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9.21 13:17

세바의 반역 (사무엘하 20장 1- 3절)

본문 : 사무엘하 20장 1- 3절
제목 : 세바의 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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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강-삼하20장1-3세바의반역-2sa100919

세바의 반역

2010년 9월 19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20:1-3

(삼하 20:1, 개역) 『마침 거기 난류 하나가 있으니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하는 자라 저가 나팔을 불며 가로되 우리는 다윗과 함께할 분의가 없으며 이새의 아들과 함께 할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삼하 20:2, 개역)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좇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좇으나 유다 사람들은 왕에게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좇으니라』
(삼하 20:3, 개역) 『다윗이 예루살렘 본궁에 이르러 전에 머물러 궁을 지키게 한 후궁 열 명을 잡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 더불어 동침치 아니하니 저희가 죽는 날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내니라』


말씀이 어떻게 인격화 되는지를 살려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성경 구절에 한결 같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우선 말씀은 사건을 유발시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하여 주변의 사람들이 반응이 일어납니다. 이 반응으로 인하여 예상 못한 두 가지 질이 발생됩니다. 말씀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모두들 다같은 형제요 성도요 신앙인인줄 알았는데 막상 사건이 터지고 보니 예수님의 피의 가치보다 자신의 자존심과 가치를 우선하는 자들이 노골화되는 겁니다.

여기서 두 가지 노선이 생겨나고 그 노선에서 구원받는 노선에서는 회개가 일어납니다. 반면에 다른 노선에서는 세력 다툼에 나서게 됩니다. 시편 8:2에 보면,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젖먹이 같은 심정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숨어있는 욕망이 발산되면 힘과 세력을 키우고 자기 주변으로 끌어 모으려고 합니다. 반면에 회개하는 심정이 곧 말씀의 인격화된 모양새입니다. 누가복음15:7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것보다 더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원칙이 모든 성경에 다 적용이 됩니다. 오늘 본문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다 사람들을 향하여 원망하며 불평하는 틈을 타서 배교자 세바가 새로운 반역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세반의 반란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고 결국 실패로 끝났으나 그의 반란의 동시는 끝나 후대 북왕국 반란의 표어가 되고 말났습니다.

세바라는 사람은 에브라함 산지의 주민으로서 사울의 친척이었기에 때문에 사울의 몰락으로 등장한 다윗에 대해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다윗의 돌아온 권력이라는 것이 신앙적 관점에서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이 반란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사람들의 세속적인 관점에서 다윗을 바라봅니다. 잘만하면 다윗의 권좌를 자신이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실제로 막상 세바가 반란을 일으키자 유다지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반란을 반대하지 않고 소극적으로 대처했습니다.    

다윗은 이 세바 진압에 그동안 압살롬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마사를 등용시켜서 해결합니다. 이것은 마치 북한에서 김일성에게 아부 충성했던 황장엽이라는 사람을 우리나라의 국무총리로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수십 년 동안 권력을 장악하려고 노린 기존의 정치세력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다윗으로부터 3일 내에 군대를 소집하여 반란군을 진압하도록 명령 내렸으나 유다 사람들은 그의 명령에 호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마사를 대신하여 요압의 동생인 아비새를 진압 지위관으로 삼고 그 휘하에 요압과 모둔 군대를 두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압의 사적인 감정은 여기서도 발휘됩니다.

그는 중동지역의 인사법대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입맞추는 척하면서 미리 준비해 둔 단검으로 그를 찔려죽였습니다. 이로서 요압은 자신의 정적을 몰아내고 실권을 회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친족(외사촌간. 대상 2:16))도 몰라볼 정도로 사악한 감정에 휩싸여서 세 번째 살인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첫 번째 아브넬이었습니다. 동생 아사헬의 죽음을 복수한다고 그런 짓을 했습니다. 두 번째는 압살롬입니다.
그래놓고서는 그는 “요압을 좋아하는 자는 요압을 따르라”라고 백성을 충동질합니다. 그는 요압과 다윗이 한편이라는 점을 백성들에게 강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압이 백성들에게 다윗나라의 제 2인자라는 것을 굳히는 전략입니다. 사도행전 20:29-3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흉악한 이리란 바로 하나님의 피를 대신해서 그 자리의 자신의 목회술을 집어넣어서 교회를 만들 수 있다는 여기는 자들을 말합니다.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합니다. 이게 바로 흉악한 이리가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피’를 말해야 하는 이유는, 이 말씀이 지금도 사건화해서, 참으로 구원받는 노선과 그렇지 않는 노선을 드러내는 유일한 기준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자리는 참으로 기적적인 자리입니다. 자신의 가치나 이득을 먼저 생각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주관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 지배가 전부인 자리입니다. 여기서는 개인적인 윤리 도덕이 통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말씀의 현실화가 차지하는 자리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 겁니다. 다윗은 압살롬과 백주대낮에 동침했던 후궁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치를 내리게 합니다.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서는 다시는 다윗이 그들을 불러 동침하지를 않습니다. 이러한 처리는 후궁들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윗 왕 자신이 시키는대로 예루살렘 본궁을 떠나면서 열 명의 후궁에게 궁을 지키라고 했기에 지켰을 뿐입니다.

또한 압살롬이 새로운 권력을 쥐고 있는 마당에서 연약한 여인들로서 어찌 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윗 왕이 남겨 두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겠죠. 다윗이 그들을 데리고 나가지 않는 상태라면 그녀들도 역시 전쟁의 피해자들입니다. 그들이 즐겨 압살롬과 놀아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뭐 자살이라도 해야할까요? 그렇게 해서라도 남편 다윗의 위신이 세우는 것이 그녀들의 마땅한 도리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다윗 자신의 문제였습니다. 자신의 가족과 가문의 불신앙으로 인해 그 후궁들은 죄의 피해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바로 다윗은 그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 역사를 모른 채 지워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 가문의 슬픈 역사를 온 백성들이 알아야 했기에 그들은 분리시킨 것입니다.

마치 후궁들이 백주 대낮에 아들 압살롬과 동침하는 모습을 백성들이 봐야 했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이 후궁들의 현대적 인권의 관점에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 안, 십자가 안에서의 한 맺힘이란 곧 죄의 일종입니다. 진정한 성도는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자입니다. 후궁들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이 다윗의 인생과 결부된 것을 하나님의 개입으로 여기고 감사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에게도 날마다 말씀 사건이 터져서 늘 젖먹이와 같은 마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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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십자가마을 2010.09.23 11:4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045강-삼하20장1-3(세바의 반역)-2sa100919

    2010-09-23 09:25:05 녹취 : 이한례


    045강-삼하20장1-3(세바의 반역)-2sa100919-(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하 20장 1절에서 3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498페이지입니다.

    사무엘하 20:1-3

    “마침 거기 난류 하나가 있으니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하는 자라 저가 나팔을 불며 가로되 우리는 다윗과 함께할 분의가 없으며 이새의 아들과 함께 할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좇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좇으나 유다 사람들은 왕에게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좇으니라
    다윗이 예루살렘 본궁에 이르러 전에 머물러 궁을 지키게 한 후궁 열 명을 잡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 더불어 동침치 아니하니 저희가 죽는 날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내니라“ 아멘


    다윗이 다시 돌아왔을 때에 예전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권력이 하나님이 주신 권력이라면 무너지지 않아야 되는데, 다윗은 자기 아들에게도 왕위를 내어줄 정도로 허약한 왕이라면, 야, 이건 다윗의 자리가 하나님이 주어진 절대 자리가 아니고, 인간들의 인기만 얻으면, ‘나’라도 넘볼 수 있는 권력의 자리라는 인상을 사람들이 갖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한 나라의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면, 옛날에 왕 될 만큼의 역사적인 바탕이 깔려있는 쪽에서 욕심을 낼 수밖에 없죠. 옛날에 왕족과 걸쳐 있다는 이유 때문에, 다윗이 혼자 왕질 다 해먹지 말고, 우리도 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이자는 식으로 나타난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 세력이 바로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세바’라는 사람이 “니만 왕 하나? 나도 왕 될 수 있다. 할 때에, 유다 사람들은 아이고, 웃기네. 지나 개나 소나 개나 다 왕 하나? 이렇게 웃기는 걸로 봤는데, 어, 그게 아닙니다. 유다 사람(지파) 빼놓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좇기를 그치고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좇으니라.“

    이 무슨 황당한 비극입니까? 그만큼 다윗의 인기가 너무나 세상적인 인기로 둘러싸인 겁니다. “믿음으로 다윗은 역시 하나님이 택하신 왕이야” 라는 믿음이 확산 된 게 아니고, “뭐 왕 할 사람 다음에 별로 있나?”에이, 구관이 명관이지. 하는 식으로 사람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냥 딴 사람 할 사람 없으니까, 니 하라는 식으로 다윗을 그냥 추대한 것뿐이었어요.

    아마 이러한 허점을 같은 왕족이라고 해먹었다는 왕족과 걸쳤다는 옛날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란 사람이 노리고 들어간 모양입니다. 그래서 봐서 여론을 살펴보니까, 아, 민중들의 마음이 온전하게 다윗에게 넘어온 것 아니다. 라는 것을 간파한 거예요. 그래서 지금 다윗에게 죽기 살기로 매달린 것은 다윗 자기 집안이고, 나머지 집안은 어쩔 수 없이 갔는데, 요런 사람들을 내 쪽으로 싹 몰치면, 요 세력으로 왕 될 수 있겠다. 는 틈새시장을 노린 겁니다.

    그만큼 그 당시에 다윗을 바라보는 입장이 신앙적인 입장이 아니었다 이 말이죠. 그냥 세속적인 권좌에, 권력은 아무나 갈 수 있다는 인간적인 육적인 그런 관점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자, 그럼 이런 이야기가 왜 성경 이야기에 왜 나오느냐, 성경 이야기에 왜 이런 이야기가 왜 등장하느냐 하면, 흔히 믿음, 믿음 신앙, 신앙 하지만, 결국에는 막상 어떤 조직의 힘에 부딪히면, 우리의 내부에서 소위 “하나님 믿습니다. 예수님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내부에서 은연중에 교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들어 닥치면, 우리도 고개를 쳐들고 교만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시편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어린 젖먹이 아이 입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젖먹이 아이, 아무것도 모르고 발발 기는 젖먹이 아이 입으로 영광을 얻는다. 이 말은 “어른들아 제발 어른 행세하려 하지마라.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깕아 먹는다는 말입니다. 차라리 젖먹이 시절로 돌아가라 말이죠. 나는 아무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그냥 기면 길수밖에 없는 그런 젖먹이 아이 입장에서 하나님을 섬기렵니다. 그런 것이 신앙에 가깝지. 이제는 내 힘으로 살 수 있다. 이래 나온다면 이미 그는 탈선한 거예요. 바퀴가 빠진 겁니다. 주님 가신 그 길에서 바퀴가 빠진 거예요.

    제가 독일 마지막 나오는 길에 예배를 드렸어요. 늘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마지막에 제 딸한테 이런 말을 했어요. 딸이 나한테 요구하는 것이, “아버지, 떠나면서 마지막 남길 말씀이 뭡니까? 유언하듯이 그런 눈치를 하고 있기에, 내가 얘기 했어요.

    “네가 좁은 길로 가거라.” 그럼 좁은 길, 넓은 길을 어떻게 아느냐?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은 무조건 아니다. 무조건 그곳은 영생 없다." 마지막 그 말 했어요.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은 무조건 엉터리 교회고 멸망의 길이다. 그냥 찾는 사람이 적거든, 그게 제대로 가는 길이다.

    그게 제가 방금 얘기한 젖먹이의 입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데, 우리는 젖먹이 입장에서 자꾸 탈피하려 해요. 마치 성숙한 어른이 되려고 합니다. 이만하면 많이 아는데... 아유, 뭘 알아요? 그냥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살아가는 젖먹이 입장이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는 입장이에요. 그게 신앙에 가장 가까운 겁니다. 신앙의 내용이 담겨 있어야 돼요. 다윗에 대한 이런 무시 감, 다윗이 젖먹이 같은 입장으로 살아가니까 소나 개나 다 무시합니다.

    그러한 입장이 돼서, 시편 3편에 보면, 다윗이 압살롬에게 피했을 때, 나오는 그때 한 기도가 나와요. 다윗이 아들한테 당했던 그때 다윗은 어떤 심정이었느냐, 시편 3편에 보면,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습니다.”

    아들마저 쳤을 때, 많은 사람이 아들 편에 섰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편에 선 사람 별로 없다는 말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영생으로 가는 사람이 예상외로 그리 없습니다. 영생,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은 멸망으로 가는 길이에요. 영생으로 가는 사람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교회에 올 때 그걸 몰라요. 모르는데, 어떤 한 사람이 세상적인 권력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마음속에 숨겨져 있던 내심 “나도 교회서 큰 소리 한번 쳐 볼까? 나도 한번 어른 돼 볼까?” 라고 노리는 사람들이 발작을 일으키면서 왈큰 하고 다 드러나는 거예요. 발작하니까 오 목사님 여기서 하신 설교 딱 생각나네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 전하면 발작 일으키고, 발작 일으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접촉이에요.

    사람들이 자기는 어린애 같은 마음이라 하지만, 막상 본인의 마음속에 자기 권력욕, 또는 세상에서 나를 알아주면 좋겠다는 그러한 욕심을 장려하는 사태가 벌어져버리면 사람은 거기에 편듭니다. 하나님은 젖먹이 입으로... 젖먹이 되기 싫어해요. 남에게 무시당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그런 오기 같은 게 발생됩니다. 바로 그러한 인간의 내부에 죄악 된 악마 같은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연약한 다윗, 남들보다 훌륭한 것 갖고 있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연약하게 다루십니다.

    고린도후서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연약하게 다루어요. 연약한 분을 믿을 자가 누구냐? 라고 묻습니다. 연약하게 살다가 연약하게 맥없이 돌아가신 분을, 그 분이 생명의 길이라고 알 자가 누구냐? 그 분의 길을 따라가라. 연약한 길을 따라가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제가 한번 정리해 봤어요. 성경 해석이란, 정리해 봤어요. 이렇게 정리됩니다. 성경해석에서 제일 어렵고 난해한 것이 뭐냐면 말씀이 어떻게 인격화 되느냐는 그 문젠데, 말씀이란 문자잖아요. 문자가 어떻게 인격화, 사람이 되느냐. 그 문제의 절차에 대해서 그것을 알게 되면 모든 성경이 다 적용이 됩니다.

    우선 말씀이 인격화되기 전에, 우선 순서가 말씀이 먼저 사건을 일으킵니다. 사건을 일으키게 되면, 그담에 거기에 대해서 새 힘들, 세상 사람들의 반응이 나타나는데, 그 반응이 항상 이상스럽게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는데, 항상 하나님이 인정하는 반응은 항상 소수라는 거예요. 소수, 몇 사람 되지 않고, 대다수가 하나님께 평소에 눌린 감정, 평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감정이 어떤 사건을 통해서 드디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데, 그게 대세를 차지합니다. 대세, 교회에서도 마찬가지고, 회사에서도 마찬가지고, 대세를 차지해요.

    말씀이란 하난데, 갑자기 말씀이 사태를 만나 사건을 일으키면, 거기서 각자의 혓바닥이 둘로 갈라진다는 거예요. 두 노선으로 쫙 갈라져요. 갈라지면서 한쪽은 뭐하냐면 소수의 사람들은 회개를 하게 되고, 그담에 한쪽의 사람들은 뭐하냐면, 그동안 본인이 믿었던 복음에 대해서 본인이 삶과 행동으로 모든 걸 하게 돼요. 뭐냐면, “예수? 내가 가치 있지. 예수는 나중 가치야. 자기 몸이 우선 가치가 있고, 그 뒤에 예수의 몸은, 예수의 생명은 자기보다 더 뒤떨어진 가치라고 밀어 버립니다. 그게 대세에요.

    추석이 되었잖아요. 추석되기 전에는 믿음 생활 잘하잖아요. 추석 때 보세요. 큰 집에서 복음 얘기 못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몸이 더 중요한데요. 어떻게 전 하나 잘 구워가지고 칭찬 받는 거, 자기 몸의 가치는 중요하고, 복음의 가지는 뒤로 물러가게 돼 있습니다.

    교회, 개척교회 할 때 서로 복음 잘 믿죠? 교회, 사람 불어나가지고, 뭐 개척교회 그럴 일, 부흥되는 일이 없겠지만, 사람 불어나가지고 만약에 예배당을 다시 짓는다 해 보세요. 갑자기 그때부터 예배당에 대한 권리 소유권 권리문제의 가치가 예수님의 피보다 더 앞장서게 돼 있습니다. 그것은 코스가 필연적인 코스에요, 말씀이 인격화 되는데 필연적 코스입니다. 그런 사건 일으킨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됩니다.

    여러분 아시는 유명한 말씀 있잖아요. 사도행전 20장 28절,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뭐냐? 하나님이 자기 피로 세운 교회다. 그러면 그 교회는 하나님의 자기 피 말고 다른 것, 다른 피, 다른 노력, 다른 땀방울은 다 빠져 나가야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라는 것이, 하나님의 피는 뒷전이고, 인간이 자기희생, 자기 피, 자기 노력, 자기 헌신, 자기 돈 바친 것, 자기기도 많이 한 것이 뭉쳐서 교회가 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사도행전에서는 그거 알아요. 알고 뭐라 했느냐하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성령이 와서 감독자로 치게 했는데, 그 후에는, 내가 떠난 후에는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와가지고 양떼를 훌치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피로 사신 양들을 하나님의 피로 산 양에다가 앞에 기관차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내가 당신을 사랑해 줄게” 라고 이리가 하나님의 피의 자리를 치워버리고 자기의 착함과 자기의 사랑해 줌, 이뻐해 줌으로 바꿔치기를 해서 그 사람들을 자기 사람을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그런 사태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 그걸 극구 밀어야 합니다. 아냐 아니야, 당신이 교회 만드는 것 아냐, 하고 밀어야 되는데, 복음 아는 사람들이 민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런 사람 오니까 전부 다 거기로 끌려갑니다.

    어떤 사람이 얘기 했어요. 조 용기 목사 무시하지 말라고, 일본에서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얼마나 내가 그 소리 듣고 놀랬는지, 복음을 안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알면, 하나님의 피로만 교회가 이루어지지, 그 외의 인간은 쓰잘데기 없거든요. 만약에 예수님의 피 외에 다른 것을 집어넣으면, 이미 훌치고 간 거예요. 하나님의 양떼를 전부다 이미 훌치고 간 겁니다.

    그게 바로 ‘세바‘란 사람입니다. “아 요거는 잘하면 내 양 되겠다. 내 사람 되겠다. 할 수 있는 거예요. 교회요? 잘하면, 저 사람 내 노선으로 포함시키고, 저 사람은 내편 될 수 있겠다. 그걸 늘~~ 구상하게 마련입니다. 겉으로는 안 드러내죠. 그러나 사건이 벌어지면, 저 사람은 이 사람 편이고, 저 사람은 내편이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피는 어디 갔습니까? 그러다가 무시하면 나 무시한다고.... 사람이 어린애 같은 신앙은 자기 무시라는 게 성립이 안 돼요. 왜냐하면 어린애는 오직 ‘예수의 피’만 있으면, 그 자체로 이미 영생이고, 구원이기 때문에 나를 무시하고 무시 안하고가 도대체 이건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지가 어른 좀 됐고, 지가 난 대장이라고 여길 때는 그때는 무시니 안무시니 하는 말이 성립이 되는 거예요. 늘 어린애 같으면 돼요.

    이런 걸 다윗은 알았어요. 뭐냐면 내 주변에 내가 믿는 하나님 믿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없을 때 어떻게 하느냐? 그 사람의 노선들을 다 드러내면 되는 거죠. 그래서 첫 번째 방법이 뭐냐면, 세바가 반란을 일으킬 때에, 그담에 뭐냐면 누구를 군대 총사령관으로 해서 진압케 하느냐면, 아마사란 사람을 여기에 등장시킵니다. 또 이렇게 성경에 사람 이름 얘기하니까 내가 골치가 아프네요. 목사님 아마사가 누굽니까? 아마사가 누굽니까? 하는데.....

    아마사가 누구냐면, 황장엽입니다. 황장엽. 현재 우리나라 국무총리 비어 있죠? 제가 대통령 되면, 황장엽 국무총리 시킵니다. 하..... 지금까지 우리 남한에서 그동안 정권 하나 잡으려고 박 근혜 쪽에서 아버지 빽 믿고 수십 년 대기하고 있는 박 근혜 쪽서 대기하고 있죠. 민주당에서 노무현 쪽에서 대기하고 있죠. 수많은 대기하는 사람이....., 황장엽 국무총리 시키겠습니까? 수십 년 동안 북한의 김 일성, 김정일 밑에서 월급 받아먹고 온갖 아부한 사람을 어떻게 국무총리 시키느냐 하겠죠?

    그걸 바로 다윗이 노린 겁니다. 다윗이 노린 겁니다. 조금 전까지 다윗에게 대들었던 적군의 총대장을 이제는 현재 다윗이 자기 사람인 세바의 난을 진압하는 총 사령관으로 아마사를 삼았다는 것은 앞으로 아마사 입장에서 정권을 유지해 나간다는 뜻입니다. 황장엽을 이제부터 이 말을 하는 것은 귀순했기 때문이에요.

    누가복음 15장에 이런 말씀 있죠. 어린양 하나가 회개하면 회개하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 양 하고는 족히 비교가 안 되겠습니다. 숫자 아흔 아홉 마리 양 그거 비교가 안돼요. 한 마리 양만 회개하면 그걸로 충분한 거예요. 노아 방주에 8명만 들어가도 하나님께서 섭섭해 하지 않으셨습니다. “노아야, 어찌 니 식구만 들어오니? 염치도 없다” 그런 소리 안하셨습니다. 충분했습니다. 평수 넓어도 여전히 충분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의 사건을 일으키는데, 어떤 사건을 두개 노선으로 나눕니다. 한쪽은 숨어있던 악마 성을 완전히 드러내가지고, “나도 복음 가치보다 내 가치가 더 중요해. 나라는 존재 가치가 더 중요하단 말이야”라는 평소에 자기의 속성을 드러내게 하는 사건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한쪽은 뭐냐, “하나님, 나 어린애만 되면 좋겠습니다. 나 하나님 피만 있으면 돼요.” 라는 늘 자기를 낮추는 회개하는 심령의 노선을 드러냅니다.

    아마사 등장합니다. 아마사 등장하니까, 재밌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다윗을 따르던 사람들이(유다 사람들이 다윗을 따랐잖아요?) 막상 다윗이 아마사를 내세우니까, 다윗이고 아마사고 하나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네? “나는 다윗의 권력이 좋지, 다윗이 하는 모든 행위를 난 좋아하지 않는다. 다윗이 당신이 왕의 혈족이라는 것 때문에, 이 땅에서 이득을 볼 때 그때 난 당신 때문에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지, 당신이 만약에 우리의 가치를 모독한다면, 나는 다윗 당신을 모독할 거야” 아이, 이거 우리 본심 아닙니까? 우리의 본심 아닙니까? 예수 당신이 나한테 이득을, 나의 원하는 것을 줄 경우에만, 그런 조건 하에서만,내가 당신을 믿을 가능성이 있지만, 만약에 당신이 내 원대로 되지 않을 경우엔 다른 예수 상을 만들어 낼 거야“

    이게 우리 모습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말씀 사건을 통해서 폭로 시키는 겁니다.

    우리가 싫어하는 아마사를 군대장관으로 세우는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다윗이 최고, 다윗은 만만“ 하다가, ”아이고, 다윗도 안 되겠어, 안되겠어, 라고 다윗에게 눈 돌리고 아무도 그에게 따라가지 않게 되는 사태를 의도적으로 다윗이 일으킵니다. 일으켜놓고 그담에 안 먹어지니까, 아마사의 명령이 안 먹어지니까, 세바의 난을 진압할 수 없으니까, 뭐로 바꾸느냐 하면, “그래 너희가 원하는 대로 바꿀게”하고 요압의 동생 아비새(요압 쪽 사람으로 바꿔치기 하니까)를 군대장관으로 삼으니, 유다 지파 쪽에서 우리 임금 좋다고 추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마사(황장엽)는 어떻게 됐는가. 요압이 몰래 만나서 칼 갖고 죽여 버립니다.

    그래서 요압 장군은 세 명을 죽입니다. 첫 번째는 귀족 아브넬을 죽이고, 두 번째는 압살롬을 죽이고, 세 번째는 아마사를 죽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의 이긴 자, 다윗 앞에서 어느 놈이고 얼쩡거리는 자는 다 죽여 버립니다.

    벌써 마음속에 싱긋이 웃음이 나죠? ...ㅎ ㅎ 이 근호 밑에 들어오면 다 죽여 버립니다. ㅎ

    다윗 밑에 있는 자를 다 죽여 버려요.ㅎ ㅎ 그래서 다윗이 뭐라 하느냐 하면“ 내가 요압에게 벌을 내리지 않으면, 내가 벌을 받겠다.” 요압은 천벌을 받을 놈이다. 진짜 시편에 나오는 다윗의 심정은 좁은 길이예요. 찾는 자가 적어요. 다윗이 본인이 구원 받는 것도, 선택 받은 것도 희귀한 사항이에요. 내가 늘 하잖아요?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 이상해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요. 아마 대부분 가짜일걸요.ㅎ 뭘 노리고 예수 믿었어요? 뭘 노리고?? 이 근호 가짜죠. 100% 가짜고, 반드시 평생 동안 내가 가짜 예수 믿는다는 것을 들통 내고 말아요.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는요. 세리와 창녀한테도 해당돼요. 세리와 창녀가 바리새인보다 먼저 천당 갑니다. 누가 누굴 비난할 자격이 못됩니다. 우리가 자꾸 젖먹이, 어린애 같은 입장이 되는 그쪽으로 가야 돼요. 그쪽으로. 우리가 어른 되면 안 됩니다. 자꾸 젖먹이 입으로 가야 돼요. 젖먹이 입으로 천사처럼 찬양 받습니다. 예수님 십자가가 그렇게 만들어 내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필요한 것은 회개죠. 다윗은 자기 자리를 회개자리로 만들죠. 그 다음 조치가 뭐냐면, 3절입니다.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 본궁에 이르러 전에 머물러 궁을 지키게 한 후궁 열 명을 잡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 더불어 동침치 아니하니 저희가 죽는 날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내니라”

    생~과부로 지내니라. 이게 무슨 사건이냐 하면, 다윗이 급하게 나오다 보니까, 다윗의 후궁 열 명이 있었습니다. 그 열 명을 미리 챙기지 못하고 다윗 몸만 빠져 나왔거든요. 그때 압살롬이 다윗이 빠져나온 왕궁을 탈취함으로 말미암아 전 백성에게 드디어 새로운 왕이 등극했습니다. 하고 표를 내는 표시를 한 거예요. 그래서 물었어요. 이거 말고 확실한 표 없냐? 하니까, 확실한 표가 ‘다윗이 동침했던 후궁 열 명과 함께 백주 대낮에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침대를 옥상에 해놓고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한 가운데서 열 명과 함께 동침 하소서’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이 동침을 했어요. 후궁 열 명과. 그 아들과 동침했던 그 후궁들이 그 후궁들입니다.

    민주주의적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여성의 인권, 민주주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지 성경적이 아니에요. 근데 민주주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사람의 인권이라는 것은 남 녀 구분 없이 동등하거든요. 여성이 남자와 결혼 할 때 그 여성은 남자 하나보고 삽니다. 그런데 남자가 비겁하게 자기(지) 급하다고 지가 급하다고 먼저 앞장서고 여자는 챙기지도 못하고( 꼭 뭐 같이 지하철 먼저 타고 아내는 놔 두고, 꼭 누구같이, 횡단보도 먼저 건너가고, 아내는 치어 죽든지 말든지, 그 누구같이...ㅎ )

    여자란 남자 보호 받고 평생 살기로 했는데, 잘못은 저만 저질렀습니까? 동침한 여자 같으면 지가 챙겨서,(동이라도 괜찮고 장미라도 괜찮아요) 같이 데려가야 하는데, 지가 실수로 후궁 열 명을 남겨 놓고, 적군은 쳐들어오는데...적군의 대장한테 농락당하죠. 그것도 집요스럽게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그러면 잘못은 누가 저질렀어요? 다윗이 잘못했어요. 다윗이 잘못했으면, 다시 후궁을 만났으면 인간적으로 백주대낮에 다시 이 나 때문에 수모 억울한 수모를 겪은 비련의 주인공들을 내가 다시 거두겠다. 하는 식으로 다시 모셔드리고, 성이 차지 않는 그 한 맺힌 그것을 찾아야 하는데....

    어, 이게 뭡니까? 니가 반란을 일으킨 적의 원수와 동침했기 때문에 이제는 더러워서 따로 밀실에 쳐 박아놓고, 따로 나가라 해서 다른 남자와 결혼할 기회도 주지 않고, 별실에 가둬 놓고 먹을 것만 주고 더불어 동침치 않았다. 그럼 평생에 별만 보고 살아라. 평생에 어이 살란 말입니까?

    왜 다윗이 이런 행동을 했는가 하는 문제.....?

    성경이 바로 회개하는 것, 예수를 믿는 게 하나의 비밀입니다. 이건 정말 기적입니다. 예수 믿는 다는 것이 인권이라든지 민주주의라든지 인간의 착한 양심이라든지 이런 게 예수님 안에서는 이건 허용 되면 안돼요. 착한 양심으로 구원 받으면 안 됩니다. 예수 믿고 착한 양심 버려야 돼요. 그렇다면 다 갖다 찢어 버려야 됩니다. 이 여인의 입장에서는 다윗의 행동이 너무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진짜 비련의 주인공들이죠.

    제가 독일에 가 있을 때 십자가 마을에 글이 하나 올라왔어요. 글이 하나 올라와서 제가 댓글을 금방 달라고 했습니다. 휴가 중인 병사가 다시 군에 오는 것도 웃기는 거 아닙니까? 자기가 부모 잃고 힘들게 살았다는 거예요. 그 글 댓글에 이렇게 달라고 했습니다. 한이 맺힌 사람은 자기를 죄인으로 보지 않아요. 간단합니다. 한 맺힌 사람은. 어떻게 십자가 앞에서 자기 한을 논합니까? 나 부모 잃었고 어렵게 살고 어떻게 살고,... 그게, 그게 착한 양심을 동정 유발하는 거예요? 뭐예요? 어디 예수 안에서 착한 양심이 어디 있습니까? 착한 양심을 예수 안에서 아직까지 갖고 있어요?

    이 여인이 다윗과 결별해야 될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여인들은, 다윗은 나는 지금 회개 중이다. 다윗은 나는 회개 하고 있습니다. 나는 두 번 다시 여인과 동침하지 않을 정도로, 더러워서 동침 안하는 것이 아니고, 나로 인하여 발생된 결과들이 이렇습니다. 라고 전시하는 거예요. 압살롬이 다윗의 후궁 열 명과 백주 대낮에 동침한 것처럼, 이제는 나 때문에 그렇게 한 맺힌 여인들이 이렇게 있습니다. 를 보여주는 전시하는 효과로 그들은 두 번 다시 다윗과 함께 동침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럼 여인은 뭐합니까? 여인은. 다윗은 회개하여 지 신앙은 좋은데, 신앙을 좋다는 걸 과시하는 것은 좋은데, 여인의 입장은 어떻게 되는가? 여인은 다윗의 젖먹이 같은 어린애 마음을 이해해야죠. 이해해야죠. 자기의 한 맺힘을, “다윗 니 때문에 나는 당했어, 평생 너는 고생해“ 하는 한 맺힘 가지고 다윗에게 호소할 것이 아니고 ”주여 내 인생을 통해서 다윗이 개입한 것을, 다윗의 회개가 다윗의 그 아픔이 내 인생에 같이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 여인들은 감지덕지해야 되죠.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의 피가 예수님 흘리신 그 피가 우리 인생에 깊숙이 주인으로 핵심으로 중심으로 개입된 것을 우리는 감지덕지 하고 그 앞에서 감히 우리의 한 맺힘을 십자가 앞에서는 논하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는 틈만 나면 원망하고, 하나님 앞에 따지고, 넓은 길로 가면서 왜 넓은 길로 가지 못하느냐고 주 앞에 불평하는 저희들입니다. 주님 가신 길이 좁은 길이라면, 주여, 그 좁은 길이 영생의 길인 것을, 하나님이 좁은 길로 우리에게 결부시킨 것을 갈수록 감사하며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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