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8.08 23:20

압살롬의 죽음 (사무엘하 18장 28-33절)

본문 : 사무엘하 18장28-33절
제목 : 압살롬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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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강-삼하18장28-33(압살롬의죽음)-2sa100808

압살롬의 죽음

2010년 8월 8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18:28-33

(삼하 18:28, 개역) 『아히마아스가 외쳐 왕께 말씀하되 평안하옵소서 하고 왕의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여 가로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붙여 주셨나이다』
(삼하 18:29, 개역) 『왕이 가로되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삼하 18:30, 개역) 『왕이 가로되 물러나 곁에 서 있으라 하매 물러나서 섰더라』
(삼하 18:31, 개역) 『구스 사람이 이르러 고하되 내 주 왕께 보할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삼하 18:32, 개역)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소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삼하 18:33, 개역)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왕에게 가서가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 갚아 주신 소식을 전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요압은 다윗왕의 마음을 알기에 그러지 말라고 합니다. 대신 구스 사람을 보내어 구스 사람이 본 것을 왕께 전하라고 합니다.

이때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다시 요압에게 청합니다. 자신이 가서  이 소식을 전하겠다고 말입니다. 요압이 만류하지만 아히마아스가 가고자하여 요압이 허락합니다. 구스 사람이 먼저 출발했지만 아히마아스가 먼저 다윗왕에게 소식을 전합니다.

28절에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붙여 주셨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해 다윗왕은 누구의 안부를 묻습니까?

압살롬의 안부를 먼저 묻습니다.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 그 때 마침 구스 사람이 도착했습니다. 구스사람도 이렇게 말합니다. “내 주 왕께 보할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앞서 온 아히마아스와 다르지 않습니다.


역시 다윗왕이 묻습니다.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 구스사람이 어떻게 대답합니까?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소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큰 실수였습니다. 사태를 파악하는 눈이 열리지 않았다는 겁니다. 참으로 무지막지하게 보고를 합니다.

이 보고를 받고 다윗은 슬픔에 잠깁니다. 기뻐할 줄 알았던 신하들과 다윗왕 사이에 괴리가 발생한 겁니다. 다윗은 사랑의 차원에서 압살롬을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이것이 사랑입니다. 다윗언약의 진수입니다. 

“내 아들아, 내 아들아”는 외침은 아버지의 심정을 아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통해서 전하고자 의도가 있는 경우에만 발생합니다. 어디서 많이 듣든 대사 아닙니까? 바로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기 아들로 간주하신 상태에서 지금까지 계속 관여해 오셨습니다. 하나님 아들 되기 싫은 자는 더 이상 이 나라에 붙어있지 말라는 차원에서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전쟁을 통해서 우리들 자신과 현재 자식과의 관계를 다시 정립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시키신 자식인지 아니면 나의 애씀과 고대함이 아들 생각에 기여하게 되었는지를 보라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인생을 어떻게 살더라도 사람으로 취급 못받습니다. 하지만 구스 사람의 관심은 하나 뿐입니다. 다윗왕으로부터 인정받는 겁니다. 하지만 다윗왕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 자가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가 있을까요 아니면 원망 들을까요?

구스 사람과 아히아마스는 하나님의 섭리의 취지를 제대로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입장에다 하나님의 섭리나 다윗의 결정을 맞추어 집어넣을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다윗과 그 외의 사람들의 관심은 상호 달랐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했을 경우에 예수님의 관심사와 일치되는가 여부가 결정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산다’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바깥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심성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압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오로지 예수님의 주되심을 있음을 말입니다. 하지만 십자가 밖의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함께 있다는 그 ‘십자가 안’ 자체가 탐이 나는 겁니다.

즉 “나도 사울처럼 십자가 안에서 살고 있다”는 식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십자가 밖의 관점일 뿐입니다. 정작 십자가 안에 사는 사도 바울은, “나는 오로지 예수님의 주되심만이 관심사다”고 나옵니다. 결코 이 관점이 일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왕은 지금 아들과 더불어 있습니다.

압살롬이 죽이던 살리던 그것은 인간이 관여할 사항이 아니라고 보는 겁니다. 다윗 자신이 원치도 않는 죽음이 일어난 것에 대해서 다윗은 언약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터뜨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십자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들이 바로 예수님을 죽이는 자들이다”고 울분을 토하는 것과 같은 입장입니다.

다윗의 관심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압살롬이 살아 있느냐입니다. 전쟁에서의 승리가 압살롬의 부재(不在)를 대신해 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의 죽음’은 곧 다윗 가문의 하자가 있음을 하나님께서도 인정한 바라는 뜻입니다. 전쟁에서 오는 승리가 다윗 권력 내의 내부적 전쟁으로 인하여 빛을 상실했습니다. 바깥 전쟁이 문제가 아니라 내부 전쟁으로 축소당해야 합니다.

이처럼 전쟁 내부에서 이질적 요소가 상호 부딪히게 하나님께서는 작용하십니다. 압살롬을 죽이지 아니하면 승리의 기쁨을 얻어낼 수가 없다고 본 것이 다윗언약 바깥의 사람들의 견해라면, 다윗의 견해는 그것이 아니라 압살롬의 죽음과 전쟁의 승리는 별개라는 겁니다. 도리어 압살롬이 죽음으로서 이번 전쟁은 다윗 진영의 내부에서 그 불씨가 끄지지 않았다고 보는 겁니다.

지금도 사람들의 관심은 자꾸 어디에 둡니까? 살아계신 예수님께 두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에게 아들이 꼭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식입니다. 즉 아들에 대해서 몰라도 하나님 섬기고 영광돌리는 일에 지장없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일에 오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마태복음 2장에 보면, 베들레헴 성 내의 자식들이 한꺼번에 몰살해서 그 어머니들이 통곡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 일은 예수님을 증거하라고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일으켰던 일입니다. 자기 아들 예수님은 무사히 애굽으로 빼놀려놓고 베들레험의 사람들 자식이 사정없이 죽어서 통곡을 낳게 만들었습니다.

누가보아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불공평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우리 내부에 하나님의 적으로서 담겨 있음을 들추어내시고자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셔서 그 아들의 주되심을 길을 열게 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아들됨을 자력으로 이해할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오로지 자기 자식을 최고로 여기는 그 자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주되심을 열어제치기 위해 깨어져야 될 환경이 된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눈에 보이는 이상적인 교회를 그리워하는 것이 정상적인 주되심의 일을 훼방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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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십자가마을 2010.10.18 10:1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041강-삼하18장28-33(압살롬의 죽음)-2sa100808-(이 근호 목사)

    2010-10-17 21:22:21 녹취 : 이한례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하 18장 28절에서 3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494페이지입니다.

    사무엘하 18:28-33

    “아히마아스가 외쳐 왕께 말씀하되 평강하옵소서 하고 왕의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여 가로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붙여 주셨나이다 왕이 가로되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왕이 가로되 물러나 곁에 서 있으라 하매 물러나서 섰더라 구스 사람이 이르러 고하되 내 주 왕께 보할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소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아멘


    이 본문이 한쪽은 기쁜 소식 가져왔습니다. 라고 좋다 하는데,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은 울고 있습니다. 한쪽은 좋다고 웃고 있고,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번 일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왕의 하나님을 찬양할 만합니다. 왕이여, 동의하시죠? 라는 쪽으로 나왔고, 다윗은 통곡하고 있습니다. 견해가 달라요. 여호와 왕의 하나님에 대한, 여호와께서 하신 일에 대한 견해가, 같이 여호와를 섬긴다고 하면서 견해가 정 반대로 나갔습니다.

    이번 일어난 일은 우리가 울어야 될 일이라고 보는 것은 다윗이고, 웃어야 될 일이라고 보는 것은 다윗 빼놓고 나머지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오늘 나오는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둘 중에 하나. 이 일을 진짜 다윗의 마음에 의해서 같이 울 일인지, 아니면 다윗의 심정을 모르는 다른 사람같이 웃을 일인지... 서로 상반되는 계기가 등장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사건 하나 일으켰는데, 세상은 둘로 분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둘로 쪽 쪼개졌어요. 우리는 뭐든지 사건을 안 쪼개지는 방향으로, 아침에 얘기했듯이 집중하는 방법으로, 하나로 통합하는 방향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깨어지는 방법입니다. 제가 이번에 레위기 강의 하면서 레위기를 제대로 해석하려면, 레위기가 어디서 깨어지느냐, 그 깨어진 구석을 찾아가 보자.

    쉽게 얘기하면, 지진이 일어나서, 지진이 왜 일어나는지 알려면 지진이 일어난 먼 쪽 멀쩡한 땅에서 봐서는 모르고, 지진이 갈라진 그 틈바구니에 들어가 보면, 지진이 몇 미터에서 일어났는가 알듯이, 우리는 뭔가 포장만 하고 덮으려고만 시도해요. 주님께서는 내부의 것을 끄집어내려고 시도합니다. 우리는 해골이고, 해골인데 우리는 해골 덮어씌우는 평토장한 이쁘장하게 손대어 아무 일 없다 생각하지만, 주께서는 그 이쁘장한 것을 톡톡 깨버립니다. 비스켓 깨듯이 톡톡 깨지는 고 짝짝 짜그러진 그 사이에서 갈라진 틈이 나오고, 그 틈으로 들어가 보면, 진짜 우리의 본모습을 거기서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를 톡 깨는 겁니다. 그냥 깨는 것도 아니고, 톡 깨는 거예요. 톡 분질러 버리는 겁니다. 분지르면서 더 이상 우리가 감추려고 속이려고 시도한 모든 것이 헛 땅이란 것을 드러내게 합니다.

    특히 여기 오늘 나오는 ‘아히마아스’는 제사장이고, 구스사람도 하나의 신하로서, 둘 다 하나님에 대해서 신봉자란 것을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요즘 교회 같으면, 예수 잘 믿는 사람이라고 소문난 사람이란 말이죠. 그거뿐만 아니라 열성을 내는 자죠. 믿음 +행함이 추가된 가장 이상적인 사람으로 사람들이 존경할 만한 그런 사람이죠.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아니고 교회 위해 충성 하는 사람, 그 충성도 톡 그냥 깨지지 말고, 톡 분질러져야 돼요. 톡 부러져야 그 사람은 도대체 충성한 것이 뭐를 노리고 충성했는가가 진짜 알맹이가 나옵니다.

    뷔페식당에 가면, 열대지방 과일이 나오는데, 다른 과일은 그냥 먹을 수 있는데, 꼭 그 과일은 귀찮아요. 털 복숭복숭난 고거는 깨야 돼요. 끝을 깨야 물기 쪼로륵 흐르는 알맹이가 나와 그것을 먹듯이 그래서 귀찮아서 안 먹잖아요. 약간 보라색, 초콜렛 색 나는 그것이 무슨 과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다 말이죠. 그런 수고까지 해가면서 애쓸 필요 없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런 식으로 껍질을 벗겨서 진짜 알맹이가 다윗이 알고 있던 하나님과 같은 알맹인가를 비교 시킵니다.

    그러니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왜 그들은 다윗이 압살롬에 대해서 ‘전쟁에 승리했느냐’ 묻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압살롬 내 아들이 잘 있느냐?’ 라고 물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물었던 이유가, 하나님의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정상적으로 유지 될 수 있는 전쟁을 하나님께서 보여줬다. 그러니까 더 쉽게 얘기하면, 사람들은 하나님, 하나님 찾고 있을 때에, 하나님(아버지)의 관심사는 아들에게 있었던 거예요.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 이세상의 ‘주’가 되신다. 여기에 관심 있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들을 쏙 빼놓고, 하나님! 제가 하나님 이런 분 맞죠? 하나님께 충성을 다했으니 복 주셔야 마땅하죠? 라는 식으로 나오더란 말이죠.

    하나님께 아들이 있는 이유에 대해서 저와 여러분들이 아십니까? 그걸 묻는 겁니다. 하나님 있고 내 있으면 되지, 꼭 귀찮게 아들이라는 게 왜 등장해야 됩니까? 하나님 아들이 왜 있어야 되요? 쏙 빠진 혹 불처럼. 괜히 아들 있어가지고 깔끔하게 믿는데, 상큼하게 믿는데, 방해된다는 생각을 우리가 느끼지 않습니까?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은 창조주고 우리는 피조물이다. 그러서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을 섬겼다. 그러면 하나님은 여광이다. 이것이 우리네 알고 있는 상식이고, 이슬람 사람들이 신봉하는 하나님이에요. 지금도 이슬람 사람들은요 금요일 되면, 금요일 오후 2시부터 3시반사인가 그땐 중손이고 직장 일 다 그만두고, 넙죽 엎드려서 동쪽을 향하여(사우디아라비아) 지금도 한국사람 절한대요.

    그 사람에게 묻기를 “하나님의 아들이 계시군요.” 하면 그 사람 뭐라 합니까? “아들이 왜 필요하냐고? 하나님에게 아들이? 거추장스럽게, 하나님 믿으면 되지,” 왜 아들이 필요하냐 이 말입니다.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드님이 두 사람이 아니고, 단 한 분이예요. 하나님의 아들이. 단 한 분이 있다는 겁니다. 한 분 있는데,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으면, 나도 하나님의 아들이고, 너도 하나님의 아들이고, 다수의 여러 명의 하나님의 아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의 상상함, 인간이 어쭙잖게 생각한 하나님하고, 진짜 하나님하고 차이점입니다.

    목사님 왜 하나님에게 아들이 한 분밖에 없습니까? 그걸 저한테 물으면 안 되죠...ㅎ 하나님이 아들이 한 분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아들이 주님 되시는 데 관심 뒀다. 이것은 성경을 덮고서는 도저히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열어보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한 분 계시고, 하나님 입장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과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의 대립관계에 놓이게 그렇게 만든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은 의롭지만 하나님 아들(예수님) 빼놓고, 몽땅 그들은 선악과 따먹은 범죄자가 되어서, 생명나무 오는 길을 차단시켰다. 이게 창세기 3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사전에 그걸 몰랐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선악과 따먹고 “아이고, 실수 했구나. 생명나무 따먹고 고쳐야 되겠다,” 하고 생명나무 따먹고 싶어도 차단되었어요.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할 줄로 우리는 생각도 못했어요. 선악과 따먹기 전에는 그런 낌새가 없었다니까요 그런 낌새도. “아이고, 이거 따먹고 실수 했다 싶으면, 생명과 따먹고 영생하면 되겠지. 하는데 하나님이 선악과 따먹고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가 되면, 더 이상은 생명나무는 어림도 없다고 차단시켜 버렸어요.

    그럼 그 이야기를 진작에 하지, 진작. 그걸 진작에 얘길 하면 좋은데 진작에 얘기 안 해요. 왜 진작에 얘길 안하느냐 하면, 진작에 얘길 해 버리면, 인간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처럼 행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이 점점 더 어려워져가요. 제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 예수님을 ‘주’라고 올리게 되면 그걸로 하나님 앞에서는 영광(박수)이요, 그걸 대 만족이에요. 뉘 집의 애 교회 안 나온다고 그걸 하나님께서 섭섭해 할 리 없습니다. 누구 사람 교회 나온다고 좋아하지도 않아요. 하나님은 누가 나오든 안 나오든 관심 두지 않고, 예수님이 주님 되시면 하나님은 더 이상 바랄 게 없어요. 흐뭇하십니다.

    주변에 있는 인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시는 곳에, 길을 열어주는 하나의 배경(그림)에 불과한 겁니다. 이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서 어떻게 사시다가 어떻게 가시는지 보여주는 피조물인 거예요. 이 결론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오늘 본문 들어가기 전에 먼저, 결론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본문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잘 아는 겁니다.

    마태복음 2장 18절에 보면, 베들레헴에 예수님 태어났는데, 태어나고 난 뒤에 그들이 뒤늦게 헛방 치죠? 천사가 와서 하나님의 아들 빼돌렸잖아요? 어디로 빼돌렸습니까? 애굽으로 빼돌렸잖아요. 호세아의 말씀대로 빼돌렸다. 애굽에서 내 아들 불러내었다.“ 빼돌려놓고, 그담에 뒤늦게 와서 헤롯의 군대가 와서 그 베들레헴 근처의 2살밑의 애들을 죽여 버리니까 그때 통곡하는 통곡소리가 들린 거예요. 그 통곡소리가 뭐냐 하면,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이래 돼있어요.

    교회 다니는 사람치고 마태복음부터 읽으라 해가지고 슬슬 읽어 보다가, 제대로 신경 좀 쓰고 읽어 본 사람은 마태복음 2장18절에서 벌써 울분이 용암같이 들끓습니다. ‘아이, 예수님만 인간이고, 나는 인간도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빼돌리라 했느니까 예루살렘 사람들 죽을 아이까지 빼돌려야 되는데, 자기 아들만 딱 빼돌려 놓고, 말씀대로 되었다 해놓고 손 털면, 나머지 그 아이들 어이하란 말입니까? 헤롯이 와서 나머지 아이들 죽이니까, 하나님 자기 자식만 귀하고, 남의 자식은 안 귀합니까? “하나님, 안 귀해요?” 하나님이 뭐라 합니까? “그게, 내 뜻이야.”

    그래서 누가 성경을 안다고 해서 누가 하나님을 알겠습니까? 자꾸 하나님하고 유사관계를 맺지 마세요. 전혀 유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려죽여도 내 자식은 귀해요. 때려죽여도 내 자식이 예수님보다 내 자식이 더 귀하다니까요. 내 자식이 남의 자식도 아니고, 하나님 자식 예수님도 귀하지 않고, 내 자식이 더 귀하다니까요. 왜? 내 몸에서 태어난 내 자식이거든요. 책임감 같은 것이 있기 때문에. 동물도 사자도 원숭이도 지 새끼 귀하잖아요.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지 자식 귀하다는 건 타고난 본성인데, 그 타고난 본성을 하나님께서 뭉개버리면, 도대체 그런 하나님에 대해서 사랑을 느낄 수가 있겠어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죠.

    지 자식만 챙기는 참 나쁜 하나님, 그것이 바로 울분과 통곡을 통해서 드러나는 겁니다. 왜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애들을 다 죽이게 하십니까? 헤롯을 보내서. 그것은 하나님의 뜻은 바로 모든 인간들의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그 하나님의 뜻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전혀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 뜻하고는 상관이 없어요. 지금 알람 울리는 것도 상관이 없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안다 하니까, 건방지게 제가 하나님이라고 하면, 쉽게 갑시다. “하나님, 하나님, 하면, 제가 하나님이라면, 제발 신경 뚝 끊으세요. 본인이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 없다고 여기고, 신경 뚝 끊으세요. 라고 제가 당부하고 부탁하고 싶어요. 괜히 뭐 교회 나와서 하나님 믿어가지고 자기 스스로 스트레스 받고 짐 맡고 하나님의 뜻을 못 지켜서...지가 아직도 못 지켰다고 하면서 벌 받을 거야~~ 이래 하는데, 사는 게 ‘벌’이예요. 사는 게 벌. 아~뭐를 새삼스럽게 벌을 받아요?

    제발 자기를 자기가 처벌하지 마세요. 처벌 안 해도 처벌 받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가 나서서 처벌하지 마세요. 괜히 처벌한다고 더 겸손한 척 한다고 하나님이 안 알아주고, 제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걷어 치고 우리 대신 예수님이 하나님 믿어 주십니다. 이게 뭐 또 충격적인 이야기 입니까? 이게 또 예? 예수님이 우리 대신 믿음 줘 가지고, “니 대신 내가 믿었다. 이 믿음을 성령으로 선물로 줄게.” 그게 오면 우리의 내부에서 뭐냐, 내가 믿던 믿음(신념이죠)하고 주님이 주신 성령이 주신 믿음하고 내부에서 대 충돌이 벌어집니다.

    이번 수련회 때 이야기 했지만, 아담은 시간이 없어요. 정지돼 있지만 거기에다가 예수님이 개입해 버리면, 지금까지 내 인생이고 내 기억이고 내 역사라고 여겼던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역사로, 주님의 아들을 주로 드러내는 역사로 완전히 바뀝니다. 단군은 우리의 조상이라 하면 주님이 씩 웃습니다. ‘단군이 니 조상이가? 내가 니 조상이야,’ 이래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저 멀리 있는 아브라함이 내 조상이라는 거예요. 아브라함, 우리 아씨 집안 아니거든요. 우리는 성이 다르거든요. 그런데 성경 상으로 보면 약속의 선배예요. 그 분은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 되는 거예요. 아이, 이걸 누가 믿겠습니까? 우리는 단군 자손이고 저 쪽 아브라함은 혈통적으로 다른 족속인데, 어떻게 매치가 되겠어요? 만남이 안 되죠.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알고 있던 하나님 그늘아래서, 우리는 내 새끼 귀한 것도 하나님 주신 본성이고 그러니까 이 일은 잘한 짓이고 내 남편, 내 아내 사랑하는 것도 이거는 하나님 주신 은총이고 영광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하나님 자체를 우두두 뚝 뜯어냅니다. 우두둑 뜯어내가지고 ‘언약’이라는 새로운 지붕이 우리를 덮쳐버리죠. 그러면 ‘언약’에서 뭔가 우두둑 쏟아져요. 언약의 정신이 우르룩 쏟아집니다. 쏟아지게 되면, 여기서 교체, 갈아치우기, 우리 마음가짐의 갈아치우기가 예수 안에서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다윗이 오게 되면, 여러분 유리알 알죠? 유리알로 여러 가지 공예품 만들죠. 유리알 속에 반짝이도 만들고, 이것 ..만들죠. 갈라디아 6장14절에 보면, “내가 십자가 안에서 세상에 대해서 나한테 죽었고, 세상은 나에 대하여 죽었다” 이래 되잖아요. 그러면 유리알이 예수님 안에 들어있다 봅시다.

    다윗처럼 들어앉아 있으면, 하나님께서 압살롬을 줄 때 이거는 다윗은 내 자식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다윗 가문을 잇게 하기 위해 주신 내 자식이라 본 거예요. 이 압살롬이라는 자식은 내가 내 힘으로 낳았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 가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임하기 위해서 배치돼 있는 인물로 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아들 이예요. 그러면 나는 아버지가 되고, 나는 아들이 되는 동시에 이것은 뭐냐 하면,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버지 입장과 그리고 아버지가 보낸 아들 입장을 압살롬을 통하여 대비해서 보는 겁니다. 이게 유리알 이예요.

    예수 안에 들어있으면,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면,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만 붙들고 살아요. ‘예수님은 주시다. 예수님은 주가 되시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는 죽어도 예수님이 나를 살려 주십니다. 죽는 게 죽는 게 아니고 쉬는 겁니다.’ 라고 말해요. 성경에서는. ‘우리의 조상은 단군이 아니고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여기에 유리알 안에 모든 성경 말씀이 들어가 있어요. 그래서 유리알 안에는 모든 성경 말씀이 실제로 역사적으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유리 밖에 있는 사람은 그 안을 들여다보면, 그게 이상하게 보이는 거예요.

    오늘 나오는 아히마아스하고 구스 사람은 다윗이 품고 있는 유리알 내부의 모습을 전혀 몰라요. ‘승리 했습니다. 압살롬은 죽여야 됩니다. 어디서 다윗 왕에게 대들어? 그거는 자식이라도 용납이 안 됩니다. 우리 다윗 왕이여 기뻐하소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대적을 손수 죽였습니다. 우리 손으로 죽인 것을 찬양 드립니다. 이제사 하나님의 원수가 없어졌으니 우리 왕이여 우리와 더불어 즐겁게 우리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립시다.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리 되면 유리알 존재 자체가 없어지는 거예요. 다윗이 유리알을 발길로 차버립니다. 와장창 깨져 버리죠. 깨면 유리알 안의 세계가 바깥으로 튀어나오면서 통곡합니다. ‘누가 죽였어? 내 아들을? 내가 내 아들 죽이지 말라고 했잖아, 누가 죽였어 내 아들을, 누가 죽였어??????

    인간: 우리는 하나님 여호와를 섬깁니다.
    하나님: 누가 죽였어 내 아들 예수님을, 누가 죽였어?
    인간: 아니 하나님 영광 돌린다고 했는데요.
    사도바울: ‘내가 하나님을 잘 믿어볼라고 예수 믿는 사람을 죽였는데요.
    하나님: 니는 나를 핍박하는 자다,
    사도바울: 누구십니까?
    예수님: 나는 니가 핍박하는 예수다.

    하나님은 유리알 세계를 확장시킴으로써 세상을 마감하려고 합니다. 세상 전체를. 이미 선악과 따먹었죠. 모든 것이 멸망당해야 하는데, 선악과 따먹은 세계에서 만들어낸, 조작해 놓은 하나님, 이런 것들로 그들은 그대로 밀어붙이려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주셔가지고 유리알 같은, 캡슐 같은 것을 집어넣었단 말이죠. 그것을 가지고 예수 안, 십자가 안, 내가 예수, 십자가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나는 예수님이 주가 되셨다는 그걸로 말미암아 나는 너무 너무 편안합니다.’ 그걸 누리는 반면에, 세상 사람들은, ‘니는 자꾸 예수만 믿으면 돈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한다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묻죠. ‘그럼 니는 뭐가 중요하나?’ 뭐랍니까? ‘내 몸이 중요하지, 그럼 너는 뭐가 중요하나? “나는 내 몸보다 예수님이 중요하지.’ 주님께서 값 주고 사신 몸이 되었으니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이렇게 하죠. 그럼 저 쪽에서는 ‘사나 죽으나 내 것이다.’ 나는 날 위해서 산다는 거예요.‘ ’아이 가슴아파라.(목사님 가슴 치며) 맨 날 날 위해서 산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유리알 속에서는 ‘우리는 주를 위해서 산다.’ 하니까, 밖에서는 ‘ 그 말은 듣기는 좋은데, 믿음처럼 보이는데, 인간의 능력치고 자기를 위해 살지, 주를 위해 살 사람이 누가 있노? 니 지금 착각하고 있지? 니 착각 하지 마, 성령 안 받아놓고 받은 척 하고, 성경에 그런 내용 나오니까 그걸 자꾸 되 뇌이고 반복한다고 해서 마치 니가 그런 사람이라고 착각 하지 마,'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어떤 사건이냐 하면, 예수그리스도가 주가 아니고, 하나의 또라이고 정신병자라고 이렇게 느낄 때, 분노를 느끼죠. 하나의 예를 들고 마치겠습니다. 서머나 교회 김성수 목사가 설교를 했다 말이죠. 설교를 여러 개 보면서 저는 분노를 느꼈어요. 어떤 분노냐 하면, 왜 목사란 입에서 주의 십자가만 증거 되지 않고, 인간이 이렇게 하시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인간이 됩니다. 라고 그쪽으로 나오느냐 하고 제가 분노를 느꼈거든요. 저는 통곡이 되더란 말입니다. 통곡. 아휴,,‘이건 정말 죽이고 싶다. 용서가 안 된다.’

    어떻게 주님이 주신 십자가의 은혜로 햇빛과 공기를 받아놓고 그 영광을 인간이 할 수 있는데다 영광을 돌리고, 이래야 참된 기독교, 이래야 참된 교회, 이래야 참된 개혁적인 교회가 됩니다. 이래야 교회를 떠난 많은 사람이 교회로 돌아옵니다.‘ 라는 인간의 응집력, 인간의 단결 집중, 그것에다가 설교의 초점을 맞춰서 하느냐.... 이 똑똑한 서울대학 나온 놈아, 어떻게 주님 주신 은혜를 이런 식으로 훼방하고 가로막고 십자가를 가로 막느냐, 전 분통이 터져서 용어를 쓰는 것도...... 이런 것 때문에 주님께서 얼마나 핍박 받고 오해받고 엉터리 같은 교회가 얼마나 세워졌는데, 그걸 모르냐??? 울분이 터져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울분이 없는 것 같아요. 설교 잘 한다. 멋있다. 배울 것 많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됐어요. 무식하게 기도하면 복 받습니다. 십일조하면 복 받습니다. 이런 놈한테는 울분을 짓고, ‘이놈 나쁜 놈 교회 엉망진창 만들고 한국교회를 불교로 절따라 산당으로 만든 이 나쁜 놈, 그것들은 영원히 죽어라 하다가, 이렇게 고상하게 ’말씀은 이렇게 깊이가 있습니다. 이런 뜻도 있습니다. 이렇게 핍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 가지고 우리가 바르게 살면 됩니다. 이렇게 찬양을 하고 찬미를 하고, 야!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 배울 게 있다. 저는 통곡하고 싶은 거예요.

    그렇다면 평소에 예수님의 십자가 가지고 이용하겠다는 말인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바른 목회, 바른 목사 될 수 있다는 또 하나의 십자가 바깥에서 십자가를 이용할 방법을 찾아내는 식인지, 아니면 주님의 십자가만 피 흘리고 돌아가시면, 저는 목사 그만해도 괜찮습니다. 평소에 목사를 포기한 사람인지, 고게 분명치가 않아요.

    오늘 본문을 보세요. 전부 다 압살롬 죽었으니까 임금님, 얼마나 기쁩니까?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자 하는데, 다윗은 통곡을 하고 있다고요. ‘니가 내 사정을 몰라, 하나님의 관심사를 모른다고요. 관심사. 하나님의 우리 다윗 집안은 하나님이 친히 죽이고 죽이더라고 친히 죽이고, 모든 것을 친히 해결할 텐데, 인간들이 ’저놈 죽여라, 저놈 죽여라.‘ 압살롬을 못 죽여서 환장난 거예요. 왜 그런 의를 갖고 있는가? 그것은 다윗 언약을 이용해서 자기 권력의 집중화를 꾀하려는 인간의 감추어진 본성이 드러난 겁니다. 본성이.

    저는 김성수 목사 같은 사람이 많이 나타났으면 좋겠어요. 한국 교회가 이제는 돈만 챙기지 말고 축복 챙기지 말고, 말씀대로 마음을 낮춰서 바르게 살자 하는 그런 가짜 교회들이 많이 나타났으면 좋겠어요. 전에는 4교회 나타났어요. 홍제., 하용조, 옥한흠, 이동원,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등장해가지고 한국 교회 저래야 된다고 했는데, 거기서 등장한 것이 박영선인데 박영선 한테 빠져서 테이프 많이 들었거든요. 이제 잠잠하다 말이죠. 이제 또 등장한 거예요. 이제 많이 드러나 왜 그런 교회가 예수님을 모독하는 교회인지, 왜 사람들이 그런 교회 모이는지, 그런 교회 모이는 이유 하나밖에 없어요. 건전한 교회 보고 싶어하는 거예요. 건전한 교회 보고 싶다. 이거 이단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 아무 이상이 없어요. 교회가 예수님의 피로 된 교회 아직도 있어요. 주님한테 문제없는데, 인간들이 문제가 있어요. ‘한국교회 이 모양이냐, 왜 절간이냐, 돈 받고 축복 주는 이단밖에 없느냐, 이런 건전한 박영선 목사 같은 사람 있었으면 좋겠다. 그게 이단 이예요. 이단!!! 그게 평소에 숨은 뜻이 나온 거예요.

    예수님의 작업은 지금도 하등 아무 이상 없습니다. 베들레헴 애들 몰살당했어요. 우리는 문제 컸죠? 주님한테는 아무 이상 없습니다. 자기 아들 애굽에 잘 계시기 때문에. 이게 바로 하나님은 자기 아들밖에 모르는 그런 하나님! 거기에 성령을 주시어 뒤바뀌면, 역시 하나님은 자기 아들밖에 모르는 거, 참 잘하신 조치이십니다. 우리가 찬동하면서 내가 있던 없던 주님께서 지금 부활해서 재림 하신다면, 그걸로 기뻐하는 그게 바로 피로 값 주고 산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저희들이 뭔가 은근히 노리고 있는 게 있지 않습니까? 보이지 않는 예수님 계신 것보다도 뭔가 근사해 보이고 완벽해 보이고 멋있어 보이고 다 같이 서로 교제하고 사랑하는 그런 살만한 우리들이 그리던 이상적인 교회 상, 도리어 그것이 우리를 주님의 뜻에 위배된다는 것을 저희가 알게 해 주시고, 그리스도 피로 말미암아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을 더욱 즐거워 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