됐는지 ‘세상은 아주 더럽지만 나는 그래도 약간은 덜 더러운 구획을 만들어서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자아상을 구축을 해요.

‘세상은 몽땅 더러운데 그래도 나만은 철이 들어서 그래도 나는 세상이 나쁘다는 정도는 알잖아.’라고 상대적으로 뭉쳐놓고 그것을 깨끗한 자아로 잡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더욱더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로마서 5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거예요. 성화 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해요. ‘성경에서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데 왜 십자가마을은 성화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가?’ 뉴스엔조이? 거기서는 아예 내 이름을 거론해 놓았어요. ‘이 근호목사의 추종자들은 율법을 지켜야 되는데 왜 율법을 지키지 않느냐.’ 하는 식으로 해놓고 거기에 대해서 ‘복음의 빚 진자’라는 아이디를 쓰는 사람은 대항하는 글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같잖은 게 뭐냐, 율법이 온 것은 저주받게 하는 그 율법을 우리가 지켜야 돼요. ‘율법이 온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주받게 하려 함입니다.’라는 그 율법을 우리가 지켜야 된다 그 말이죠. 잘 지키잖아요, 우리는. 율법을 아무리 지켜도 그것은 저주가 우리에게 쏟아지는 하나의 방편이라는 것을 지켜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걸 지키게 되면 율법의 요구에 부응한 것이 되니까 그것이 우리의 의가 된다 그 말이죠. 그리고 ‘율법의 요구를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롬 8:1-3) 했잖아요. 그 십자가를 믿잖아요. 그래서 그 율법의 완성을 지키잖아요. 성경 말씀대로 한다 그 말이지요. 이것은 쉬운 거니까 좀 어렵게 해 봅시다.

성경에 살인하지 말라는 것이 나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을 하게 되면 이 세상에 아무도 죽는 사람이 없어야 돼요. 그런데 살인하지 말라고 해놓았는데 이 세상에는 죽는 사람이 있어요. 사람이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말은, 하나님이 사람을 죽이는 그것은 괜찮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살인하는 그것은 의라고 하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창세기 9장에 나오는 겁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의 행함이 왜 죄가 되고, 예수님의 행함은 왜 의가 되는지를 네가 가만있으면서 한 번 보라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한시도 가만있지를 못하니까 설치면서 보는 거예요.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우리 속에 잠재되어 있던 선악적인 본성이 발휘되어서 가만히 있을 때는 죄인이라고 하다가 갑자기 설치게 되면 ‘설친 만큼 내가 의롭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마구 들어요.

이것은 또 나름대로의 선과 악을 구분하는 거예요. 선과 악을 구분하게 되면 그 다음문제가 뭐냐, ‘내가 이렇게 착실하고 의로운데 왜 나같이 착실하고 의로운 인간을 왜 하나님은 날 죽이려고 하고 세상은 왜 내 맘대로 안 됩니까?’라는 하나님에 대한 반발로 튀어나옵니다.

그리되면 하나님께서 그 앞에 율법을 들이대 버리지요. ‘하나님의 법은 너로 하여금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다.’ 그 뒤에 말씀을 보게 되면 로마서 5장 20절에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죄다 저것이 죄다, 하는 것은 성도의 모습이 아니에요. ‘내가 죄인이구나.’ 이렇게 하면 되는데 ‘이것은 죄구나.’ 하면 그것을 안 하면 그것으로 의인됩니까? ‘아하, 이것이 죄인의 값을 하는 것이구나.’ 하시면 됩니다. 중간을 정리하고 넘어갑시다. 성도의 삶은 어떤 것이라고요? ‘아, 이것이 나의 죄인 된 모습이구나.’라고 아시면 된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꾸어서 ‘이것이 죄야.’라고 한다면 마치 그 죄를 안 지을 것처럼 행세하는 인간밖에 안되기 때문에 또 화를 돋우는 거예요. ‘가만있으라고 했잖아. 왜 자꾸 설쳐대.’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한 다고 분명히 했는데 네가 착해버리면 나는 뭐가 되느냐.’ 그 말이지요.

사람이 자꾸 자기 나름대로 의를 모으려고 하는 것은 뭐냐, ‘내가 저 사람보다 더 의롭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내가 생존에 필요한 것, 내 이름과 내 영광과 내 자존심에 필요한 것을 내 놓으란 말이야.’ 하고 금요철야기도 하면서 내 미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청소할 때 참석하면 그만큼 없던 죄가 나온다는 말입니다.

‘왜 이렇게 밖에 안 나왔습니까?’ 하니까 장로님이 하시는 말씀이 ‘올 사람은 다 왔습니다.’ 해요. 그 때 퍼뜩 떠오르는 것이 뭐냐, 화개장터에요. 있을 것은 다 있고 없을 것은 없는 곳, 그게 교회입니다.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주께서 친히 만드시는 교회는, 오직 예수님의 행하심을 바라보는 진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은 노아방주에 여덟 명만 들어가도 충분한 것처럼 안 올 사람은 안 오게 하고 올 사람만 오게 하는 거예요.

자기 행함은 어떻게 해도 죄인 것을 아는 사람들은 천국에 가고 그렇지 않고 예수님의 행함보다 자기 행함을 믿는 사람들은 지옥에 가고, 그렇게 하는 행위에 대해서 빈틈이 없습니다. 그게 화개장터입니다. 안 올 사람은 안와야 되고 없을 사람은 없어야 되는 거예요. 여기서 좀 더 이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라고 되어 있어요. 다시 보겠습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짧은 문장을 제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열두 살 소녀가 죽어갈 때는 주님이 안와요. 죽고 난 뒤에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살아야 돼. 살아야만 돼.’라고 생각했던 소녀 말고 소녀 주변의 인물들, 소녀는 죽어가고 있고 자기들은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이러한 구분자체는 성립이 안 된다는 겁니다. 죽어가는 소녀와 더불어서 소녀가 죽어가는 것을 애 닳아 한다면 그것은 곧 살아 있는 자기들도 실은 죽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예수님이 왜 왔는지, 인간이 못하는 것을 예수님은 어떻게 해내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사람들이 애 닳아 하든 말든지 간에 소녀를 죽여 버립니다. 죽은 뒤에 소녀가 죽는 모습을 보고 각자 거기에 대한 자기의 감상문을 쓰게 하지요. ‘이 소녀는 끝났어. 이제는 예수님도 필요 없어. 참 안됐다. 절망이야.’ 각자 자기의 감상문을 쓰게 만들어요.

감상문을 다 거두어서 빵점으로 처리하면서 찢어버려요. 그리고서는 ‘이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고 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헐~!’ 사람들의 그 평가가 옳지 않아요. 그것은 마땅히 자기는 살아 있어야 된다는 관점에서 죽은 소녀가 안됐다고 하는 거예요. 주님 보시기에는 ‘네가 참 안됐다. 네가! 소녀는 자는데 너는 죽어 있다.’ 그 말이죠.

어떤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데 중간부분에서 가사가 불분명하고 음성은 좋은데 음정이 좀 안 맞고 어쩌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 점수는요?’ 하는 거예요. 그거 일등 해봐야 무슨 소용 있습니까? 내년에 일등이 또 나오는데. 시지포스의 신화가 있습니다. 돌을 애써 굴려서 산꼭대기에 올려놓으니까 올려놓자마자 산 밑으로 도로 내려갑니다. 모든 게 허탈해요.

예수님은 그 소녀와 소녀의 죽음을 통해서 현재 있는 그 소녀뿐만 아니라 이 세상자체가 이미 잘못된 세계 속에 놓여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산 사람을 죽이고 공격해서 공개적으로 인간속의 죽음을 끄집어내는 이유가 뭐냐, 원래 밤에는 별이 더 많이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별이 있다는 것을 낮에는 몰라요.

밤이 되면 별이 더 많아집니다. 미네르바는 황혼에 뜨잖아요. 숨어 있던 것이 드러나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죽게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소녀야 일어나라.’하고 살려내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일방적인 예수님의 낯선 생각을, 여기서 중요해요, 사람들이 그 예수님의 낯선 생각을 반긴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의 하이라이트입니다. 그렇게 살려줬으면 우리 같으면 ‘고맙습니다. 내 생각이 잘못되었군요. 내가 죽어있으면서도 살았다고 우겼는데 내가 옳지 않게 살아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군요. 이제 주님의 행하심만 나의 모든 것의 소망입니다.’ 이렇게 나오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그렇게 해도 사람들은 자기 고집을 버리지 않고 그 다음부터는 ‘저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저 예수를 어떻게 작살내느냐, 눈앞에서 어떻게 예수를 없앨까.’ 여기에 분주한 겁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그런 예수님이 눈앞에 있는 이상은 나만의 고상한 거룩함, 나만의 의로움이 구축이 안돼요. 우리속의 악마가 이것이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좋지만 예수는 싫은 이유가 뭐냐, 그냥 하나님은 믿고 천국은 가고 싶어요. 그러나 예수 앞에서는 눈 돌리고 싶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나만의 가치를 인정을 안 해주니까, 나의 행함의 가치를. 우리가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을 주님께서는 아예 손목을 꺾어버려요. “네가 남보고 옳다 그르다 하지 말고, 남보고 ‘네 점수는?’ 하지 말고 ‘바로 네 점수는?” 하면 기분 나쁘다니까요.

사람이 듣기에 제일 기분 나쁜 말이 뭔지 알아요? ‘네가 알기는 뭘 알아!’ 이것이 제일 기분 나쁘잖아요. 나 자신이 나를 규정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이렇게 우리속의 죽음을 끄집어낸다는 사실을 감사해야 됩니다. ‘매일 우리를 죽음에 넘기는 것은 매일같이 우리를 살리려고 하심이다.’(고후 4:10-11)

그러면 우리는 매일같이 죽음에 넘겨지는 그것을 슬퍼해서는 안돼요. 우리가 죽음에 넘겨 질 때는 우리가 그동안 사랑했던 모든 것도 같이 넘겨지는 겁니다. 여자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 가방 들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 사람의 가방을 들고 있더라도 어떤 사명, 그 사람을 전폭으로 지지한다는 의미에서 가방 들지 말고 좀 도와주자 하는 의미에서 가방을 들어야 하지요. ‘난 당신 없이는 못산다.’가 되어버리면 그것은 안 되지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우리가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된다면 출애굽이나 성경이 다 이해가 될 겁니다. ‘당신은 왜 살아 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살아 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로마서 6장에서는 의의 종이라고 하는 겁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생명나무, 그 생명이 여기에 등장합니다. 이 생명의 등장이전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수긍을 해줘야 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러니까 우리가 죄를 지었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아예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마땅히 죽어야 되는데 죽은 그것을 가지고 슬퍼하지 말고, 성령을 통해서 무엇과 연관시키느냐하면, 우리를 죽게 만드는 그 언약, 그 약속, 그 힘이 바로 곧 생명의 힘이라는 말이지요.

살게 하는 힘이 곧 나를 죽게 한다 그 말입니다. 살게 하는 힘이 내 눈가에 기미가 끼게 만들고 살게 하는 힘이 나로 하여금 치매 걸리게 만들고 살게 하는 힘이 나로 하여금 이 땅에서 돈 한 푼 벌 때 그토록 힘들게 만든다는 말이지요. 이것이 살려내고자 하는 하나님의 선물, 은사라는 겁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이에요.

왜 그러냐, 우리는 완벽한 거룩이 없거든요. 어떻게 알았는가? 말씀 앞에서 알았습니다. 말씀 앞에 설 때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거룩한 사람이 없습니다. 끝으로 한 말씀 더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복음에 빚 진자’라는 아이디를 가진 분이 성화를 주장하는 목사님과 논쟁을 하는데 그걸 봤어요.

‘성경말씀에 하라, 하지말라가 분명히 있는데 왜 자꾸 십자가 마을에서는 예수 믿기만 하라고 했느냐, 말씀대로 해야지.’라고 하니까 ‘복음에 빚 진자’가 하는 말이 ‘당신이 한 번이라도 말씀대로 살았다면 그 실적을 이야기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나온 거예요. ‘한 번이라도 나는 이렇게 성경말씀을 지켰다는 그런 것이 있다면 내놔보라.’고 부탁을 했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뭘 내놓지는 못하고 ‘살려고 애를 쓴다.’라고 하는 거예요. 착하게 살려고 애쓰는 것은 아무나 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살려고 애쓴다는 말에 대해서 다시 하는 말이 ‘착하게 사는 것과 진짜 착한 것과는 하늘과 땅차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왜 자꾸 그렇게 착하게 살려고 합니까?

착하게 산 것으로 말미암아 자기의가 구축되고, 그래서 ‘남은 망하고 굶어죽어도 하나님, 저는 살려줄 거지요?’라고 여전히 언약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악마가 지배하고 있는 선과 악의 구조 안에 머물러 있는 거예요.

이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인 선악을 부셔버리고 언약,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아하, 내가 지금 살아가는 것이 약속의 일부구나. 약속에 의하면 내가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살려내기 위해서 교체작업을 하고 있구나. (그 교체작업 하는 과정에서) 네가 이 땅의 눈에 보이는 것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주께서 지금 기다리고 있는 천국에 가기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마라. 내가 너 같은 철딱서니 없는 인간을 위해서 내가 맞아죽을게. 그 맞아죽은 피가 너를 살려내는 용서의 피였다.’ 하는 것을 알려주는 그 일을 주께서 지금 하고 계시는 겁니다.

평소에 그런 은혜가 여러분에게 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아를 구축하는 순간부터 하나님께 대드는 순간인 것을, 마귀가 작동하는 순간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구원받았다고 말만 외치지 말고 이제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영원토록 주님의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주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