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0. 6. 18:16

악의 발견 (예레미야 23장 9-12절)

본문 : 예레미야 23장 9-12절
제목 : 악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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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강-렘23장9-12악의발견-jer101006

악의 발견

2010년 10월 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3:9-12

(렘 23:9, 개역) 『선지자들에 대한 말씀이라 내 중심이 상하며 내 모든 뼈가 떨리며 내가 취한 사람 같으며 포도주에 잡힌 사람 같으니 이는 여호와와 그 거룩한 말씀을 인함이라』
(렘 23:10, 개역) 『이 땅에 행음하는 자가 가득하도다 저주로 인하여 땅이 슬퍼하며 광야의 초장들이 마르나니 그들의 행위가 악하고 힘쓰는 것이 정직하지 못함이로다』
(렘 23:11, 개역)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특한지라 내가 내 집에서도 그들의 악을 발견하였노라』
(렘 23:12, 개역) 『그러므로 그들의 길이 그들에게 흑암 중에 미끄러운 곳과 같이 되고 그들이 밀침을 받아 그 길에 엎드러질 것이라 그들을 벌하는 해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선지자의 죄를 고발하고 징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야지 일반 교인들은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바탕에는, 영적 세계에서 착함의 강도에 준해서 계급같은 것이 형성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신부보다 주교가 더 착할 것이고, 주교보다 대주교가 더 착할 것이고, 대주교보다 추기경이 더 착을 것이고, 추기경보다 교황이 가장 착한 사람이란 것이라는 의식같은 겁니다.

그래서 신부는 일반 천주교인들이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주교급에서 잘못을 지적할 권리가 있다고 믿게 됩니다. 그렇다면 교황이 잘못하면 누가 지적하지요?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근본적으로 사람들의 성직에 관한 오류는 급수가 높을수록 더욱 완벽하게 고상하거 거룩한 자들일 것이라는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잘못된 의식은 구약 유대나라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에게 지적을 받는 선지자는 제사장이라는 특수계급은 종교의 힘으로 권력체계를 단단히 갖추어놓고 사는 자들입니다. 이런 계급 구조가 이들 성직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로부터 당연히 동의를 받는 제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 성직자에게 예레미야를 보냅니다. 이렇게 되면 그들이 졸지에 거짓 선지자로 들통이 나게 됩니다. 참된 선지자가 더 착해서가 아닙니다. 진정한 선지자의 기능을 참된 선지자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죄로 인한 벌에 민감하게 수용을 해야 하는 역할이 선지자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 같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죄라도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는 예민하게 작용토록해서 거기에 대한 벌도 지체하지 않고 떨어지게 됩니다. 마치 예민한 피부를 가진 사람에게는 조그마한 상처에도 병균에 의해서 크게 곪아서 부풀어 오르듯이 말입니다. 이로서 선지자는 기능은 한 마디로 말해서 ‘희생 제물 기능’입니다.

마태복음 20:26-28에 보면,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있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세상 권세을 옹호하는 의식구조를 갖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피라밋식 의식구조가 종교계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점을 간파하고 거꾸로 뒤집어버리려고 합니다.

죄에 대한 벌이 얼마나 혹독한지는 선지자 너희들이 먼저 당해야 한다는 겁니다. 요즈음도 목사되려는 자들이 줄지를 않습니다. 남을 위해, 혹은 타인의 죄로 인해 자신이 도리어 크게 희생해야 하고 당해야 하는 것이 목사나 오늘날 성도의 역할인 것을 알아도 그 길을 그토록 가고 싶어할까요? 아닐 것입니다. 다른 꿍꿍이가 있습니다. 목사를 생계 수단으로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참 선지자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소위 선지자라는 자들은 대중들로부터 인기와 존경을 한 몸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참 선지자가 등장해서 비교되면 그들은 졸지에 하늘나라에서는 이미 거짓 선지자로 판명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 당시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잡아놓고서 사람들은 강도 바라바를 예수님보다 더 가치있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반대로 생각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선지자의 기능은 자신의 희생을 통해 죄의 실체를 폭로하는 역할을 할 사람입니다. 구약에서는 선지자와 선지자의 만남을 통해 부스러기처럼 떨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열왕기상 13장에서는 어떤 이름 모을 선지자가 여로보암 왕에게 예언을 전하고서 다른 동네에서는 사자에 물러서 죽는 사건이 나옵니다.

이 선지자는 그 누구로부터도 대접을 받아서는 아니된다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늙은 선지자를 만나서부터는 그 늙은 선지자에게 깜빡 속여넘어가서 그만 사자에게 물려죽게 됩니다. 이점을 볼 때에, 선지자의 존재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이라는 것을 이 두 선지자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죽은 선지자는 손해일까요? 아닙니다. 그 선지자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희생이 진정한 선지자의 역할인 것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또 다른 경우도 나옵니다. 열왕기상 20장에 보면, 또 이름 모를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같은 친구 선지자에게 부탁하기를 “하나님의 지시가 그러하니 제발 나를 쳐다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친구 선지자는 이 부탁을 거절하자 갑자기 사자가 등장해서 그 친구 선지자를 물어죽였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 모를 선지자는 길 가던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서 자기를 쳐달라고 하자 그 행인은 선지자를 실컷 패 주었습니다. 붕대를 감은 선지자는 아합왕을 만나게 딥니다.

아합왕이 하나님께서 잡아준 원수를 하나님의 지시도 없이 쉽게 풀어주어서 하나님의 선지자가 이토록 하나님에게 대신 실컷 얻어맞았다고 합니다. 이 장면에서 두 명의 선지자 모두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희생물이 됩니다. 한 사람은 의리를 생각하다가 사자에게 물려죽고 다른 한 선지자는 실컷 얻어맞는 희생을 해야했습니다.

이처럼 선지자의 기능은 희생입니다. 백성들의 죄에 대한 벌을 민감하게 먼저 맞이해야 하는 자들도 선지자가 해야 될 일입니다. 하지만 거짓 선지자는 이러한 희생의 정신을 모독하고 거꾸로 나갔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 비유가 나옵니다. 아버지를 재산을 성급하게 미리 얻어내어서 먼 도시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다 쓰버리고 돼지 우리에서 지내다가 뒤늦게 후회하고 아버지 집으로 기어들어오는 그 탕자 말입니다.

마음씨 좋은 아버지는 그 자식을 대환영해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입니다. 한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자식이 고생하는 줄 안다면 왜 아버지쪽에서 먼저 탕자를 찾는 노력을 하지 않았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늘 상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를 섬기고 온 그 큰 아들을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즉 희생의 의미를 모르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의 의미가 삽입되지 않는 이 시대의 선지자가 아닌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들이 살아가면서 핑계나 변명을 하지 말게 하옵소서. 그저 감사만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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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렘23장 9-12(악의 발견)-jer101006-이 근호 목사

2010-10-08 16:21:24 조 이름 : 오용익
 

080-렘23장 9-12(악의 발견)-jer1010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3장 9절부터 12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87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23:9-12

“선지자들에 대한 말씀이라 내 중심이 상하며 내 모든 뼈가 떨리며 내가 취한 사람 같으며 포도주에 잡힌 사람 같으니 이는 여호와와 그 거룩한 말씀을 인함이라 이 땅에 행음하는 자가 가득하도다 저주로 인하여 땅이 슬퍼하며 광야의 초장들이 마르나니 그들의 행위가 악하고 힘쓰는 것이 정직하지 못함이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특한지라 내가 내 집에서도 그들의 악을 발견하였노라 그러므로 그들의 길이 그들에게 흑암 중에 미끄러운 곳과 같이 되고 그들의 밀침을 받아 길에 엎드러질 것이라 그들을 벌하는 해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선지자들에게 계시를 내립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선지자에게 계시를 내린다.’ 듣는 선지자 굉장히 기분 나쁘겠지요. 교회에서 보통 이러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일반 교인들을 다루는 것은 목사가 다룰 수 있어도 목사를 다루는 것은 하나님이 친히 다루어야 된다. 평신도가 목사의 잘못을 끄집어내는 것은 자기 분수에 넘치는 일이다. 하나님의 기름 부은 종을 혼내면 잘했든 못했든 상관없이 혼나고 저주받는다.’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이 선지자들, 당시 유대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잘못했을 때는 누가 그 잘못을 지적하고 손 대드냐, 라는 문제가 대두가 되겠습니다. 본문은 선지자가 선지자에게 질책을 하는 대목입니다. 선지자가 선지자에게 질책을 할 때에 ‘똑바로 해, 잘하란 말이야.’라는 식으로 했겠는가? 아니면 또 다른 방법으로 했겠는가? 그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만약에 선지자들 중에서 더 훌륭한 선지자가 있어서 그 선지자가 다른 선지자를 질책을 한다면, 쉽게 말해서 일반 신부 혹은 목사 급 말고 그 보다 더 높은 주교 급에서 목사나 신부를 다룬다면, 또는 감리교 같은 경우에 감리사가 일반목사를 다룬다면 주교 급은 누가 손대지요? 그러면 주교보다 더 높은 대주교가 다룰 것이고 대주교가 잘못한 것은 누가 손보지요?

그것은 교황이 손보면 되고, 그러면 교황이 잘못한 것은 누가 손보지요? 그것은 예수님이 손보십니까? 바로 그러한 의문점을 본문은 가볍게 해소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상식과는 완전히 다른 방법이 됩니다. 우선 선지자가 일반교인보다 더 착하고 완벽해야 된다는 사고방식이 있게 되면 아까 제가 말한 그 사다리 같은 계급에서 일반 교인들은 못 벗어납니다.

‘어찌되었든 간에 우리 목사님은 나보다 더 훌륭할 것이다.’ 하는 선입감, 그것은 하나님 뜻이 아니고 인간의 아이디어에 불과한 겁니다.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지자, 그들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니고 죄인입니다. 선지자가 존재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죄를 감추기에 급급한 반면에 선지자와 일반인과 다른 점이 있는데 죄를 있는대로 들키는 기능을 하는 것이 선지자입니다.

우리의 상식과는 완전히 다르지요? 우리는 선지자, 혹은 목사가 더 착하다고 여기잖아요. 그런데 구약 때 선지자가 존재하는 이유는 일반교인들이 미처 모르는, 일반성도들이 미처 모르는, 일반인들이 ‘이것은 죄가 아닐 것이다.’라는 것까지 선지자선에서 ‘그것이 죄 맞거든.’ 하고 자기의 모습을 통해서 죄가 폭로당하는 선구자들, 폭로당해서 하나님께 벌 받아야 될, 그래서 매를 먼저 맞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 선지자입니다.

쉽게 말해서 희생물입니다. 그렇게 그들이 희생물이 될 때 그들은 어디에 가까운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물과 연결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내가 이 땅에 온 것이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다. 섬김을 받는 것은 어느 쪽이냐, 세상의 권력구조에서는 섬김을 받는다.’(마 20:25-28) 하는 겁니다.

아랫사람은 그보다 약간 윗사람을 섬기고 그 윗사람은 또 약간 더 윗사람을 섬기고, 대리는 과장을 과장은 부장을 부장은 이사를 이사는 사장님을 섬기는 이것이 세상의 권력구조라면 ‘나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 권력구조를 모래시계 뒤엎듯이 피라미드 뒤엎듯이 그것을 뒤집어버리는 거예요.

뒤엎어 버리면 일반사람들은 조금 잘못한 것, 그냥 넘어가는 죄도 선지자에게는 아주 민감해요. 민감한 피부 같아요. 어지간한 화장품을 써서는 안돼요. 약간만 뭔가 먼지나 바이러스가 스쳐도 퉁퉁 부어야 돼요.

요즘 제가 새끼손가락이 아픈데 뭐가 들어간 것 같은데 선지자는 아주 심하게 조금만 뭐가 스쳐도 얼굴이 퉁퉁 붓고 두드러기가 나야 되고, 죄를 가진 자에게는 반드시 벌이 주어진다는 것을, 아주 여리고 여린 영혼이 되어서 아주 얇은 막처럼 되어서 약간의 흠만 있어도 된 통으로 터지는 역할과 기능을 먼저 하라는 것이 선지자입니다.

이걸 그 당시 유대나라 사람들이 몰랐어요. 이스라엘도 몰랐습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그 당시의 참 선지자들, 이사야나 예레미야 다윗 이런 사람들이 알지 다른 사람은 몰라요. 그래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의 잘못은 어떻게 들통 나느냐하면 참 선지자와 대비될 때 거짓 선지자로 들통 나는 방법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겁니다.

참기름이 진짜인줄 알려면 참, 참, 참기름이 등장해야 되고 이 꿀이 진짜 꿀인지 가짜 꿀인지가 파악되려면 참, 참, 참 꿀이 등장해야 되지요. 왜냐하면 오늘 본분에서 선지자나 제사장들은 돗대거든요. 자기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자기보다 더 높은 사람이 없어요. 선지자나 제사장은 그 당시는 신의 계시를 논하는 사람들입니다.

거룩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인데 어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 말씀도 모르는 아마추어가 말씀을 거론하면서 들이댑니까? ‘네가 말씀에 어긋났다.’라고 하면 ‘이게 어디서! 말씀도 모르는 것이, 어느 신학교 몇 년도에 나왔어? 네가 원어를 알아?’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목사도 그렇게 설치는데 신학교 교수나 박사가 되면 얼마나 설쳐대겠습니까? 그렇게 신학박사 되고 신학을 공부하면 뭐합니까? 선지자가 뭘 하는 기능인지도 모르는데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예수님께서 ‘난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고 너희를 위해서 나를 대속 물로 주려 하심이라. 이런 나를 본받아라.’라고 했거든요.

‘네가 어린아이같이 섬기지 아니하면 너는 하늘나라 못 간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준 것은, ‘하늘나라라는 것은 많이 생채기가 나야 되고 많이 얻어맞아야 되고 조금 잘못했는데 열 배나 얻어맞는 사람, 그래서 죄라는 죄는 다 예민하고 민감하고 항상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볼 때 죄라는 것부터 출발해서 세상을 볼 수 있는 사람, 그게 바로 선지자다.’라는 겁니다.

오늘날 성도라는 것이 바로 이런 사람이지요. 교회에서 복음 아는 목사가 계속해서 복음만 전하는 것은 ……, 교인들이 이래요. ‘휴, 또 십자가인가? 또 복음인가?’ 막 거부반응이 일어납니다. 신명기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제가 요새 책을 하나 쓰는데 거기에 그게 나와요. 정탐꾼이 약속의 땅에 정탐을 다녀오지요.

가기 전에는 의기양양 했지요. 다녀와서 보고를 하는데 ‘저들이 키가 얼마나 큰지 장대 같고 우리는 이제 다 죽었다.’ 하니까 그 소리를 듣고는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성통곡을 하면서 ‘괜히 왔어. 괜히 왔어.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까봐.’ 하면서 후회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을 제가 빗대어서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했어요.

오늘날 교회가 교회 부흥시키고 돈 모아서 교육관 짓고 하늘나라 확장한다고 선교사도 보내고, 그러고 있는데 목사가 ‘여러분, 저는 이제 십자가 피만 전하겠습니다.’ 할 때 교인들이 속으로 대성통곡을 해댑니다. 복음을 안다는 목사는 그걸 아는 거예요. ‘교회가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가 사람을 구원한다.’는 겁니다.

그 차이 뿐이에요. ‘목사님, 복음 전하는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자꾸 물으시는데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사람을 구원하지 교회 덩치가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다.’ 하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외치는 목사가 복음 전하는 목사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교회에 돈 낼 때 자기가 다니는 교회 덩치 키우겠다고 돈을 냈는데 복음 아는 목사가 그런 소리 해버리면 대성통곡 안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선지자요 왕이요 제사장이요 하는 것은 구약과 연계를 시켜야 돼요. 연계를 시킬 때 예수님이 선지자로 오셨다는 말은 반드시 그 주변에는 거짓 선지자가 있었어요. 거짓선지자가 있었는데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백성의 마음이나 선지자의 마음이나 전부 다 ‘키우자, 키우자, 키우자.’ 했습니다. 얼마나 듣기 좋은 이야기입니까?

‘복 받으면 클 수 있습니다. 복 받으면 클 수 있습니다.’ 얼마나 듣기 좋은 소리예요. 그런데 그 한 가운데 참 선지자인 예수님이 오셔서 비교를 해보니까 백성들이나 그 당시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는 선지자나 제사장들이나 다 한통속이 되어서 악마의 나라를 이룩한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진리다. 내가 길이고 내가 생명이다. 내 살과 피가 영생이니 나 빼놓고는 없는 것이다.’라고 했을 때 그들이 예수님을 때려죽일 수밖에 없었지요.

그리고 거기에 있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바라바라는 강도보다 더 쓸데없는 존재로 예수님을 처분했습니다. ‘누굴 살려줄까? 예수를 살려줄까’ 하니까 ‘예수를 죽이고 차라리 저 강도를 살려주는 것이 더 낫다.’고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거기에 합세를 했습니다. 지금 유대인들 욕할 것이 못됩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했던 일들과 똑같은 일들이 교회에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선지자의 관계에서 본문에서 악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그 악이 뭐냐 하는 겁니다. 대충 감을 잡았겠지만 좀 더 확실하게 감 잡기 위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참 선지자를 보낼 때는 반드시 거짓선지자와 참선지자와의 만남, 그 만남의 틈새에서 ……, 두 선지자 중에 어느 쪽이 옳다가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참 선지자지만 그 이전 초창기에 이름을 밝히지 않은 선지자들에게는 둘 다 헤딩을 시켜서 양쪽 다 부스러기처럼 떨어지는 그것이 진리에요.

어느 한쪽이 승리했다, 어느 한쪽이 착하다가 아니라 꽈당, 하고 맞닿은 그 사이에 있는 그 무엇, 그 틈새에서 떨어진 그것이 장차 예레미야로 연결되는 겁니다. 사실 그 전부터 엘리야 엘리사로 연결되겠습니다만. 열왕기상 13장 18절에 보면 이름 모를 하나님의 선지자가 하나 등장합니다. 그 당시 북쪽에 여로보암이라는 사기꾼같은 왕이 있어요.

그 왕을 고발했습니다. ‘당신의 가문은 망한다.’ 왕이 ‘이놈이 감히 어디서!’ 하고 잡으려고 하니까 손이 갑자기 굳어져서 풀리지를 않습니다. 선지자가 기도해서 풀어주자 왕이 하는 소리가 ‘내가 땅과 많은 것을 주겠다.’ 할 때 하나님의 계시가 선지자에게 내려왔어요. ‘선지자야, 너는 너에게 땅이든 물이든 음식이든 뭐든 일체 받지 말라.’라고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당부를 했어요.

그런 당부가 있은 뒤에 선지자가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북쪽 이스라엘왕국에 늙은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렇게 훌륭한 선지자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서는 만나보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 늙은 선지자가 물과 양식을 대접하면서 ‘우리가 같은 선지자인데 혹시 신학교 어디 나왔습니까?’ ‘사당동 총신출신입니다.’ ‘아이고, 저도 거기 나왔습니다.’ ‘혹시 몇 회? 75회라고? 아이고, 내가 56회.’ ‘그런데요, 저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런 것을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 ‘나도 당신같이 복음도 알고 다 아는데 하나님의 천사가 나에게 찾아와서 당신을 섬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 대접은 받으셔도 됩니다. 이 시대에 이런 훌륭한 선지자가 있다는 것을 저는 아주 뿌듯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해서 대접을 해주고 그 대접을 받았지요.

그런데 대접받고 난 뒤에 갑자기 어디서 거대한 사자가 등장해서 그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여 버립니다. 이것은 간단한 문제에요. 우리는 어느 선지자가 옳으냐, 그것을 찾기 십상인데 선지자가 옳으냐, 하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이 말씀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 밑에 선지자는 인간이 아닙니다. 죄인입니다.

다른 사람은 인간으로 마음껏 행세하라고 하세요. 세상 사람들 다 그렇게 사세요. 하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성도는 죄인입니다. 이 사실, 이 기능을 두 선지자가 꽈당, 하고 헤딩을 하니까 비로소 떨어지는 부스러기가 ‘아하, 인간보다, 선지자보다 보이지 않는 말씀이 우선이구나.’ 하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선지자는 너무나 억울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천사라고 하면서 한 것을 왜 그렇게 허용하느냐? 그 선지자는 희생물이 된 겁니다. ‘말씀을 어긴 자는 이렇게 단박에 벌 받는다.’ 하는 것을 멋들어지게 즉각적으로 벌 받는 역할과 기능을 그 이름 모를 선지자는 했어야 했습니다. 그게 바로 선지자입니다.

여자가 목사 되겠다고 나서고 신학교 시험 친다고 하는데 왜 그 희생물을 자진해서 하려고 하는지 저는 도저히 이해가 안돼요. 목사가 되면 뭔가 챙길 것이 있는 모양입니다. 집안에 목사 나왔다고 축하를 하고. ‘목사는 착하다.’라는 사고방식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목사는 훌륭하다.’ 목사는 훌륭하지 않습니다.

목사는 된 통으로 당해야 됩니다. 그것도 하나님한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단한테 패배해서 당해야 돼요. 이단 만나서 엎어지고 이단한테 오히려 채여서 죽어야 돼요. 그 기능을 복음 아는 선지자는 해야 됩니다. 힘도 없고 교인도 없고 돈도 안 되고, 그래서 목사 되어 복음 전한다고 좋아들 했는데 그랬던 일가친척이 다 떨어져 나가잖아요.

다 외면하면서 ‘너는 언제 그렇게 해서 교인 모을래.’ 명절 되어서 만나기면 하면 ‘너는 그렇게 해서 언제 교인 모을래?’ 얼마나 그런 소리를 듣겠습니까? 성경에서 구원이 의외로 어려워요. 예를 들게요.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이야기를 여러분이 아시지요.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성질 급하게 가져가서 기생하고 지내면서 다 털어먹고 돼지하고 뒹굴다가 나중에 집구석에 기어 들어와서 아버지가 소 잡아줬다는 그 탕자요.

그 탕자 이야기에서 우리가 그것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 탕자의 아버지는 아들이 집나갔을 때 왜 사람을 풀어서 먼저 안 찾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왜 탕자가 집구석에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가 하는 거예요. 찾아내면 될 텐데. 전봇대에 ‘이 사람을 아십니까?’ 다 붙이고 찾아야 될 것을,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을 찾아가지 않고 왜 돌아오기만을 그냥 기다렸는가, 그 말입니다.

핵심은 하나예요. 집에 있는 아들 작살내기 위해서, 큰 아들 작살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큰 아들과 비교하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하나님이 용서하고 사랑한다고 하니까 그냥 우리 사랑한다고 엎어지고 자빠지면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구원은 제켜야 되고 조져야 되고 반드시 탈락시켜야 될 사람과 함께 부각시킵니다.

‘너는 아니야. 네가 옆에서 아버지를 모셔도 너는 아니야.’ 반드시 한쪽이 구원되려면 한쪽이 지옥을 가 주셔야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니 가슴이 아파요. 구원받으려면 한쪽은 교회 와서라도 세상으로 나가줘야 돼요. 그것도 복음 안 듣고가 아니라 복음 다 듣고 지옥으로 가 주셔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선별적이고 인간의 요구에 따라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요구에 따라서 일방적으로 택한 백성만, 예수님이 원하는 자만 구원하는 것이 명확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교회에 붙어 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에 새벽기도 나오고 금요철야 나오고 아예 교회에서 살림을 살아도 교회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구원되는 경우는 예수님의 피의 의미를 아는 경우만이 구원이 되지요. 우리가 언제 그 탕자 같은 마음을 유지하겠습니까? 그 첫사랑을 놓지 않겠습니까? 또 한 예가 아합왕 때 입니다. 아합왕 때에도 두 이름 모를 선지자가 등장해서 꽈당, 헤딩합니다. 어떤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어요.

아합왕이 벤하닷이라는 아람나라장군을 잡아놓고 이걸 봐주는 겁니다. ‘이젠 나한테 꼼짝 못하지? 정신 차렸지? 그러면 풀어주마.’ 하고 풀어줘 버렸어요. 하나님에 의해서 체포된 자를 자기의 위신을 위하여 ‘저 사람 풀어주면 얼마나 나를 어질다 하겠느냐.’ 하고 마치 자기가 잡아놓은 것처럼 자기 맘대로 풀어줘 버린 거예요.

풀어주니까 하나님께서 이름 모를 선지자 하나를 등장시켜서 친구 선지자를 만나게 합니다. ‘친구야. 내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도록 쳐버려라.’ ‘아이고, 내가 왜 널 때리겠느냐.’ 그러니까 선지자가 하는 말이 ‘너 나가서 곧 사자에게 물려죽는다.’ 그래서 사자에게 물려죽었어요. 사람을 안쳤다고 물려죽은 거예요.

이것이 인간의 윤리적 양심적, 도덕군자, 공자나 맹자에 이런 것이 안 나옵니다. ‘친구가 때리라고 하거든 실컷 때려줘라.’ 이런 것이 공자나 맹자나 칸트나 소크라테스에 안 나와요.도덕 책에 안 나옵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선지자가 ‘날 때리라.’고 하거든 ‘패버려라’ 하는 것이 성경에 나온다니까요. 성경에!

안치다가 사자에게 물려죽었습니다. ‘왜 네가 하나님 말을 안 들어.’ 하는 거예요. 그래서 또 가다가 어떤 사람을 만났거든요. ‘치세요.’ 하니까 그 사람이 그 날 부부싸움을 했는지 성질난 것이 있었는지 잘되었다, 해서 실컷 팼어요. 그래서 선지자가 붕대를 칭칭 감았어요. 붕대를 칭칭 감고 아합왕을 만나서 이야기를 합니다.

이야기를 꾸며내요. ‘왕이여, 제가 전쟁터에 나갔거든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저한테 포로 하나를 데려와서 잘 지키라고 하면서 만약에 그 사람 놓치면 되레 내 생명 빼앗겠다고 얼마나 윽박을 지르는지 그 사람을 맡아 놓았는데 정신없는 사이에 그 맡겨놓은 사람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제가 어쩌면 좋겠습니까?’ 하니까 왕이 하는 소리가 ‘네가 잘못 했네. 그러면 네가 당해야지.’

왕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니까 그 때 붕대를 풉니다. 붕대를 푸니까 ‘어? 너는 유명한 그 선지자!’ 한 거예요.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야가 죽고 난 뒤에 나단선지자가 나타나서 다윗을 이야기할 때 그냥 ‘당신 죄인이야.’ 하지 않고 입장 바꾸어서 이야기하게 하지요. ‘이 나라에 아주 못된 놈이 있는데 자기 양과 소가 심히 많으면서도 가난한 자의 하나밖에 없는 양 새끼를 빼앗았습니다.’하고 입장 바꿔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선지자가 외치는 복음은 뭐냐 하면, ‘나는 구원받았다. 나는 흠이 없다. 나는 이 정도 하면 괜찮은 인간이다.’ 전부다 남 핑계, 남 탓으로 돌리지 말고 우리 죄 때문에 희생당하시는 예수님의 입장에서 서서 우리가 주님의 희생에 동참하고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아주 가까이, 복음을 아주 가까이, 그리고 그 안에 놓여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절감하는 기회가 된다는 겁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버렸습니까? 우리가 주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이것은 어떤 특혜에요. 은혜를 받은 겁니다. 복을 받은 겁니다.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감히 주님입장을 생각하겠습니까? 그런데 성령이 오시게 되면 우리는 내 입장이 아니고 주님 입장에 서는 거예요. 만약에 내 입장이 되면 다윗처럼 변명과 핑계를 대고, 그럴 거예요.

그러나 주님 입장이 되어버리면 남한테 얻어맞는 것도, 남들이 하지 않는 희생적인 일을 하더라도 그것을 ‘남들한테 안 시키고 왜 나한테 시키나.’ 이런 군소리가 안 나오고 ‘주여, 이런 일을 하니까, 죄에 대해서 예민하게 되는 이런 일을 하게 하시니까 얼마나 큰 은혜인지 주여, 저 사람 탓도 나한테 뒤집어 씌워서 내가 저 사람대신 죽는 것도 영광입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에 더 큰 사랑이 없다.’ 했지요.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갈수록 교회라는 것도 자기편한 자리가 되고 말았고 변명이 늘어나는, 자기 핑계로 가득 찬 모임이 되고 말았어요. 교회 나오면 이 핑계 저 핑계, 봉사하라면 이 핑계 저 핑계, ‘나도 할 도리 다 했다고, 더 이상 어떻게 하느냐고…….’

하지만 신약의 선지자 된 우리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남하고 비교하지 말고 주님하고 비교해서 주님께서 나같이 핑계가 많고 변명하기 좋아하는 나를 위해서 돌아가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그 순간에 몸에서 성령의 열매가 나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희생이라는 단어를 우리가 자주자주 놓쳐버리고 붕 뜨고 잊어버립니다. 남들처럼 성공 못했다고 남들처럼 복 많이 못 받았다고 하나님한테 대들고, 그런 식으로 거짓선지자들 따라가는 생활을 이제는 돌이켜서 참 선지자란 자기 죄에 민감하고 남의 죄까지 민감하고 주님의 희생에 민감한 성도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