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0. 13. 19:01

선지자들의 문제점 : 예레미야 23장 16-17절

본문 : 예레미야 23장16-17절
제목 : 선지자들의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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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강-렘23장16-17선지자들의문제점-jer101013

선지자들의 문제점

2010년 10월 1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3:16-17

(렘 23:16, 개역)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렘 23:17, 개역)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그 배후에 천국과 지옥과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천국으로 데려가는 말씀인 것만이 아니라 지옥으로도 데려가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도 모르는 인간들은 이 말씀을 대뜸 낚아채서는 자신의 이익을 덧보태는데 활용하고자 합니다. “이것 지키면 내 소원도 들어줄거죠?”라는 흥정하는 식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인간들의 바로 이런 점을 거짓 선지자들을 놓칠 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말씀의 본래의 취지를 가로 막고 나서면서 사람들의 욕망을 수용해주는 하나님이라고 둘러대면서 포섭에 나섭니다. 바로 이런 경향으로 인하여 오늘 본문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이 거짓 선지자들을 아예 출몰하지 못하도록 하실 능력이 하나님께서 충분히 있다고 우리들은 믿고 싶지만 하나님께서 실제로는 일을 그렇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의 말씀은 천국 뿐만 아니라 지옥으로도 데려가야 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그냥 우리 인간이 듣기만 하라는 식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에는 천국과 지옥으로 이끄는 힘도 같이 나옵니다. 따라서 쥐 끈적이에 붙어있는 쥐처럼 말씀이 덮치게 되면 인간의 힘으로 그 말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식으로 어떤 이는 천국, 어떤 이는 지옥으로 끌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과 인간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다윗의 경우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무엘하 12:10-12에 보면,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사무엘하 16:21-22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왕의 아버지가 머물러 두어 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부친의 미워하는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 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지붕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 앞에서 그 부친의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하니라”

이렇듯 하나님의 약속은 빈 틈이 없이 다윗의 일생을 통해 덮치고 이끌고 관통하고 있는 겁니다. 바로 이런 상황을 다윗이 수용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일생을 말씀 전달자로 사용한다는 사실을 믿는 겁니다. 다윗의 생각은 항상 하나님 약속에 의해서 삭제당하고 덮히고 무시당하게 되는 것은 뻔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이 나와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에게도 축복과 평안을 주신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경우인가를 알아야지만 참된 선지자와 거짓된 선지자의 차이를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멸시와 존경은 서로 대립되는 말이기에 결코 하나로 합해질 수가 없고 배척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멸시했다면 이는 필시 하나님 대신 존중하는 대상이 따로 장만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 대상이 누구일까요? 이 점을 잘 보여주는 본문이 신약에 나옵니다. 로마서 10:2-3에 보면,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인간의 자기 의’와 ‘하나님의 의’가 섞일 수 있는 성질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진정 하나님의 의를 믿는다면 이는 필시 ‘자기 의’를 아예 포기한 자에게나 해당될 사항입니다. 자기 의를 포기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의를 믿는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 의를 포기한다는 것은 지금 세월까지 자신이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하나님에게 바르게 했다고 여기고 열심히 했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자진해서 삭제하고 멸시하고 더럽다고 모멸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멸시할 자가 누가 있단 말입니까?

인간이란 자신이 스스로 마음 낮춘 것도 두고두고 고상하기 그지없는 ‘자기 의로움’으로 누적이 되고 축적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겸손마저 자기 의로움 가계부에 수입으로 잡히는 마당과 아담 이후 아무도 자진해서 자신을 모멸한 자는 없습니다. 스스로 멸시하지 못하는 이상, 하나님을 존중하고 하나님의 의를 사모할 재주는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의는 사람들 손에 잡혀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의 특징은 사람들에게 낚아 채워서 사람 손에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미움을 받아 결국에는 사람들로부터 숨어버리는 경과를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경우란 그 숨어계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나타나심으로만 가능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 ‘나타남’이란 바로 그 전에 벌써 인간들의 교만과 강퍅에 의해서 이미 거부를 당한 그 상처를 안고 ‘나타남’입니다. 이로서 그 나타난 말씀 앞에서 모든 인간들은 자력으로 말씀 성취가 불가능한 자들로 들통 나 버리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말씀 지키겠다는 덤벼드는 것은 진정 말씀 자체의 의의보다는 그 말씀 지킴을 근거로 자신의 욕구 달성에 하나님을 끌어대겠다는 심보입니다. 바로 이것이 지옥으로 이끄는 계기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낚여서 자신들의 본색이 노출되게 되어 있고 그렇게 해서 그들은 지옥에 가고 할 말이 없는 겁니다.

지옥이란 죽어도 자신을 멸시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존중히 여기고 귀하게 여길 자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예수님을 십자가 죽이는 본색을 생생하게 발휘하며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님이 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의의가 ‘말씀 성취’의 차원에서 남김없이 우리네 일생에 걸쳐서 덮쳐져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네 일생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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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강-렘23장 16-17(선지자들의 문제점)-jer101013-이 근호 목사

2010-10-16 10:17:58   이름 : 오용익
 
 
081강-렘23장 16-17(선지자들의 문제점)-jer1010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3장 16절부터 1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87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23:16-17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이 세상의 모든 말들은 사람의 말, 사람에게서 나온 말, 그리고 사람이 만들어낸 말이라고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과서에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라고 나와 있는 대목이 없어요. 국어 제 3단원 42쪽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것이 없습니다. 전부 이 소설의 저자가 누구며 뜻은 무엇이며, 이런 식으로 나오지요.

사람에게서 나온 겁니다. 왜 국어교과서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가 없는가 하면 천국과 지옥에 관한 것은 하나님의 입에서 직접 나와야 되지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와서는 그것이 아무리 고상해보이고 멋있어 보여도 천국과 연결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좋은 설교를 들으면 은혜 받고, 은혜라기보다는 감동을 받는다고 하지만 그 앉은 자리에서 감동받는다고 해서 천국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혓바닥에서 긴 혀가 나와서 한 마리 파리를 낚아챘다면 그 파리는 ‘긴 혀가 나에게 달려들었네.’로 끝나면 안 되고 그 혓바닥에 파리가 앉아서 돌돌 같이 말려 들어가서 혓바닥을 내었던 그 원천의 자리로 회귀되어야 되겠지요. 쏙 들어가 버려야 됩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우리보고 감동이나 먹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은혜를 받아라, 눈물을 흘려라, 그 정도가 아니고 그 말씀이 우리한테 꽂혀버리면 그 말씀이 솔솔 당기는 순간순간 마다 우리는 그 말씀과 더불어서 천국에 가게 되고, 그 말씀뿐만이 아니고 또 같은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 꽂혀 버리면 그 사람은 본인의 생각과 상관없이 돌돌 말려버리면 그 사람은 지옥에 가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천국용으로만 쓰이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지옥 갈 자를 지옥으로 보내는 것도 이 성경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말씀은 천국 갈 사람뿐만이 아니고 지옥 갈 사람도 같이 등장한다는 것이 제가 한 말을 증명하는 거예요. 이 말씀을 순종했다는 사람도 있지만 이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이런 큰 낭패를 당한다고 항상 짝을 맞추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 보면 영원이 만날 수 없는 두 갈래의 길, 천국과 지옥, 지옥과 천국으로 확연하게 갈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다 지옥가기 싫고 천국가고 싶어 합니다. ‘목사님, 어떤 말씀이 천국 가는 말씀입니까?’라고 관심을 갖게 되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천국 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사람들은 그 말씀보다 지옥 갈 인간들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면서 말로는 천국가고 싶다고 해놓고는 막상 하나님의 말씀을 주게 되면 고개를 돌리고 침 뱉고 말씀의 전달자를 핍박하는 현상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본문 17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조작하고 위작을 하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와 마음이 강퍅한 자에게도 은혜를 주려고, ‘아무 일 없습니다. 복 받습니다. 축복받으세요.’라고 사람들을 자기교인으로 들어앉히려고 애를 쓰는 일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이런 사람을 없애면 되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시니까 이런 사람이 안 생기도록 하면 좋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핍박하는 일들이 있어줘야 진짜로 천국 가는 사람들이 분류가 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허비하는 것이 없습니다.

괜히 일을 저지르는 법은 없어요. 어떤 사람이 나에게 돌을 던져도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내게 하게 할 때는 그것이 괜한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어떤 일도, 참새가 떨어지는 하찮게 보이는 일도 그것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식으로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황무지에 비가 내리는 그것도 욥으로 하여금 깨닫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빗줄기였습니다.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주님에게 무의미하게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짜 말씀이 뭐냐, 우리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힌트를 주셨으니까,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들, 강퍅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고 좋아하면 그것은 백퍼센트 가짜 복음이고 가짜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들이 무지 좋아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이 주님을 즐겨 찾고 있을 때 그렇게 만드는 말씀은 완벽하게 엉터리이고 사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다는 것이 어떤 경우를 말하는가? 이것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 안했던 경우의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예를 하나 들고 신약의 최종적인 결론을 가지고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사무엘하 12장 11절에 보면 다윗이 간음하고 우리아를 죽이고 난 뒤에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찾아와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라는 예언을 합니다.

이 말씀대로 사무엘하 17장에 보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대낮에 궁궐 옥상에 텐트 쳐놓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해서 다윗의 위상에 모독을 주는 일을 하게 됩니다. 나단 선지자가 사무엘상 12장 12절에서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라는 예언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 다윗이 하나님을 멸시, 업신여겼다는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그렇게 보게 되면 다윗은 어떤 은혜를 받았느냐하면 하나님하고 자기하고 결코 떨어지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 더 쉽게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는 다윗 자신의 인생을 하나의 필름으로 쫙 깔아놓았다면 그 필름에 있는 내용들은 어떤 내용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예언해놓고 다윗이 일을 저질러놓고 거기에 맞대응해서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이 장차 압살롬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나님의 약속이 필름에 담긴 사진처럼 그냥 모든 것이 새겨지고 찍혀지는 하나의 누워있는 선반, 토대처럼 다윗은 그것을 인정한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지 않는 거예요. 다윗은 자기생각, 자기계획, 그것은 항상 말씀에 의해서 지워져야 되고 무시당해야 되지요. 잊어버려야 되고요. 내가 생각했던 나의 기억도 말씀에 비추어서 제거되어야 되고 삭제되어야 되는 겁니다.

바이러스 먹은 파일이 매일 같이 삭제되듯이, 글을 쓰면 삭제되고 글을 쓰면 삭제되는 것처럼 항상 주의 약속만이 우위를 차지하고 내가 생각했던 상상, 내가 기대했던 환상, 내가 구상했던 이 모든 계획은 하나님의 말씀에 밀려버리는 하나의 필름 같은 입장에 있는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려고해도 무시할 수 없는 겁니다.

자기는 도화지고 주님은 거기에 크레용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시는 겁니다. 아까 505장 506장 찬송을 부르는데 제 찬송가 밑에 해설이 붙어 있어요. ‘예수 더 알기 원함은’ 이라고 제목이 있고 그 다음에 해설이 나오는데 “작시자 엘리자 에드먼즈 히윗여사는 69년동안을 독신으로 살면서 주일학교 교육과 찬송시 작시에 전념했던 신앙인이었다.” 이걸 왜 적습니까?

우리는 지금 “예수 더 알기 원함은 크고도 넓은 은혜와……” 우리는 이것을 무엇과 연관시키느냐 하면 우리는 필름이니까 하나님의 성경말씀과 연관시키는데 이 밑에 ‘작시자 엘리자 에드먼즈 히윗여사’ 이 아줌마가 여기 왜 등장하는 거예요. 505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예수를 닮기 원함이라.” 이것은 성경말씀과 일치되는가, 일치된다면 은혜롭게 가고 있는데 “이 찬송시의 작시자 치섬은 27세의 청년 시절에 기자로 활동하던 중 주간지의……” 이 이야기를 왜 집어넣는냐 그 말이죠.

모든 성경말씀은 숨은 데서 나타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안 숨고 어떤 기자가 은혜 받으면, 혹은 어떤 69살 된 아줌마가 은혜 받으면 거기에 같이 동참하면 은혜 받는 줄 알고 뭔가 숨었다가 나타나는 것을 거부하고 글자가 있다면 글자를 읽기만 해도 은혜가 팍팍 되는 식의 것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필름이 아니고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의 생각을 삭제당하지 않는 상태에서 거기에 계속해서 덧대는 식으로 말씀이 임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여, 성경보고 내가 찾아가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혓속에 파리가 묻어서 어쩔 수 없이 빨려들어 가는 것처럼 빨려들어 가야 되는 거예요. 마치 쥐 끈끈이에 쥐가 걸리면 쥐는 빼도박도 못해요. 쌀이 바로 옆에 있어도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굶어서 죽었는데, 우리는 이 말씀의 끈끈이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상태이고 주의 말씀을 우리가 일부러 무시하려고 해도 무시를 못해요.

왜, 말씀이 덮치니까. 말씀 밖으로 벗어나려고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에서의 이 강퍅이 신약에서 최종적으로 어떻게 됩니까? 왜 제가 신약을 여기서 거론해야 되느냐 하면 구약은 중간과정이지만 신약은 최종적이거든요.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사람, 진짜 강퍅한 인간은 중간의 과정에서 나오는 것으로는 다 알 수가 없고 신약에 최종적으로 나와요.

로마서 10장 2절, 3절에 보면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서 그들은 힘써, 버티고 또 버티고, 이것이 멸시고 강퍅이거든요, 이렇게 계속 힘쓰고 버티는 것은 ‘내 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의를 만들어낼 수 있는데 내가 열심내서 이룬 의를 왜 깡그리 하나님은 무시하느냐’라는 이것이 멸시고 강퍅입니다.

사람은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님의 열심도 있고 우리도 열심을 내고 이 양쪽이 서로 통한다고 이 이야기를 적어놓은 것이 아니에요. 아무리 해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 통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한쪽은 다른 한쪽을 서로 미는 것이라는 말이에요. 이렇게 서로 적으로 간주해서 밀어 침으로 ‘너, 어느 쪽이야.’라는 것이 성립이 되는 겁니다.

자, 평생토록 교회 와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칩시다. 그런데 어느 날 복음을 들었는데 ‘우리의 모든 열심은 죄가 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오직 우리의 열심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에 달려서 얻어낸 그 효과, 십자가라는 그 의만 하나님께 찾으신다. 따라서 그 두 개는 섞이지 못하니까 어느 쪽입니까?’라고 물을 때 왕! 하고 울어버립니다.

‘얼마나 교회 생활이 재미있었는데, 얼마나 정들었는데, 그것을 어떻게 포기해.’ 자기는 하나님말씀을 존중 한다, 여기고 지켜왔던 겁니다. 하나 지키면 지킨 그것이 마일리지로 쌓이고 또 하나 지키면 또 마일리지가 쌓이고. 제 집 컴퓨터 배경화면이 어디 가서 세 식구가 찍은 사진입니다. 그 사진은 제 딸이 갖고 있는 사진기로 찍었을까, 아니면 내가 갖고 있던 사진기로 찍었을까, 라고 물으면 그것을 알 수 있는 단서가 있어요.

그 사진 안에 우리 집에서 가지고 간 사진기가 찍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사진기 두 개 중에서 어느 사진기로 찍었다는 것이 뻔히 드러나지요. 우리 딸애가 갖고 있던 사진기로 찍었기 때문에 제가 갖고 있던 사진기는 사진에 찍혀서 나온다는 말이지요. 주님께서 사진기로 찍어버리면 그 사진에 뭐가 찍혀 나오느냐 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의를 만나기전에 열심히 애썼던 그 의가 그대로 들어 있는 채 찍혀 나옵니다.

그것은 하늘나라에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미련을 두게 되면 이쪽 사진, 하늘나라 주님 사진에 얼굴이 안 나옵니다. ‘얼굴 좀 드세요.’ 하는데 ‘나는 이쪽 사진기 볼 거야.’ 하면 얼굴이 안 나와요.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뭡니까? 신앙생활이란 숨었다가 나타나는 말씀에 우리 얼굴을 훤히 갖다 대는 거예요.

그런데 일반사람들, 성령을 안 받은 사람들은 뭐냐 하면, 아까 말한 찬송가 505장, 506장의 해설처럼 이것은 자꾸 옆의 사람을 보는 거예요. 십자가 지기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졌는데 자꾸 어디를 살피느냐하면, ‘우리 목사님은 어떻고 우리 장로님은 어떻고…….’ 자꾸 옆 사람을 보는 거예요. 교회 와서 주님의 십자가만 바라봐야 되는데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자기가 과거에 주님 앞에 열심히 한 것 그것이 잊어지지가 않고 마일리지가 쌓이는 거예요.

주님께서 그것으로 천국 사진 찍지 않습니다. 그 마일리지 가지고 오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 자신을 멸시하기가 너무너무 어렵고 힘들고 불가능해요.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순간 무슨 느낌이 팍 다가오느냐 하면, ‘지금까지 당신이 교회에서 해온 모든 것을 다 잊으세요.’라고 하는데 그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을 진짜 존중하십니까?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멸시하세요.’라는 것으로 느껴지는 거예요.

자신이 스스로 멸시가 안 되면 하나님께서 누굴 보내더라도 나를 멸시해주면 그것을 고마워해야 됩니다. ‘인간도 아닌 게…….’ ‘아멘!’ 고마워해야 됩니다. 내가 스스로 멸시가 안 되니까! 교회에서 인정받고 사랑받고 훌륭하다는 소리 들어가면서 ‘장로감입니다, 집사감입니다, 권사감입니다.’ 이런 칭찬 듣는 이것을 잊을 수가 없어요.

교회는 멸시 받기 위해서 나와야 됩니다. ‘교회 키우자, 순종하자.’ 이런 것 다 필요 없어요. ‘멸시 받자!’ 네 글자로 충분합니다. 왜, 우리는 스스로 멸시가 안 되니까, 말씀을 통해서 충분히 멸시 받아야 됩니다. 생선회는 날것으로 먹을 수 있습니다만 고등어는 구워먹을 때 제 맛이 납니다. 바짝 구워서 먹을 때 고등어 입에서 ‘저 맛 어때요?’ 이런 소리 안 나오거든요.

멸시로 바짝 굽고 뒤집어서 또 바짝 굽고 또 약간이라도 덜 구운 구석구석 다 찾아서 바짝 구워서 온 사방에 자기의가 나타나지 않도록 바짝 구워야 돼요. 그런데 기존교회는 두 개가 겸할 수 있다고 본 거예요. 기존 교회들, 너무 자기의만 내세우면 이단소리 들을까 싶어서 하나님의 의로 구원받는다고 일단 해 놓고 구원을 받았으면 여러분이 열심을 내서 봉사를 해야 된다, 꼭 그런 식으로 하게 합니다.

말씀이 숨어 있는데서 나오는 이유는 사람들이 말씀이 오면 ‘말씀이다! 맞구나! 복음이다! 내가 말씀에 복종하겠습니다.’라고 그 말씀의 진짜 의미를 깨닫는 사람은 아담 이후에 아담 포함해서 한명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비난받는 용도요 핍박과 설움을 받는 용도로서 결국 사람들은 그 말씀을 사람들은 찢어버리고 태워버리고 지워버리고 침 뱉는 과정을 거쳐서 그 말씀이 사람들에게 찢겨서 숨겨져 있다가 다시 톡 튀어 나올 때는 어떤 인간도 자력으로 이 말씀 지켰다 소리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숨었다가 튀어나오는 겁니다.

예레미야가 고난 받고 예레미야가 주는 말씀은 고난 받고 난 뒤에 말씀대로 재앙이 내려지는 엄청난 약속이 성취됩니다. 다윗의 약속도 다윗이 완전히 깨지고 난 뒤에 약속이 약속대로 성취되지요. 그래야 ‘그 말씀은 내가 알아서 잘 지킬 수 있는데 괜히 하나님께서 유별나게 구신다. 그런 말 정도는 내가 내 인격으로 충분히 지킬 수 있는데.’라는 소리가 일체 안 나오도록, 전혀 안 나오도록.

사람이 왜 자꾸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느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진정으로 담긴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이고 주님에 관한 것인데, 사람이 말씀을 지킬 때 어떤 인간도 노림수를 가집니다. ‘이 말씀을 지키면 복 주시겠지요.’ 이렇게 합니다. 그때까지 없던 강퍅까지 만들어내면서 말씀을 덥석 쥡니다.

‘내가 이 말씀 지키면 저 사람보다 더 뛰어나게 해주겠지요? 그런 보너스가 있어야 말씀을 지키지요.’ 이렇게 자기 신을 우선하다 보니까 하나님은 항상 뒷전이고 예수님은 항상 천대받게 되어 있어요. 사무엘상 2장 30절에 보면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이것은 엘리제사장보고 그렇게 지키라는 소리가 아니라 ‘너는 아무리 해도 이미 잘렸어.’라는 뜻입니다. 반드시 잘리는데, 네 가문이 폭삭 망하고 잘리는데 그 이유나 알고 잘리라는 겁니다. 이 말씀 듣고도 엘리는 자기 자식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제가 십자가마을게시판 댓글에 ‘어느 인간도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했습니다. 팔이 밖으로 굽은 사람은 아브라함밖에 없다고 했지요.

팔을 보세요. 안으로 굽지 어디로 굽겠습니까? 내 자식 아닙니까? 아브라함은 이삭을 자기 안에 두지 않고 자기 밖에 두는 자식으로 본 겁니다. 이삭을 통해서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거예요. 내 자식 여기 있으니까 이 하나님의 약속의 자식을 통해서 저의 멸시와 교만과 강퍅을 용서해달라고 한 거예요.

우리는 우리의 자식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내놓을 용의가 있습니까? ‘나는 신앙생활 못해도 이 자식은 신앙생활 하는 자식으로 잘 키울 테니까 나는 이대로 죽더라도 이 자식은 천국 넣어주옵소서.’라는 용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자식이야 지옥가든 말든 나는 천당 가야지, 이런 이기주의가 우선되잖아요. 제가 지금 불가능한 이야기를 눈치도 없이 계속 이야기하고 있지요.

제 이야기가 아브라함을 본받아서 구원받으라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말씀이 숨어 있다가 나올 때는 우리가 어째서 말씀 하나 못 지키는가를, 숨어 있다가 나타남으로서 엑-레이 찍히듯이 구석구석, 우리가 얼마나 주님은 천대하면서 나만 존중하는가를 발각당하는 것이죠.

그런 뜻에서 우리가 말씀을 봐버리면 비록 다윗은 간음하고 비록 다윗은 살인한다 할지라도 다윗은 아주 아낌없이 말씀이 자기에게 덮치기를, ‘그래서 남들에게 멸시를 당해도 좋고 천대를 당해도 좋으니까 약속이 나에게 입혀진다면 그것이 내가 해야 될 소명이고 존재의 이유입니다.’ 라는 것을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예레미야가 그런 사람입니다. 예레미야는 죽습니다. 직접 얻어맞아 죽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로 위협을 느낍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그것마저 자기의 서러움을 받고 외톨이가 되는 것마저 말씀대로 될 것을 예레미야는 알고 있었지요. 우리가 어떻게 하든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죄와 은혜를 연결시켜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의 십자가 때문에 은혜 받아 사는구나.’라고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 스스로 자기를 멸시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자기이익부터 챙기고 나중에 하나님께 영광돌리겠다는 우리의 심보, 이 악마의 심보를 주님의 약속 앞에 십자가 앞에 그 피 앞에 활짝 펼쳐 보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