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0. 3. 10:39

왕의 귀환 (사무엘하 19장 11-15절) 빠진 설교 8월 15일

본문 : 사무엘하 19장11-15절
제목 : 왕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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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강-삼하19장11-15(왕의귀환)-2sa100815

왕의 귀환

2010년 8월 15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19:11-15

(삼하 19:11, 개역) 『다윗 왕이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너희는 유다 장로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왕의 말씀이 온 이스라엘이 왕을 궁으로 도로 모셔오자 하는 말이 왕께 들렸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느냐』
(삼하 19:12, 개역)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어늘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오는 일에 나중이 되리요 하셨다 하고』
(삼하 19:13, 개역)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대신하여 항상 내 앞에서 군장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 하여』
(삼하 19:14, 개역) 『모든 유다 사람들로 마음을 일제히 돌리게 하매 저희가 왕께 보내어 가로되 왕은 모든 신복으로 더불어 돌아오소서 한지라』
(삼하 19:15, 개역) 『왕이 돌아와 요단에 이르매 유다 족속이 왕을 맞아 요단을 건네려 하여 길갈로 오니라』


육적인 사실이 어떻게 영적으로 전환되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육에서 시작해서 육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반대로 영으로 시작해서 영으로 가는 것도 환각이나 환상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실제로 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영적 세계인 부활의 세계에 진입하게 된 그 경로를 우리 성도의 입에서 고백하게 하십니다. 다윗의 왕 자리는 분명 육적인 자리맞습니다. 하지만 그 육적으로만 알고 그 자리에서 어떤 영적 지혜가 작용하게 될까요? 모세 시대에 있어 이스라엘이 나라 체제는 왕 체제가 아닙니다. 대제사장 책임제였습니다.

왕이 처음부터 필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육적인 현실에서 영적 세계로의 진입은 오로지 대제사장을 통해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계시로 국한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대제사장이 제대로 유지되면 나라가 제대로 유지되고 대제사장이 허물어지면 그 나라도 허물어지는 나라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왕이라는 직위가 따로 필요했을까요? 원래 이스라엘의 왕은 보이지 않으신 분입니다. 지금도 이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그 분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보이지 않으신 왕께서는 제사장 구조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계셨습니다. 이 의도는 백성들이 채택한 의사가 아닙니다.

제사장들은 아무런 재산이 없습니다. 단지 백성들이 십일조를 바쳐야 살아갈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쉽게 말해서 백성들이 하나님을 안 믿는다고 선언해 버리는 순간, 제사장은 굶어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백성들은 자신들이 힘들게 애써서 번 돈에서 10%를 제사장에게 상납하는 겁니까?

원래 그 약속의 땅이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수리 날개 위에 얹어서 자기 백성을 그 땅에 들여놓았다고 하십니다. 즉 인간의 힘으로 정복되거나 침범될 장소가 약속의 땅이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일방적 사랑으로 그들을 그 땅에 쏟아놓았으니 그 땅의 주인은 오직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세금내는 것이 당연합니다. 남의 땅, 임대해서 농사짓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있어 품군입니다. 십일조를 낸다는 말은, 나머지 아홉은 농사꾼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실은 나머지 90%도 자기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몽땅 다 하나님 것인데 단지 하나님께서 봐주어서 10%만 받겠다는 겁니다.

이 은혜가 유지된다고 제사장들도 얼마든지 “하나님 덕분에 삽니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땅에 살던 백성들이 이웃 이방민족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법으로 존재하는 나라들을 본 겁니다. 얼래? 하나님 믿는 나라보다 더 잘 살고, 더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어 있어 언제든지 힘으로 이스라엘 정도로 밀어붙일 태세입니다.

이제 백성들이 자진해서 그들의 믿음을 철회하기 시작합니다. 십일조 바쳐서 복받는 것이 아님을 이제 안 겁니다. 차라리 애굽식으로 차라리 이방나라 식으로 사는 것은 자기네들 타고난 인간 본성에 합해서 좋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니 십일조거 원활하게 거두지지 않게 됩니다.

생계 위협을 느낀 쪽은 제사장들입니다. 하나 둘씩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을 고용한 개인이나 단체의 복이나 빌어주는 고용인 변해갔습니다. 군대에 근무하는 군목, 사학에 근무하는 교목, 병원에 근무하는 원목, 교회에 근무하는 회목들이 이런 자들입니다. 이들은 그냥 개인 사업체의 직장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다윗을 왕으로 간택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백성들이 옹립하는 왕이 아니라 도리어 왕이 백성들을 새로 생산하는 체제로 돌입하게 된 것입니다. 왕이 일방적으로 뽑는 것이 왕 역할의 주안점이 아니라 필히 제사장의 진정한 존재 이유를 아는 자들만이 백성이 되는 것이 주안점입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 덕분으로 산다는 것은, 곧 그들 손에 안수당하고, 그들 손에 희생당하고 불에 태어지는 그 제물의 운명을 자신을 운명으로 일치시키는 일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20:26-28에 보면,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근본 원칙은 희생입니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강탈당하는 행복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날 때부터 잃는 쪽이 아니라 끌어모으는 쪽입니다. 하지만 제사장을 통해서 선택받은 왕을 이해한다는 것은, 밑으로 내려가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밑바닥에 내려가는 그 길이 바로 메시야가 거쳐지나간 노선입니다.

그것이 바로 육적에서 영적 세계로 빠지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다윗왕은 자기주변에서 벌어지는 권력장에서 바로 이 메시아의 경로를 알아 챈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되 잃었음을 경험하는 자는 자기 직속 최고 사령관 자리에 앉힙니다. 그 사람이 바로 아마사입니다. 다윗은 자기 조카를 자리를 새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아예 요압이라는 위대한 장군이 차지하고 있는 그 자리를 적군의 장수에게 내어줍니다.

그는 전에 압살롬 진영에서의 군대장관이었습니다. 이것은 거꾸로 사는 삶입니다. 권력 끌어 모음과 반대되는 행정처리입니다. 전쟁에서 승자는 모든 것을 가져갑니다. 그 어떤 시혜나 자비는 장래를 생각해보면 위험한 짓이 됩니다. 아예 싹을 잘라야 한다는 것이 인간들의 삶의 경험이요 지혜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뒤엎습니다. 그렇게 뒤엎을 때, 진정 하나님의 왕되심을 이해하는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10:6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말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는 모든 성도들에게 잃어버리는 체험을 제공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경로를 가면서 바깥에 예수님의 피흘리심의 모습이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는 경로는 천국으로 통하는 경로입니다. 육신적인 것이 늘 삭제당할 때 그 배후에서 영적 세계의 면면이 보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 십자가 지신 주님과 함께 살면서 함께 길을 가고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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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강-삼하19장11-15(왕의귀환)-2sa100815-(이 근호목사)

2010-10-03 08:11:44    녹취 : 이한례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하 19장 11절에서 15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495페이지입니다.

사무엘하 19:11-15

“다윗왕이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너희는 유다 장로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왕의 말씀이 온 이스라엘이 왕을 궁으로 도로 모셔 오자 하는 말이 왕께 들렸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느냐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어늘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오는 일에 나중이 되리요 하셨다 하고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대신하여 항상 내 앞에서 군장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 하여 모든 유다 사람들로 마음을 일제히 돌리게 하매 저희가 왕께 보내어 가로되 왕은 모든 신복으로 더불어 돌아오소서 한지라 왕이 돌아와 요단에 이르매 유다 족속이 왕을 맞아 요단을 건네려 하여 길갈로 오니라” 아멘


왕의 자리가, 왜 그것이 하나님이 통하는 자리라야 하는 겁니다. 보통 하나님은 안보이시잖아요? 항상 성경을 볼 때 믿음 있다고 보지 말고, 믿음을 반대 한다고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 오늘 하나님 욕하고 다시는 안 나올 거야.“ 그런 마음가짐으로 다시 한 번 성경을 보자. 그러면, 성경은 우리의 그런 마음을 익히 아시고 다 적어 놨어요. 쉽게 얘기 하겠습니다.

'육적으로 시작해서 어떻게 영적 세계에 진출할 수 있느냐' 그 과정을 여기에 담아 놨다 이 말이죠. 보이지 않는 하나님! 하나님 한다고 영적 되는 게 아니에요. 다만 영적이 될려면, 육적도 알고 영적도 알고 둘 다를 다 알아야 됩니다. 아까 장로님 기도하신대로 육적에서 우리는 죄인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아, 죄인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육적으로  육이 있는 한, 아직까지 죽지 않고 육이 있는 한, 야~  죄인 맞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되는 것은 주님의 조치가 있었다는 거예요. 조치. 주님이 주신 조치가 있는 거예요. 우리보고 “천국 올라와.” 이럴 때 우리는 못 갑니다. “아이, 내가 내려갈게.” 그래서 하나님이 육신이 되고 우리가 그렇게 서글퍼 하는 육신이 되셔서 같은 육신으로 뭔가 일을 우짝우짝 어떻게 했어요. 일을 벌렸다 이 말이죠. 그 육으로 오신 예수님이 육적으로 일을 벌렸더니만, 육적인 인간이 영적으로 달라졌다. 라는 이야기가 성경에 깔려 있습니다.

육에서 육으로 해석하면 곤란해요. 그러면 구원이 없습니다. 영에서부터 영으로 가버리면 그건 착각입니다. 망상이에요. 어디 절에 가서 도 닦는 게 편해요. '육으로 와서 영'으로 가야 돼요. 십자가 죽으심에서 부활이 있고, 그냥 부활의 세계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반드시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은 자'에 한해서 부활의 혜택이 주어지는 겁니다. 부활에 먼저 욕심내지 마시고 십자가에 와서 영으로 가셔야 돼요. (장로님 오늘 안 나온 사람이 있네요. 이제 생각이 난다. 한 집사님 안보이시네, 저 자리 앉으셔야 되는데...ㅎ 하여튼 그건 그거고..)

육으로 오셔서 영으로 가셔야 돼요. 그러면 육으로 오셔서 영으로 할 때, 우리가 레위기 할 때 했습니다. 그 일은 제사장이 한다고 했습니다. 제사장 책임제라 했습니다. 그러면 제사장 책임제로 고거하면 되는데, 요번에 다윗 왕이 나오잖아? 이렇게 따지게 되죠. 제사장이 괜찮은 제사장 같으면 말  안 합니다. 제사장 지(저)는 뭡니까? 지는 육적 아닙니까? 마찬가지거든요.

제사장 제도로 해가지고 제대로 될 것 같으면, 뭣 땜에 왕이 필요하겠습니까? 제사장이 어설프기 짝이 없어요. 제사장 본인의 죄도 제사장 본인이 감당이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왕이 필요했던 겁니다. 왕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러려면 제사장 위에 바로 하나님이 있던 그 구조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 제사장 위에 왕이 있고, 왕위에 하나님이 있는 구조로 바뀌는 겁니다. 아래 절차가 하나 더 들어가죠. 그 제사장이나 왕이나 인간 레벨이 아니기 때문에 그걸 '기름 부은 자'라고 합니다. 나중에 기름 부은 자 한 사람 더 나옵니다. 선지자 나와요.

선지자, 제사장, 왕, 이 세 사람을 기름 부었다 했어요. 구별했다 이 말입니다. 따로 나와 계세요. 다른 사람은 다른 기능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기능을 특별히 하늘나라 기능을 하실 분입니다 해서 기름 부은 자예요.  지금은 기름 부은 자가 누구냐? 지금은 기름 부은 자가 누구냐면, 성령 오게 되면 누구나 기름 부은 자에요. 집에서 참기름 붓는다고 해서 기름 부은 게 아니고...ㅎ

성령을 기름 붓게 되면, 누구나 기름 부은 자가 돼서 특별한 기능을 하게 돼요. 이 어두운 세계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하늘나라 사람으로 사는 게 되고 다른 말로 하면, 영적 사람으로서 육적 사람들과 섞여 사는 겁니다. 영에 속한 사람들은 영의 이야기를 하고, 육에 속한 사람들은 육의 이야기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세상과 소통이 안 돼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오직 하나님께 속한 자만 하나님의 하는 이야기를 알아듣게 돼 있습니다.

그것은  신비로운 신학 이야기를 하라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어떻게 이 땅에 오셔서 어떻게 하늘나라로 들어 가셨느냐의 그 경로를 우리 입으로 말씀을 해 주셔야 돼요. “내가 암 걸렸는데, 기도해서 병 낫다.“  내 이야기 하지 말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어떤 경로를 밟아서 올라 가셨는가? 그 경로를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게 돼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부활을, 다시 사심을 믿는 자는, 입으로 시인하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나오잖아요? 이거 이야기 여러 번 한 거예요.

그렇다면, 왕이 하나 새로 등장하는구나. 그러면 뭐 왕 하나 선발하면 되지. 이렇게 하는데, 성경에 나오는 선택 받은 왕은, 백성이 왕을 옹립하는 게 아닙니다. 왕이 백성을 만들어 내요. 생산해 냅니다. 아이, 이게 어려워요. 백성 없는데 왕이 덜렁 있어버려요. 백성 없는데, 백성 없고, 왕이 먼저 등장해서 왕이 백성을 생산하고 만들어내는 겁니다. 제품 찍어내듯이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내요. 그러면 왕이 돼 가지고, 너, 너, 너, 너, 너, 내 백성이야 이러면 되겠네. 고러면 되겠는데, 고렇게 하질 않습니다.

어떻게 하느냐? 왕 밑에 제사장이 있어요. 왕 있다고 제사장이 날라 가 버린 게 아닙니다. 제사장들 위에 왕이 새로 생겼으면, 왕 밑에 제사장이 있습니다. 그러면 왕은 내백성이냐 내 백성 아니냐를 뭐로 판단 하냐 하면, 자기 밑에 있는 제사장의 기능을 제대로 아는지, 모르는지를 가지고 그담에 자기 백성을 내 백성이다 내 백성 아니다. 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오늘 본문에서 “다윗 왕이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기별하여 너희는 유다장로에게 얘기한 것처럼 빨리 나를 왕으로 모셔라” 이야기를 해요. 왕 밑에 제사장이 있는 거예요. 왕 밑에.

다윗 왕 밑에 제사장이 있어서 제사장을 거친 왕과 제사장이 없이 사람들에게 옹립 받은 왕의 차이를 분명히 하겠다는 겁니다.

아유, 이거 어렵죠? 제사장이 없이 왕이 돼버리면, 백성들이 자기편의 위주로 “임금님이여~ 왕이시여~제발 우리 어려운 실정을 아시고 통촉 하옵소서~ 왕이라고 맨날 연애만 하고 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동이하고 연애하고 그러면 안돼요. 왕이라는 것은 백성의 아픔을 돌보시어 ‘너희들이 못하는 것을 왕 수준에서 내가 해 줄게.’ 그래서 왕이 사는 만큼 너희들이 내 수준만큼 살게 해줄게. 그래서 백성들이 왕을 찾는데...그것은 세상 백성이고, 세상 백성의 왕은 백성을 돌보는 입장인데....

하늘 백성은 그게 아니에요. 아니고, 제사장이 왜 있어야 되는지를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이 백성이 되요. 제사장이라 하는 것은 ‘희생’입니다. 제사장은 땅도 없고 밭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하나님이 없다면, 제사장도 굶어 죽습니다. 그렇게 돼 있어요.

그 당시 제사장들은 (자꾸 제사장이라 하지 않고, 그 당시 제사장, ‘그 당시’ 라고 말을 넣는 것은, 자꾸 목사들이 지가 제사장인줄 착각해가지고 자꾸 신경 쓰세요 하는데) 십일조를 받습니다. 아유, 이래야 또 안심이 되네..ㅠ 그 당시 제사장은 십일조를 받아요. 소득의 십일조를 받는 이유가 일반 백성들의 수입이 그들 노동의 댓가가 아니고, 제사장들의 기도한 덕분으로 수입을 얻는 거예요.

통닭집에 손님이 열 명 왔다면, 열 명 다 제사장의 기도를 통해서 나온 열 명입니다. 그러니 이 못된 통닭집이 입을 싹 닦고, 고 통닭 지 혼자 벌은 돈 다 해 , 십분의 일,제일 큰 통닭 팔은 십분의 일, 처음에 팔았던 마수구리 통닭 값을 제사장에게 드리는 거예요. “우리는 제사장 덕분입니다.”이래야죠. 제사장은 일종의 요새 말로 양아치죠. 양아치. 투캅스에 나오는 나쁜 경관님. 그 길거리 잡화상에 테이프 파는 것 얼마 남는다고, 이름이 누군가, “어이, 내 놔. 그래가지고 경관이 부정부패 하는 것, 투캅스에 나와요.

어떻게 생각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보면 아마 하나님 참 깡패네, 원래 약속의 땅이란 것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땅(세계)이 아니에요. 쉽게 얘기해서 길이 없어요. 길이. 불쑥 솟아 지상 150미터 위 개마고원 같은 산 위에 약속의 땅이 있다면, 올라갈 수 있는 밑바닥에서 길도 없고, 사다리도 없고, 터널도 없어요. 근데 하나님께서 독수리 날개로 업어가지고 (제 얘기 아닙니다. 성경에 나와 있어요) 펄펄 나는 거예요. 날면, 우리는 “야, 뜬다. 뜬다, 뜬다 하고 훅 불어(부라 :경상도 말) 쏟아놓으면, 그곳이  약속의 땅, 천국이다 말이죠. 그 이야기를 성경에서 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우르룩 쏟아져 가지고 ”여기가 무슨 동네지?“ 와 보니까, 제사장이 ”여기는 제사장 책임제, 내각 책임제가 아니고, 제사장 책임제, 나의 희생 덕분에 너희는 살았다. 내 놔, 내 놔. 십분의 일씩 내 놔.“ 뜯어가는 거예요. 뜯어가는 것도 그것도 아픈 양 말고, 제일 실한 양, 제일 맛있는 고기 내 놔. 얼른  밑에 있는 사람들이 들으면, ”도둑놈들 나쁘다, 땅 장사 하겠구나, 여호와 하나님 못됐구나, 고렇게 나쁜 생각 밑에 있는 사람만 생각한 게 아니고 그 위에 올라갔던 사람도 했어요. 위에 올라갔던 사람들이 십일조 처음엔 몇 번 줬겠죠. 쳐다보니 공짜로 뜯겼다고 느껴져서 기분 더럽거든요.

저 옆을 보니까 자기는 잘 산다 했는데, 더 잘 산단 말야. 더 잘 사니까 이것은 우리 신이 구라 쳤다. 거짓말 했다. 저쪽에는 여호와 믿지 않더라도 더 잘 살잖아. “제사장 이리 와“ 이리 와 제사장, 이게 쉬잇~ 어디서 구라 치고 있어? 뭐! 양아치.. 십일조 하면 잘 살 다고? 니 눈 있으면 봐라! 절에 가는 사람이 더 잘사는지 교회 가는 사람이 더 잘사는지 봐라.” 이 말이죠.

절에 가는 사람 집에 가 보니, 황금 거북이다가 부처도 황금으로 만들어 놓고, 얼마나 잘 사는지... 절에 중은 머리만 깎았지 소고기에다가 술에다가 매일같이 진탕 여자 데려다가 이거는 뭐 하지.. 거기다가 권력까지 탐내가지고 문화공보부 자리까지 탐내고 거기서 대통령도 꿈쩍 못해 기죽지, 역시 불교가 역시 세계 최고라. 더 잘 살고 힘이 더 있는데요. 이거는 위에서 반란이 일어났어요.

그렇다면, 목사님 제사장들이 얼마나 가슴 아프겠습니까? 이래 생각하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제사장님, 하나님 저 이거 안 합니다. 다시는 제사장 안합니다. 이거 뭐 십일조 주지도 않고,  땅이 있습니까? 밭이 있습니까? 저쪽에서 미리 이루는 조건 하에서 받아먹게 돼 있는데, 저쪽에서 이방 신을 쫒아 나와 버리니까, 중간에 친 사람이 누가 치냐 하면, 십일조 먹고 제사장한테 치이니까, 그때부터 제사장들은 각지에 흩어가면서 복 빌어 줄 테니까, 우리 연봉제로 합시다. 이 집안에 내가 복 빌어 줄 테니까 복 주는 조건하에 월급 받아먹고 나도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도 배운 기술 없고, 이거 성경에 복 빌어주는 그런 거만 하니까 해줍시다. 하는 사람들이 군목, 교목, 회목(교회목사), 병원에 있는 원목, 복 빌어주는 재주 가지고, 그거만 배웠기 때문에, 그거 써먹고 있는 겁니다.

그걸 싹쓸이 없애 버리는 것이 ‘왕’입니다. 왕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제사장들아, 너희들이 제사를 드리지 말고, 제사 제물, 어린양, 수송아지, 수양, 희생정신으로 돌아가라. 백성들이 십일조 안 드려도 굶어 죽어라. 이겁니다. 십일조 안 하더라도 굶어 죽어라. 그게 선지자의 바램이었고, 다윗이 요구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생 밑으로 내려가는 법을 배우라는 말이죠.

박찬호가 오늘 아침에 이래말해요. “나는 지금까지 올라가는 법만 배웠고 밑으로 내려가는 법은 못 배웠다는 겁니다. 내려가 보니까 인생을 알겠다는 거예요. 지금도 인생 몰라요. 마누라 잘 만나서 그러나 위로받지 지금 공도 못 던지고 쫓겨 날판이지만, 많이도 해 먹었지. 많이 해 먹었거든, 사실은. 수백억을 갖고 있는데요. 앙 선생이 그 분이 최근에 뭐라 했는지 아세요? 그 사람은 모든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고 이럴 순 없다는 거예요. 무슨 국가에 헌납한 사람이 세상에 300억입니까? 앙 선생님... ㅎ

내려가는 것, 박탈당하는 것, 빼앗기는 것을 백성들에게 돈 내라 하지 말고, 니부터 먼저 하나님 섬기며 하나님만 좋아요. 빼앗겨도 좋아요. 그게 그 자리가 기름 부은 자리가 아니냐는 거예요. 그게 바로 다윗이 압살롬에게, 아들에게 몽땅 권력 다 빼앗기고, 우리 새로 시작하라는 기고, 내가 왕이라면, 진짜 나를 왕으로 생각하나? 그렇다면, 왕의 입장에서 우리 이스라엘이 뭔지를 새로 시작하자는 거예요. 새로 만들자는 거예요. 그러면 적군들 조져버리고 다윗 편에 선 사람들을 옹립하면 되는데, 다윗 편에 선 사람들을 고위직으로 앉히면 되겠네.

다윗의 생각은 반대였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대신하여 항상 내 앞에서 군장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리라”

무슨 말이냐 하면, 이게 적군에 있는, 그동안 압살롬 편에 있는 장군을, 요압 자기 최고 사령관 자리에 앉혀 버리니까, 이것은 지금까지 권력, 다윗이란 편에 서면, 이번에 다윗이 정권을 다시 잡으면, “너희들은 죽었다. 너희들은 죽었다. 우리 다윗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힘 센 줄 아느냐?” 라는 사고방식을 아직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제사장다운 왕의 입지를 전혀 이해 못하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어렵게 얘기할 것 없어요. 쉽게 갑시다. 쉽게 제가 마태복음 한번 읽어 볼게요.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세상에 인간치고 태어나가지고 지 잘살려고 살지, 자기 목숨을 남한테 줘 버리려고 사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다 내 잘나고 힘 모으려고 살잖아요? 그래 그런 정신으로 예수 믿는다? 이건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말이죠. 아까 힘주는 예수는 아마 마귀가 만든 예수예요.

그걸 고린도후서 11장에서는 그걸 가지고 다른 복음, 다른 예수라 합니다. 사도바울이 그런 용어를 사용했어요. 너희들이 “고린도교회야, 너희들이 되도 않는 자가 지금 당회장이 돼 가지고,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 다름의 삼위일체...ㅎ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을 너희들은 잘도 섬기는구나.” 그러니까 그쪽에서 항의를 해가지고, “사도바울 니는 뭐야? 너는 그럼 어떤 예수야?” “나는 매 맞는 사도, 40대에서 하나를 감한 매를 3번씩이나 맞는 강도 맞는 사도, 도적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항상 모든 걸 빼앗기는 사도, 그래서 나는 진짜입니다. 빼앗기는 사도, 마치 제사장 같아요. 진짜 믿는 자가 도와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내 살기 위해서 교인들을 이용하지 않는, 참 그런 말하기도 부끄럽다. 입을 쳐야지...ㅎ 그런 제사장.

바로 이 다윗은 그것을 본인이 인간성 좋아서 한 게 아닙니다. 그 모든 권좌에서 쫓겨나고 빼앗기고 도로 찾는 이 과정, 십자가에서 내려가야 부활 된다는 이 과정을 자기는 그렇게 이해한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왕다움이다. 장차 오실 왕 되실 분도 아마 이렇게 오실 걸, 이렇게 오실거야, 그래서 다윗 편에 서가지고, “야, 이제는 우리는 승리자, 이제 적들을 조집시다. 조집시다.” 하는 자에게 “놀고 있네, 어이, 야, 니 나가. 니 자리에서 기어나가.”

아마사는 다윗 조카예요. 자기 조카를 요압 자리에다가 집어넣죠. 그러니까 이게 뭐냐면, 기존의 자리가 꽉 찼는데, 빈자리 만들어서 자기 빽 써가지고 자기 친척 하나 집어넣는 게 아니고요. 십자가 없이 부활 해줄게. 가 아니고, 십자가 가가지고, “나는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나같은 인간은 지옥가도 마땅해.” 라는 사람에게 다른 자리, 빼앗긴 사람에게, 없는 자에게 자리를 만들어주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나가 잇~” 이것이 제사장의 정신을 올바르게 분류하는 왕의 왕다움입니다. 이런 왕이 후대에 있었는가? 죄송합니다. 제가 죄송할 거 없지만... 없습니다. 없으니까 그다음부터는 솔로몬 다음에 나라가 둘로 쪼개지죠.

쪼개지면서 남쪽나라에 뭐냐 하면, 아직도 다윗의 정신으로, 다윗의 등불로, 인간도 아닌 왕을 그래도 다윗 때문에, 계속해서 유다나라는 존속되었다는 말을 연거푸 연거푸 계속하고 있습니다. 꼭 우리한테 하는 말 같아요. 주일 날 설교 듣고 반짝 복음 알았다가, 문만 열고 나가면 오후부터는, 다윗의 정신이고, 희생정신이고, 뭐 나는 섬기러 온 것이 아니고 대속 물을 주려고 왔다는 예수님의 정신을 다 까먹을 때, 되풀이해서 그래도 예수님의 사랑으로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우리로 하여금 천국으로 인도하는 겁니다.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침에 설교하면서 저도 은혜 받은 게 뭐냐 하면, 경부선 기차가 대전부터 갈라지게 되는데, 제가 뭐라 했든가요?  제가 그 말 하면서 은혜를 받았어요. 바깥 풍경이 다르다. 바깥 풍경이 달라요. 나는 똑같아요. 나는 날마다 돈 욕심, 뭐 똑같아요. 안 믿는 사람이나 똑같아요. 근데 바깥 풍경이 달라요.

자꾸 ‘십자가 피’가 창가에 튕깁니다. “저 분 왜 죽었지? 저 분 왜 죽었지?” 그 분 다윗 자리에 앉는 왕이십니다. 우리는 그분 보고 이렇게 하세요. 오, 왕이시여~ 내 대신 죽으신 왕이시여~ 그래서 피를 흘리고 계시군요.“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나는 이스라엘을 회복하려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중에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온 진짜 왕이다 이 말이죠. 주께서 지금도 바깥 풍경, 피 흘리는 풍경으로 자기 백성을 새롭게 생산해 내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다윗이 경험했던 것이 영적으로 저희들에게도 같은 경험을 하게 하옵소서. 빼앗길 때 그게 실패 인생이 아니고, 잃어버렸을 때 낙심할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성공적인 구원의 사례인 것을 구원은 그렇게 되는 절차인 것을 저희들이 놓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오히려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