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8.29 11:12

충성 싸움 (사무엘하 19장 40-43절)

본문 : 사무엘하 19장40-43절
제목 : 충성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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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강-삼하19장40-43(충성싸움)-2sa100829

충성 싸움

2010년 8월 29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19:40-43

(삼하 19:40, 개역) 『왕이 길갈로 건너오고 김함도 함께 건너오니 온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나 왕을 호행하니라』
(삼하 19:41, 개역) 『온 이스라엘 사람이 왕께 나아와서 고하되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이 어찌 왕을 도적하여 왕과 왕의 권속과 왕을 좇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네었나이까 하매』
(삼하 19:42, 개역) 『유다 모든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대답하되 왕은 우리의 지친인 까닭이라 너희가 어찌 이 일에 대하여 분내느냐 우리가 왕의 물건을 조금이라도 먹었느냐 왕께서 우리에게 선물 주신 것이 있느냐』
(삼하 19:43, 개역) 『이스라엘 사람이 유다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는 왕에 대하여 십분을 가졌으니 다윗에게 대하여 너희보다 더욱 관계가 있거늘 너희가 어찌 우리를 멸시하여 우리 왕을 모셔 오는 일에 먼저 우리와 의논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


사람은 눈에 보이는 사건들에 민감합니다. 어떻게든 판정을 내리고 싶고 옳고 그름을 해결지우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판정내린 그 판정에 만족하려 합니다. 신앙이란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한 신앙이라고 여겨서 이 세상에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독수공방하는 식으로 살고 싶어도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쉴새없이 판정과 평가를 내리게 만듭니다.

결국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접근되는 양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19:1-4에 보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에게는 조금도 ‘들리지 않는 소리’로서 세상은 상호 통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포착해야 합니다. 이 원리에 흡수되어야 합니다. 이 원리에 진입해야 합니다. 이것은 곧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온통 눈에 보이는 것으로 둘러싸여서 어떻게든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해야함을 요구받게 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러한 예입니다. 권력을 다시 찾게 된 다윗왕이 본래의 제자리를 찾아 환궁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좌하는데 주도적으로 나선 쪽이 바로 다윗왕과 같은 족보라 할 수 있는 유다지파와 그리고 연관된 베냐민 지파입니다. 12지파 중에서 두 지파가 따로 독자적인 행보를 보인 것입니다. 이로서 상대적으로 배제되었다고 여긴 무리가 나타났으니 바로 유다의 두 지파 외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윗을 왕으로 다시 옹립하는데 있어 유다 지파가 단독으로 실행한 것에 대해서 도적질 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즉 다윗왕은 모든 사람의 왕이지 결코 가까운 혈족들만의 왕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들은 나라의 두 조각으로 균열될 여지가 보임에 대해서 위기감을 갖게 되었고 그 원인제공은 다윗왕의 가까운 혈족들이 일을 주도적으로 저질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예전처럼 다시 다윗왕을 자신의 왕으로 견지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혈족보다 더 합리적 이유가 바로 숫적으로 2:10의 차이남입니다.

숫적으로 자신네들이 열지파나 되니 유다지파와 함께 하는 베냐민 지파는 자연적으로 이 10지파에게 주도권을 양도하는 것이 옳다는 겁니다. 이러한 사건은 우리 인생사에서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같이 어떤 식으로도 판정과 판단을 요구받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네 생활입니다.

이렇게 되니 우리들은 이런 와중에서도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 있다는 티를 내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세계’와 연줄을 닿아있음을 고백하는 겁니다. 즉 인간이 할 수 있는 일과 인간이 할 수 밖에 없는 일을 늘 생각하면서 구분지어면서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며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은 무엇입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눈에 띄는 모든 일들입니다. 소위 신앙생활이라는 이름붙이면서 벌리는 차별화된 모든 것, 전부가 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겁니다. 반면에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일까요?

시편 78:67-68에 보면,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과연 이 선택에 대해서 인간이 할 수 있을까요? 도저히 못합니다. 한다는 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정말 닿아야 될 ‘들리지 않는 소리’와 ‘보이지 않는 일’이란 바로 이 선택의 소리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름대로 이스라엘을 규정하면서 결코 두 조각 나서는 안될 나라라는 겁니다. 그 근거는 출애굽 할 때부터 충분합니다. 출애굽 당시에 12지파는 공동의 혜택을 입고 애굽에서 벗어났습니다. 따라서 그 어느 지파가 그 어느 지파 위에 오를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왕이시고, 그 왕적인 행사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계속 구원받는 상태 안에 놓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지파 위에 특별한 지파를 얹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왕되심의 효과를 가리는 경우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가 자기네들의 왕으로 다윗왕을 고집한다면 이는 그것을 저지하는 자신들의 10지파의 말이 원칙에 입각해서 옳다고 장담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이 모든 것이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겁니다. 즉 인간이 어떤 주어진 사건 속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가름하는 식으로 사태를 정리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인간들의 판정이 시편 78편에 나오는 말씀, 즉 ‘10지파는 싫어버린 바 되고 2지파는 내가 택했다’는 하나님의 숨겨진 약속과는 완전히 위배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즉 인간은 아무리 자기 딴에 바른 판정을 내린다 할지라도 자신의 구원에 전혀 보탬이나 도움이 되지 않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쫓아가는 신앙’이 아니라 ‘이끌리는 신앙’의 본질을 보여주는 바가 됩니다. ‘쫓아가는 신앙’은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들을 연결시켜 하늘에 까지 닿게 다는 겁니다.

반면에 ‘이끌림의 신앙’은 항상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들이 부정당하고 거부당하는 식으로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선택의 선’에 닿아있음을 드러내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 곧바로 ‘선택의 선’에 닿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인간이 ‘처리해야만 하는 눈에 보이는 일과 사건’들에 무주치게 되어 있습니다.

한 예를 들면, 사사기 8:22-23에 보면,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그 누구 하나 남 앞에서 나서서 지휘할 자격자가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인간도 인간이 인간의 구원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개인에게만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들이 어쩔 수 한 모든 일들이 신앙에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숨어있는 진실이 드러나는 계기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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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십자가마을 2010.09.25 12:4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044강-삼하19장40-43(충성 싸움)-2sa100829

    2010-09-25 07:28:21 녹취 : 이한례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하 19장 40절에서 43절까지입니다. 제가 읽습니다. 구약성경 497페이지입니다.

    사무엘하 19:40-43

    “왕이 길갈로 건너오고 김함도 함께 건너오니 온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나 왕을 호행하니라
    온 이스라엘 사람이 왕께 나아와서 고하되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이 어찌 왕을 도적하여 왕과 왕의 권속과 왕을 좇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네었나이까 하매
    유다 모든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대답하되 왕은 우리의 지친인 까닭이라 너희가 어찌 이 일에 대하여 분내느냐 우리가 왕의 물건을 조금이라도 먹었느냐 왕께서 우리에게 선물 주신 것이 있느냐
    이스라엘 사람이 유다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는 왕에 대하여 십분을 가졌으니 다윗에게 대하여 너희보다 더욱 관계가 있거늘 너희가 어찌 우리를 멸시하여 우리 왕을 모셔오는 일에 먼저 우리와 의논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 아멘


    성경을 대할 때나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인간적인 입장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뭐냐 하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된다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주목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주목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실제로 하나님의 일이 일어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자꾸 우리 앞에 들이대고 나타나는 거예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것을 들이대면서 뭐라고 하느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에 신경 쓰지 마래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아예 들이대지 않고, 보이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신경 쓰라면, 우리는 그냥 상상하면 돼요. 오~ 하나님, 오~ 아름다운 온 세상, 이렇게 하면 참 쉬운데,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이 뻔히 눈에 보이는데, 눈에 뻔히 보이는 것을 보이면서 하시는 말씀이, “니 앞에 눈에 뭐 보이지? ”네, 보입니다.”신경 쓰지 마래이, 그거 의미 없다.” 이렇게 하니까, 우리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것을 제치고, 그 뒤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다가갈 수 있는 새로운 영안이 새로운 시각의 눈이 우리에게 발생 되야 함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아, 시간이라 하는 것은 보이는 것을 보면서도,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아 볼 수 있는 그런 안목이 있어야 되겠구나 하는 겁니다. 사람은 세상 피조물의...

    시편 19편을 읽어 보겠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

    이래 되어 있습니다. '잡아라'. '포착하라' 이 말입니다. '포착해내라' 이 말입니다. 뭐냐 하면,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을 포착해 내라 이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을 포착하고 싶으면, 보이는 것을 안 보고 싶은데, 주님께서는 자꾸 보이는 사건들을 유발시켜 가지고, 우리 몸으로 하여금 보이는 것 우리가 현혹 될 수밖에 없는 것, 우리가 신경 쓸 수밖에 없는 것, 그런 것으로 신경 쓰게 한다 말이죠. 아주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아가씨가 교회 다니는 아가씨가 교회 안 다니는 가정에 시집갔다 합시다. 그럴 때 마음속으로 각오를 하겠죠. “하나님아버지, 비록 내가 안 믿는 집안에 시집가지만, 주일날 그들과 상대하지 않고, 나는 아예 나 혼자 일찌감치 시간 땡 하고 치면 나는 교회 가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 억지로 하겠습니다. 마음을 딱 먹는다 말이죠.

    그런데 막상 시집 가보면, 바로 그런 신앙 때문에 집안에 고통과 다툼과 막 이게 벌어지는 겁니다. ”니 하나만 좋지, 니 하나 편하면 좋은데, 너로 인하여 다른 식구, 시집식구가 고통 받는 것은 니 눈에 안 들리느냐? 이런 식으로 다가올 때에, 자기는 결혼하기 전까지는 “내 몸 빠져나가면 돼지,“ 라고 편하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얼키고 설키고, 그다음부터는 빼도박도 못 하고 싸워야 되고, 신경 써야 되고, 나중에 시아버지 돌아가면서 유산줄 때, ”니는 교회 가기 때문에 유산 한 푼 없다“ 이래 나오면, 남편도 가만있지 않고 ”니 땜에 돈 한 푼도 못 건졌다“ 이래 나오고, 싸우고 문제 된다 이 말이죠.

    이 세상 만물은(본문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들리는 소리는 없으나 언어가 없고 소리는 없으나......”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침묵의 소리로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계속 나타내고 있다 말이죠. 그러면 그것을 포착해야 된다는 말이죠. 그것을 포착해야 돼요. 그것을 붙잡아야 돼요. 시편도 그런데,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고향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가라했다. 그러면 그 이야기를 성경 본 사람이 누구나 그런 생각 들어요. 아브라함이 지 혼자 착각 할 수도 있잖아. 맞잖아요. 지 혼자 착각 할 수 있다 말이죠.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고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아담아, 어디 있느냐? 라고 하셨다. 성경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아담이 그런 착각을 할 수도 있지.“ 하나님이 그런 이야기 한 적도 없는데, 신이 허락한 적도 없는데, 괜히 벌거벗으니까, 지가 미안해 가지고, ”아담아 어디 있느나?“ 마치 들리는 것처럼, 지가 환청을 들을 수도 있잖아?” 라고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저쪽(불신 쪽)에서 하는 말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 들리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쪽으로 만져지는 쪽으로 딱 제시 해봐라, 우리가 믿어 줄게 이래 나온다 말이죠. 뭐든지 딱 제시하면 믿어줄게. 그러면 성경은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만 있는 게 아니에요. 딱 손에 잡히는,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런 사건들도 엄청나게 착착 제시돼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오늘 다루어야 될 본문의 말씀이 하나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윗 왕이 어느 정도 얼추 정비가 되었어요. 반발을 일으키는 세력들이 잠잠해졌고, 다윗 왕은 그동안 고생 꽤나 했습니다. 빨리 모셔서 다시 원위치로 다윗 왕을 왕으로 모시는데 대해서 가까운 유다, 다윗이 유다지파이기 때문에 같은 성씨를 가진 유다족속이 다윗을 옹립해서 다윗 왕으로 도로 모셨습니다. 이게 눈에 안 보이는 일입니까? 눈에 보이는 거잖아요.

    대통령 투표 할 때 표 찍는 거 이거 눈에 보이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거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이명박 대통령 되기를 소원하면서 표 찍었습니다. 자기가 표 찍어가지고 대통령 이명박 지금 됐어요. 그런데 그들은 뭐라고 하느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이명박 장로님을 대통령 되게 하셨다.”고 하는 거예요. 지가 보이는 종이에 보이는 손으로 동그라미를 찍어 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보이지 않는 것에다가 그 원인을 두는 거예요. 교회는 신앙인은 적어도 그래야만 한다고 다들 무난하게 하는 겁니다.

    이성령인지 김성령인지 아직도 기억납니다만, 그분이 미스코리아 되고 난 뒤에,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겠습니다.“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미스코리아 진을 되게 했다면, 미장원은 안 가야죠. 미장원은 가지 말고, 아무 조치도 안하고, 그냥 놀러왔다가 픽업 되야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 할 수 있지, 온갖 지는 노력 다하고 워킹 연습 다 해 놓고, 기껏 되고 난 뒤에, 이 모든 영광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할 때 다른 사람들이 납득이 안 되죠. 지가 아예 그런 노력을 안했으면 이해되는데, 지가 눈에 보이는 것에 주목을 했다 이 말이죠. 주목을. 눈에 보이는 것에다가. 거기다가 머리도 했고, 귀도 했고 다 애써 놓고, 엉뚱하게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이러면 믿음이 좋은 겁니까?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특히 개혁주의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개혁주의 신학을 죽 펼쳐놓고 하는 말이, “그래도 구원은 예수님의 피로 돼 있습니다. 이래 이야기 하거든요. 남들 보기에는 완벽에 완벽을 기한 신학처럼 보이겠죠. 그러나 저는 그것에 대해 동의 못해요. 왜냐하면 개혁주의, 쉽게 말해 신학, 인간의 신학에서는 ”피“가 안 나오게 돼 있어요. 안 나오게 돼 있습니다. 피가 나오려면 간단해요. 신학을 버리면 됩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단이다 하면, ”아, 당신 피 믿는구나.“ 이러면 앞뒤가 맞아요. 앞뒤가. 왜? 개혁주의 신학은 우리가 하는 거고, 구원은 주님이 하시는 거고,

    제가 대전서 강의 마치고 식사를 하는데, 대전에 뭐 성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대전에 희열 씨란 분이 계시는데, 밥 먹으면서 주변 분들에게 이야기 하는 것을, 건너 건너에서 듣다가 제가 메모 꺼냈어요. 왜냐하면 설교를 하는데 멋진 설교를 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는 술술 자기 느낌을 이야기하는데, 믿음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자기가 쫒아가는 믿음이 있고, 이끌리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했다는 거예요. 본인은 희열 집사님은 남에게 얘기 했지만, 나는 그 자리에 나보고 그 분이 설교하는 중이예요. 설교 하시면 받아 적어야죠.

    쫒아가는 믿음이 있고 이끌리는 믿음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자꾸 쫒아가는 믿음을 하니까, 그것이 결국은 자기 한계로 들통 나버렸다. 믿음은 그게 아니고 이끌려 가는 믿음이다. 라고 설명을 해대는 거예요. 그러면 제 3자가 있다가, 그러면 장 희열 집사님, 성까지 얘기 해버렸다만....ㅋ 이건 이끌리는 신앙이다 이건 쫒아가는 신앙이라는 것을 눈에 보이는 손에 잡히는 어떤 경험을 하셨습니까? 라고 이야기 할 때, 그분은 자기 인생 전부 다 나올 거예요. 남들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그 행동을 고대로 모방하면 마치 신앙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건 절대로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자기가 어떤 행동을 해놓고, 거기에 대해서 이런 행동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들리는 소리는 없어도, 침묵의 소리, 뭔가 자기 행동을 분명히 해놓고, 이렇게 행동 하게 된 것은 결코 내가 선택해서 내가 눈에 보이는 대로 한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이끌림 때문에 이렇게 했기 때문에 나는 보이는 것에 대해서 마음 빼앗기거나 거기다가 나는 몰입하지 않습니다. 나는 거기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예로부터 없다 사라진다 할지라도 영원히 온 우주에 통하는 그 소리에 나는 귀를 기울인다. 라는 고백이 없으면 그런 설교를 분명히 할 수 없죠.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요약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원리는 반드시 우리에게 보이는 식으로 드러난다. 고거 하나, 두 번째 그 보이는 식에 대해서 사람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덤벼들 때에, 진짜 신앙인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도 결코 우리가 해내지 못한, 이끌려야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렇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그러니까 우리는 기도원에 가서 산에 파묻힌다든지, 세상 살기 싫다고 혼자 들어가서 있으면, 그건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평소대로 사세요. 누구를 만나든 만나세요. 그러나 보이는 것에 대해서 신경 쓰세요. 하지만 그 원리는 내가 쫒아가는 신앙이 아니고, 이끌리는 신앙 중의 하나의 증거로서 툭툭 불거져서, 사건들이 우리 속에 날마다 터져 버린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오늘 사건은 어떤 사건이냐 하면, 이런 겁니다. 다윗 왕을 옹립하는데 있어서 유다지파가 옹립을 했어요. 제가 아까 얘기 했듯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겁니다. 하니까 거기 이스라엘 지파에 속한 사람이 “왜, 다윗 임금은 온 이스라엘의 임금님인데, 왜 자꾸 너와 같은 족보(유다)라고 다윗 왕을 따로 빼돌려서 저들의 왕 인양 왜 옹립해서 왕으로 복귀시켰냐? 그리되면 다른 사람들이 왕하고 가까운 인척과 친인척들이 권력을 쥐는 것이 당연하다고 인상을 줄 수가 있잖아? 하는 오해를 하는 거예요.

    여기서 방금 제가 설명하면서 중요한 대목을 하나 설명했어요. 뭐냐 하면, 제가 설명한 것이 기록에 나온 건데, 유다에 속한 사람과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 둘로 나누었어요. 찢었습니다. 원래 출애굽 할 때 지파가 12지파였습니다. 12지파인데, 다윗이 왕이 될 때에 12지파의 왕 이예요. 아무 일 없습니다. 예, 나라 안 찢어졌어요. 정상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왕으로 옹립하는 순간 드디어 나라가 둘로 쪽 째졌습니다. 베냐민과 유다지파 둘로 하나 묶어 버리고 나머지 두 지파 빼고 나머지 10지파 몽땅 한쪽 편으로 쏠리게 되었어요. 쏠림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왕이 한번 자리에서 쫒겨 났다가 다시 오는 와중에서 뭔가 찢어진다는 사건이 발생될 때는, 이거는 들리지 않는 소리, 보이지 않는 원리, 그것이 이미 서서히 개시를 일을 시작한 겁니다. “아이, 우리가 단결을 못해서 그래” 이래 나오신다면 그건 오해예요.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신앙인양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쫒아갈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인양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미처 모르는 숨겨진 뭔가 이끌림을 받는 원칙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시키는 작업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뭡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다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건 무엇입니까? 답변은 간단합니다. 할 수 없는 겁니다. 이거 놀리는 게 아닙니다.ㅎ 제가 할 수 없는 걸 제가 성경에 빗대서 하는 겁니다. 제가 말 놀리는 거 아닙니다. 여러분, 어른들이신데 놀리면 안 되죠. 성경 말씀 딱 댈 테니까, 여러분, 할 수 있는 건지 없는지 분간해 보세요. 오늘 시험 한번 칩시다.

    시편 78편 67절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고“

    요거 우리가 할 수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못 들었으면 다시 할게요. “요셉 장막 10지파를 버리시고, 에브라임 지파도 10지파에 해당되니까 싫어하시고, 오직 유다지파와 시온 산을 택하셨다“ 하는 구절이 나오는데,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걸 우리가 할 수 있는 겁니까? 할 수 없는 겁니까? 할 수 없는 거죠. 할 수 없는 거란 말이죠. 아, 이 보통 어려운거 아니죠. 다시 천천히 해보겠습니다.

    애굽 출애굽 할 때 12지파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 요셉 중심의 10지파가 따로 떨어져 나갈 것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아예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상상도 못한 일입니다. 유다지파나 요셉지파나 우리는 everybody 한 형제가 돼 가지고 하나가 돼서 하나님 우리 다 같은 하나님이라고 꿀떡같이 그렇게 알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본문에 보니까, 다윗 왕이 아들 땜에 쫒겨 났다가 다시 복귀하는 그 과정 속에서 얼레, 갑자기 10지파 하고, 2지파 유다지파와 베냐민지파가, 어, 균열이 생기네요. 뭔가 파벌이 발생되네요. 이 파벌이 발생될 때 다윗파부터 누구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겁니다. 이러면 안 돼, 이러면 안 돼, 말이 안 돼, 말이 안 돼, 양보할 건 양보해야 돼, 고집부리면 안 돼, 이러다 나라가 둘로 쪼개지면 안 되지, 이러다 나라가 둘이 되면 큰일 나는 거야, 이건 오해가 있으면 오해를 풀어야 되고, 찾아가든지 해야 돼. 라고 설치자마자. 설쳐서 빨리 쪼개진 것을 하나로 빨리 봉합해서 전처럼 우리가 처음처럼 나라가 둘이 아니었고, 우리는 어디까지나 한 형제고 한 뿌리다. 라고 할 수 있도록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눈앞에 등장한 겁니다. 손에 잡히는 것이고 눈에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시편78편67절~68절에 보니까, 어, 아무리 인간들이 애써서 갈라진 것을 봉합하고 같이 하려고 해도, 애초부터 창세전부터 10지파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바 돼 있고, 버린바 돼 있고, 오직 유다지파만 하나님이 택하신 바가 되었다고, 이미 창세전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예언, 인간이 할 수 없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사실이 딱 여기 배치돼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 되려고 애썼던 시도들이 결국은 뭐냐 하면, 그것조차 우리가 하나 되려고 애썼던(사랑하는 형제끼리~~ 찬송 부르면서 어깨동무하죠) 시도조차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거고, 기껏 쫒아가는 신앙의 그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갈라서도록 돼 있는 것을, 우리는 못내 그게 아쉬워서, 그래서는 안 되는 것처럼 느껴져서, 갈라서면 형제사랑이 안 되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이해가 되어서, 최선을 다하여 교회가 하나 되려고 애쓰는 거, 그거 인간이 할 수 있는 겁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거, 그거 신앙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이 어려운겁니다. 그래서 어려운 겁니다.

    제가 어느 글에 댓글 달았습니다. 결과는 원인을 조장할 수 있다. 이렇게 달았어요.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죠? 결과는 원인을 조장할 수 있다. 요 원인에서 요 결과는 나왔잖아요?

    예를 들어서 내하고 남편하고 자식새끼 낳았잖아요. 내가 원인이 되고 자식은 결과잖아요. 근데 그 자식이 교회에 가서 들은 소리가 하는 말이 “엄마, 아빠 나는 창세전에 예정되었대. 태어나야만 했대.” 라고 했을 때 자식이 안고 있는 그 신앙의 결과와 나의 원인을 그 결과에 따라서 수정이 가능해요. 재배치가 가능하고, 재조정이 가능해요.

    구약성경에 나와 있는 이 하나님의 뜻이 그때는 최선을 다한다고, “그저 나라가 깨지면 안 돼, 나라가 분란을 일으키면 하나님께서 형제사랑 하라하셨는데, 형제를 미워하고 헤어지면 우리는 지옥 가는 거야, 이건 안 돼, 이건 나쁜 거야.” 라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필히 그래야만 했던 겁니다. 그렇게 갈라서야만 했던 거예요.

    그러면 속으로 묻습니다. 그러면, 그때 갈라서게 한 우리의 행동은 잘한 겁니까? 하아 요것은 얄궂은 질문이네~~그러면 그때 “그 사람들과 갈라설 수밖에 없어“ 라고 했던 우리의 결정은 참 잘하신 겁니까? 아니죠. 아니죠, 그건 아니죠. 그건 아니란 말이죠. 왜 그게 아니냐 하면, 주님께서 예상 밖의 일을 하게 된 것은, 그러니까 갈라선 것은 ”너 참 잘한 거야“ 라고 칭찬하기 위함이 아니라 ”너란 존재는 항상 있으나 마나한 존재란 말이야” 그 뜻입니다. “니가 기도 열심히 해” “웃기고 있네. 애쓰면 기도로 니 구원받아”. 그럼 제가 열심히 기도한 것은, ”니는 기도하면서 내가 기도한 이것하고 주의 뜻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깨우치라고 우리보고 기도 시킨 겁니다.

    하지만 목사님, 그럼 우리가 기도 안하면 되네요? 제가 처음에 얘기했죠? 우리는 어떤 사건에 부딪히면 기도 안 할래야 견딜 수가 없어요. 기도 안 하면 지옥 같은 나라 같아요. 기도 하면 마음이 편한 것 같아요.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뭔가 신앙적인 하나님의 일에 관여하고 싶다는 것이 티가 나는 것 같아요. 우리는 기도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게 바로 보이지 않는 것이 항상 우리로 하여금 답답증과 조급증과 뭔가 설쳐야 된다는 걸 독촉하는 입장에서, 뭐라도 해야 될, 기도도 해야 되고, 헌금도 해야 되고, 예배참석도 해야 되고, 설교 말씀도 듣고 싶고, 안 그러면 견딜 수가 없어요. 견딜 수 없어요. 그래서 어떻게 어떻게 해서 이렇게 내가 했던 모든 것이 내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돼 간다는 생각을 갖도록 만들어요. 갖도록 만들고 뒤에가 뒤통수치기는, “갖기는 뭘 가져, 그냥 니가 설쳐 본거야“ 라는 말씀을 볼 때에 우리는 희열, 환희, 그 외 다른 표현이 될 수 없습니다. 내 한계, 내 신앙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있고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그 환희, 그 짜릿함, 그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건 춤을 추고 싶어요.

    보이지 않는 힘이 이끄시는 그 힘이 나를 설칠대로 설치게 하면서도 그 설치는 것과 내 구원과 상관없게 만드시는 그 놀라운 선택, 그것이 시편 78편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에브라임은 애초부터 짤려야 되고, 유다는 애초부터 선택받아야 하고, 그런데 그 사실을 미처 몰랐던 그 당시의 유다사람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설치고 왕을 옹립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소리를 내뱉고 있는 겁니다.

    “아냐 우리가 모셔야 돼, 아냐 우리가 모셔야 돼,” 다윗 왕이 다시 옹립되는 그 과정 속에서, 그 눈에 보이는 사건 속에서 주께서는 보이지 않는 숨어있는 내막을 드러내는 전제 작업으로서 그러한 시도들이 움직임들이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앙이라는 것은 참으로 쉬우면서도 참으로 말하기는 어려운 거예요.

    그 중에 예를 하나 들고 마치겠습니다. 사사기 8장 22절에 보면, 거기에 유명한 기드온이 나와요. 기드온이 나팔과 횃불 들고 수십만 대군을 물리치고 이겼습니다.이기고 난 뒤에 눈에 보이는 사건으로 이긴 거예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김 장훈씨가, 김 장훈이라는 가수가 있어요. 그 가수가 미국에 세계에서 유명한 뉴욕 타임즈에다가 돈 몇 억씩 때려 넣어서 “독도는 한국 땅‘이라 광고를 했더니만, 그걸 보고 일본사람이 다 같이 회개해가지고 이제는 두 번 다시 ’독도는 한국 땅‘이라고 양심 선언했다는 가상적인 사건이 터졌다면, 우리는 김 장훈이를 국회로 보낼 수밖에 없죠. 당신이 그렇게 설쳐서 독도를 되찾았다면 당신은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야 마땅하다. 누가 됐던지, 김 두한 이든지, 누가 됐든지, 누가 갈 거예요? 김 장훈 가수는 청문회 해도 나올게 없어요. 완벽하니까...그게 바로 인간이 기껏 할 수 있는 그거다 이거죠. 인간들이 할 수 기껏 할 수 있는 게.

    그런데 기드온은 뭐라 합니까? 극구 사양하는 거예요. “이 사람들아 내가 승리한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주위에서 겸손 떨기는...또 아이고, 믿음까지 좋은데 겸손까지 계시네. 그러니까 주위사람들이 당신 아들이 왕이 돼야 된다고 설치는 거예요. 그게 인간들이 누구나 할 수 있는 한계가 거기까지입니다. 쫒아가는 믿음, 아이고, 요렇게 해서 요렇게 하나님 섬기면 하나님 기뻐하시겠지. 이 쫒아가는 거예요. 그럼 기드온은 뭐냐? 그런 시대 이끌리는 것 나는 밑바닥 인생이고, 나는 그때 우연히 아다리 돼가지고 했을 뿐이지, 나한테는 일체 능력이 없습니다. 구원은 보이지 않는 힘이 여러분을 구원하고, 이미 하나님이 선택했기 때문에 선택의 역사가 여러분을 구원하십니다. 백날 얘기해도 소용없습니다.

    첫 번째,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로 눈에 보이는 것을 주목하세요. 두 번째, 눈에 보이는 것에 주목하셨습니까? 그게 의미 없고 아무 가치 없다는 것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지금도 주님께서 선택한 자를 구원하신다는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어떤 일에도 그 속에서 이끄시는 보이지 않는 것에 여러분이 늘 접촉하시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 옹립하는 와중에서 ‘너희들이 그래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했다’는 그러한 인간적인 다툼과 논쟁,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미 창세전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은 버림 받게 돼있고, 유다는 선택되게 돼 있는데, 마찬가지로 오늘날 저희들도 마찬가지인줄 아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원리가 우리를 작용해서 눈에 보이는 세상 속에 깊숙이 박혀 있으면서도 이끌리시는 그 원리를 항상 잊지 않고 연결된, 연결 지어진 그런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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