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8. 22. 12:16

살고자 하는 마음들 (사무엘하 19장16-19절)

본문 : 사무엘하 19장16-19절
제목 : 살고자 하는 마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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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강-삼하19장16-19(살고자하는마음들)-2sa100822

살고자 하는 마음들

2010년 8월 22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19:16-19

(삼하 19:16, 개역) 『바후림에 있는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급히 유다 사람과 함께 다윗 왕을 맞으려 내려올 때에』
(삼하 19:17, 개역) 『베냐민 사람 일천 명이 저와 함께 하고 사울의 사환 시바도 그 아들 열다섯과 종 스무 명으로 더불어 저와 함께 하여 요단 강을 밟고 건너 왕의 앞으로 나아오니라』
(삼하 19:18, 개역) 『왕의 가족을 건네려 하며 왕의 선히 여기는 대로 쓰게 하려하여 나룻배가 건너가니 왕이 요단을 건너려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의 앞에 엎드려』
(삼하 19:19, 개역) 『왕께 고하되 내 주여 원컨대 내게 죄 주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옵시며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인간들은 남들로부터 듣고 싶어 하는 문장이나 단어가 따로 있습니다. “너는 처신을 잘했어. 너는 훌륭해. 그래, 너의 행동은 정당했어. 너만은 더 오래 살아야 돼. 너같은 인간은 정말 아까운 인간이야”라는 종류의 말입니다. 이처럼 이미 기대하는 바가 확정된 이상, 그 다음에 나오는 인간의 행동이란 이 틀 속에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시 권력을 회복해서 왕궁으로 복귀하는 다윗왕에 세 인물이 등장하게 됩니다. 한 사람은 시므이요 다른 한 사람은 므비보셋이요 다른 한 노인네는 바르실래입니다. 이들은 모두 왕의 처분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은근히 기대하는 처분은 따로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구약적 상황이 신약의 복음의 그림자 안에서 어떻게 취급받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구약적 상황은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인간들의 삶에 대한 요령과 처신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예 전체 인간 상황을 무시하고 단정적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21:42-44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신약에서 예수님은 ‘돌’ 이야기하십니다. 낯선 돌 이야기입니다. 이 돌 이야기는 평소에 우리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듣고 싶은 것은 우리 존재 가치를 긍정해주는 주변의 격려같은 겁니다. “너 제대로 잘 살고 있는 거야. 힘을 내”같은 겁니다. 바로 이러한 자기 긍정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므이나 므비보셋은 제대로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겁니다.

바로 이런 점이 신약에서 봐서는 그저 ‘육신’일 뿐입니다. 로마서 3:19-20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신약을 보면서 바로 신약 성경을 믿을 것으로 덤벼들어봐야 소용없습니다. 구약의 육신적 태도를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입을 틀어막는지 구약을 봐야 합니다. 구약에는 나름대로 살아보려고 애쓰고 투쟁하는 면면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즉 말씀과 언약에 대한 필연적인 육신적 오해를 드러냅니다.

쉽게 말해서 언약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건 한가운데서 “나는 어떻게하든지 살아야겠다”는 것을 허락되지 않는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신약의 복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말씀의 정신과의 이질성을 드러냅니다. 시므이 이 사람은 누굽니까? 이전에 다윗이 도망갈 때때 잿가루를 날리며 저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윗왕이 다시 정권을 잡으니 와서 자신이 범죄했음을 인정하면서 살려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므비보셋이 나옵니다. 비록 다윗왕을 못 따라 간 사람입니다. 자기 변명으로 일관합니다. 자기 종의 잘못으로 돌리고 자신의 신체의 불리함으로 돌립니다. 이 두 사람에 비해서 바르실래는 어떠합니까? 바르실래는 다윗왕으로부터 충분히 공궤를 받을 수 있지만 다윗왕에게 누를 끼칠 수 없다고 이를 사양합니다. 모든 것을 왕의 처분대로 하라고 합니다.

즉 그는 ‘왕의 처분’의 의미를 압니다. 이런 삶의 상황이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들이닥칩니다. 매일같이 반복해서 들이닥칩니다. 이 신약시대에도 말입니다. 변명할래 포기할래를 묻게 됩니다. 하지만 변명을 하든 포기를 하든 우리의 구원하고는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시대의 방침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돌이 이제 도리어 사람에게 도로 찾아드는 식으로 세상이 작용하신다는 겁니다.

농사 지을 때, 쟁기가 동원되는 것은 흙 자체를 갈아엎기 위함입니다. 말씀도 이와같습니다. 우리 인간이 말씀 앞에서 살 궁리하는 것은 본성이라면 그 본성을 말씀이 자진해서 찾아오셔서 갈아엎는 겁니다. 율법 앞에서 입을 다물어야 하는 말씀이기에 입을 다물게 만듭니다. 말씀 앞에서 어떤 인간의 그 어떤 행위도 죄라고 드러나야 하기에 죄로 드러내게 하십니다.

이런 작업으로 인하여 오히려 우리 성도에게는 근심, 걱정이나 불만이 있을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살아야 한다고 노력하는 그 노력의 대가로 우리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말씀이라는 쟁기로 뒤엎어지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찾아냄을 당한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다루는 그런 육신적인 관계가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의 확정된 신약이 말씀에 의해서 우리가 일방적으로 다루어진 관계에 놓이게 된 것을 도리어 감사해야 될 처지입니다. 그 어떤 형편에 있던지 말입니다. 누가복음 17:26-29에 보면,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신약 때에 와서 인간들이 기껏 하던 행세가 이 본문에 다 나와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시집가서 아기놓고 장가가서 가정 꾸리고, 이런 일 밖에 무슨 의미가 또 있겠습니다. 인간들은 바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이런 일에 매진한 것으로 자신들이 당연히, 마땅히 살 권리가 있다고 여기고 은근히 그 격려를 기대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오심은 언약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의견에 동조해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기껏 할 줄 아는 그런 것들을 뒤집어서 그런 것들이 실은 하나님 앞에서 입을 다물어야 될 일임을 알려줍니다. 언약을 받은 다윗의 가문도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런 육신의 난리 통해서도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의 처분에 맡깁니다. 바로 말씀 앞에서 이런 자세를 보이는 것이 성도의 본 모습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이 쟁기를 쥐시고 날마다 우리를 갈아엎어서 십자가 피만이 우리를 살려낼 수 있음을 되새기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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