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9. 5. 13:15

아직 죄인 때에 (로마서 5장 8절)

본문 : 로마서 5장 8절
제목 : 아직 죄인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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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5장8우리가아직죄인되었을때에100905


롬5장8절-(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오용익 목사)

2010-09-10 10:51:01 조회 : 31        이름 : 김창길

 
롬5장8절-(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100905-우리교회(오용익 목사)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교회에 오면 만날 동영상으로만 설교하는 것 제가 듣고 그러다가 여기 오면 이것저것 확인하는 쏠쏠한 재미가 있습니다. 얼마 주고, 유아실 고쳤다고 하면 거기 가서 그거 확인하고 화장실 청소 잘 안한다고 하면 거기 가서 진짜인가 확인하고……. 확인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무엇을 또 확인하느냐 하면 직접 여기 서면 그림으로 보는 것 하고 제가 직접 서 보는 것 하고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굳건한 반석에 서리라’ 나는 굳건한 반석에 선 것이 아닌가! 왜 다리가 후들거리지……. 그런 것 확인합니다.

복음을 머리로 안다는 것, 그것하고 막상 이 말씀의 세계가 나에게 덮쳐서 이게 복음이라고 하는 것과 그렇게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이것이 사도바울이 복음을 시작하는 어떤 개시점, 출발점입니다. 위아래 쭉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가 경건치 않을 때,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이렇게 합니다.

질문 던지고 싶습니다. 질문하나 할게요. 왜 죄인 되었을 때에 입니까? 좋은 시절 놔두고 왜 죄인 되었을 때 입니까? 사람이 평생 살면 힘들다, 고생한다, 만나면 다 힘들다고 이야기 하지만 자기가 생각하는 좋은 시절이 한두 번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 좋은 시절을 놔두고 왜 죄인 되었을 때에 입니까? 우리 장로님 하고 대화 나누는 중에 어떤 분은 연세가 70여에 복음을 알고 그 뒤로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다고…….

그 앞에 좋은 시절이 많이 있었을 텐데 그 앞에 좋은 시절보다 지금이 훨씬 좋으시데요. 그렇게 지내고 계시데요. 그 앞에 좋은 시절이 많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좋은 시절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런 것을 다 제치고 하필 죄인 되었을 때에 입니까? 제가 확인은 안 해 봤는데 우리교회교인들은 다 들어먹고 오신데요. 인생을 다 들어먹고 오는 교회가 이 교회랍니다. 확인은 제가 안 해봤습니다. 제가 소문만 들었어요. 들어먹었는지 뭘 틀어먹었는지 아무튼 그러고 옵니다. 왜 그러고 오게 만듭니까? 좋은 때 놔두고요.

제가 십자가마을 알고 복음을 알고 머리로는 다 알고 있었는데요. 어떤 정리 안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게 뭔가 하면 복음을 들으니까 너무 명쾌한 겁니다. 앞뒤가 너무 잘 맞아요. 성경을 해석하는 이게 맞아요. 신학교 때도 이게 안 풀려서 고민을 많이 했는데 이것을 들으니까 앞뒤가 척척 다 맞는 게 빈틈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이게 복음이다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전했지요. 사람들이 안 믿는 거예요. 왜 그러냐고 복음전하면 관계 끊어지고……. 남 얘기 아니죠. 여러분들도 아는 얘기죠. 겪는 얘기이고 제가 생각한 것이 그겁니다. 이게 맞는데 논리적으로 하자가 없는데 사람들이 왜 외면하고 왜 안 믿을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정리한 것이 이겁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자기 약속을 성취한 겁니다. 그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 약속은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입니다. 거기는 사람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 약속의 내용 속에는 뱀과 여인의 후손이 나옵니다. 그래서 뱀의 머리를 여인의 후손이 짓부수면 약속이 성취된다는 내용이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이미 그 이전에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모든 세상은 마귀에게 장악당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약속을 이루십니다. 어디서? 십자가에서....... 히브리서 2장 14절에 있습니다. 거기 십자가에서 마귀의 머리통을 짓부셔서 예수님이 자기 약속을 이루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하게 나옵니다. 결국 이 세상이 사람들이 복음을 안 듣고 외면하고 안 먹어주는 것은 사람들이 머리가 나빠서도 아니고 논리적으로 뭐가 부족해서도 아니고 다 아무 이유도 아닙니다. 세상이 마귀 들려서 그렇습니다. 정신과에 가면 히스테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것이 있답니다. 겉으로는 아무 외상이 없어요. 상처가 없어요. 그런데 속 깊은 상처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외부에 어떤 일이 나타나면 이상한 발작 증세를 보이는 것, 그것을 히스테리라고 합니다. 세상이 그렇다는 겁니다. 자기도 뭘 하는지 모르는 겁니다. 왜 그러는 건지도 모르는 겁니다. 그러나 그 뒤에 그런 세력, 마귀죠. 그게 복음의 내용, 예수님이 그 마귀를 때려 부순 그 일 때문에 마귀가 발작을 하는 겁니다. 마귀가 발작을 해요. 마귀가 발작을 하니까 전부 다 온 세상이 발작을 하는 겁니다. 그 발작의 내용은 복음과 정 반대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 복음의 광채가 나오는 구멍을 틀어막겠다는 겁니다. 안 보겠다는 겁니다. 못 보게 한다는 겁니다. 마귀 짓을 한다는 게 무슨 이상한 짓을 한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든 짓이 다 마귀 짓이라는 것, 그것을 제가 그렇게 정리했습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는가? 왜 이 복음을 전하는데 왜 사람들이 안 먹어주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제가 정리한 것은 이것입니다. ‘세상은 발작중이다.’ 어떤 발작? 복음에 대한 발작, 누가 일으킨 발작? 복음이 일으킨 발작, 복음 때문에 일으킨 발작입니다. 그 발작의 내용이 뭐냐? 복음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오늘 말씀이 뭐냐 하면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했다. 끝냈다는 이야기입니다. 완성했다. 그것을 인정 못하겠다는 거예요. 그것을 인정 못하겠어서 그 발작의 내용이란 이겁니다. 결국은 내가 나의 힘으로 내 행함으로 선으로 악을 이겨서 그리고 의를 만들어서 하나님도 꼼짝 못하도록 이 의를 내가 하나님에게 가져가서 당신이 나를 천국에 안 넣어주면 안되고 당신이 나를 이 세상에서 불행하게 해 주면 안 되고 하는 이런 협박 또는 엄포, 이런 것, 특별히 뭐 이상한 짓을 해서 발작이 아니라 세상이 학문, 애 키우는 것, 내 가정 일구는 것, 결혼하는 거…….

노아가 방주 만들 때 세상 사람들이 다 시집가고 장가가고 거기 이상한 내용 나오는 거 아니에요.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고 이런 내용 나와요. 누가 그것을 발작이라고 보겠습니까? 그냥 평상시 살아가는 내용이지요. 그런데 그게 무슨 내용이냐? 언약이 세상으로 내려오니까 그 언약에 대해서 일으키는 발작이라는 의미로 거기 씌어져 있다는 것을 제가 알았습니다.

정리합니다. 세상은 발작중입니다. 자기도 발작하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다 발작하는 겁니다. 그게 과학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다 세상은 발작중입니다. 세상은 지금 발작중, 무엇에 대한 발작? 복음에 대한 발작, 누가 일으킨 발작? 복음이 일으킨 발작, 복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자기 약속을 완전히 이루심으로 말미암아 이 지상에서 이렇게 일어날 수밖에 없도록 일으킨 그런 발작입니다.

첫 번째 정리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 했습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어줄까? 이게 복음이 앞뒤가 다 맞는데 논리적으로 아무 하자가 없는데 이것을 왜 사람들이 왜 안 먹어줄까? 사람들이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마귀가 발작하니까 같이 발작을 일으키면서 ‘아니야, 그건 아니야’ 그건 아니야 라는 의미로 사는 모든 것이 다 발작이라는 겁니다. 그건 아니라는 의미로 자기는 몰라요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몰라요. 그러면서 그냥 살아가는 모든 것이,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고, 소 팔고, 장사하고, 영업하고 사업하는 그 모든 것이 다 발작이라는 겁니다. 첫 번째는 그겁니다.

그러면 두 번째, 정리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이 지상에 자기 얼굴을 들어내는 방식이 무엇이겠냐 하는 겁니다. 제가 처음에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왜 좋은 시절이 아니냐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주는 그 시절이 왜 좋은 시절이 아니에요? 왜 좋은 때가 아니에요? 왜 우리가 10년씩 새벽기도 할 그 좋은 시절에 왜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지 않느냐 제가 그 말 하는 겁니다. 제가 교회에 열심 내면서 누구도 그것이 발작인지도 모르고 누구도 아무도 의심 안했어요. 정말 하나님이 그 좋은 시절에 나를 만나주시는 줄 알고 그게 진짜 하나님이 나와 교감하는 의심치 않는 그런 것으로 알았던 그 시절에 하나님은 나를 안 만나주셨다는 겁니다. 그게 죄인 되었을 때에 예요.

그러면 그런 식으로 복음은 우리에게 얼굴을 드러내지 않아요. 하나님이 자기 사랑을 그런 식으로 이 지상에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거라면 그러면 두 번째 정리, 답변 나옵니다. 뭐냐 하면 복음은 반드시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 하늘나라 실상이 확 터져 나온 자리가 어디냐 하면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그 눈에 보이는 그 예수님이 하늘나라 실체가 아니었고 예수님이 찢어질 때, 히브리서에 나오죠.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다 찢어졌다는 겁니다. 확 찢어져서 예수님이 그 열린 휘장사이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게 예수님의 진짜 실체였다는 거죠. 바로 찢어져서 피가 나온 모습, 예수님 몸 덩어리가 그게 하늘나라가 아니고 예수님이 살아 있으면서 기적을 일으킨 게 그게 하나님의 얼굴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렇다 저렇다 설교하면서 그 내용 다 알아 듣지도 못했죠. 그게 아니고 마지막 최종자리 예수님이 찢어져서 흘린 피, 그것이 하늘나라 실상이었다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이 지상에 품고 있는 하나님의 생각이었다 이 말입니다. 찢어져서 흘린 그 피가…….

진노죠. 심판이죠. 그러면 그 복음을 쫙 열고 하나님이 얼굴을 보여 주실 때 과연 이 지상과 만나는 어떤 접촉점은 무엇이겠냐 하는 겁니다. 이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갖고 왔던 고운 인생, 고운 신앙, 누구도 의심치 않고 하나님은 반드시 이런 일들로 인하여 나를 만나주시고 만나 주실 것이라는 그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겁니다. 그것을 찢는 겁니다. 예수님이 찢어져서 하늘나라 실상을 보여 주신 것처럼 정말 그 예수님을 이 지상과 맞다드리는 그런 순간이다 결국 그 복음이 다가와서…….

이런 것이 발작이다. 그동안 너는 발작해 왔다. 그동안 너는 너 고운 인생을 가꾸면서 하나님이 너에게 축복을 줘서 하나님이 너에게 이런 복을 줘서 네가 너 인생을 곱게 가지고 왔다고 아니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라도 그냥 세상살이 하면서 신이 나에게 축복을 주지 않았으면 신이 나에게 특별한 사랑을 베풀지 않았으면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인생이 풀렸겠느냐는 그런 거 힘들게 살 때도 그건 놓지 않죠. 언젠가는 한번은 대박 터질 듯이 터질 거다. ‘신이 나를 버리지 않았다.’는 그 줄을 놓지 않았던 바로 그게 발작이었다. 라고 하면서 주님이 자신을 찢으신 것처럼 이 세상을, 내 고운 얼굴을, 내 고운 인생을, 내 역사를 내 과거부터 쭉 이어서 지금까지 온 그것,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계속 이어가겠다는 그것을 확 찢으면서 그 찢는 가운데 비로소 ‘그러면 내가 그동안 마귀에게 속아서 마귀의 짓거리를 하면서 주님 앞에 발악했단 말인가!’ 라고 할 때, 그 지점, 그 접속 지점을 사도바울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고운 마음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 예수를 믿는 내 마음이 착한 마음이라고 접속하는 그런 복음은 없습니다. 어제도 차를 타고 쭉 지나가다 보니까 교회가 큰데 교회에 여호와는 당신들을 다 부르십니다. 대문짝만하게 교회 벽에 써놨습니다. 그런 식으로 부르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접속하는 지점이 없습니다. 복음이요, 복음이 세상을 발악하게 했습니다. 세상은 발악중입니다. 발악하는 인간이 무슨 예수를 믿습니까? 발악하는 인간이 무엇으로 접속해요. 그 복음을 열어보면 세상이 발악한다는 내용으로 가득 들어 있습니다. 인간이 좋아할 수없는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복음입니다.

로마서 1장28절을 보면 나와 있어요. 사람들이 자기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했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면 그 싫어하는 마음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 분명한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 복음 안에는 이 세상 인간들이 좋아 할 만한 구석 좋아할 만한 요소가 하나도 없다는 것은 그것도 분명한 현실입니다. “제가 ‘가’하면 ‘예’ 하십시오.” 그렇게 동의 받을 일은 아니지만 성경이 그렇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동의 받고 싶은 사항은 아닙니다.

여기 죄인 되었을 때에 죄인이라고 나오는데 뒤에 바로 보면 이게 무슨 의미의 죄인인지 설명 해 주고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이게 복음 안에 들어 있는 죄의 내용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아담이 교통법규를 어겼는데 범칙금은 우리가 낸다는 그 말입니다. 이게 기분 좋은 이야기입니까? 여러분 이게 선뜻 수용이 됩니까? 여러분 중에 범칙금 내면서 다니시는 분 있습니까? 이게 듣기 좋은 이야기에요? 생각해 보지도 않고 예수 믿으면 하늘나라 데려가 준 다니까 그냥 덥석 챙기는 식으로 따져보지도 않고 한 거죠. 관심사가 애초부터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따져볼 마음도 없고 원래부터 그런 것은 휙휙 지나가는 것이고 원래 딴 노림수에요 내 인생 바꾸는 것 외에는 없는 겁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 놓고 율법아래에 이것이 뭔가 하면 율법을 수갑으로 절대 그 죄인 된 자리, 사망처리 된 자리에서 아무도 못 나오게 했다는 뜻입니다. 레위기 수련회 갔다 오신 분은 생각 나실 겁니다. ‘출생이 곧 처벌이다.’ 그 뜻 아닙니까? 목사님이 앞에서 그 이야기를 하니까 ‘출생이 곧 처벌이다.’ 라고 하니까 다들 웃으시는 거예요. 저도 남들 따라 같이 웃었어요. 집에 와서 조깅하면서 생각해 보니까 굉장히 심각한 이야기예요. ‘출생이 처벌이다.’ 한 살 때도 처벌, 두 살 때도 처벌, 세 살, 네 살, 아무리 살아도 처벌, 처벌, 처벌……. 달라지지 않는 처벌, 달라지지 않는 사망처리, 달라지지 않는 죄인처리…….

복음이 진짜 자기 얼굴을 내밀고 들어오면 발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외면할 수밖에 없어요. 이사야 53장에 있습니다. ‘싫어버린바 되었다.’ 이게 싫은 거죠. 로마서 7장에 보면 그 율법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나와 있습니다. 그 율법의 기능이 이런 겁니다. 내가 주차를 이렇게 했잖아요. 주차를 했는데 갑자기 주차 선을 틀리게 그려놓고 ‘네가 죄인’이라는 거예요. 그게 율법의 의미입니다. 그러면 내가 이제 똑바로 주차를 할 것 아닙니까? 주차를 똑바로 해 놓고 보면 주차 선을 다르게 또 그려 놨어요. 이게 무슨 말이죠? 무조건 죄인 되도록 만들어 놨어요. 이 주차 선은 내가 주차하고 있는 이 땅바닥에 그려져 있는 주차선이 아니라 위에 떠있는 주차선이에요. 나는 잘 맞췄다고 맞췄는데 이 율법이 위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나는 아무리 잘 맞춰도 다시 보면 틀린 거예요. 옆으로 움직여서 맞추면 또 틀리고 움직여요. 왜 움직일까요? 성경에 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기 위함이라 율법아래 가두기 위함이라, 한 사람도 ‘네가 주차 잘해서, 네가 똑바로 주차해서, 네가 그 의를 얻어서 하늘나라 오는 길을 완전히 차단하겠다.’

출생은 곧 처벌이라는 이 움직이지 않는 현실을 계속 끌고 가겠다는 하나님의 확실한 작전이고 의지라는 겁니다. 이게 기분 좋은 이야기입니까? 로마서 7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탄식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탄식할 수밖에 없어요. 한번이라도 정말 진지하게 내가 예수 잘 믿어서 말씀 잘 지켜서 내가 주님의 의를 이루어 봐야지 대표적인 사람이 복음전하는 바울입니다. 자기는 의에 흠이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갈등이 왜 없는지 모르겠어요. 갈등이 어떻게 없는지 모르겠어요. 여기서는 율법을 이렇게 설명하죠. 자기는 선을 행하려 하는데 자기도 의식하지 못했던 그 밑바닥의 악이 올라와서 선을 잡아먹는다는 거예요 그것을 악이 홀딱 잡아먹고 입맛 다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 미처 몰랐던 악입니다. 이런 겁니다. ‘내가 이제 간음하지 말아야지. 내가 바람 같은 것 피우면 안 돼’ 하는 그 순간부터 온 동네 아낙네들이 다 예뻐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내가 예상치도 못했던 그런 악들이 막 튀어나와서 ‘뭐 네가 간음을 안 해?’ ‘네가 주차를 똑바로 해?’

제가 사는 마을에 어떤 목사님이 목회하다가 간음하다가 그것을 동네방네 들켰어요. 그래서 소문나서 다른 동네로 이사 갔다는 이야기를 제가 들었습니다. 제가 그 목사보고 ‘참 불쌍한 인간이다.’ 했습니다. 왜 불쌍할 까요? 간음해서 불쌍할 까요? 간음하다 걸려서 불쌍할 까요? 안 걸리면 그거 재미가 쏠쏠할 건데…….(ㅎㅎ) 모든지 금지가 되어 있는 것을 몰래하는 그 즐거움, 잠언에 있는 것처럼 몰래 먹는 떡이 맛있다고 그것을 누리는 그 즐거움, 이목사님이 텔레비전을 몰래보는 즐거움이 쏠쏠한지 안본다고 하면서 만날 이야기하죠. 보고 싶은데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아예 없습니다.

그 목사가 불쌍한 이유는 간음하다 걸려서도 아니고 간음했다는 것도 아니고 그 목사는 하나님의 뜻이 담긴 복음을 몰랐다는 것이 불쌍한 겁니다. 그 목사는 하나님이 간음 안하는 그런 동네에서 칭찬해 주고 바르게 똑바로 살아가주고 목회 잘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예쁘게 보고 사랑스럽게 여기고 그것을 가지고 자기를 도와주는 식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는 그것, 그것이 불쌍한 거예요. 그런 악마를, 그런 마귀를 자기 하나님으로 철석 같이 믿고 있었다는 그 현실이 불쌍한 거예요.

저는 그 사람이 간음하다 들켰던 그 사건이 그 사람에게 너무나 좋은 기회라는 것을 정말 말해 주고 싶었는데 제가 말해 주기 전에 먼저 이사가 버렸어요. 뚜껑이 열렸을 때, 다시 말해서 내가 원했던 나의 좋은 모습이 정말 찢어졌을 때, 예상 밖에 찢어졌을 때 바로 그 자리, 그 죄인 되었을 때에 그때 복음과 접속 될 수 있는 뭐 인생 날아간다고 해서 하나님이 구원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기회가 좋잖아요. 이사 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제가 사는 동네에 살다가 남부끄러워서 다른 동네로 이사 가면 뭐가 달라지는 데요? 출생이 처벌이라는 하나님의 공식이 달라집니까? 복음이 완성되어서 이 지상에 터트리는 현실이 달라집니까? 본인은 또 재개를 노리겠죠. ‘또 이룰 거예요 보나마나 내가 한번 실수했으니까 다음엔 다시는 실수하지 말아야지 다시 한 번 하나님이 나에게 기회를 주실 거야!’라는 식으로 또 재개를 노릴 겁니다.

발악이죠. 발악입니다.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 생각도 안 해요.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었겠지. 그것 믿으면 구원된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었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나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집에 웬 택배가 도착한 겁니다. 열어보니까 시체가 들어 있는 거예요. 시체에 이렇게 쓰여 있는 겁니다. ‘너 대신 죽은 분, 여기 있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뒤집어 생각해 보면 뭐가 되는 겁니까? 아, 어떤 인간이 ‘나 대신 당신 죽어주세요.’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낮에 그 택배가 우리 집에 배달되면 집안 식구들 들어오기 전에 빨리 택배 잘 못 배달 됐다고 반송 처리 할 겁니다. 사람들이 대신은 좋아해요. 그러나 대신 죽으심은 싫어합니다. 보기 싫어해요. 대신을 좋아하는 것은 이겁니다. 대신 뒤에 다른 내용을 집어넣는 것을 좋아해요. 대신 우리아이 성적 올려주는 거, 대신 큰 집으로 이사 가는 것, 대신 뭐뭐 해 주는 것, 대신 뭐뭐 원하는 것…….

전부 무슨 내용이냐 하면 나를 기쁘게 하는 대신은 좋아하죠. 그러나 대신 죽으심은 싫어합니다.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뭐냐 하면 마지막에 여기입니다. 확증했다는 것, 그것으로 끝냈다는 것, 그것 말고 없다는 것, 실컷 가두고 웬 택배가 도착해서 보니까 전혀 우리가 원하는 것도 아니고 전부 불쾌하고 싫고 정말 발작을 일으킬 것들만 다 해 놓고 그리고는 마지막에 닫아버리는 확정했다라고 하는 이것이 사람을 제일 발작하게 만드는 겁니다.

교회가면 목사님이 설교 하시죠. 앞에 십자가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 예수 피 믿으면 여러분 다 구원받습니다. 여러분 믿으시죠? 아멘. 그 뒤에 계속 이 십자가 복음을, 복음이 말이죠. 이렇게 해서 세상 현실이 이런 거거든요. 아멘. 다 받아들입니다. 듣고 싶은 이야기를 안 해 주는 거예요. 듣고 싶은 이야기가 뭘까요? 교회가면 해 주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앞에 십자가 이야기하고 뒤에 법이요. ‘뭐하면 뭐된다.’ ‘헌금내면 복 받는다.’ ‘십일조 잘하면 복 받는다.’ 이 패턴, 앞에 십자가 이야기하고 뒤에 법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법 잘 지켜서 복 받았다는 그 이야기하고 ‘여러분에게 축복이 한량없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끝내는 설교 패턴 말고 다른 설교 들은 분이 있으면 신고 해 주시기 바랍니다. (ㅎㅎ) 저는 아직 까지 못 들어 봤습니다.

제가 전에 있던 교회에도 들어 가보고 또 여기 저기 설교한 사람들 또 들어 보면 그 패턴에서 하나 달라지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첫날은 봐주죠. 뭐하면 뭐된다는 그 법을 기다리는 데, 법을 안주는 거예요 둘째 주에 또 기대하는 거예요. 지금 다 제 이야기입니다. 제가 무안 시골 교회에 있을 때 있었던 얘기입니다. 목사님이 처음 오셔서 지금 우리보고 다시 한 번 정비하는 식으로 복음에 대해서 확실하게 다지고 왕창 복을 쏟아 주실 모양이다. 다음 주에 또 기다립니다. 법을 안주죠. 왜 안 줄 까요? 제가 나쁜 사람이라서 법을 안줄 까요? 그 사람들이 복 받고 살기 싫어서 법을 안줄 까요?

그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하면서 사는지 제가 다 아는 데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태양 볕에서 시달리면서 풀 뽑고 돈도 별로 못 벌어요. 농사도 기술적으로 머리 좋은 분들이 해야 돈을 벌지 그냥 불쌍하죠. 인간적으로야 복을 팍팍 빌어주고 싶어요. 시골 할머니들 오면 배만 아프면 안수 해 달라고 저한테 와요 해 줬어요. 사모님한테는 고추장 달라하고 저한테는 안수 해 달라하고 고추장 얻으면 자기가 낳는데요. 목사 고추장 먹으면 잘 낫나보죠.(ㅎㅎ) 우리 집사람은 고추장 퍼주고 저는 안수해 줬어요. 낫게 해 줬으면 좋겠는데 이것은 복이 아니고 우리 할머니가 진짜 복을 잘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해서 기도 해 주는 거죠. 왜 제가 안했을까요? 법을 왜 안줬을까요? 없으니까 줄 수가 없죠. 복음 안에 법이 없는데요. 하나님 이루신 약속 안에 그런 내용이 없는데요 ‘뭐하면 뭐된다.’ 하는 그런 것이 없는데요. 사람이 무엇을 해서 뭘 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보고 복을 주던 말든 하는 그런 결정하는 이야기가 없는 데요 확증한 것을 나보고 어떡하라고요 하나님이 확증하신 사항을 나보고 어찌하라 고요 ‘하나님 잠깐만 이 사람들은 미확정이니까 보류해 주세요. 이 사람들 복 빌어주는 동안 잠깐만 보류해 주세요.’ 그렇게 해야 되는 겁니까? 없는 것을 ....... 발작이죠.

그 순박한 시골사람들이 그렇게 발작을 일으킬 줄 제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예배 시간에 툭 일어나서 ‘목사님 때문에 기도를 못하겠습니다.’ ‘제가 언제 기도를 방해를 했습니까?’ ‘목사님이 기도만 하면 다 틀렸다고 조목조목 지적해서 다 찢어발기잖아요.’ 찢어버려야 그게 발작인지 알 것 아닙니까? 찢어 발려야 속살이 나오고 그게 마귀에 속아서 마귀짓거리인 것을 알고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므로 ……. 그 모습으로 접속 돼야 주 예수님도 알고 하나님 사랑이 확증된 것도 알고 죄인 되었을 때에 라는 그 노선으로만 접속되어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접속 시켜 주려하는 데 싫다면 어쩔 수 없는 거죠. 그것을 제가 어떻게 깨겠어요. 그 단단한 주님이 율법 안에 가두고 라는 것을 그냥 이렇다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런데 목사가 말씀전하다 보면 답답해요. 제가 오죽하면 심하게 이렇게 했어요. 시골어른들이 진짜 모욕스러웠을 겁니다. 뭔가 하면 당신들이 그렇게 법가지고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는 복가지고 어떻게 이렇게 밖에 복을 못 받았냐고 때려치우라고 심하게 이야기 했어요. 아직도 안 때려 쳤어요. 아직도 그러고 있어요. 그 사람들이 때려 친 것이 아니라 제가 그 교회를 때려치웠어요. (ㅎㅎ) 그런 것 상관없어요. 뭐 교회 있으나 나오나 상관없어요. 약간 마음은 섭섭해요. 그러나 진짜 마음 아픈 것은 이것이 복음인데, 복음인데 하는 것은 있어요. 자기 의가 왜 안 들어가겠어요. 내가 이렇게 전했는데 안 알아준다는 그 의, 그 마음이 또 어디로 가겠어요.

결론 들어갑니다. 첫 번째 세상은 발작중입니다. 두 번째, 그래서 주님이 자기 얼굴이 이 세상에 들어 낼 때는 바로 주님을 찢는 것처럼 이 세상을 찢는 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자기 얼굴을 내민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끝났습니다. 복음의 내용이 이러함을 이 지상에서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복음을 좋아한다고요? 거짓말입니다. 예수님과 나하고 코드가 맞는 다고요?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노래가 나왔습니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입니다.(ㅎㅎ) 그 거짓말 중에 거짓말이 개혁주의 신학입니다. 개혁주의 신학하시는 분들이 발작 중에 발작인데요. 오늘 본문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죄인 되었을 때에 이렇게 나오니까 처음 예수 믿을 때는 그랬고, 처리, 처리 하는 겁니다. 지금은 아닌데 처음 화목 될 때, 제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지금 여기 때가 나오는 데요 여기 나오는 때가 점심때입니까? 저녁때입니까? 여러분 언제죠? 이게 어렵다니까요? 1982년도에 예수 믿었으면 그때인가요? 이게 어렵다니까요. 그런데 개혁주의자들은 본문을 가지고 그렇게 해석해요. 그런 때라고 그리고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은 어떤 때냐? 성경본문 뒤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그렇게 해 놓고 그 뒤에는 더욱 그 주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더욱 화목할지라. 더욱 구원을 얻을지라. 그러니까 딱 어떻게 들리느냐 하면 처음 구원받을 때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구원받는 것 맞고 그 뒤에는 하나님 말씀 따박따박 지키면서 그렇게 하나님 마음에 들 때 하나님이 그때 화목 하신다는 그런 식의 신학, 그런 식의 주장, 그게 발작입니다. 복음에 대한 발작…….

주님이 다 이루신 그 내용 속에 주님의 행위밖에 들어 있지 않는다는 그 발작, 예수님의 죽으심이 뭐예요? 예수님이 혼자 죽어서 다 끝냈다는 죄인 되었을 때가 뭐예요? 너희들의 행위는 여기 하나도 안 들어 왔다는 뜻이에요. 일체 섞이지 않고 그리고 주님은 죽어버리고 하나님은 자기 약속 다 이뤄버리고 끝냈잖아요. 그건 인정 못하겠다는 이 발작, 개혁주의 신학 발작입니다. 아무도 어느 누구도 이 지상에서 사람들에게서 난 것 가지고 복음에 접속 못합니다.

그래서 본문에 있는 사도 바울이 부러운 거예요. 복음이 우리의 본성상 완벽하게 싫은 내용, 외면하고 싶은 내용, 발작할 수밖에 없도록 하게 되어 있는 내용, 무관심 하는 발작, 별의 별 발작 다 있잖아요. ‘교회 좀 나오세요.’ ‘담배 끊고 나가겠습니다.’ 이것 발작이죠. 자기 딴에는 자연스런 핑계 같죠. ‘교회 좀 나오세요.’ ‘술 끊고 오겠습니다.’ ‘술 끊고’ 발작이죠. 마귀가 일으키는 발작입니다. ‘바빠서 못나옵니다.’ 전부 발작입니다. 못나오면 그냥 못 나오지 왜 ‘바빠서’ 못 나옵니까? 꼭 바쁘데요.

제가 옛날 교회에 있을 때, 서울에서 조폭 하다가 시골에 온 사람이 자기를 예수 믿게 해 달라는 거예요. 우리 집에 와서 저 같이 연약한 사람을 앉혀놓고 떡대가 큰 사람이 와서 크리스마스 전이었는데 ‘내가 크리스마스트리도 해 주고 돈도 좀 기부 하겠다.’ 헌금이라는 말을 모르니까 기부한다고……. 갑자기 마음도 쫀득쫀득해 지고 내가 말하는 발언에 따라서 봉변도 당할 수 있고……. 자기를 예수 믿게 해 달래요. 딱 앉아서 ‘믿게 해 주쇼’ 그래서 제가 험한 말 안하고 곱게 타일러서 보냈어요. 믿게 해 달라고 해서 믿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고요 발작이죠. 믿게 해 달라 당신이 당신행위로 그 복음에 접속시켜 달라 그 말이잖아요. 그때는 발작인지 몰랐는데 요즘 보니까 그게 다 발작이었어요. 나도 발작 너도 발작 다 발작이에요.

사도 바울이 부러워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발작하고 발악하는 그러는 게 아니에요. 여기 앞에 즐거움, 즐거워, 신나 죽겠어. 제가 이런 상상을 했어요. 사도 바울이 지금 복음을 전하는 입장이 어떤 입장이냐 하면 왜 발작하는 세상하면 여름에 더워서 부채질 하고 있는 모습이에요. 막 주여, 더워죽겠다고 발작 일으키고 있는데 시원한 폭포 밑에 들어가면 물이 위에서 막 쏟아지잖아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지어낸 이야기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부음바 됨이니 뭐, 그런 느낌, 막 위에서 쏟아지니까 거기 가면 말은 잘 안 나오잖아요. 너무 시원해서 ‘으으허’ 얼어서 시원한 거예요. 시원하다는 그런 느낌, 너무 시원해서 즐겁다는 그런 느낌가지고 싫은 게 아니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주님께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자기 혼자 춤추고 신나고 막 난리 났어요. 사도 바울이 자기 혼자 잔치해요. 그러니까 우리는 묻고 싶죠. ‘당신은 뭐 통뼈요. 우리는 발악이나 하는 데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복음이 즐겁소?’ 사도 바울이 답합니다. ‘나는 서 있는 자리가 다르거든’ 5장 2절에 보니까 롬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 사도 바울은 자기가 서있는 자리가 달라요.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즐겁습니까? 남들이 싫어하는 발작하는 복음을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즐거워합니까?’ ‘나는 서있는 자리가 다르거든’ ‘그럼 당신은 그 자리에 어떻게 들어갔습니까? 헌금 많이 하셨나요?’ ‘아니요’ ‘기도 많이 하셨나요?’ ‘아니요’ ‘원래 성품이 좋으신 분이군요?’ ‘아니’ ‘에이, 신학을 제대로 했군요?’ ‘아니요’ 전부 아니에요. 그럼 뭡니까? 그냥 약속이 그 복음이 그 예수님 죽음의 실력이, 죽음의 능력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 예수님이 그 죽음의 능력을 가지고 그 모든 약속의 실력, 죽었다가 부활한 그 실력이 품은 그 성령이 약속을 품고 그대로 들이 덮쳐서 눈뜨고 보니까 자기가 그 자리에 서 있더라는 겁니다.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헌금해서, 십일조해서, 교회 열심히 봉사해서, 신학해서, 목사해서, 20년, 30년 신앙생활해서 만들어 내는 자리가 아니고 약속이 덮쳐서 보니까 생겨난 자리입니다.

약속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자리입니다. ‘어떻게 그런 자리가 있어요?’ ‘있어요.’ ‘그러면 내부 구경좀 시켜 줄랍니까?’ ‘시켜 줄까? 여기 있으면 말이야 양쪽이 다보여’ ‘뭐가 보이는데?’ ‘주님의 보좌가 보여’ ‘주님 어떻게 하고 계시는 데요?’ ‘그 보좌에서 쉴 새 없이 생명의 양식이 떨어지고 생명수가 흘러’ ‘ 그게 뭔데요?’ ‘영생, 확증 하셨느니라.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 마음에 성령을 부음바 됨이니 폭포처럼 계속 또 붓고 또 붓고 또 붓는 그게 보여요’ ‘또 뭐가 보이는데요?’ ‘지옥도 보여 마귀가 이 복음에 대해서 발악하는 현실이 보여 이 세상 현실이 다보여’ 그래서 그 자리에 서서 사도 바울은 아주 즐겁게 기쁘게 자기 죄인 됨도 알고 주님이 그 죄를 용서 하시는 그 용서의 사랑도 알고 그래서 그 자리에서서 아주 기쁘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그렇게 고백하고 있답니다.

사람들이 궁금하죠. 여기가 하나님의 사랑이 쏟아지는 자리라고 하니까 궁금한 것이 그런 거예요. 자꾸 사람들은 당신이 뭘 해서 그 자리에 서게 됐냐는 거예요. 바울은 말합니다. 죄인의 자리라는 겁니다. ‘죄인의 자리에 무슨 사랑이 쏟아집니까? 무슨 그런 게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이게 약속이거든 하나님이 그렇게 정했거든’ ‘무슨 그런 게 있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들어가 보니까’ ‘아, 당신이 어떻게 그런 복을 받냐고요? 그런 사랑을 받느냐고요? 무슨 사랑받을 짓을 했겠지’ ‘아니 그게 아니고 여기가 내 자리야’ 들어와 보니까 거기가 자기 자리 인거예요. 무슨 자리? 죄인의 자리……. 주님은 어디에 계시고? 보좌에 계셔서 사랑을 주는 자리…….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 자리,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 자리가 확증해서 덮치니까 사도 바울이 서있는 자리는 죄인의 자리가 되고 그리고 그 자리에서 보니 한량없이 사랑이 그냥 막 쏟아지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쏟아진 복음이 뭐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에요. 따박따박 논리적으로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나오는 거예요. 인형이 이런 것이 있어요. 꾹 누르면 ‘엄마 사랑해’ 하는 인형이 있어요. 하나님이 성도를 그렇게 다루는 겁니다. 어떻게? 이미 다 줘 놓고 무엇을 줘놓고? 약속을 줘 놓고 우리는 몰라요. 어디를 눌러야 ‘엄마 사랑해’가 튀어나오는지 우리는 그 지점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누르고 싶은 지점은 이겁니다. ‘주님 제가 이렇게 했으니까 이렇게 해 주시겠죠.’ 라는 그게 우리가 누르고 싶은 지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 누르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겠지’ 아니요. 주님이 정확하게 지점을 찾아서 누릅니다. 거기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딱 누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주님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게 그냥 튀어나오는 인형, 그게 성도입니다. 이것을 목사가 뭘 가르쳐서 됩니까? 인간이 이 자리를 어떻게 만듭니까? 이 자리를 어떻게 들어 겁니까? 하나님이 그냥 덮쳐서 그냥 제가 죄인의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사랑이 막 쏟아집니다.

도대체 주님이 왜 그렇게 하신거래요? 마지막 이 이야기만하고 마치겠습니다. 수련회가면 저녁때 다 모여서 이야기를 많이 해요. 수련회이야기도 하고 이목사님은 레위기가 10강이면 거기서 11강, 12강 하시고 그렇게 하시는데요. 어떤 장로님이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오후에 설교 레위기 할 건데, 그 레위기 중심을 흐르는 제일 중요한 관통하는 지점이 뭐냐면 주의 이름을 높인다는 것에 관심이 쏠려있다는 겁니다. 그 장로님이 질문 하셨죠. ‘하나님이 왜 그렇게 주의 이름만 높이는 거래요?’ 여러분 그런 질문 잘 받아보시지도 않고 잘 해 보시지도 않죠. 그때 이목사님이 모른다고 답 하셨어요. ‘그건 모르죠.’ 그래서 저는 깜짝 놀랐어요. ‘아니 이목사님이 답변 못하는 것도 있네.’ 하면서 제가 속으로 박수치면서 그러고 있었는데(ㅎㅎ) ‘아, 이목사님이 모르는 게 있다’ 그래서 제가 ‘그러면 하늘나라 가면 알 수 있습니까?’ 그랬더니 ‘하늘나라 가면 그런 질문이 필요 없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이 왜 예수님의 영광만 높입니까? 그 질문한 그 장로님이 억하심정 가지고 그랬다는 것은 아니고요 하나님이 왜 예수님의 영광만 높입니까? 하는 그 속에는 이런 게 반드시 깔려있도록 되어 있는 거예요. ‘왜 우리 영광은 안돌려줍니까?’ 이런 것이 깔려있는 거죠. 그래서 답변이 뭐냐 ‘예수님의 이름만 돌리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 영광은 안 돌리고 예수님의 이름만 높이고 그분께만 영광 돌립니까?’ 라는 우리가 그렇게 질문하도록 만드는 그 하나님은 가짜고 비로소 사도 바울처럼 성령이 덮쳐서 아예 자리 만들어서 죄인의 자리 만들어서 가지고 와요 왜? 그 자리에 있어야 주님의 죽으심의 축복, 영생, 구원, 주님이 마련하신 모든 하늘나라의 것, 이 지상의 모든 발악을 이기는 능력, 아무도 접속할 수 없는 그 마귀의 발악을 꺾어놓은 주님이 가신 그 힘으로 덮쳐서 용서, 법 없이도 사는 그게 자리라니까요. 뭘 안 해도 된다가 아니라 없다니까요 원래 자리가 그런 자리라니까요 그러니까 진짜 성도는 그 자리가 신나는 거예요. 자기를 그 자리에 놓아두고 복을 준다는 현실이 그것이 신나는 거예요. 왜, 그래야 절대 주님이 주시기전에 그 사랑이 딴 데로 새어나가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설치면 다 줄줄 흘리는 거예요. 하늘나라 못가요.

어떤 예화가 생각나네요. 비행기 밀고가면 하늘나라 못갑니다. 타고 가야지 사도 바울이 정신 차리니까 이미 깨어보니까 언약 안에 약속의 비행기 안에 타고 있답니다. 타고 보니까 이미 자기 자리가 정해 져 있어요. 그 자리가 죄인의 자리이었답니다. 그 자리에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준비 되고 전부 다 나온답니다. 그래서 이목사님이 걸아가지 않고 독일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셨다는 거 아닙니까?

정리하겠습니다. 이 모든 이유는 다 숨어 계신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만 높이고자 하는 하나님의 작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식으로 이 고백을 하는 겁니다.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주님 나의 때는 이제 없습니다. 주님, 나의 인생은 이제 없습니다. 왜, 죄인의 자리에요. 죄인의 자리 자체가 그래요. 주의 죽으심으로 주님, 제 인생은 이미 주님의 죽음 속으로 다 빨려 들어가서 제가 저를 관리할 수 있는 능력도 없거니와 할 수도 없거니와 제가 저를 책임지거나 관리하거나 하는 무엇도 없습니다. 저의 소유권이 등기이전이 주님 죽으실 때 넘어갔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래서 저는 무조건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고 그래서 주의 이름을 높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고 주님이 인형 누르듯이 여기 누르고, 저기 누르고......., 성도는 주님이 하도 여기 저기 꾹꾹 눌러서 인형이 다 망가졌어요. 그 말이 인생을 덜어먹어도 된다고 해도 되는 거예요. 여기 쑤시고 저기 쑤시고 왜, 그 소리가 나와야 되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인형은 다 달아지거나 말거나 상관없어요. 왜? 약속 안에 인형 다 달아지면 다시 살려준다는 것도 약속 안에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약속이 덮쳐서 생겨난 자리입니다. 죄인의 자리, 성도의 자리입니다. 타보니까 약속이라는 비행기에요. 그리고 약속대로 이미 지금까지 다 인도하셨고 하늘나라 갈 때까지 인도하실 겁니다. 남은 것은 주님이 부르실 때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주님의 죽으심으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이렇게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주의 죽으심을 증거하는 일만 우리에게 남았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생 내 뜻대로 안될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하는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싫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그것이 마귀의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우리가 죄인의 자리에 있어야 복 받는 것도 알려주시고 그래서 그 죄인의 자리에서 떠나지 말라. 그래서 그 자리에서 복 받고 주님이 자기 죽음으로 이루신 자기 피로 이루신 그 사랑 받고 하늘나라 가라고 여기까지 인도하시는 것을 또 알았습니다. 하나님 남은 인생 이 약속 타고 가면서 주님이 우리를 건드릴 때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주님 자기 사랑을 다 확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면서 주의 이름만 높이는 그런 성도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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