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9. 29. 17:07

지혜로운 여인 (사무엘하 20장 14-19절)

본문 : 사무엘하 20장14-19절
제목 : 지혜로운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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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강-삼하20장14-19지혜로운여인-2sa100926

지혜로운 여인

2010년 9월 26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20:14-19

(삼하 20:14, 개역) 『요압이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행하여 아벨과 벧마아가와 베림 온 땅에 이르니 그 무리도 다 모여 저를 따르더라』
(삼하 20:15, 개역) 『이에 저희가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세바를 에우고 그 성읍을 향하여 해자 언덕 위에 토성을 쌓고 요압과 함께한 모든 백성이 성벽을 쳐서 헐고자 하더니』
(삼하 20:16, 개역) 『그 성에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가 외쳐 가로되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 청컨대 너희는 요압에게 이르기를 이리로 가까이 오라 내가 네게 말하려 하노라 한다 하라』
(삼하 20:17, 개역) 『요압이 그 여인에게 가까이 가니 여인이 가로되 당신이 요압이니이까 대답하되 그러하다 여인이 저에게 이르되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대답하되 내가 들으리라』
(삼하 20:18, 개역) 『여인이 말하여 가로되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삼하 20:19, 개역)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어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미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의미는 성경에 담겨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력으로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인간을 둘러싼 검은 기운들을 계시로 인하여 인간쪽으로 집중되도록 몰아붙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을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서 극도로 민감한 반감을 갖게 됩니다.

‘복음에 대항하는 피조물’로 만들어내므로서 그 실존 배후에 주목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게 해서 도출된 악은 곧 ‘여자의 후손’과 최후의 전쟁을 책임지는 숨어있는 책임자로서 그동안 숨어서 활약해 왔음을 역사 전면에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인간 위주로 생각하는 선과 악은 진정한 선과 악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선과 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하신 일들이 계속 오해받아 왔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일어나는 일도 예외가 아닙니다. 한 여인이 쳐다보는 것과 요압이 쳐다보다는 것이 상호 다릅니다. 그러면서도 결과에 있어서는 마치 원하는 바가 같은 것으로 오해되기 십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것은 ‘전쟁’에 있어 일치되지 않는 의도들이 현실에서는 같은 승리로 인식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아벨성에 이름 없는 한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을 살리기 위해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 앞에 던집니다. 이것으로 여호와께서 이 여인에게 주신 기업은 아무 일이 없게 됩니다.

이 여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핵심과 관련된 일임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과 상관없는 전쟁이 있음도 아울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같은 원칙은 흔히들 ‘산다’라는 말에도 해당됩니다.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산다’라고 언급할 수 있는 겁니까?

이 하늘 높은 가을날에 진정 ‘산다’는 것이 어떤 경우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성묘하고 벌초하고 등산가고 주말에 산과 들에서 가을의 정취를 맛보고, 농부들은 가을 추수에 분주하고, 수험생들은 시험에 대비해서 그동안 익혔던 내용들을 다시금 집중해서 총정리하는 급박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진정 ‘산다’에 해당되는 경우입니까? 아닙니다.

이런 세속적인 삶도 역시 ‘전쟁’이라는 양상 속으로 흡수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그렇게 살지 않는 자들도 있음을 발췌하는 계기가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름모를 여인에게 있어 ‘산다’는 것의 의미를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줍니다. 여호와께서 은혜로 주셨다는 그 사실을 지워버리는 그 어떤 것들과의 밀릴 수 없다는 긴장도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목숨 지키는 긴장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지켜야 하는 긴장감 말입니다.

세상은 이처럼 늘 ‘하나님께서 그저 주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시비를 걸면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납니다. 세상을 상식선에서 보자는 겁니다. 별나게 살면 피곤하다는 겁니다. 즉 너의 삶에 훼방되고 방해되고 있는 것을 내놓고 삭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말하는 ‘삶’은 생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주신 것들을, 은혜가 아니라 본인들의 행함으로 얻은 보상이라는 차원에서 주입된 것을 방출하는 것이 진정한 ‘삶’을 지키는 모습입니다.

말씀을 지킨다든지, 율법을 지킨다든지 하는 것은 그 본래적 가치를 사수해서 잊지 않고 유지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이 남기신 약속의 가치는 자신의 삶이나 자신의 목숨을 잃는다 할지라도 지킬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 진정 ‘성도의 삶’입니다. 촌에서 사과 과수 농사를 하면서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삶’이란 바로 과수농사가 잘되고 못되고 와는 상관없이 오늘밤도 내 영혼 데려가면 모든 것이 결국 나의 것이 아님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이런 심정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고마워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유지하는데 있습니다.

사람의 행함에 대해서 요압이 그 속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망치 세바를 잡아들이는 것이 요압의 명성을 쌓고 그것으로 인하여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요압 장군의 삶에 합당한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소유하므로서 사는 삶’을 뜻합니다.

세바가 요압쪽과 그리고 이 여인이 거할 성쪽, 모두에게 위험한 존재가 되는 이유는, 소유성에 대한 위협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요압 장군쪽에서는, 요압 본인이 그동안 쌓아올린 명성과 권력을 넘어뜨릴 위험을 세바가 갖고 있고, 뿐만 아니라 이름 모를 여인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그저 주심’을 인간적 소유의 대상으로 변질되게 만드는 위험을 세바가 역시 보여 줄 수가 있습니다.

요압과 여인 사이에는 세바라는 공통의 적은, 각각  양쪽에게 다 수용할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세바의 죽음을 여인 쪽에서 이해하면 하나님의 저주가 주어진 결과요, 요압쪽에서 이해하는 요압보다 못한 존재라는 죽어야 되는 인물이라는 것을 대외적 천명한 셈이 됩니다.  즉 요압이 이번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마치 그만큼 이 땅에서 더 오래 살 자격자가 되는 양 오해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성도는 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즉 성도 자체가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에 의하면 기업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기 자신이 곧 하나님께서 거저 구원해내신 기업인 것을 나타내면서 이 세상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요압 꼴이 됩니다. 오로지 자신의 노고와 노력으로 자신이 이 땅에서 살 가치가 있다고 우기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면 모두 복음을 훼방하기 위해 투입된 것들입니다. 그 중에 제일 위험한 나쁜 요소는, ‘내 힘으로 얻었다’고 여기는 발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인이 세바를 치면서 요압을 동원시키신 겁니다. 이 여인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로 돌아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누가복음 10:17-21에 보면,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는 자신이 없을 때도 하나님은 무슨 전쟁을 벌리고 있는 가를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는 점에서 어리석은 자입니다. 갈라디아서 3:29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에 비하면 우리는 거기에 붙어있는 이끼같은 존재입니다. 여인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귀한 유산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유산을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생존을 승리라고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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