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9. 12. 21:45

우리가 언제 (말라기 1장 6절)

본문 : 말라기 1장 6절
제목 : 우리가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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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1장6우리가언제100912


말1장6-(우리가 언제)-100912-우리교회(한윤범 목사)

말 1: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찐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찐대 나를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모세를 통해서 계명을 주실 때에 출애굽기20장2절에 보면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너희를 구원하신 여호와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이 호세아13장4절에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애굽 땅으로부터 나오고 있는데 그 인도자가 구원자가 여호와라는 거예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계명을 주시고 또 구원하시고 인도 하시는 분이 여호와라는 거예요.

출애굽기에는 바로 그 여호와가 등장하는 장면이 나오죠. 3장에 보면 가시떨기나무에서 하나님과 모세가 만나는 장면입니다. 가시떨기 나무가 불타오르는데 모세는 이상하게 여기지만 하나님께서는 접근하지 말라고 하죠. 그러면서 이것은 거룩한 것이니 네 신을 벗으란 말로 모세가 접근하는 것을 막습니다. 거기서 비로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여호와란 이름을 가르쳐주시죠.

여호와란 말은 나는 스스로 계신다는 의미잖아요. 그리고 구약 전체를 통해서 언약의 하나님으로 불리는 하나님이죠. 그랬을 때 모세가 먼저는 질문을 했죠. 내가 백성들에게 갈 때 뭐라고 이야기할까? 모세를 백성들에게 보낼 때 그때 여호와라는 이름을 주시는데 그 여호와라는 이름이 새삼스럽게 등장하는 이유가 뭐냐 이거죠. 여호와라는 이름을 굳이 하나님께서 이름을 붙여가면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주신 것은 뭔가 다른 구분을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도 이미 하나님이라는 신이라는 존재는 세상 도처에 다 깔려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세상 신들과 여호와 하나님이 어떻게 다른지 보여 주시기 위한 정확히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인데 왜 여호와하나님이냐는 거죠. 이스라엘백성들도 세상 사람들과 같이 신을 알고 있었어요. 여러 신들을 모시고 있었잖아요. 이미 애굽에서 430년 동안 있을 때부터 신이란 신은 다 경험하고 체험하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에도 보면 교회 다니는 사람이나 다니지 않는 사람이나 신, 하나님에 대한 의식들은 다 있잖아요. 하나님, 뭐 하늘님, 하느님, 천재님, 천주님 하면서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보니까 이게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야 무슨 무슨 신하지만 결국은 그 사람들은 신의 이름을 다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야말로 개나 소나 다 하나님이라는 거죠.

누구나 다 부르는 하나님인데 ‘나는 여호와하나님이다.’ 라는 거예요. 굳이 하나님께서 여호와하나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끌고 나오면서 무엇을 보여주고자 함이냐 이거죠.

출애굽기 6장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또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내가 이삭과 야곱과 아브라함에게는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지 않았었다는 말을 합니다. 아주 굉장히 생소한 부분이에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이 그들에게 나는 전능의 하나님, 에이샤단이라고 하는 전능하신하나님이라고 불러요. 그렇게 나타나셨다는 거예요. 그러나 내가 모세 너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나고 너를 통해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계명을 주고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그 이름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붙인 언약의 하나님으로 보여 질 것이다. 전능의 하나님하면 보통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과 거의 비슷합니다.

우리가 힘겹게 이루려고 노력하지만 얻을 수 있는 그것을 주실 수 있는 그런 능력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전능의 하나님이 이제는 여호와하나님으로 불려야 되고 나를 그렇게 부르라고 하고 백성들에게 가서 소개 하라고 모세에게 이야기 합니다. 세상에 많은 신들이 있고 여호와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붙인 내가 있다는 거죠. 이제부터 여호와하나님이 하신 일들이 성경에 가득 펼쳐지는 것이죠. 물론 전에도 전능하신하나님이 전능하신능력을 통해서 하나님이 독특하고 특별한 분이신 것을 보이셨지만 이제 여호와하나님으로 세상 모든 신들을 평정하고 계명에 나오는 대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두지 말고 섬기지 말라는 말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증명해 보이십니다.
 
컴퓨터를 다루려면 운영체제가 필요하잖아요. 저는 모든지 다 늦게 시작했습니다. 컴퓨터도 늦게 시작하고 신학공부도 늦게 하고 나이만 잔뜩 먹고……. 처음에 윈도우 98부터 시작했어요. 윈도우xp 넘어오고 요즘에는 윈도우7까지 왔죠. 전능의 하나님이 여호와하나님으로 업그레이드 됐다는 말이 적당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완전히 기능이 끝나 버린 거예요. 이제 더 이상 플러스된 기능이 필요하지 않은 하나님이 여호와하나님입니다. 윈도우7 이후에 또 어떤 추가적 기능이 있겠지만 비유적으로 그렇다는 겁니다. 여호와하나님이 신약에 넘어오면 바로 새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예수그리스도를 지칭한 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 여호와하나님이 여호와하나님을 오늘날 우리가 여전히 찾으면서 그 하나님을 믿으면 그 하나님과 함께하면 그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되느냐 하는 얘기죠. 제가 신학교에서 공부를 할 때 구약신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콤플렉스 같은 것이 있어요. 학생들이 항상 궁금해 여기는 게 뭐냐 하면 구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이 신학시대에 넘어와서 예수그리스도가 나와 있으니까 예수그리스도에게 모든 주권을 넘겨주고 권력까지 이양해 줬으니까 구약의 하나님은 이제 빠져야 되지 않느냐 라는 식의 질문을 신학 교수들이 많이 받아요. 우리는 궁금하니까 물어본 거예요.

그때 기억나는 교수가 한 분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냥 씁쓸해 하면서 설명을 해 주는데 이분은 그날 완전히 화가 난거예요. 그야말로 핏대가 난거예요. 이 성경에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많이 나오느냐 하나님 이름이 무수히 나오는 데 이 하나님을 뒤로 하고 예수그리스도만 이야기하면 성경 4분의 3이 날아가 버린다. 도대체 너희들이 나한테 뭐 하러 공부를 배우느냐 구약의 하나님도 인정하지 않으려면 복음서만 공부하고 사도바울서만 공부해라! 이런 식으로  화가 나서 학생들하고 논쟁을 벌이고 했어요. 구약교수들이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부분이에요. 구약의 하나님이 정말, 삼위일체의 우두머리이죠. 이게 개혁주의 특징 아닙니까? 이 대장하나님을 빼놓고 어떻게 감히 그런 식으로 도전을 할 수 있겠느냐 그거죠.

신학교수 그분이 모르는 게 뭐냐 하면 이름에 따라 하는 일이 다른 것을 모르는 거예요. 이름에 속에 그 기능과 역할이 다 담겨져 있는 거예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여호와하나님으로 넘어가야 되는 것은 여호와하나님이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언약을 끝내버린 완성의 상태에서 그 모든 것을 종결을 지어야 됩니다. 그래서 능력을 발휘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위해서 권세를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말씀하시는 구약신약 그 언약을 이루시는 완성하시는 그 시스템에 종결 끝 지점까지 가야 된다는 그것을 끝내버려야 돼요. 그게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여호와하나님으로 끝나면 되는 데 그런데 문제는 새 언약으로서 예수그리스도가 등장한다는 것이 그 교수님은 마음에 안 들었던 거예요. 하나님으로 충분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우리 소원 들어 주시고 말씀 잘 지키면 교회 부흥시켜주고 꼭 그런 교수님이 한 분 계셨어요. 하나님말씀 그대로 전하면 교회 부흥된다고 저도 그때 그런 줄 알았어요. 그래서 열심히 성경 읽고 성경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그 분의 문제가 뭐냐 하면 그분이 강의 한 것을 그대로 써야 해요 토씨하나 빼놓지 않고 서모라는……. 고생 무지했습니다.

저는 외우는 것 잘 못해요. 오늘 이 설교를 하려고 제가 원고를 써서 그것을 녹음을 했습니다. 들으면서 외우려고요. 하나도 기억이 안나요. 그 정도로 외우는 재주가 없어요. 그런데 점수를 받고 졸업을 해야 하니까 그게 안 되면 라이선스를 못 받으니까 죽을 뚱 살 뚱하면서 그것을 쓴 거예요. 그대로 이 성경말씀을 그대로 전하고 지키면 교회부흥 한다고 자기가 보장한 다고 했어요. 안되면 찾아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찾아가려고 할 때 이근호목사님 만나서 다 소용없는 일이 되었지만 그렇게 이름에 담긴 이름에 따라서 하는 역할과 기능이 다르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거예요. 신학교수를 하고 있으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하고 이 하나님에 대해서 바로 알지 못하고 바로 쓰지 못하면 점수도 안주고…….

그러나 세상에 새 언약의 하나님계시잖아요.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끝내놓으시지만 그분으로서 그분만 믿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호와하나님은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잖아요. 물론 그 언약 속에 십자가 지심까지 분명히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고 그렇게 하나님이 그런 계획을 가지고 계셨구나하면 여호와하나님이야기를 하더라도 예수그리스도와 금방연결을 시킬 수 있는데 그냥 잘라서 다른 편에서 우리는 신약, 우리는 구약 이렇게 학문적으로 논하다 보면 매일싸움 밖에 일어나지 않아요.

십자가 지신하나님이 바로 진짜 하나님이잖아요. 마지막 하나님이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게재가 우리는 되지 않아요. 전능의 하나님 여호와하나님 새 언약의 예수그리스도까지 쭉 오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가서 뭐하나 거든 거 없어요. 집을 짓는 데 벽돌하나 나르는 일이 없다는 겁니다. 없으면서도 우리는 말씀을 보면서 자신이 다 재단을 하고 해석을 하고 그 결과물을 가지고 교인들에게 나눠주면서 이게 진짜라 하고 2천년 역사동안 그 신학체계 역사체계가 쌓여서 역사적 전통적 문법적 해석방법으로 자기를 잡고 있고 거기에 맞지 않으면 다 잘라버리고 이게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우리하나님께서 이러한 언약을 시작을 하시면서 그 완성자로 예수님을 세우신거예요.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가 탄생되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그 이름을 마리아나 요셉이 지을 때 생각이 없었어요. 예수라는 이름을 아기는 지금 나오려고 하고 있는데 그 나을 수 있는 안전한 장소조차도 찾지 못한 상태잖아요. 그러니 이름을 예수로 짓던지 뭐로 짓던지 그럴 정신과 겨를이 없는 거예요. 이름이고 뭐고 애만 안전한 게 잘 나으면 좋겠다. 해서 나은 곳이 말구유 아닙니까? 그러나 이미 하나님이 뭘 준비해 놓으신 거예요?  성령께서 나타나셨잖아요. 그래서 이름을 주셨잖아요. 예수라는 이름을……. 저 백성들을 저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자라는 이름, 그 당시 흔하고 흔한 이름이지만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새로 탄생한 아이에게 이름이 주어졌을 때는 이미 그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다 담겨져 버린 거죠.

그 담겨진 상태에서 태어난 그 아기 예수그리스도가 이제 성경 전체를 시작을 해 버렸고 성경전체를 끝내버린 그 왕이 돼 버리셨잖아요. 그분을 바라보면서 ‘나는 구약전공이니까 구약 하나님을 무시하면 안 돼’ ‘나는 바울 서신 전공이니까 바울이 이야기하는 예수만 이야기할 거야. 나는 마태복음을 전공했으니까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만 전할 거야’ 제가 지금 말한 이 교수 밑에서 배웠어요. 그들이 배우고 전공한 것에 대해서 아주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수백 명이나 되는 학생들에게 계속해서 떠들고 주입시키는 거예요. 그게 아니면 안 된데…….

구약신학의 사사기 강의에 들어가면 구약의 하나님을 믿어야 되고 그 구약의 하나님을 모르고 믿지 않으면 이단이 되는 거예요. 구원에서 떨어지는 거예요. 바울서신 과목 시간에는 바울이 이야기하는 그리스도 거기에 대해서 빠져들지 않으면 또 이단이 되는 거예요. 그것은 성경 전체를 하나로 꿸 수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거죠. 우리속담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물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말씀 한절 한절이 다 진주에요. 보물이잖아요. 보화이고 그런데 아이들이 진주알 100개, 200개를 가지고 있으면 진주 목걸이로 귀하게 여기겠습니까? 꿰지를 못하니까 단편적으로 하나하나 가지고 내 하나님, 내가 소개하는 예수님, 내가 소개하는 그리스도만 나열할 뿐이지 전체적으로 그 이름이 무슨 뜻이 담고 있고 그 이름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를 통합적으로 우리에게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배우는 학생들은 앉아서 끄덕끄덕 할 뿐이에요. ‘그 말이 맞네, 여호와 하나님이네, 전능한 하나님이네, 예수님이네,’ 그것을 목회현장 가서 단편적으로 전하니 매번 전할 때마다 다른 이야기, 다른 말이 나오잖아요.

십자가 마을에서는 주구장창 십자가 복음, 그 피만 이야기 하죠. 너는 왜 십자가 피만 이야기만 하냐고 따지는 자체가 그 안에 뭘 가지고 있어요? 제가 앞에 설명한 것이 그것을 다 깔고 있는 거잖아요.  꿰지를 못했다는 거잖아요. 결국은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 이름을 가지고 이 일을 하시면서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것을 보여 주겠다는 거예요. 그것을 보여 주기위해서 신. 구약 성경 전체를 우리에게 던져 보여 주시는 것이고 이것을 네 맘대로 해석해서 알아먹으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보여주고 해석해 준 것만 듣고 알아먹으라는 얘기죠.

구약시대에도 이러한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서 여전히 주님 이름의 의미가 뭐고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잘못된 신앙 상들이 오늘 읽은 본문 속에 나타납니다. 말라기 1장 6절에 나왔지만 제사장들에게 이 말씀을 주는 거예요.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하면서 나옵니다. 제사장이라고 하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잖아요. 2장 5절에도 보면 그 제사장과 내린 언약을 통해서 거기에 생명의 언약을 제사장과 맺었다는 말씀을 통해서도 제사장과 하나님이 특별한 관계, 언약 관계 속에 같이 놓여 있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멸시했다라는 거예요. 그런 지적을 당하면 “네가 나를 멸시했어, 나를 모욕 했어” 라고 당하면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제사장이라면 자기를 돌아보면서 “주님 제가 그랬습니다. 저도 부지불식간에 안 그러려고 했지만은 그랬나 봅니다.” 이런 식으로 고백하든 인정을 하면은 더 이상 문제가 없는데 이들의 반응은 주님의 그러한 그 지적에 대해서 거역하는 식으로 나왔죠.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우리가 언제, 내가 언제?” 아이들 싸울 때 보면 그런 식으로 싸워요. “너 그때 나 때렸잖아! 내꺼 빼앗아 갔잖아!” “내가 언제, 몰라” 꼭 그런 식의 말라기 1장에 들어와서도 그런 내용들이 있고 그 이후에도 그런 비슷한 거역하는 답변들이 계속 나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했다니까” “아, 사랑, 좋은 거죠. 그런데 언제 나를 사랑했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셨다는데 그 사랑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언제 나를 사랑했냐고 하는 거예요. 내가 너 대신 십자가 피를 흘렸다니까 “언제요?” “2천 년 전에” “2천 년 전에 난 못 봤어요.” “언제 피흘려줬습니까? 언제 나를 사랑했습니까? 언제 제가 주의 이름을 멸시했습니까?” 이런 식으로 계속 나와요. “언제 내 행함은 무가치 하도록 하나님께서 다 이루라 했습니까?” 이런 식으로 따지고 드는 거예요. 주님의 이름이 무슨 일을 하고 그 이름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내용들이 신약까지 내려오면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를 알지를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 우리는 이런 의문과 반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버렸어요.

그런데 제사장들이 이 백성들이 “하나님을 언제 주의 이름을 멸시했습니까?” 라는 말을 이들은 진심으로 하는 얘기에요. “나는 주의 이름을 멸시한 적이 없어요.” 그들의 입장에서는 진심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제사장들이나 이들은 무엇을 가지고 있어요? 율법을 소지하고 있어요. 법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법을 지키는 자로 나섰기 때문에 그 법에 어긋났다고 지적하는 것에 대해서 자신은 법을 어긴 적이 없기 때문에 “내가 언제 주님을 멸시했습니까?”라는 반응이 당연하게 자연스럽게 나오는 겁니다.

이것의 근본적인 문제는 겉으로 들어나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지적을 당하고 미리 부르심을 당한 자가 아닌 상태에서는 그것이 당연한 반응이라는 거예요. 율법을 가진 상태, 율법을 지키는 상태에서 그 법에 어긋나지 않으면 나는 하나님을 어긋난 적이 없고 나는 하나님 밖을 벗어난 적이 없고 하나님의 법을 안 지킨 적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너는 법을 어겼구나! 내 이름을 멸시 했구나!”라는 지적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거예요. 난 그런 적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 밀 수밖에 없어요. 

뒤에 7절 8절에도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더럽게 했다는 지적들, 그런데 “우리가 언제 더럽게 했습니까?” 이런 식의 반응들…….  이것은 구약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똑같은 식으로 우리에게 계속 등장하고 있어요. 그런데 왜 이런 식의 반응이 계속 끊임없이 끝까지 등장하느냐 하면 죽을 때까지 이 일이 이루어지는 이유는 하나님이 안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콘셉트가 보이지 않게 하는 거예요. 숨어 계시는 거예요. 감춰진 거예요. 우리는 그분이 안 보이기 때문에 안 보이시는 그분의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안 보이시는 그분이 들어냈다고 오전에 말씀을 드렸죠. 그러면 안 보이시는 그분이 이 말씀의 행함을 기록해 놓은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구나. ‘아, 이 속에 안 보이는 하나님이 있네.’ 이렇게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이 생각이 내 생각 속에서 따로 따로 노는 거예요. 안 보이시는 하나님이 자기를 보이기 위해서 성경을, 이 말씀을 주셨구나! 라고 접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것대로 받아들이고 안 보이는 것은 안 보이는 대로 그냥 남아 있는 거예요. 안 보이는 것을 이렇게 보여주셨으면 여기서 하나님을 찾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보면서 안 보이는 하나님을 계속 안 보인다고 우리는 아우성치고 놀라고 분노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보고 해석하면서 엉뚱하게 해석을 해요. 안 보이는 하나님을 보이는 자신이 보고 보이는 것으로 끌어내려고 하고 그 결과가 이 말씀을 지키고자 달려드는 식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백성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나두지 않는 거죠. 저주를 계속 퍼 붙고 있습니다. 구약의 특징 중에 하나가 즉각적인 저주가 선언되고 선포되는 거죠. 이런 제사장들에게  2장 3절을 보시면

말 2:3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예배를 주관하고 제사를 주관하고 그것을 인도하는 제사장 얼굴에 진 밖으로 버려야 할 똥을 쳐 바르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똥이 발라진 거예요. 그러면 제사장 통째로 진 밖으로 나가야 되는 겁니다. 버림당해요. 2장 9절에 보면 네가 나를 멸시한 것처럼 나도 백성들 가운데 너를 멸시하고 천대하리라는 말로 그들에게 또 저주를 퍼 부어요. 그런데 오히려 주님을 믿고 주의 말씀을 지킨다고 하는 제사장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무리가 요구하는 개 취급하는 이방인과 이방나라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높이는 식으로 나옵니다. 그것이 1장 11절 말씀이에요.

말 1: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주의 이름이 이방나라에서 높여질 것이라고 거듭 반복하면서 제사장들이 하는 짓과 딱 대조해서 보여주고 있어요. ‘너희가 비교해 봐라 너희가 어떤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자신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고 눈 밖에 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 지키고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그냥 확신하고 있는 거예요.

문제는 주께서 미리 정하시고 부르신 자를 끄집어 내지 않으면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하죠. 주께서 끄집어 내 주지 않으면 아무리 내가 주를 믿는다고 하고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말씀을 지킨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자기 혼자 믿고 자기 혼자 신을 만들고 자기 혼자 지키고 자기 혼자 다 해버리는 거예요. 그래놓고 나중에 주님한테 가서 “내가 주님 잘 믿었습니다. 주님 말씀 잘 지켰습니다.” 라고 해 본들 아무 소용 없는 거예요. 쓸데없는 헛된 짓을 한 거지요. 부름을 받았느냐는 얘기죠. 그리고 그분이 부름 받은 자에게 주시는 믿음을 받았느냐는 얘기죠.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성경을 드려다 보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렇게 이런 말씀을 하셨구나! 이렇게 자신을 들어 내셨구나!”라는 것이 보여 지느냐는 얘기죠.

하나님 나라와 땅의 나라는 서로 반대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또 나중에 죽어서도 좋은 곳 천국에 가는 꼭 이 두 개를 가지고 있어요. 이것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늘 항상 이러고 싶은 거예요. 성경은 항상 두 개가 같이 가지 않음을 이야기 합니다. 동행 할 수가 없어요. 동행 할 수 없는 이유는 뻔 하지 않습니까? 뜻이 같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맞지 않잖아요.

하늘에서 내려온 것과 하늘에서 주어지고 하늘에서 부른 사람과 땅에서 소산하고 땅에서 생산하고 땅에서 나온 것과 어떻게 같이 합치고 어떻게 같이 연결을 시킬 수가 있어요? 절대 그런 일은 있을 수 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날마다 주를 믿고 주의 이름을 부르고 다니면서도 결국은 받은 게 없으면 엉뚱한 소리밖에 할 수가 없죠. 그러니 여기 나오는 제사장들처럼 주의 이름을 멸시해 놓고도 “우리가 언제 그랬어?”라고 오리발 내 미는 거예요. 오리발 내미는 입장에서는 절대 오리발 내미는 게 아닙니다. 정당함을 내 놓지요. 그런데 그의 정당함이 주께서는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에게 불행한 것이죠.

우리는 정말 무례하기 짝이 없습니다. 주님이 멸시했다하면 그것은 멸시한 겁니다. 네가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하면 그런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의를 표할 수밖에 없어요. 표하게 되어 버립니다. 그것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에요. 이미 그것을 보았고 하나님이 열어주신 하늘의 비밀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증거 할 수밖에 없고 그것을 전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십자가를 대할 수밖에 없어요.

한 가지만 말씀드리면 1장 8절 끝을 보면 너희들이 병든 제물을 한 번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받겠느냐는 식의 표현이 있어요. 우리는 우리가 믿는 주를 사람보다 더 못한 대접을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게 대접해 놓고는 “우리가 언제 그랬어요?” 자기 열심에 빠져서, 자기 행함에 빠져서, 자기 의에 빠져서 주께서 행하시고 무엇을 이야기 하시는지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십자가로 구원 해 주셨다면 그 구원 받은 것으로 끝이에요.

“구원받았으면 됐지. 천국 가겠네.”하면 그것으로 끝이에요. 그러나 거기까지 끌고 가시는 주님의 행하심, 일하심을 계속해서 바라보는 것이 이 땅에서 우리가 죽는 그 날까지 계속해서 일어나요.  그러한 고난과 어려움과 함께 펼쳐지는 주님의 주신 은혜가 함께 동시에 여러분 마음속에 여러분 삶 속에 담겨져 있어서 계속해서 나갈 것입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갈등하고 고민하지만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이 사망의 골짜기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주를 떠나소서!’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고 그런 고백 속에서도 주께서 나를 이끄시는 것을 안다면 그것이 복 받은 성도인 것이 틀림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언제?” 이러한 오리발을 내미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 분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드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른들 또 그 주께서 그 이름의 뜻을 알려 주신들 우리가 그 내용들을 얼마나 똑바로 바로 알 수 있겠습니까? 그저 그 하시는 이름이 하시는 일들을 통해서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를 끌고 가시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믿음을 통해서 그것을 보게 하실 때 우리는 그저 기뻐하며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크오니 은혜 받은 자로서 주님 뜻 가운데서 주님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 갈 수 있도록 함께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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