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9. 21. 13:17

세바의 반역 (사무엘하 20장 1- 3절)

본문 : 사무엘하 20장 1- 3절
제목 : 세바의 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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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강-삼하20장1-3세바의반역-2sa100919

세바의 반역

2010년 9월 19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20:1-3

(삼하 20:1, 개역) 『마침 거기 난류 하나가 있으니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하는 자라 저가 나팔을 불며 가로되 우리는 다윗과 함께할 분의가 없으며 이새의 아들과 함께 할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삼하 20:2, 개역)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좇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좇으나 유다 사람들은 왕에게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좇으니라』
(삼하 20:3, 개역) 『다윗이 예루살렘 본궁에 이르러 전에 머물러 궁을 지키게 한 후궁 열 명을 잡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 더불어 동침치 아니하니 저희가 죽는 날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내니라』


말씀이 어떻게 인격화 되는지를 살려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성경 구절에 한결 같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우선 말씀은 사건을 유발시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하여 주변의 사람들이 반응이 일어납니다. 이 반응으로 인하여 예상 못한 두 가지 질이 발생됩니다. 말씀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모두들 다같은 형제요 성도요 신앙인인줄 알았는데 막상 사건이 터지고 보니 예수님의 피의 가치보다 자신의 자존심과 가치를 우선하는 자들이 노골화되는 겁니다.

여기서 두 가지 노선이 생겨나고 그 노선에서 구원받는 노선에서는 회개가 일어납니다. 반면에 다른 노선에서는 세력 다툼에 나서게 됩니다. 시편 8:2에 보면,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젖먹이 같은 심정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숨어있는 욕망이 발산되면 힘과 세력을 키우고 자기 주변으로 끌어 모으려고 합니다. 반면에 회개하는 심정이 곧 말씀의 인격화된 모양새입니다. 누가복음15:7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것보다 더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원칙이 모든 성경에 다 적용이 됩니다. 오늘 본문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다 사람들을 향하여 원망하며 불평하는 틈을 타서 배교자 세바가 새로운 반역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세반의 반란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고 결국 실패로 끝났으나 그의 반란의 동시는 끝나 후대 북왕국 반란의 표어가 되고 말났습니다.

세바라는 사람은 에브라함 산지의 주민으로서 사울의 친척이었기에 때문에 사울의 몰락으로 등장한 다윗에 대해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다윗의 돌아온 권력이라는 것이 신앙적 관점에서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이 반란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사람들의 세속적인 관점에서 다윗을 바라봅니다. 잘만하면 다윗의 권좌를 자신이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실제로 막상 세바가 반란을 일으키자 유다지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반란을 반대하지 않고 소극적으로 대처했습니다.    

다윗은 이 세바 진압에 그동안 압살롬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마사를 등용시켜서 해결합니다. 이것은 마치 북한에서 김일성에게 아부 충성했던 황장엽이라는 사람을 우리나라의 국무총리로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수십 년 동안 권력을 장악하려고 노린 기존의 정치세력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다윗으로부터 3일 내에 군대를 소집하여 반란군을 진압하도록 명령 내렸으나 유다 사람들은 그의 명령에 호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마사를 대신하여 요압의 동생인 아비새를 진압 지위관으로 삼고 그 휘하에 요압과 모둔 군대를 두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압의 사적인 감정은 여기서도 발휘됩니다.

그는 중동지역의 인사법대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입맞추는 척하면서 미리 준비해 둔 단검으로 그를 찔려죽였습니다. 이로서 요압은 자신의 정적을 몰아내고 실권을 회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친족(외사촌간. 대상 2:16))도 몰라볼 정도로 사악한 감정에 휩싸여서 세 번째 살인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첫 번째 아브넬이었습니다. 동생 아사헬의 죽음을 복수한다고 그런 짓을 했습니다. 두 번째는 압살롬입니다.
그래놓고서는 그는 “요압을 좋아하는 자는 요압을 따르라”라고 백성을 충동질합니다. 그는 요압과 다윗이 한편이라는 점을 백성들에게 강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압이 백성들에게 다윗나라의 제 2인자라는 것을 굳히는 전략입니다. 사도행전 20:29-3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흉악한 이리란 바로 하나님의 피를 대신해서 그 자리의 자신의 목회술을 집어넣어서 교회를 만들 수 있다는 여기는 자들을 말합니다.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합니다. 이게 바로 흉악한 이리가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피’를 말해야 하는 이유는, 이 말씀이 지금도 사건화해서, 참으로 구원받는 노선과 그렇지 않는 노선을 드러내는 유일한 기준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자리는 참으로 기적적인 자리입니다. 자신의 가치나 이득을 먼저 생각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주관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 지배가 전부인 자리입니다. 여기서는 개인적인 윤리 도덕이 통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말씀의 현실화가 차지하는 자리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 겁니다. 다윗은 압살롬과 백주대낮에 동침했던 후궁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치를 내리게 합니다.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서는 다시는 다윗이 그들을 불러 동침하지를 않습니다. 이러한 처리는 후궁들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윗 왕 자신이 시키는대로 예루살렘 본궁을 떠나면서 열 명의 후궁에게 궁을 지키라고 했기에 지켰을 뿐입니다.

또한 압살롬이 새로운 권력을 쥐고 있는 마당에서 연약한 여인들로서 어찌 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윗 왕이 남겨 두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겠죠. 다윗이 그들을 데리고 나가지 않는 상태라면 그녀들도 역시 전쟁의 피해자들입니다. 그들이 즐겨 압살롬과 놀아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뭐 자살이라도 해야할까요? 그렇게 해서라도 남편 다윗의 위신이 세우는 것이 그녀들의 마땅한 도리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다윗 자신의 문제였습니다. 자신의 가족과 가문의 불신앙으로 인해 그 후궁들은 죄의 피해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바로 다윗은 그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 역사를 모른 채 지워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 가문의 슬픈 역사를 온 백성들이 알아야 했기에 그들은 분리시킨 것입니다.

마치 후궁들이 백주 대낮에 아들 압살롬과 동침하는 모습을 백성들이 봐야 했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이 후궁들의 현대적 인권의 관점에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 안, 십자가 안에서의 한 맺힘이란 곧 죄의 일종입니다. 진정한 성도는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자입니다. 후궁들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이 다윗의 인생과 결부된 것을 하나님의 개입으로 여기고 감사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에게도 날마다 말씀 사건이 터져서 늘 젖먹이와 같은 마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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