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0.12 19:34

이스라엘의 등불, 사무엘하 21장 15-22절


본문 : 사무엘하 21장15-22절
제목 : 이스라엘의 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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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강-삼하21장15-22이스라엘의등불-2sa101010

이스라엘의 등불

2010년 10월 10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21:15-22

(삼하 21:15, 개역) 『블레셋 사람이 다시 이스라엘을 치거늘 다윗이 그 신복들과 함께 내려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더니 다윗이 피곤하매』
(삼하 21:16, 개역) 『장대한 자의 아들 중에 삼백 세겔 중 되는 놋창을 들고 새 칼을 찬 이스비브놉이 다윗을 죽이려 하므로』
(삼하 21:17, 개역)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그 블레셋 사람을 쳐 죽이니 다윗의 종자들이 다윗에게 맹세하여 가로되 왕은 다시 우리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하니라』
(삼하 21:18, 개역) 『그 후에 다시 블레셋 사람과 곱에서 전쟁할 때에 후사 사람 십브개가 장대한 자의 아들 중에 삽을 쳐 죽였고』
(삼하 21:19, 개역) 『또 다시 블레셋 사람과 곱에서 전쟁할 때에 베들레헴 사람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는데 그 자의 창 자루는 베틀채 같았더라』
(삼하 21:20, 개역) 『또 가드에서 전쟁할 때에 그곳에 키 큰 자 하나는 매 손과 매 발에 가락이 여섯씩 모두 스물네 가락이 있는데 저도 장대한 자의 소생이라』
(삼하 21:21, 개역) 『저가 이스라엘 사람을 능욕하므로 다윗의 형 삼마의 아들 요나단이 저를 죽이니라』
(삼하 21:22, 개역) 『이 네 사람 가드의 장대한 자의 소생이 다윗의 손과 그 신복의 손에 다 죽었더라』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을 중심으로 원처럼 주변에 부하 장군들이 배치되어 있는 양상입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4장에 나와 있는 천국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천국의 가운데는 ‘어린양의 보좌’가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서 24장로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인간들을 비롯해서 피조물들의 특징은, 모두 어린양을 쳐다보고 있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단순히 쳐다보는 정도가 아니라 그 어린양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그대로 따라 움직입니다.

이러한 천국의 모습이 최종적이라면 그 전의 모든 배치들은 천국의 이러한 모습의 윤곽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천국 중심은 새언약이신 예수님이 계시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다윗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다윗을 부하들은 ‘이스라엘의 등불’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이 ‘이스라엘 등불’ 개념을 부하들이 잘 알고 있었을까요? 

흔히 교인들에게 목사들이 뭐라고 말하느냐 하며는, “여러분들은 세상과 빛과 소금입니다”고 합니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 교인들은 곧장 자기에게 적용시켜서, 자기 빼놓고 자기 주변에 있는 세상을 어두운 세상으로 간주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진정한 빛과 소금의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소위 ‘빛’이라고 우기는 그 인간의 내막을 들추어내신 식으로 작업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교인은 드디서 성도로 변합니다. 곧 자신이 빛이 아니라 빛이 따로 계심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은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은 세상의 그 누구보다 더 악한 죄인이라는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게 됩니다.

결코 자신만은 어두움이라고 여겼던 것이 깨어지고 자신도 어두움에 속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바로 제대로 빛 앞에서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아는 자들이 모아져서 천국을 이룹니다. 천국은 잘 난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라 이처럼 못난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오로지 가운데 계시는 어린양의 보좌만 쳐다보며 사는 자들이 천국의 광경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른 천국의 배치요 구조인데 과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배치와 구조는 이 천국에 부합될까요? 다윗의 부하들은 ‘힘과 힘’의 맞대결로 다윗의 왕되심의 의미를 찾고자 합니다.

사람은 현재 자신의 모습을 자꾸만 정상적인 표준 상태로 간주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나름대로의 개성이라고도 변명하고 본인의 성격이라고도 우깁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비정상을 측정할 기준을 떼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랫동안 목회 생활한 목사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경만이 하나님의 계시인데 그 대신 자신이 어렵게 인생을 산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계시 대용으로 사용합니다. 이렇게 되면 어느새 자신의 처지를 표준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이처럼 자신이 정상인지 아닌지조차 판별하는 기준점을 제거한다는 것은 벌써 위험한 지경에 들어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와서 찡찡대면 안됩니다. 자기 형편과 처지를 자꾸 앞장 세워버리면 천국의 구조와 배치의 의미가 가려져버리는 겁니다. 참된 계시가 인간의 한맺힘에서 만들어낸 가짜 계시로 답답하게 막혀버립니다. 그렇다면 그 기준점을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주위에 적들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 자신의 정체가 밝혀집니다. 적들이 무엇을 위하여 시비걸며 무엇 때문에 공격하며 무엇을 무기로 하여 쳐들어오고, 무엇을 얻고 무엇을 노리기 위하여 우리를 대상으로 삼고 상대하려고 하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자신의 적들이 자기 주변에 깔려 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본인의 존재 자체가 언약의 중심자되시고 이스라엘의 등불되시는 분을 가려버리게 된다는 사실이 발각됩니다.

전쟁이란 세상을 힘과 힘의 우열로 총정리해 버립니다. 힘 있는 자들은 힘없는 자를 지배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 전쟁의 철칙입니다. 고대에 있어 인간들에 있어 힘이란 오로지 신들이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그 신들만이 갖고 있는 힘을 어떤 식으로 얻고자 시도하는 것이 사회를 통솔하는 기본 신앙이었습니다.

다윗을 둘러싼 장군들은 바로 다윗을 이런 영웅으로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다윗이 살아있다면 곧 신마저도 인정하는 영웅으로 살아있어 자신들의 생존의 불안을 해소해줄 것이라는 믿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참 하나님의 다윗 세움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거룩과 죄의 차원을 위하여 다윗을 선택한 겁니다.

블레셋 나라와 골리앗 적장과의 싸움이 생존을 보장받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의와 거룩이 여전히 지배하기 위한 전쟁이었습니다. 생존의 차원이란 완력에는 완력으로 맞설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룩 차원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서는 ‘거룩’과 ‘완력’과의 연관성이 분명해야 합니다.

만약에 계속해서 완력에 미련을 둔다면 이는 골리앗의 의식 세계와 일치되는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대하고 복음을 대하지만 그들의 의식 속에는 ‘생존의 차원’이 자리잡고 있어 무슨 내용이 되었던 생존에 필요한 힘, 즉 신으로부터 사랑의 대상이 되어 지금보다 더 많은 양의 힘으로 둘러싸이는 것을 원하게 됩니다.

다윗의 전쟁은 항상 이 거룩을 보여주기 위해 인간의 죄를 들추어내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등불은 적을 비추는 등불이 아니라 이스라엘 내부를 비추는 등불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동네에 새로운 사람들이 이주해 왔다면 교회마다 사람을 유치하려고 애쓰게 될 것입니다.

과연 여기서 무엇이 승리요 무엇이 패배일까요? 많은 사람을 확보한 것이 교회의 승리가 아니라 이 와중에서 교회의 더러운 본색이 드러나게 되면 그것이 곧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이십니다. 즉 평소에 인간들이 얼마나 세속적인 안목으로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지를 폭로당하게 하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바로 이 점을 증거해야 하는 것이 우리 성도의 할 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공구로 사용하여 어린양의 은혜만 증거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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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십자가마을 2010.10.24 10:3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048강-삼하21장15-22(이스라엘의등불)-2sa101010-(이 근호 목사)

    2010-10-23 15:40:19 녹취 : 이한례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하 21장 15절에서 22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501페이지입니다.

    사무엘하 21:15-22

    “블레셋 사람이 다시 이스라엘을 치거늘 다윗이 그 신복들과 함께 내려 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더니 다윗이 피곤하매 장대한 자의 아들 중에 삼백 세겔중 되는 놋창을 들고 새 칼을 찬 이스비브놉이 다윗을 죽이려 하므로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그 블레셋 사람을 쳐 죽이니 다윗의 종자들이 다윗에게 맹세하여 가로되 왕은 다시 우리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하니라 그 후에 다시 블레셋 사람과 곱에서 전쟁할 때에 후사 사람 십브개가 장대한 자의 아들 중에 삽을 쳐죽였고 또 다시 블레셋 사람과 곱에서 전쟁할 때에 베들레헴 사람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는데 그 자의 창 자루는 베틀채 같았더라 또 가드에서 전쟁할 때에 그곳에 키 큰 자 하나는 매 손과 매 발에 가락이 여섯씩 모두 스물 네 가락이 있는데 저도 장대한 자의 소생이라 저가 이스라엘 사람을 능욕하므로 다윗의 형 삼마의 아들 요나단이 저를 죽이니라 이 네 사람 가드의 장대한 자의 소생이 다윗의 손과 그 신복의 손에 다 죽었더라.” 아멘


    오늘 본문을 쭉 읽어보니까, 중앙에 다윗이 있고 그 위에 아주 용맹하기 짝이 없는 다윗의 장군들이 배치돼 있는 것을 볼 수 있죠. 이러한 배치가 천국가면, 예수님 중심으로 또 다시 보게 될 겁니다. 천국에는 어떤 모습인지 여러분 궁금하지 않습니까? 천국의 중앙의 보좌에 어린양의 보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 앞에는 4종류의 생물의 형상을 갖은 천사들이 배치돼 있습니다. 그리고 고 단 하나 단 밑에는 뭐가 돼 있냐 하면, 24장로들이 있습니다.

    어린양 되신 예수님 빼놓고 다른 피조물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그것은 모두 어린양의 공로만 찬양하고 있다는 겁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첫 번째 공통점은 그 중심을 향하여 어린양의 공로, 홀로 일하심을 찬양하고, 거기에 준해서 끊임없이 예수님한테 지시를 받고 움직인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24장로들은 순교자들인데, 그들이 순교할 때 자살하고 싶어서 순교한 게 아닙니다. 베드로처럼 ‘내 생명을 포기하고 주만 따라가겠습니다.’ 자기오기 부려서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순교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순교한 것조차도 자신의 신앙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냥 주님의 일이 덮쳐서 자기는 주님에 의해서 쓰여진 사람들뿐이죠.

    어제 대전 강의하면서 그것을 바로 주님의 공구, 레지마시라고 하니까 못 알아들어요.ㅎㅎ 주님의 레지마시들이예요. 어떤 사람이 좋게 번역을 해 주었어요. ‘드라이버’ 라고. 레지마시가 정겨운데, 주님께서 사용하시니까 천국가게 된 겁니다. 이러한 배치가 천국 가서 알게 되는데, 희미한 그림자는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다윗은 그냥 다윗이 아니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 이예요. 예수님은 그냥 예수님이 아니고 새 언약을 받은 사람입니다. 유일하게 통하는 통로를 말합니다. 그 통로 위치에 다윗이 있고, 그 주변에 바로 씩씩한 장군들이 배치돼 있습니다.

    그 장군들에게 전쟁의 명분이 있어요. 뭣 땜에 전쟁을 하느냐 하면, 17절 끝에 보면, “다윗의 종자들이 다윗에게 맹세하여 가로되 왕은 다시 우리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이래 돼 있어요. 이스라엘의 등불이.

    사람을 볼 때 이스라엘의 등불로 봅니다. 만약에 우리 교인들이 저를 보고, ‘이 근호 목사님이라 하지 않고, 우리교회의 등불이시여,’ 이래 유창한 시가 나온다면, 듣는 등불 굉장히 기분 좋겠죠? ㅎㅎ ‘위대한 지도자, 영도자, 김정일 동지, 김정은 동지, 얼마나 기분 좋습니까? 남편을 보고, ’당신은 우리 집의 등불이요. 기둥이요. 문을 여니까 기둥뿌리가 깨진다.ㅎ 기둥뿌리가 중간에 휘어지고 깨진다는 거예요. 기둥 노릇 하려니까 왜 이리 힘든지... 우리 집은 예외입니다만...ㅎㅎ 평소에 가정에는 ‘등불이요, 뭐 아들한테, 아버지한테 잘 해줘, 아버지는 우리 집의 가장이고 어른이야,’ 듣는 아버지는 그게 그렇게 부담이 돼요.

    어쨌든 간에 모든 권력이라는 것은 주위에 집중이 되고 배치가 돼 있습니다. 그럴 때 자, 여기서부터 어려운 거예요. 그 주변에 있는 다윗의 부하들이 다윗보고, “오!! 이스라엘의 등불이여,” 말은 좋아요. 등불은 좋은데, 굉장히 수상합니다. 뭔가 “당신은 우리의 기둥이요.” 말은 그렇게 좋게 해주는데, 기둥한테 잔소리가 너무 심해, 뭔가 낌새가 수상해, 부담 돼요, 뭔가 노림수를 가지고 부하들이 혹시 다윗을 이용하지는 않는가를 검토해 봐야 합니다. 이게 정말 중요해요.

    우리가 “주여, 주여,” 하는데, 그 부르짖는 것이 아주 수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등불이요.“ 그런데 수상해요. 뭔가 주님을 등불로 치하하면서 예수님 갖고 있는 권력을 내가 빼앗아 보겠다. 또는 예수님 덕분에 내 숨겨진 야욕과 야망을 달성해 보겠다는 심보가 가득할 때 주님께는 그런 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진짜 이스라엘 등불 맞아요. 맞는데, 진짜 등불의 본질이 뭐냐? 그 당시 부하들이 외치는 등불이 그 등불인지, 아니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그 예수님의 뜻과 같은지 다른지를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등불의 특징은 주변을 밝게 하기위해서 자체 발광이죠. 자기 쪽에서 빛이 나오는 겁니다. 그게 등불이 하는 첫째 기능 이예요. 그렇게 되려면, 주변은 일단 어두워야 됩니다. 말 고상하게 하지 말고 아주 노골적으로 해 봅시다.

    목사가 설교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했을 때 어떤 교인이 들었다 말예요. 박 집사가 들었다 합시다. ”아, 나는 빛이야, 어디가든 빛이 돼야 돼, 이렇게 되면 박 집사의 심보가 어떻게 보이냐 하면, “그래 난 아마 빛이야,” 교회 말고 밖에 나가면, “그래 우리 회사는 믿는 사람이 없어, 그럼 나는 뭐야? 내가 지난번에 주일 날 교회 갔을 때 교회서 ”너는 빛이야 소금이야,“ 하니까, ”나는 이 회사에 빛이야. 빛이 되려면 결국은 상대방은 뭐가 돼야 해요? 어둠이 돼야 돼요. 그래 인간들 어두운 인간들, 나만 빛이야, 이게 첫 번째 오류로 빠지는 첫 번째 걸음입니다.

    두 번째는 그 빛 자체가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는 목사님이, “여러분은 빛입니다” 해놓고, 그런데 성경 말씀 통해서 ‘빛이라고 한 사람에게 빛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빛과 비교해 보세요. 여러분들은 빛이라고 우기는 음흉한 사람입니다.’ 라고 첫 번째는 세상은 어둡고 여러분은 빛입니다. 두 번째 더 나아가면, 여러분 자체가 문제 있습니다. 빛이라고 우기는 여러분 자체를 보세요. 어두움이 세상 어두움이 벌써 여러분 안에 파급돼 있습니다.

    그렇게 돼 버리면, 세 번째, ‘아하, 나는 빛이구나.’ 에서 ‘나는 진짜 어두움 중의 어두움, 죄인중의 괴수, 내가 바로 진짜 어두움이구나.~~’ 그럴 때 다른 사람이, ‘너 어떻게 알았어?’ 진짜 빛 된 분을 만났을 때, 그전까지는 내가 빛이라고 상대방보다 낫다고 우겼는데, 아이고, 진짜 빛 만나보니, 빛도 아니고 완전히 어둠 중의 괴수였다.‘라는 그때, 그 사람이 진정한 성경에서 말하는 빛과 소금의 성도입니다. 자기 자체발광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 계신 분의 발광 앞에서 자기는 가까이 있기 때문에, 늘 주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욱 더 세밀하게 죄에 대해서 예민해지고 세밀해져서 누가 뭐래도 마음을 낮춰서 살 수밖에 없는 그런 배치의 인물.

    아까 처음에 배치 얘기 했죠? 어린양의 보좌 옆의 4생물, 24장로들, 그 사람들은 남들보다 훌륭하단 생각을 절대 안 하고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빛 되셔서 이 못난 인간이 천국에 앉아서 주님을 찬양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에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면, 찬양을 할 필요 없죠. 뭡니까? 주님도 훌륭하지만 나도 쪼깨 훌륭하거든요. 이래 가지고 천국 가서 경쟁 할 거예요. 저들이 면류관 반환하는 걸 보니까 못난 인간으로서(아침에 이야기 했죠?) 못난 인간임을 알게 하셔서 세상에서 터무니없게 천국에 주님과 함께 떡 하니 앉아 있다는 게 이게 웬 은혠지, 몽땅 은혭니다. 모든 게 은혜입니다. 고백할 수밖에 없죠.

    자, 요것이 신학 성경에 나오는 해답입니다. 정답인데, 과연 구약 때도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구약 때는 왜 그게 아니냐 하면, 신약이 안 됐기 때문에, 구약은 고렇게 고정도로 전개 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제는 ‘등불입니다.’ 라고 하지만 수상한 낌새들이 폭로를 당하죠. 자체 발광 우기다가 자체 발광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깨지는 고런 사건들이 터져야 됩니다. 이걸 너무 슬프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우겼다가 고 깨지는 그것을 주님과 만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시면, 우리는 행복합니다. 어디서 그런 놀라운 체험을 하겠습니까? 내가 스스로 나를 깨지 못할 때, 주님께서 “너는 아무런 가치가 없어, 살아도 가치가 없는 거야,” 이걸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 우리가 그야말로 세상의 빛으로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겁니다.

    그 작업을 하는데 부하들이 오해(다윗은 등불입니다)가 시작돼요. 힘에는 힘으로 조지겠다는 겁니다. 힘에는 힘으로 하겠다. 저는 여러 가지 남의 설교를 들어요. 다른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데, 들을 때 제 나름대로의 제시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성경이란 계시를 이야기 하느냐, 아니면 자기 인생 의미를 계시로 만들어 내는가, 고 차이를 항상 들여다봐야 돼요. 성경 자체의 계시가 계시로 살아나느냐, 아니면 자기가 신앙생활 한 것, 자기가 살아 온 것을 신의 계시처럼 우기면서 내세우나, 그걸 이렇게 봅니다.

    보게 되면, 예를 들면 이런 게 있어요. ‘내 인생이 이렇게 서글픕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하지만 용기를 내서 다시 한 번 주님을 붙들어 봅니다.’ 굉장히 경건해 보이지만, 지금 예수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느낌 이야기 하는 거예요. 신세타령, 신세한탄이 되는 거예요. 신세타령을 아름답게 포장해 버리면, 누구 계시가 되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를 가로막는, “나 믿는 사람 맞습니다.” 우기는 인간이 조작한 계시가 돼 버려요. 아!! 또 계시하나 또 튀어나왔구나....

    “이래서 나는 죄인입니다.“가 아니라 ”이래서 예수 믿고 나는 쫄딱 망했습니다.“ 가 아니라 계시가 되면 곤란하다 말이죠. 그렇게 서글픔과 한풀이를 풀려면, 누군들 없습니까? 누군들 없어요? 어느 집에 방문해 보세요. 모두 다~~ 슬픔 있고 한이 서려있고, 천하에 자기 집보다 고생 더 많이 한 사람 없고, 지가 고생 제일 많이 했고, 망가진 것 지가 제일 망가졌고, 참, 인간성이 좋아서 살아가지 안 그러면 벌써 죽었다는 이야기를 어느 집이나 다 띵동! 누르면 그런 소리 다 나와요. 사람 좋아서 참지, 안 그러면 남편하고 벌써 헤어졌습니다. 고 나와요. 이거 뭐 다 있어요. 중요한 것은 있는 것은 맞습니다. 맞고요. 근데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니까요.

    낼 학생이 중간고사 칩니다. 오늘 교회 오는 날입니다. 교회 오면 낼 성적 올라갑니까? 택도 없는 소리예요. 컵을 하나 해도 “주여 나는 믿습니다. 컵이 입에 들어오기를.” 이렇게 기도한다고 안 들어오거든요. 아무리 컵이 있더라도 손수 내 행동을 움직여야 컵 하나도 들어오듯이, 수학하나, 공식하나, 영어 단어하나가 내가 꿈적이고 노력해야 머릿속에 들어오듯이 기도한다고 공식이 머리에 들어오는 게 아니란 말이죠. 그래서 공부든 뭐든 놀면 안 되고 열심히 공부할 땐 공부하고 뭘 해야 돈도 벌고 공부도 되는 거 맞습니다. 맞고요. 그걸 틀렸다 하면 안 됩니다.

    문제는 그것이 진짜 하나님의 등불을 가리는 자신이 등불 되기 위한 조작된 신의 가짜 계시라는 겁니다. 그게 문제예요. 그게 맞는 말인데, 맞는 말이 모여서 본인을 지옥으로 몰아넣는 게 문제라니까요. 이래하면, “일하지 마라, 기도하면 다 되겠네.“ 자꾸 엉뚱한 소리를 해요. 사람이 열심히 해야 뭘 일을 해야 주워줘요. 하지만 그것이 인생의 정답은 아니다 말이죠. 그걸 하지마라 가 아니라 그것이 인생의 정답은 아니에요. 아무것도 댓가 바라면 도둑놈이죠.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고 했잖아요. 이 얼마나 심한 말입니까? 하지만 그것이 과연 그런 생각들이 진짜 우리를 살려내는 은혜를 심하게 가려버리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이렇게 하죠. “목사님, 기준점을 제시해줘요.” 내가 이렇게 고생했다. 서럽다. 한스럽다, 나는 이렇게 낭패다. 틀렸다. 이것이 기준점이 아니고, 만인에게 공통적인 기준점이 있어요. 그 기준점은 ‘예수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림’입니다. ‘주님, 저 피 흘렸어요.’ 자기가 피 흘린 것이 기준점이 아니란 말예요. 자기보기에는 고상해 보이고 대단해 보이지만 그런 기준점이 아니에요.

    제가 어렵게 했지만, 쉽게 하면, 시골 교회 목사한테 설교 들어봐요. “내가 시골이지만, 배운 사람이 참고 와 가지고 이만큼 여러분과 함께 했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면 지 고생한 얘기예요. 와, 날 안 알아주느냐 이 말이거든요. ‘다른 목사는 월급 받고 그냥 살지만 우리 집은 얼마나 어려운지 사모가 영양사로 나간다고... 그럴 수도 있거든요. 실제로 영양사하는 목사 사모님 있습니다. 산 너머 있다 말이죠. 근데 그것을 교인 붙들고 한 풀이 해서는 신의 계시가 십자가의 피를 가리는 그건 마귀 짓이 된다 말이죠. 사모나 목사뿐만이 아닙니다. 교인들 마찬가지. 하여튼 교회 와서 제일 싫은 사람은 찡찡대는 사람,(이 소리하니까 10년 체증이 다 내려가요) 찡찡대는 사람, 계시처럼 활용해요. 남한테 이기고자 하는 하나의 무기처럼 사용하는 거예요. 찡찡대지 말란 말이죠.

    다윗의 배치도는 힘들입니다. 분명히 천국에서는 힘이 아니고 힘들을 뺐는데 여기 다윗의 부하는 신났어요. 완전히 신났어요. 힘이 넘쳐요. 완전히 한 판 붙자는 식이예요. 우리 다윗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데, 이것들이 감히 우리 다윗을 무시하고 “임금님 가만히 계세요. 우리가 힘이 돼서 다 조지겠습니다.” 조지는데 그 조지는 대상들이 어떤 대상들인가 하면, 자기보다 키도 크고 힘이 더 센 대상들을 다 죽였다는 그 업적을 나열한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남은 짧은 시간이지만, 처음에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을 때의 취지가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고 난 뒤에 사람 눈에 무엇이 보이느냐 하면, ‘다윗은 재주도 좋아, 힘도 좋아, 저렇게 골리앗을 이기다니,’ 라는 외부에 드러나는 힘과 힘의 싸움으로 일방적으로 해석을 해 버린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이 갖고 있던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연약함, 이런 것은 인간들의 가짜 계시로 다 막혀 버린 겁니다.

    로마 어디 가면 유명한 다비드상이라는 게 있어요. 미켈란젤로가 만들었다든가 있습니다. 그것을 조각한 이유가 있는데, 왼손으로 팔베개하고 오른손은 축 내리고 유명한 밑에는 고추 다 내놓고 그런 조각이 있어요. 그것을 보면 다윗은 균형미가 아주 놀랍고 상체 하체가 아주 아름답게 배치가 잘 돼 있어요. 그래서 돌팔매를 균형미 있는 자세 때문에 최대한도로 물리적으로 돌팔매를 빠른 속도로 던질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다윗의 균형미가 골리앗을 이겼습니까?

    삼손의 머리카락의 길이가 삼손의 힘의 원천이 아닙니다. 삼손의 희생정신 이었어요. 삼손의 머리카락이 길었던 것은 삼손의 희생정신을 갖추고 있는 그 시점부터 때를 기다린 거예요. 희생정신이 없는 한 두 번 다시 삼손은 블레셋을 못 이깁니다. 벌써 기가 팍 죽어버렸는데요.

    일본 축구가 아르헨티나 축구를 이겼답니다. 시람들이 놀래요. 어떻게 일본 쪽발이가 세께 최고의 아르헨티나를 이기느냐?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죠. 실력이 아니고 정신력이다.

    성경에서는 뭐냐 하면 이걸 본인의 정신력이라 하지 않고 신앙심이라 하지 않습니다. 신앙심이라 하면 자기 계시가 돼요. “역시 다윗은 믿음이 좋아 믿음이 좋아, 우리는 그의 믿음을 본받아야 돼,” 또 이렇게 나와요.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냥 레지마시, 다윗을 공구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 하면 천국에 가 있는 24장로들, 지가 잘해서 천국 온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주께서 그렇게 쓰셨고 그 쓰였던 그것을 본인이 알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기신 힘은 힘으로 이기신 것이 아닙니다. 그게 소년 다윗이 이긴 것과 같은데, 그것이 사무엘상 17장 26절에 보면, 거룩하지 않는데 거룩한 나라에 할례 받지 못한 속된 나라가 덤벼들면, 거룩한 나라의 중심에 계시는 이스라엘 등불 같은 하나님이 왕이 되기 때문에, 여호와라는 왕이 가만두지 않고 척결한다. 라는 방정식을 다윗은 보여줬을 뿐 이예요. 거룩하지 않은 자가 감히 힘을 믿고 덩치 믿고 거룩한 자한테 대들면, 저쪽은 ‘우리는 이래서 거룩하지 않습니다. 라고 자기 본색을 드러내게 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시구나.‘ 하는 것을 드러내게 하는 거예요. 어렵죠? 어려우면 쉽게 가야죠.

    예를 들어서 이 동네 만약에 요양병원이 생겼다 합시다. 이 동네 교회가 밑에는 수정교회와 우리교회 두 개 밖에 없다고 합시다. 요양병원에 새로운 환자가 오셔가지고 자기 교회 못 가고 어차피 가까운 교회에 가야 된다고 칩시다. 요양병원 환자가 1000명이라고 합시다. 그때부터 수정교회와 우리교회는 누가 교인 끌어 모으는가를 합니다. 그런데 요양병원 환자들은 자기 입맛대로 어떤 사람은 수정교회로 어떤 사람은 우리교회로 간다고 합시다.

    그래서 우리교회에서 십자가 복음을 전해가지고, “여러분이 아픈 것은 여러분의 죄 값입니다.“ 그래 가지고 다 삐져서 다 갔다고 합시다. 그런데 저쪽에는 ”여러분, 희망을 잃지 마세요. 기도하시면 병 나아서 다시 자식들과 합칠 수 있습니다.“ 했다고 합시다. 그래서 1000명 가운데서 1명만 빼놓고 999명이 수정교회 가서 크게 부흥되어 예배당을 세웠다고 합시다. 누가 이겼습니까? 누가 이겼나 말이죠.

    이게 힘의 싸움이라면 오늘 다윗의 부하처럼 힘의 싸움이라면, 골리앗을 이겼으니까 큰 힘을 가질 수 있으니까, 다윗은 골리앗보다 힘이 더 세야 된다는 원리가 있는 거예요. 그걸 그대로 그들은 지 맘대로 생각해가지고 “다윗, 다윗” 하고 있는 거예요. 생각하는 게 힘만 가지면 승리자가 된다고 착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승리는 뭐냐 하면, 숫자가 누가 많으냐가 아니라, ‘어떻게 들통 났는가,(적어 놓으세요. 이거 중요합니다) 어떻게 요양병원이 안 나타났으면 몰랐을텐데, 더러운 힘만 추구하는 그냥 힘만 있으면 전부고 돈이 힘이고 권력이고 힘만 있으면 살맛난다. 행복하다는 그 감추어진 본색이 요양병원 등장해서 전도하는 가운데서 본색이 드러냈으면, 그건 바로 우리 왕이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승리입니다.

    나쁜 놈은 나쁜 놈대로 드러나고, 복음대로 그대로 드러날 때, 그것보다 더 깔급한 3D가 없어요. 깨끗한 화면이 입체적으로 드러나요. 그게 바로 주님의 승리입니다.

    우리가 성도가 남보다 더 잘 살아야 되고, 더 못살아야 되고 하는 기준은 사라졌어요. 새 언약에서는 사라졌어요. 잘 살아도 천국가고 못살아도 지옥가고 특정 기준을 정하지 맙시다.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냐’의 본색을 드러내는 어떤 기준을 발견하신다면, 여러분들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어떻게 살든 오늘도 주님께서 친히 등불이 되어 올 때, 우리는 진짜 어둠중의 어둠이었습니다. 이것을 고백함으로써 주님께 쓰임 받음을 날마다 찬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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