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0.20 16:08

다윗의 찬양 , 사무엘하 22장 1- 3절

본문 : 사무엘하 22장1-3절
제목 : 다윗의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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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강-삼하22장1-3다윗의찬양-2sa101017

다윗의 찬양

2010년 10월 17일                           

설교 본문: 사무엘하 22:1-3

(삼하 22:1, 개역)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삼하 22:2, 개역) 『가로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삼하 22:3, 개역)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의 구원과 관계되는 적이 두 종류가 됩니다. 하나는 이방민족이라는 적이요 다른 하나는 사울이라는 적입니다. 이것은 곧 다윗이 처해 있는 이스라엘 유리한 쪽으로 잡혀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단순히 이스라엘의 왕이라면 다윗을 대적하는 자들은 모두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자들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전쟁이나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을 무조건 옹호하는 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뒤에 보면 다윗의 적들 속에서는 이스라엘의 왕 사울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렇게 본다면 다윗은 자기 나라 백성들로부터도 공격을 받은 바가 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다른 민족들 뿐만 아니라 같은 아브라함 혈통이라고 여기는 유대인들로부터도 밉상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다윗이나 예수님의 이러한 입지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구원이라는 것과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로의 옮김인 가를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주는 바가 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 집이나 사무실이나 상점에 가면 오늘 우리가 앞서 읽은 오늘 본문 말씀이 많이 걸려 있습니다.

여러분 천천히 한번 읽어 보시며 생각해 보세요.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위로가 됩니까 되지 않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그렇다면 이이 말씀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볼 때에 어떨까요?

그들은 이 시를 보면서 다윗의 주관적인 생각이라고만 할 것입니다. 따라서 보편적인 진리가 될 수 없다고 매도할 것입니다. 진리란 객관적으로 모든 인류에게 고루 적용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뭔가 모르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전쟁이라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구원을 말씀하신다는 점입니다.

오늘 시를 오해하게 되면 “하나님의 나의 편이다”고 요약된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전쟁이라는 것이 없는 바가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씀하시는 ‘나의 반석’에서 ‘나’란 다윗이 앉은 특수한 자리를 근거로 한 겁니다. 이 특수한 자리는 장차 오실 예수님과 다윗과의 관련성 속에서 그 본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 관련성이란 바로 의인과 죄인의 만남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비로소 드러난 사실이 바로 그것인데 즉 구원이라는 것이 아담의 자리에서 두 번째 아담의 자리로 이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이동에서 그 어떤 아담의 속성도 허락받지를 못하는 겁니다. 만약에 사람이 자기 자신의 자리, 곧 아담의 자리에서 구원받지 못한채 천국을 가 버리면 거기서도 여전히 자기 자리를 고수할 것이 뻔합니다.

그렇다면 그 천국에서 해괴망측한 사태가 다 일어나게 됩니다. 즉 “왜 어린양만 찬양 받아야 되고 구원받은 우리 자신의 가치는 모독하느냐?”는 식으로 데모나 파업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왜 나만 구원시키고 내 사랑하는 자식은 지옥에 빠지게 하느냐? 자식이 지옥간 이상, 나는 더 이상 이 서글프고 우울한 천국 생활을 못하겠다”고 나올 것이 뻔합니다.

그동안 인류사에서 성경을 대하는 주류들의 생각은 모두 권력 결집과 관련 있습니다. 즉 교회 바깥에서 돌아가는 분위기와 교회가 상호 교류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바깥 세상에서 돌아가는 그 요구에 부응못하면 문 닫데 됩니다. 소위 종교개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모두 왕의 종교에 일반 백성들이 무조건 따라야 하는 세상이었습니다. 오늘날 북한에서 김정일의 정책에 따르지 않으면 집안이 거덜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이 살던 그 바벨론 시대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느부갓네살이라는 왕이 섬기는 신 말고 다른 신을 섬기면 천하의 다니엘이나 다니엘 세 친구도 사정없이 사형당하는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따라서 소위 종교개혁을 했다는 이 교회들이 바깥 사정에 눈치를 보면서 어떤 식으로 성경을 가르치고 해석하고 전했느냐는 하며는, “이제는 각자 본인들의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오직 믿음, 오직 성경, 그리고 만인제사장입니다”고 외친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결국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 중심주의 세계관’을 부추긴 꼴이 되어버린 겁니다.

즉 자기로부터의 구원이 되지 않아도 천국갈 수 있는 식으로 사람들을 선동한 것입니다. 로마서3:9에 보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이미 선언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실 때 왜 자신을 비롯해서 과거 아브라함은 제외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 구원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언약을 위한 말씀으로 말씀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다윗의 찬양은 실은 하나님의 예언이요 계시입니다. 그의 찬양 속에는 장차 오실 메시아상이 구현되어 있습니다. 이 다윗의 찬양은 전쟁을 경유해서 나오는 찬양입니다. 전쟁이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쟁이란 생존 차원이 아니라 죄를 겨냥한 의 차원에서 벌어지는 전쟁입니다.

이 의 차원에서의 전쟁에서 ‘나의 의로움’을 챙길 그 어떤 여유란 없습니다. 그런 의를 하나님이 주신 적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의 뿐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벌린 모든 전쟁도 바로 이 의로움 전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를 획득하기 위해서 그 어떤 행위가 불사하겠노라도 덤벼들었지만 도리어 그런 행위가 예수님의 의를 핍박하는 하나님의 원수로서 작용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6:28-29에 보면,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미 우리 자신이 악마에 꽁꽁 묶어서 같이 구조적으로 하나님에게 대드는 처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수가 따로 없습니다.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이란 바로 예수님의 일하심으로만 성사됩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예수님의 일하심 속에서 같이 움직이면서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쉬지 않고 일하시면서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 자신으로부터 구원을 성사시켜 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무엘하-2009/49강-삼하22장1-3다윗의찬양-2sa101017.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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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십자가마을 2010.10.20 18:3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049강-삼하22장1-3(다윗의 찬양)-2sa101017-(이 근호 목사)

    2010-10-20 16:41:56 녹취 : 이한례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하 22장 1절에서 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501페이지입니다.

    사무엘하 22:1-3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란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 아멘


    방금 읽었던 말씀 가운데서 다윗의 적이라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다윗은 이스라엘 사람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나라가 다윗의 적이라고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대통령을 세웠다면, 대통령의 적이라는 것은 북한부터, 일본, 중국 모든 것에 포함되는 그들을 이야기 하는 거겠죠. 왜냐하면 대통령은 개인적인 대통령이 아니고 대한민국의 대통령이기 때문에, 그런 대통령을 공격한다는 것은 우리 대한민국을 공격하는 게 됩니다.

    그런게 우리의 상식인데,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셨다” 그러니까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 하면, ‘너 구원 받았어? ‘ 예, 구원 받았습니다.’ ‘어떤 적에서부터 구원되었어?’ 라고 묻는 겁니다. ‘나를 구원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마귀로부터 구원 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맞는 말인데, 그것은 오늘 본문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에서 구원한다.” 라는 거기에 해당되는 말이고, 고 뒤의 말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다.”는 말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킨다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나는 나로부터 구원되었습니다. 내 구원을 남이 방해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극구 내 구원을 방해했습니다. 내가 이 땅에서 한번 살아보려고 남자 같으면 남자로서 여성으로는 여성으로서 살아보려 애썼는데, 그 애씀에서부터 주님께서는 저를 건져냈습니다. 살고자 하는 나로부터 하나님께서 건져내어서 죽어도 살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나는 무조건 내 편이고 내 바깥에 있는 것은 무조건 적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불교가 되는 겁니다. 정작 자기의 욕망으로부터는 벗어나지 못한 상태가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만약 구원이 된다면 그 사람은 하늘나라 가서도 파업하고 데모할 사람입니다. 왜 이 하늘나라 좋은 곳에 우리 엄마는, 내 자식은, 오지 못하게 하십니까? 왜 나를 낳은 어머니는 오지 못하게 하십니까? 내 귀여운 딸은 왜 못 오게 하십니까? 내 사랑하는 아내는, 사랑하는 남편은( 그런 사람은 없겠다??ㅋ 그런 사람 별로 없어요.ㅋ) 내 사랑하는 자식은 왜 못 오게 하십니까? 아마 파업할 거예요. 지금 프랑스는 파업하는데, 아마 파업할 거예요.

    우리 몸 자체는 아담의 세계에서 마지막 아담(예수그리스도)의 세계로 옮겨가는 게 구원이라면, 거기에 아담의 성질, 아담의 속성은 차단돼야 마땅합니다. 만약에 아담의 속성이 차단되지 않은 상태에서 천국 가 버리면 거기에 또 자기의 자리를 잡게 돼요.

    오늘 읽었던 본문 말씀, 여러분이 많이 봤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혹시 신방할 때 같이 따라가다가 예수 믿는 사람의 가게 하거나 가정에 보면, 현관에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라고 이런 구절이 소나무 현판에 새겨놓은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 보면, 나, 나, 나, 나 계속 등장한다고요. 나, 나가. 그런데 시편에서의 ‘나‘ 라 하는 것은 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을 두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현판에다 떡 걸어가지고 하게 되면, 이거는 누가 봐도 이거는 “나의 요새시요” 이는 ’나‘ 가 나 자신을 두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방금 설교하면서 뭐라 했습니까? 나 자신으로부터 구원되지 못하면 구원이 안 된다 했습니다. 나 자신을 그냥 가져가면 천국에서 예수님과 대치상태에 들어가요. 예수님이 우선이냐, 내가 우선이냐를 지상에서 하는 그 더러운 버릇을, 개 같은 버릇을 천국 가서도 그대로 계속 하게 되는 거예요. 어린양이 우선이냐, 내가 우선이냐, 어린양을 위해서 내가 영원히 살 거냐? 아니면 나를 위해서 영원히 살 거냐? 의 그 대치상태가 그 더러운 상태가, 더러운 행세가 천국 가서 또 그런 행세를 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런 대목의 성경을 보면서, 그 사람은 천국 안 가겠다고 해요. 천국가면 심심해서 못 살겠답니다. 왜? 자기를 위한 일이 없기 때문에. 천국 가면 전부 다 예수님을 위한 일인데, 그게 얼마나 짜증나는 일이냐 이 말이죠. 지상에 있을 때는 주체 없이 천당 가려 하니까, 하는 척 하지만 그걸 영원히 한다고 해 보세요. 영원히.

    군에서 2년, 3년 군대 교회 다니다가, 세상 교회 가면 눈물 팍 쏟아집니다. 군에 가기 전에 봉사하고 성가대 하다가, 군대 제대하고 성가대 앉으면 성가 연습 늦게 온 사람 미워 죽어요. 이렇게 귀한 성가대 봉사를 왜 그렇게 소홀히 하는지, 하지만 제대하고 6개월만 지나 보세요. 지도 늦는데..ㅎ

    하나님을 이야기 하는 그것, 자기 자신이 낮아질 때는 은혜인줄 알지만, 갑자기 그걸 상투적으로 반복이 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은혜인지 모르게 자기 자신이 솟구쳐 올라오는 겁니다.

    옛날의 중세 신학,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흔히 말하는 현재 개혁주의 신학의 초점이 뭐냐 하면, 이렇게 하시면 여러분들이 구원받습니다. 가 초점이 돼요. 침례교, 감리교, 장로교,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이름! 이름! 하나님의 영광을! 거론하지만 사실은 그 중앙에 뭐냐 하면, 나만 구원 받으면 장땡 이예요. 땡 이예요. 그거로 끝나는 거예요.

    왜 그런 신학이 그 당시 있었냐 하면, 그 당시에 민족이 분열되면서, 국가가 분열되면서 국가 영주와 임금님을 섬기는 신에서, 임금도 귀찮고 나를 위한 하나님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나가지고, 집단적으로 믿던 것을 사적(개인적)으로 믿는 종교로 바뀌기 때문에 거기에 맞는 신학들을 이야기 해줘야 복음도 아닌데, 복음이라고 이야기 해줘야 사람들이 교회에 올만하다 하고 교회에 오게 된 거예요.

    그래서 교회라 하는 것은 그냥 허구에 떠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시대 상황에 풍덩 잠기는 것이 교회기 때문에 교회 바깥에서 흐르는 사상에 서로 교류가 하게 돼 있어요. 들뢰즈란 철학자는 그런 얘기 했습니다. 처음에 인간을 세 종류로 나눴어요. 처음에 인간은 자기 혈족(핏줄)끼리 살던 시대기 때문에 그저 살아있는 사람의 자신이 욕구대로 생존만 하면 그만이었던 시절이었던 반면에, 그 뒤의 신학은 하나의 핏줄 가운데 왕초가 되는 오야봉이 등장해가지고 자기가 대장, 왕 질을 하는 그런 시대가 등장한 겁니다. 그게 국가고 왕인데, 왕 앞에 전부 다 제사장이고 뭐고 다 갖다 바쳐야 될 폭력적인 그런 세계가 왕이 있는 그런 나라가 등장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때는 사람들이 자기 신도 없어요. 왕이 믿는 종교, 왕이 믿는 신앙에 그들이 전부 합세를 해줘야 목숨이 부지되는 세상입니다.

    오늘 낮에 주일학교 했지만, 느부갓네살이라는 왕이 등장하거든요. 그 나라가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에 느부갓네살이라는 최고의 지배자가 믿는 그 신에게 복종하지 아니하면, 다니엘이고 다니엘 세친구간에 모가지 다 날아나는 그런 시대가 성경에는 있고 실제로 있었고 지금도 있어오고 그렇습니다. 지금 북한에서 김일성을 안 섬기고 욕해 보세요. 죽이죠. 그게 뭐냐 하면, 그걸 어려운 말로 ‘코더화‘ 라, 딱 균형 잡혔다. 이래 보는 겁니다.

    근데 그 시대가 끝나버리니까 그담에 사람은 그 시대가 왕이 있던 왕을 1789년 프랑스 혁명 때 왕도 단두대에다 작살을 내버렸어요. 왕이 뭐 필요 있어요? 조선시대 이후에 왕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대통령을 왕으로 섬기는 버릇이 아직 남아 있는데, 왕이 없으니까 뭐가 왕 질을 해대는가 하면, 국회의 국회의원들이 왕의 노릇을 해야 돼요. 국회의원들을 왕으로 해서 대통령을 뽑는 내각책임제라 해서 그게 민주제도가 돼 있는데, 어쨌든 저쨌든 국회의원을 누가 뽑느냐? 국회의원 하고 싶다고 뽑는 것이 아니고 투표해서 뽑을 때, 투표하는 모든 기준이 뭐냐 하면, 얼마나 우리를 잘 살게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옛날의 왕은 ‘왕의 은총입니다.’ 황공무지로소이다. 하고 엎드리는 게 문제지만, 우리는 국회 잘 뽑고 당 잘 뽑을 테니까 너희들이 이제부터는 봉사 희생 해가지고 널 뽑아준 우리를 돈 잘 벌게 하고 잘 살게 만들어라 이런 쪽으로 나라가 바뀌어요.

    그럼 뭐가 왕이냐 하면, ‘돈’이 왕 이예요. 돈이. 누가 돈 벌고 잘 사는 그걸 자본주의 사회라고 해요. 이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은 이거는 개개의 능력에 따라 이제는 똑같아요. 왕이고 태어난 신분이고 뭐고 없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잘 벌면 돈 있는 사람들이 돈을 노리고 우르르 몰려와, ‘아이고 형님, 형님’ 하면서 자동적으로 달라붙게 돼 있어요. 그래서 사람 지배하는 고런 재미도 느껴본다 말이죠. 그런 시댑니다.

    그런 시대(자본주의)의 인간이란 것은 ‘나’ 보다 더 귀한 게 없어요. 찬송가 있잖아요. 주 예수보다 귀한 게 없다고, 가사를 바꾸면 돼요. 나보다 귀한 게 없어서 ‘여러분, 여러분이 귀합니다. 따라서 귀한 여러분들을 귀하게 모시는 하나님이 여기 있고, 귀하게 모시는 예수님이 여기 있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 교회는 자본주의 원리에서 부흥 발전되는 겁니다. 우리교회 와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복 받아 부자 되었습니다. 라고 하면 그 교회 막 몰리는 거예요. 우리교회 와서 사법고시 이렇게 많이 합격했습니다. 하면 막 몰리는 겁니다. 그게 나 중심의 교회들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점점 그것이 발달하면서 문제가 생겼어요. 이게 전쟁인데요. 돈 전쟁에 빠져드니까 사람들이 이제부터 피곤한 거예요. 어릴 때부터 시험 쳐야 되고, 줄서기 해야 되고, 돈으로 실력으로 사람을 제쳐야 하니까 너무 피곤하니까 학자들이 연구를 했어요. 도대체 이게 정상인가? 보니까 정상이 아니에요.

    왜 정상이 아니냐 하면, 프로이드 라는 사람이 그것을 밝혀냈는데, 여러분 꿈을 꿀 때 누가 등장하는가 하면 내가 등장하죠. 꿈 꿀 때 등장하는 나하고, 꿈 깰 때 나하고 같습니까? 안 같아요. 꿈속에서는 막 하늘을 날고 천사처럼 날아다녀요. 꿈 깨면 현실로 돌아오죠. 따라서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닌 다른 나를 자꾸 만들어 가고, 그걸 목표로 해서 살아가고 있더란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은 꿈속에서의 내가 어쩌면 내가 그리워하던 내가 꿈속에서 있는 거예요. 아무 간섭받지 않고. 이러니까 꿈 깨면 현실적인 나와 꿈꾸면 내가 되고 싶은 나, 그러니까 평소에 나와 나 사이에 균열이 일어나는 거예요. 균열이 일어나게 되면 그담에 뭐가 일어나느냐 하면, 이게 중요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산다는 것이, 꿈속의 내가 원하는 바르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지, 현실 속의 내가 바르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지, 바르게 살고 올바로 산다는 그것도 계속해서 쪼개지고 갈라지는 겁니다.

    20대의 내가 다르고, 30대 꿈꾸는 내가 다르고, 40대는 또 다르고, 50대는 또 다르고, 그래서 오늘 본문 같은 말씀 가운데서 안 믿는 사람들은 뭐라 하냐 하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고” 나오면 안 믿는 사람들은 뭐라 하냐 하면, ‘너무나 이 시는 주관적이다. 객관적이 아니다.’ 보편적이 아니고, 다윗 자기한테만 되게 좋은 시네.‘ 그리고 이걸 딱 현판에 걸어놓으면 그 현판 걸은 그 집만 잘 되는 ’우리 집은 여호와의 요새시고, 여호와는 우리 집의 방패시고, 여호와는 우리 집의 구원자시고 도우시는 분‘ 너무나 주관적인 것만 ’우쌰 우쌰‘ 잘 되게 하는 신이기 때문에 객관성이 떨어진다. 고 얘기할 겁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얘기한 것처럼 이 시를 가만히 들여다봐도 우리는 자본주의란 세계 속에서 나라는 것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그 ‘나‘가 규정되지 않은 이상에서 아무리 봐도 소용없습니다. 이걸 봐도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만약에 집에 불이 났다 해 보세요.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주여, 날아간 돈 보충해 주세요.” 대번 이래 나온다 말이죠.

    왜냐 ‘나’라는 것이 누군지 몰라요. 나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어떤 구조화 속에 있는 고리, 하나의 고리 하나의 매듭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구조화 된 거예요. 나라는 것은 내가 나가 아니라 내 안에 채우는 것은 이 세상에서 내가 들어왔던 것이 내 안에 차 있는 거예요. 구조화해서 어렵게 돼 버렸는데....

    내가 만나기 싫어도 만나야 되고, 교사일하고 하고 싶어도 할 수없이 때려치우지 못하고, 뭐든지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 못 만나고 내가 하고 싶어도 못하고 나는 뭔가 세상에서

    구조가 갇히는 대로 갇혀야 되고 밀리는 대로 밀려야 되고, 착한 일하고 싶어도 우우 와서 밀어 붙이면 같이 해야 되는 거예요.

    촌에 가면 뭐 조신합니까? 아니에요. 촌에 가서 과수 농사하면, 뭐 며칠 안 돼서 마이크 대고 ‘장녹반 여러분, 지금 농지은행에서 뭐 하겠다는데 우리는 결사반대 합시다. 만약에 여기 반대하는 사람 같으면, 이번에 일가친척 제사지내는데, 우리 일가친척으로 간주하게 않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 족보에서 빼버린다 이리 나와요.

    그러니까 어떤 핏줄이라는 단체에 몰려버리면, 이거는 데모하기 싫어도 피켓 들고 나서야 되는 거예요. 모두가 잘 되기 위해서인데, 잘되기 위해서라는 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왕에게 복종하기 위한 잘됨이 아니고, 나에게 수입이 많이 떨어지는 쪽으로 하니까 단결 합세해야 돼요.

    여기 무슨 “여호와는 나의 요새시요, 반석이라는 말이 가능합니까? 그럼 어떻게 하느냐? 이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요. 나의 요새시요. 라는 말을 해야 되는 이유는, 전쟁이라는 것을 겪지 아니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찬양이 나올 수 없게 돼 있어요. 전쟁이 아니면. 전쟁 없이 고요한 가운데 살다가 천국 가고 싶은 것이 우리의 사적인 욕심이지만, 하지만 주님께서는 전쟁 속에 우리를 밀어 넣습니다. 전쟁 속에 밀어 넣으면 거기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느냐 하면, 옛날에는 전쟁이 없을 때는 나의 원수만 생각했었는데, 하나님이 일으킨 전쟁 속에 들어와 버리면, 내가 하나님의 원수와 합세하여 피켓 들고 하나님께 대들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돼요.

    매일같이 눈만 뜨면, 우리는 하나님께 같이 대드는 사람과 같은 사고방식과 생활 방식을 견지하고 있다는 겁니다.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나를 도와달라고 하는 그런 소리 하는 내가 하나님의 원수가 돼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 나 어디다 쓸려고? 뭘 하려고? 뭣 땜에 달라는데? 어데 써 먹을 건데? 그거 해가지고 누가 좋아라고?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싸우러 왔어요. 악마의 세계와 싸우러 왔습니다. 그런데 12제자가 예수님이 뽑아 놓으니까 오해를 했어요. 자기들은 하나님의 원수가 아닌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남들보다 더 혹독하게 자기가 하나님의 원수가 됐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 치르려 하는데, 주님 하시는 말씀이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고, 니는 나를 따르라” 어떤 동생은 자기 유산을 못 받으니까 예수님한테 와서는 ”예수님, 내 유산을 챙기게 하옵소서,“ 하니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사람의 영생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게 아니다.“

    지금 누가 누구를 쳐야 되는 지를 지금 예수님한테 도움 받으러 온 사람이 혹독하게 욕을 얻어먹는 경우가 생깁니다. 계속해서 그런 게 발생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주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주님 하시는 말씀이 ” 니가 뭘 할 생각하지 말고 나를 믿는 것이 주의 일이다.“ 세상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주의일이라는 거예요. 뭔가 교회에서 우리 손으로 해야 주의 일이라 생각하는데, 예수님이 하신일이 주의 일이고, 그 외는 주의 일이 없다는 사실을 수용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 주의 일에 합세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걸 제가 대구 서문교회에서 강의를 했어요. 아..서문교회 이승. 목사가 화가 이만큼 났습니다. 아들 목사부터 해가지고....“누구야? 이근호 목사 초빙한 사람 누구야?? 대번 보복 들어왔습니다.ㅎ 새 생명 운동 총무하고 전도운동하고 해서 강사로 오신 사람이 이 짓을 왜 하냐 말 이예요. 이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닌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회가 커져야 교회에 돈이 모입니다. 돈 끌어 모으기 위한 일을 한 거예요. 교회하고 바깥하고 똑 같아요.

    나한테는 정면으로 말고, 후담에 이근호 강사 모셨다고 너무 심하게 구박을 받았어요. 나는 이미 빠져 나왔는데...ㅎ 이것이 서문 교회가 남의 얘기가 아니고, 우리교회도 있을 수 있고, 우리 가정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요.“ 만약에 우리 집에다가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요.“ 그날 밤 꿈속에 주님 나타나서 ”니 왜그러는데? 니 뭘 바라고 그걸 걸었느냐“ 이 말이죠. 귀신 들어오지 말라고 그걸 걸어놨는가? 있는 귀신 다 들어옵니다.

    나로부터의 구원이 되려면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알아야 돼요. 이미 인간은 뭔가 개미나 벌이 뭘 쫓아갑니까? 맛있는 설탕이나 꿀을 쫓아가듯이, 인간은 구조적으로 뭐가 의로운가, 뭐가 주께 영광인지에 이런 데 관심 없어요. 나를 알아주고 나를 높여주면, 거기에 아무리 교회 다녀도 후딱 배반하고 배신하고 그 맛있는 꿀이 있는 쪽으로 본인 쪽으로 따라가게 돼 있습니다.

    이런 전쟁을 우리가 할 수 없어요. 우리는 이러한 전쟁에서 우리가 할 능력이 못돼요. 우리가 하나님 일을 못합니다. 이 전쟁을 대신 해 주시는 분을 우리는 믿어야 돼요. 로마서 3장 9절에 보면,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로마서 2장에 사도바울이 유대인 선생(요새는 목사들이죠)들에게 말하기를 “니가 도적질 말라 하면서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니가 우상숭배 하지 말라 하면서 니가 우상에 대한 돈을 탐을 내느냐? 우상에 있는 귀한 금속을 니가 탐을 내느냐? 말이죠.

    여러분 절에 가 보세요. 절에다가 만약에 금덩어리로 부처를 하게 되면, 우리는 뭐라고 비난합니까? 공개적으로 ”아이고 불쌍한 사람들, 부처를 금으로 만든 무지 몽매한 사람들, 라고 하죠. 만약에 부처 금을 녹여서 “하나 드릴게요,” 하면 우리는 얼른 받습니다.ㅎㅎ 얼른 받아요.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 자신의 내부에 있는 우리를 자랑하고 있는 악마의 싸움에서 우리가 져버리라 말이죠. 이기지 말고. 졌습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 편에 설 수 없고 마귀 편입니다. 하고 주님 앞에 항복을 선언하는 거예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하면 ”맞습니다.“ 하고 피켓 들고 ”내가 죄인입니다.“ 하고 나오면 되는 거예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구출인데 이스라엘 구출할 때 모세에게 당부했습니다. “너는 가만히 있어라, 가만히 있어,” 우리가 가만히 있어 줘야 하나님이 약속대로 약속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보라 말이죠. 그 효과가 홍해 물이 쭉 갈라지지 않았습니까? 왜 우리는 바가지 들고 매일같이 홍해 물을 푸려고 합니까? 그건 성화론 자들이나 주장하죠. 성화론 자들은 매일같이 거룩해지려 물 푸는데... 백날 푸라, 지옥 가서 푸라 하세요...ㅎㅎ

    우리는 주께서 갈라진 그 길을 좀 뻔뻔스럽지만, 가면서 우리는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승리자입니다.”라 고백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사람 되길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의 전쟁은 우리 전쟁이 아니었고 예수님께서 우리 배후에 있는 악마와의 전쟁이었습니다. 우리는 패배자였고 묶여 있었고, 우리는 가구였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오셔서 쳐들어와서 건져내시니, 우리는 주님만이 승리자인 것을 증거 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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